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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세전쟁
1) 100년 전쟁
백년 전쟁은 중세 서유럽의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 사이에서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중세 유럽의 역사구분을 간단히 나누었을 때, (서로마 멸망)-프랑크 왕국-바이킹 지배-십자군 원정에서 이어지는 큰 변환점이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분리를 시작으로 유럽 국가들의 국경선과 민족성이 정립되기 시작하여, 서로 다투는 과정에서 자본의 이동을 통하여 여러 가지 발전을 일으키는 대대적인 변혁의 시작점으로 평가받는 전쟁이다.[1]
보통 가스코뉴 지방에서 벌어진 전면전을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이름은 백년 전쟁이지만 양국이 116년 동안 지속해서 싸우지는 않았고, 단지 처음 선전포고를 한 1337년 이래 완전한 종전 선언이 발표되기까지 116년이나 걸렸다. 중간에 몇 차례 휴전과 종전이 있었다.
비슷한 개념으로 17세기 말엽부터 19세기 초엽까지, 9년 전쟁(일명 팔츠계승전쟁)-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미국 독립전쟁-프랑스 혁명-나폴레옹 전쟁 등으로 이어진 양국 간의 충돌을 제2차 백년 전쟁(1701~1815)[2]으로 부르기도 하나, 잉-프 만이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들도 주도적인 역할을 차지하는 전쟁들은 잘 통용되지 않는다.
'정면승부를 고집하는 프랑스 기사단 vs 온갖 얍삽한 방화 & 노략을 자행하는 잉글랜드 약탈군들'이 이 전쟁 초기의 이미지였다. 사실 이때 프랑스는 흑사병 이전을 기준으로 인구수 1600만 이상의 엄청난 강대국이었고[3], 잉글랜드는 인구가 프랑스의 절반도 안되는 4~500만 명인 데다 이웃 왕국인 스코틀랜드한테도 털리고 자신들끼리 싸우느라 분열을 반복했다. 그러나 이때의 실전 경험으로 쌓은 용병술을 통하여 프랑스군과 승리할수 있었는데 잉글랜드군은 프랑스 내부를 휘저으며 돌아다녔고, 프랑스의 도시들을 잿더미로 만들며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프랑스군도 비교적 빠른 시기인 장 2세 치세부터 군제개혁을 시작해서 1360년대 이후에는 오히려 기동전술을 잉글랜드군보다 잘 구사했고, 대규모 야전군을 편성해서 한타를 걸어오는 잉글랜드군을 청야전술과 게릴라전으로 괴롭혔다. 1370년 퐁발랑(Pontvallain) 전투에서는 프랑스군이 잉글랜드군을 격파하면서 크레시 전투 이후 24년간 지속된 잉글랜드군의 야전 무적 신화를 종결시켰다.
이때의 잉글랜드-프랑스 대립이 근세기 유럽의 분쟁의 대부분으로 이어지는 것은, 잉글랜드-프랑스 통합 왕조라는 집단이 분리되는 것을 시작으로 유럽이 각자의 국경선과 민족 성향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지속적인 분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결과는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분리, 두 라이벌의 외교 싸움에서 촉발되는 유럽의 각종 분쟁, 그리고 이탈리아 도시들이 양 국가를 지원하면서 얻은 엄청난 황금으로 일으키는 르네상스라는 거대한 발전의 시대로 이어진다.
한마디로 십자군 전쟁 이후 근대 유럽이 보여주는 거의 모든 변화의 프롤로그를 장식하는 첫 번째 사건이라고 평할 수 있을 정도이다.
2) 십자군 전쟁
십자군 전쟁(十字軍戰爭, Expeditio Sacra)은 1095년부터 1291년에 걸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레반트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간헐적으로 발생한 유럽 기독교 국가들의 이슬람 원정을 가리킨다. 흔히 '크루치아테(Cruciatae)'로도 불렸으며, 현대 영어로는 '크루세이드(Crusades)'라고 한다. 이는 전쟁에 참가한 군인들이 자신들의 의복과 장식에 십자가 문양을 그려 넣었던 데에서 유래했다.
1071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로마노스 4세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제국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에게 대패한 뒤 근동 일대에 대격변의 시기가 찾아오고, 결과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기존 핵심 지역이던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잃게 되었다.[1] 1081년 새로운 황제 알렉시오스 1세가 즉위하여 이를 수습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고자 했지만, 남이탈리아의 노르만족, 북방의 페체네그족, 그리고 아나톨리아의 셀주크 제국 등 사방에 적들이 너무 많아 약해진 제국의 힘만으로는 부족했다. 때문에 제국은 전쟁으로 인한 군비가 팽창하는 1040년대를 전후하여 꾸준히 해오던 지원 요청을 보다 다급하게 해오고 있었다.
그러한 요청의 일환으로 1095년 3월 피아첸차에서 열린 공의회에도 사절단을 파견했는데, 피아첸차에서 이들을 접견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성스러운 교회를 수호할 수 있도록 이교도들에게 맞설 원군을 보내달라"정도의 내용의 요청을 듣고는 본격적으로 십자군을 위한 여론 조성에 나섰다. 그렇게 1095년 11월의 클레르몽 공의회를 기점으로 서유럽은 약 200년간 여러 차례[2]에 걸쳐 십자군을 파견하게 되면서 전쟁의 서막이 오르게 된다.
3) 30년 전쟁
■ 전쟁의 원인 및 경과(1618 ~ 1648)
1618년 신성 로마 제국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 개신교도 탄압으로 보헤미아 귀족들이 반발하여 시작된 종교전쟁(개신교회와 로마 카토릭 교회 대립), 처음에는 신성 로마 제국과 보헤미아 사이의 민족대립의 성격이었으나, 종교가 아니라 각국의 이해에 우선하여 입장이 바뀌는 전쟁이었다.
보헤미아 개신교의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반란을 로마 가톨릭 교회 측 사보이 공국이 지원했으며, 개신교 진영인 작센과 브란덴부르크는 가톨릭 교회 동맹을 지원하였다가 후에 개신교 측에 돌아선다.
이후 황제가 이끄는 카토릭 연맹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개신교 세력이 진압되어, 합스부르크 왕가에 의한 개신교 탄압과 강압적인 로마 가톨릭 교회 정책이 독일 전역에 미치기 시작하자, 전쟁이 2기에 접어들면서 국가 간 패권투쟁의 양상으로 변하면서, 유럽에서 패권을 확립하던 합스부르크 왕가와 제지하려는 세력 간 이권 다툼의 국제전쟁으로 발전함.
레콩퀴스타 •
711년부터 이슬람이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 • 1492년 레콩퀴스타 (Reconquista) 완수 -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라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
카를 5세 • 부친 부르고뉴 공국의 필리프 1세 모친 후아나(Juana) – 이사벨라와 페르난도 2세 의 딸 • 1516년 스페인 왕 즉위 • 1519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즉위 • “해가 지지 않는 제국” 건설 -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와 스페인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의 식민지 – 16세기 초 유럽 국제관계의 중심 • 합스부르크가의 영역 팽창과 그리스도 교회의 재통일이 목표
종교개혁과 카를 5세 제국의 분열 • 칼 5세 vs 루터파 제후들 (슈말칼덴 동맹) • 슈말칼덴 전쟁 (1531년-1555년) - 저항하는 자 “Protestant” • 아우크스부르크 화의(1555년) - “각 영방에 종교의 자유를” (cujus regio, ejus religio) - 국가종교의 시작 - 신앙문제가 제후 개인의 독단으로 결정 - 개인의 종교적 자유에까지 이르지 못함 - 아우크스부르크화의 이후 종교가 정치보다 우월해지기 시작 사료강독 –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 각 영방 제후는 자기 영방 종교를 결정할 권리를 갖는다. • 이 원칙은 루터파에게만 적용된다. • 1552년까지 프로테스탄트들이 점거한 교회의 재산은 프로테스탄트 측의 기득권으로 인정된 다.
16세기 초 유럽의 국제질서 •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 •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 영국의 헨리 8세 –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를 중재하며 세력균형 왕조전쟁 •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의 각축 • 밀라노 공국, 나폴리 왕국, 북방 부르군드, 플랑드르, 나바르의 영토 다툼 • 1521년부터 1544년까지 전쟁이 산발적으로 진행 • 이후 프랑스의 앙리 2세와 스페인의 펠리페 2세의 대립으로 이어짐 • 1559년 카토-캉브레시스(Cateu-Bambresis) 조약 - 신성로마제국이 이탈리아의 지배권 장악 – 이탈리아 통일 저해 -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세력 강화 펠리페 2세 • 16세기 초가 카를 5세의 시기라면 16세 기 후반은 펠리페 2세의 시기 • 재위 1556년-1598년 • 카를 5세에 비해 가톨릭 노선을 더욱 강 화 • 스페인의 우월성 강조 • 네덜란드가 펠리페 2세의 정책, 즉 스페 인의 우월성 강조 그리고 가톨릭 노선 강화라는 정책의 희생양
네덜란드 독립전쟁 • 스페인 관리를 파견하여 통치하던 지 역 • 칼 5세 시기부터 칼뱅파 프로테스탄트 박해 • 1566 섭정 마르텔에 대한 청원 – 펠리 페 2세의 묵살 • 네덜란드 북부 7주의 독립 - 1609년에 휴전 성립 -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완전한 독립 달성
프랑스 종교전쟁 - 위그노(Huguenots) 전쟁 • 1562년 바시(Vassy) 학살 – 가톨릭의 위그노 학살로 전쟁 발발 • 1572년 샤를르 9세의 여동생 마르그리트(가톨 릭)와 나바르 왕 앙리(프로테스탄트)의 결혼식 • 1572년 바르톨로메오 대학살 – 결혼식 직후 위 그노 학살 • 1598년 부르봉 왕가의 앙리 4세가 낭트 칙령 공포 – 모든 프로테스탄트에게 종교적 신앙의 자유와 정치적 권리 부여
사료강독 - 낭트칙령 • 제 6조 소위 개신교라고 불리는 신앙을 신봉하는 자들은 짐의 통치권이 미치는 왕국과 지역의 모든 장소와 도시에서 살 수 있고 또한 체제할 수 있음을 허락한다. 그들은 이 칙령의 다른 부 분에서 규정하고 있는 점을 만족시키는 한 어떠한 괴롭힘도 당하지 않고 그들의 양심에 어긋 나는 어떠한 종교적 문제도 강요받지 아니한다. • 제 7조 소위 개신교 신앙을 신봉하는 모든 귀족, 가문, 시민들은 영지의 보유권을 가질 수 있고, 그들의 집에서 그 신앙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을 허가한다. • 제 9조 만약 개신교 신앙이 1597년 8월 말까지 확립되고 그 신앙 의식이 여러 번에 걸쳐서 이 루어졌던 곳이라면 모든 법령과 판결에 상관없이 통치권이 미치는 모든 마을과 장소에서 개신 교 신앙을 행사하고 계속하는 것을 허가한다. • 제 13조 이 칙령에서 허가한 장소(7조와 9조)를 제외하고는 짐의 통치권이 미치는 모든 왕국 과 지역에서 성직, 규율, 훈육, 그리고 공공 교육 등에서 개신교 신앙을 가르치는 것은 엄히 금 지한다. 30년 전쟁 • 배경 -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의 한계 – 프로테스탄트로 전향한 제후는 더 이상 가톨릭 측 재산을 점거할 수 없었음 - 발트해 진출을 둘러싼 여러 국가의 경쟁과 긴장 – 스웨덴과 덴마크, 신성 로마제국, 프랑스, 영국과 네덜란드 - 전통적인 왕조간 대립 – 프랑스 vs 신성로마제국 베스트팔렌 조약 (1648년) • 칼뱅파와 루터파가 동일한 권리를 획득 • 프랑스가 유럽의 패권을 장악 • 베스트팔렌 체제의 성립 – 근대 국가체제와 국제적 세력 균형, 근대적인 국제적 외교관계 수립, 국제법의 필요성 대두
베스트팔렌 조약 • 정치적인 내용 • 프랑스는 알자스 일부지방과 로렌 지방의 대부분과 메츠 지역 등을 얻는다 • 스웨덴은 포메라니아 서쪽 지역과 브레멘 주교의 영지 등을 얻는다. • 브란덴부르크는 포메라니아 동쪽 지역을 얻는다. • 바이에른, 작센 역시 영토를 조금씩 획득한다. • 스페인으로부터 네덜란드의 독립을 인정한다. • 독일의 제후는 영토에 대한 완전한 주권과 외교권, 조약 체결권을 갖는다. • 스웨덴은 오데르 강, 엘베 강, 배저 강 지역의 지배권을 갖는다. • 종교적인 내용 • 1555년 이루어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회의'내용을 재차 확인하며 칼뱅파에게 루터파와 동등 한 권리를 인정한다.
2. 세계 1차 대전
1) 최초의 세계대전
1914. 7 ∼ 1918. 11, 32개국이 참전
급속한 경제성장을 배경으로 세계질서의 재편을 원하는 독일, 오스트리아 등 동맹국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협상국(연합국)간 일어난 최초의 세계대전
독가스, 전투기, 전차 등 신무기가 등장한 총력전, 연합국이 승리하였으며, 전후 유럽의 경제 몰락과 세계질서가 바뀌는 결과 초래
2) 시대적 배경
독일의 팽창정책
빌헬름 2세(1888~1918) 즉위 후 애국적 팽창주의는 유럽판도 변화
러시아 3제동맹(독, 오, 러) 재보장 거부
독일과 러시아의 동맹 단절은 프랑스 고립 탈피, 러시아와 비밀 군사조약 제결(1894)
러시아 1917년 3월 혁명으로 로마노프 왕조 몰락, 11월 혁명으로 레닌이 정권 장악
3. 세계 2차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은 대체로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시발점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11]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의 집권 이후 베르사유 조약의 준수를 거부하고[12] 범게르만주의 이념에 기반한 팽창주의적 행보를 보이던 독일은 급격한 군 재무장을 시행하고 폴란드 침공 이전부터 안슐루스와 뮌헨 협정 등으로 주변국들을 흡수하는 등 그 세를 불리며 영국, 프랑스와 지속적인 마찰을 빚고 있었다.[13]
이 전쟁에서 공격 측이었던 추축국 진영은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3국이 이끌었으며, 방어와 반격 측이었던 연합국 진영은 미국, 영국, 소련, 중화민국, 프랑스 5국이 이끌었다.[14] 애초부터 사실상 연합국에 비해 추축국은 상대적으로 국력이 부족했고[15] 제국주의 열강인 이탈리아 왕국이 생각보다 전쟁에서 크게 활약하지 못하면서 추축국은 전쟁 초반부(1939년-1942년 초)의 빠른 승세 이후 정체되었으며, 특히 나치 독일의 성공적이지 못한 소련 침공과 미국의 제2차 세계 대전 개입이 결정타가 되면서 빠르게 몰락했다.
4. 월남전
1955년~1975년까지[18]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과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이다.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불리기도 한다.
냉전 시기에 소련과 함
께 양대 초강대국이었던 미국의 군대가 남베트남에 파병되어 북베트남을 상대로 싸웠지만 졸전을 거듭하며 남베트남에서 활동하는 게릴라 조직인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에 의해 고전하게 된다. 이는 미국이 북베트남을 지원하던 러시아와의 전면전을 우려해 제한적 작전을 행한 것도 있었지만 미국 군부의 부패 및 작전 수행 능력의 부재 등으로 인하여 세계 1위를 자신하던 미국의 군사력이 많은 의심을 받게 되었으며 결국 내 가족과 주변 젊은이들을 희생시키지 말라는 미국 내 반전 운동과 여론에 밀려 미군은 철수하게 되었고 베트남전 이후 미국의 징병제도 폐지된다. 예상 밖의 고초를 당한 미군의 군사적 명성은 크게 실추되었다.[19] 그리고 주월미군의 철수 이후 남베트남은 고전하다가 결국 북베트남에게 패망하였다.
5. 한국전쟁
1943년 12월의 카이로선언주1에서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였고 이는 다시 1945년 7월의 포츠담선언주2에서 재확인되었다. 다만, 독립은 ‘적당한 시기에’ 이룩한다는 조건부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은 항복하였고, 그 통치지역이었던 한반도는 군사적인 편의에 따라 38선을 경계로 남북한은 미 · 소 양군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다. 분할된 상태로 미 · 영 · 소 3국 외상은 그 해 12월에 모스크바에서 회동하고 한반도에 5년 간 신탁통치주3를 실시할 것을 합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국민은 맹렬히 반탁운동주4을 전개하였으나 좌파세력이 소련의 지령을 받고 찬탁으로 돌아섬으로써 정치적인 혼란이 일어났다. 한국문제가 반탁운동으로 난국에 직면하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46년과 1947년 두 차례에 걸쳐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아무런 해결책도 강구하지 못한 채 결렬되었다.
1947년 9월에 미국은 소련의 반대를 뿌리치고 한국 문제를 일방적으로 유엔에 제기하였다. 이로써, 38선을 경계로 한 남북한은 미국과 소련의 대립 속에서 이데올로기의 갈등마저 겪으면서 국제 무대에 노출되었다. 1947년 11월에 열린 유엔총회에서는 유엔 임시한국위원단을 구성하고 그 위원단의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북한을 점령하고 있는 소련군사령관은 1948년 초에 활동을 개시한 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하였다. 이에 유엔소총회에서는 선거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의 총선거를 결의하여 그 해 5월에는 남한만의 선거가 행해졌고, 8월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 해 12월의 제3차 유엔총회에서는 한국을 총선거가 실시된 합법정부로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북한에서는 김일성(金日成)을 중심으로 하여 ‘최고인민회의’ 선거를 실시하여 9월에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함에 따라 소련을 비롯한 공산 여러 나라가 이를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한반도에서는 남북한이 각각 별개의 정권을 수립하여 분단을 공식화하였다. 정부 수립을 마친 북한은 곧이어 미소 양군의 철수를 요구하였고, 이에 부응하여 지정학적으로 유리한 소련은 그 해 10월부터 철병을 개시하였다. 남한에서는 공산세력의 준동에 대응하여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요청한 바 있고, 이에 따라 미군의 주둔은 잠시 연기되긴 하였으나, 1949년 6월에 미국은 약 500명에 달하는 군사고문단만을 남긴 채 남한에서 철병을 완료하였다.
6. 이라크전
미국은 알 카에다의 9·11 테러 이후 엄청난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던 이 행위에 더불어 이라크가 유엔이 금지한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나중에 조작이라는 게 드러난) 정보가 미국 귀에 들어갔다. 특히 트레일러를 개조한 이동식 실험실에서 탄저병 등 생물학 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정보가 이라크 망명자들에게서 나왔다. 이들은 후세인 정권이 1981년 이스라엘군의 오시라크 원자로 폭격으로 좌절됐던 핵무기 개발도 재개했으며, 화학무기에 관련된 자료도 제시했다.
이런 일련의 자료에 기반해서 미국의 아들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를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국제 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인 이라크 침공을 결정하였다. 구체적으론 사담 후세인 바트당 정권을 타도하여 독재에 신음하는 이라크 민중을 해방시키고,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하여 세계평화에 기여하며, 알 카에다와 연계된 후세인 이라크 정부를 무너뜨리고 이라크에 (친미) 자유로운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여 테러와의 전쟁을 끝마치고 중동을 민주화한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처음에는 대량살상무기와 알카에다와의 연관성만을 밀다가 둘 다 몇 달째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하자 '비인도적인 독재정권 제거'와 민주주의 전파를 메인 명분으로 내걸었다. 부시 행정부가 무조건 이라크를 침공하기로 결정한 뒤에 명분은 나중에 가져다붙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결과만 말하면 전쟁에 내건 모든 명분은 조작됐거나 날조, 과장된 것이었다. 즉, 명분이 없다는 말. 미국은 이라크 전역을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 대량살상무기는 없었고 후세인 정권과 테러리스트의 연계도 거짓말이었다. 이 모든 정보가 조작된 것이라 판명되자 미군이 찾은 대량살상무기는 이라크군의 AK소총과 PK, RPD, RPK, DSHK 기관총이라는 비아냥을 듣게 되었다.
7. 우크라이나 전쟁
2014년부터 시작되어 2022년 전면전으로 번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전쟁이다.
러시아는 과거 소련의 영광을 잊지 못하고 옛 소련의 영역은 자신들의 영역으로 남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옛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회원국들이 NATO에 가입한 것은 물론 소비에트 연방의 구성국이었던 나라들도 NATO에 가입하기에 이르자 국경에 붙은 나라들에 대한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유로마이단 이전에 동맹국으로 우대하던 우크라이나가 정권 교체 이후 친서방으로 돌아서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태도를 적대적으로 바꾸었고, 결국 이는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돈바스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분쟁에서 우크라이나가 친러 반군들을 소탕하지 못하고 지리멸절하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손쉽게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 오판했고, 결국 2022년 2월 24일 현지 시각 5시 50분경, 러시아의 포병대와 미사일 부대가 전면적인 포격을 시작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미국과 반미 세력 간의 신냉전에서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로 러우 전쟁 혹은 우러 전쟁,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오렌지 혁명:20세기의 상당 기간 우크라이나는 소련(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연방)에 소속된 한 공화국이었다. 소련의 소속국이라는 측면에선 러시아도 마찬가지였다. 푸틴 대통령은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한 부분”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유럽과 러시아의 경계선에 있는 이 지역에서, 러시아 및 폴란드와 맞서며 스스로를 ‘우크라이나’로 부르는 사람들의 집단이 역사적으로 형성되어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 12월 국민투표를 거쳐 소련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주권국가를 설립했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자신들과 함께 소련 소속 국가였던 러시아의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거부감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몇 차례에 걸쳐 우크라이나를 복속시킨 바 있었던 러시아가 자꾸 ‘우린 한 민족’이라고 우기는 것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적어도 법치주의와 민주주의, 발전된 경제 시스템을 갖춘 유럽이 훨씬 매력적으로 보였을 것이라는 점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를 입증한 역사적 사건이 바로 2004년 오렌지 혁명이다. 그해 11월 독립 이후 세 번째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서 친러시아 정당(당시 여당) 후보인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야당 후보 빅토르 유셴코를 근소하게 누르자 대규모 시위가 터졌다. 대선 운동 과정에서 발생한 유셴코 암살 기도 사건을 배경으로 숱한 부정선거 사례가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결정된 재투표에서 유셴코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우크라이나는 서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렌지 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린다. 유셴코 정권은 나토 가입 및 유럽연합(EU)과의 제휴협정(Association Agreement)을 추진하는 등 대체로 친EU 정책을 펼쳤다. 이 제휴협정은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을 위한 첫 단계”이며 무엇보다 “법치와 민주주의 가치를 토대로 하는 국가에 살고자 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염원”을 확인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점진적 개혁론자인 대통령과 급진적 친유럽 개혁론자인 율리아 티모셴코 총리 사이의 갈등이 의회 해산으로까지 치달았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에 따른 경제난도 뒤따랐다. 유셴코 임기 말에는 총선에 참패하며 친러 정치인인 야누코비치를 총리로 임명하는 지경에 이른다. 야누코비치는 2010년 2월 치러진 4대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 유로마이단 혁명:야누코비치는 국정 방향을 친러시아로 되돌리며 권위주의적 통치를 자행했다. 나토 가입과 제휴협정 추진을 철회했다. 경제 측면에서도 EU와의 협력 대신 푸틴의 유라시아경제연합(Eurasian Economic Union)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러시아 흑해함대의 크림(크름)반도 세바스토폴 항구 임차 기간을 2042년(원래는 2017년)까지 연장했다. 이 조치의 후과로, 우크라이나는 향후 크림반도를 러시아에 빼앗기게 된다. 이에 반발한 우크라이나 시민들은 2013년 11월부터 대규모 반정부시위를 벌인다. 이듬해(2014년) 2월엔 야누코비치 정권의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고 고문 살해하며 희생자의 시신을 거리에 걸어놓는 유혈 참극이 벌어진다.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한 끝에 야누코비치는 러시아로 달아났다. 이 사건을 유로마이단 혁명이라고 부른다. 유로(Euro)는 유럽, 마이단(Maidan)은 광장(키이우 중심부의 독립광장)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러시아의 대응이 바로 크림반도 합병과 돈바스 전쟁이다.
■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크림반도는 우크라이나 동남부 끝자락에 자리 잡은 반도다. 우크라이나 남쪽으로 접한 흑해의 중심부를 향해 우뚝 돌출해 있다. 흑해는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남유럽 국가들이 지중해를 경유해 대서양으로 나갈 수 있는 길목이다. 그리고 흑해를 지배하려면 크림반도를 장악해야 한다. 러시아가 이 반도의 세바스토폴항을 빌려 흑해함대를 주둔시켰던 이유다.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유적들로 유명한 관광지이기도 하다. 다만 담수를 구하기 힘든 지형이라서 반도의 머리 위를 지나가는 드네프르(드니프로)강의 물을 북크림 운하로 공급받는다. 그곳에 헤르손이 있다. 우크라이나 군과 러시아 군이 치열한 공방을 펼치고 있는 바로 그 지역이다.
야누코비치가 러시아로 도주하던 2014년 2월엔 크림반도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 크림반도는 러시아계가 전체 인구의 60% 이상을 점유하는 이른바 ‘친러’ 지역이긴 했지만, 그 이전엔 ‘우크라이나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할 정도로 강경한 입장은 드물었다. 그러나 이미 수년 전부터 네오 나치 등 러시아 국수주의자들이 크림반도(와 돈바스 지역)에서 공공연하게 활동하며 ‘독립’을 선동하고 있었다. 그해 2월 말엔, 러시아 하원 대표단이 방문해서 ‘합병 요청이 들어오면 검토할 것’이라고 말하더니 대규모 친러시아 시위가 벌어졌다. 곧이어 표식을 달지 않은 러시아 군(당초엔 크림 거주민들이 만든 자경단으로 알려졌지만 이후 세바스토폴항 주둔 흑해함대의 해군이라는 점이 확인되었다)들이 청사와 공항 등 인프라를 점거했다. 3월 들어서는 러시아가 공식적으로 ‘러시아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수천 명 규모의 군대를 크림반도로 파병했다. 3월 중순, 크림반도 의회에서 ‘우크라이나로부터의 독립’을 결의했다. 직후 주민투표로 ‘러시아와 합병’이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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