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1. 21.
- 시청률 높은 앞번호 채널 받아 사업권(事業權) 따면 1~2년 사이 흑자
- 반면 3~5년마다 재승인(再承認) 심사… 권력 기관에 로비할 수밖에
우리나라 홈쇼핑 업계에는 독특한 먹이사슬 구조가 있다. 규제의 먹이사슬이다. 이 구조는 전병헌 전 청와대 정무수석에 대한 수사로 다시금 도마 위에 오른 롯데홈쇼핑 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3년 전 납품업체로부터 20억원대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대표이사를 포함한 임직원들이 줄줄이 쇠고랑을 차더니, 이번에는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전 전 수석의 으름장 한 번에 3억원이나 되는 돈을 홈쇼핑과는 전혀 무관한 e스포츠협회에 상납한 정황이 검찰 수사에서 드러나고 있다. 중소 납품업체에 대해서는 수퍼 갑(甲)으로 군림하고, 권력기관 앞에서는 꼼짝 못 하는 '3류' 기업의 전형이다.
여기에는 속사정이 있다. 우리나라 홈쇼핑 업체들은 뒤 번호 쪽에 채널이 몰려 있는 미국·영국·일본 등 선진국과는 달리, 시청률이 가장 높은 지상파와 종편 채널 사이에 번호를 부여받는 특혜를 누리고 있다. 홈쇼핑 채널들이 앞쪽 번호를 받은 게 국민의 시청권 침해라는 비판이 쏟아져도 규제 기관에서 애써 못 들은 척한다. 이 덕분에 TV홈쇼핑 업체가 무려 7개나 되는데도 사업권을 따내면 예외 없이 1~2년 내에 흑자를 내는 기적을 연출하고 있다. 사업권만 받으면 땅 짚고 헤엄치는 장사를 할 수 있기에 중소 납품업체에 대해서는 방송 출연과 편성을 무기로 엄청난 권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해외에서는 유례가 없는 규제도 받는다. 대표적인 것이 면세점처럼 3~5년마다 돌아오는 재승인 심사다. 롯데홈쇼핑같이 빌미를 제공했을 때에는 납품업체를 포함해 수만 명이 십 수 년간 이어온 사업을 단번에 접어야 할 수도 있다. 선진국에서는 상업방송인 홈쇼핑의 경우 좋은 채널을 배정받는 특혜도 없고 재승인 같은 규제도 없지만, 우리나라는 규제 기관이 쉽게 돈을 벌게도 해주고 또 반대로 생살여탈권까지 쥐고 있다. 갈수록 심화되는 반(反)기업·반부자 정서를 이용하면 종아리 때리고 넘어갈 사안에 대해서도 목 부러뜨리겠다고 압박할 수 있다. 이런 구조 속에서는 국회의원 등 권력기관을 상대로 로비를 많이 할 수밖에 없다.
▲ 전병헌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20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한국 e스포츠협회 비리 의혹과 관련 피의자 신분 조사를 받기 위해 검찰로 들어서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지상파나 종편 재승인의 경우도 미국·영국 등에서는 공공(公共) 자산인 주파수를 사용하는 지상파의 경우만 8~10년 단위의 재승인 심사를 할 뿐, 민간 통신망을 이용하는 종편에 대해서는 아예 재승인 심사 자체가 없다. 설령 재승인 심사를 하는 경우에도 장기간 모니터링을 거쳐 문제가 있는 것을 개선하도록 하는 수준이지 우리나라처럼 완장 찬 권력과 홍위병들이 나서서 방송사 경영진에게 "네 죄는 네가 알렷다"는 식으로 윽박지르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
비단 방송뿐 아니다. 우리나라는 정부가 시장에 너무 깊숙이 간여한다. 인공지능 알파고가 3000년 넘은 인간 바둑을 평정하고 민간 기업들이 화성에 우주기지를 만들겠다는 시대에도 정부는 여전히 쌍팔년도 식으로 시장 경쟁과 가격을 통제하려 든다. 해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규제로 범법자를 양산하고, 이를 빌미로 새로운 규제를 만들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통신요금 인가제라는 게 있다. 이 규제는 통신업체가 가격을 올릴 때는 물론, 가격을 내릴 때도 정부의 허락을 받도록 한다. 통신업체 간 요금 경쟁을 원천적으로 차단해 놓고는 대통령 말 한마디에 통신요금 할인을 강제하는 앞뒤 안 맞는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런 규제와 낡은 관행이 진짜 적폐다. 전 정권, 전전 정권에서 미운털이 박힌 사람들을 줄줄이 구속하는 것보다 이런 규제의 먹이사슬을 깨는 게 적폐 청산이다. 삼성전자·LG전자·현대자동차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데에는 해외 시장 위주로 사업 구조를 재편해 이런 규제에서 자유로워진 게 핵심이다. 금융이나 유통·통신 등 이른바 내수 규제 산업에서 글로벌 경쟁력이 있는 기업이 단 한 군데도 없는 이유를 곱씹어 봐야 한다.
조형래 부국장 겸 에디터(경제담당)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