<문경의 인물>
○권상일(權相一, 1679∼1759)은 조선 영조 때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태중(台仲), 호는 청대(淸臺) 및 졸수재(拙修齋)로 증조부는 권구(權坵), 조부는 권이칭(權以偁), 부친은 권심(權深)이며 모친은 경주이씨(慶州李氏)이다.
선대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 태사공 권행(權幸)으로 그의 후손들은 여전히 관향지인 안동에 많이 살고 있다. 그의 선대 역시 안동 이계촌에 세거하였는데, 고조 권익린이 예천 지금곡으로 이주하였고, 다시 증조 권구가 산양현 근암촌 초곡(일명 수개곡)으로 이주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권상일은 상주 산양현 근암리(현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에서 태어나 가학으로 퇴계학을 전수(6대조 권대기-5대조 권우-고조 권익린-증조 권구-조부 권이칭-부친 권심) 받아 학문탐구에 진력하였다. 19세 때 선성김씨를 첫 부인으로 맞이하였으며, 20세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후 사회활동에도 점차 외연을 넓혀 나가면서 1705년 8월(27세)에는 한성시에 합격하는 기쁨을 누렸으나, 이듬해인 1706년 3월(28세) 부인 선성김씨와 사별하였다. 같은 해 12월 여주이씨를 재취로 맞으며 가정의 안정을 되찾고 과거시험에 대비하였다. 1707년 봄(29세) 향시에 합격했다. 1710년(32세) 늦은 나이에 득남(아들 욱)의 기쁨을 누렸으며, 같은 해 음6월 증광시문과에 급제함으로써 승문원 부정자라는 벼슬이 내려져 겹경사를 맞이하였다. 이후 점차 승진하여 중앙의 청요직을 두루 거쳐 1727년 7월(49세) 처음으로 외직인 만경현령에 임명되자 부친을 모시고 부임했다. 1733년 양산군수·군자감정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같은 해 『퇴계언행록(退溪言行錄)』을 교열해 간행하고, 1734년 상소를 올려 민폐 근절책과 관기숙정 방안을 건의했다. 이에따라 홍문관의 계청에 의해 경연에 참석해 소신을 진술했다. 그 해 울산부사가 되어 춘추관 편수관을 겸임하고, 구강서원(鷗江書院)을 중창해 동서양재(東西兩齋)를 건립하여 학문을 진흥시켰으며, 공씨에게 군역을 면제하는 등 선치를 행하였다. 1741년 시강원 필선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745년 봉상시정, 이듬 해 사헌부 헌납·사간원 사성·사헌부 집의·동부승지·형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1748년 우부승지로 물러났다. 뒤에 대사간·판결사(判決事)·홍문관 부제학·한성좌윤·지중추부사·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퇴계 이황(李滉)을 사숙해 「사칠설(四七說)」을 지어 이(理)와 기(氣)를 완전히 둘로 분리하고, 이는 본연의 성이며 기는 기질의 성이라고 주장했다.
저서로는 『청대집(淸臺集)』 18권 9책, 『초학지남(初學指南)』·『관서근사록집해(觀書近思錄集解)』·『소대비고(昭代備考)』·『가범(家範)』·『역대사초상목(歷代史抄常目)』과 『일기(日記)』 30여 권이 있다.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죽림정사(竹林精舍)에 배향되었다가 뒤에 근암서원(近嵒書院)으로 위패 등을 옮겨 향사하고 있다.
#참고문헌
청대집, 청대선생문집, 청대일기, 청대 권상일의 생애와 사상
#관련자료 검색:
산북길라잡이, 청대 권상일 선생의 생애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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