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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17
⊙ 改憲 贊反, 권력구조에 대한 여론 엇갈려, 개헌 논의 ‘관심 없다’가 ‘관심 있다’보다 약간 높아
⊙ ‘改憲 골든타임’에 집착하면 졸속 改憲 되풀이할 수도
⊙ 국민들은 통치구조 관련 원포인트 改憲보다는 기본권·경제구조 포함한 改憲 지지
⊙ 스웨덴, 單院制 도입 改憲에 14년, 선거개혁에 4년 걸려
정치권을 달구는 改憲 논의
개헌(改憲) 논쟁이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로 부상(浮上)했다. 김무성(金武星) 새누리당 대표는 지난 8월 20일 관훈토론회에서 “그동안 여러 조사 결과 5년 단임제(單任制)는 우리 실정에 안 맞는다. 무능한 대통령에게는 너무 길고 유능한 대통령에게는 너무 짧아 4년 중임(重任) 정·부통령제를 선호한다”고 밝혔다. 그는 “개헌은 이미 17·18대 국회에서 준비된 부분이 있어 시작만 되면 빨리 가능하다. 세월호 문제가 해결되면 논의를 시작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힘입어 여야 의원 152명으로 구성된 국회 ‘개헌 추진 의원모임’이 지난 10월 1일 “이달 중으로 국회 개헌특위를 구성한 뒤 내년 상반기까지 독자적인 개헌안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 현직 국회의원 중 改憲 정족수를 넘는 231명이 개헌에 찬성하고 있다. 사진은 2013년 12월 27일 열린 ‘개헌 추진을 위한 국회의원 워크숍’에 참석한 여야 의원들.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은 이런 개헌 논의에 제동을 걸었다. 박 대통령은 10월 6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면서 “이제 민생법안과 경제 살리기에 주력해야 하는데 개헌 논의 등 다른 곳으로 국가 역량을 분산할 경우 또 다른 경제의 블랙홀을 유발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개헌 불가론’ 천명 이후 정치권에서는 오히려 개헌론이 더 크게 확산되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예기치 못한 발언이 기폭제가 됐다. 김 대표는 10월 16일 상하이(上海)에서 기자들과 만나 “정기국회가 끝나면 개헌 논의에 봇물이 터질 것”이라며 ‘개헌 불가피론’을 제기했다. 이것이 청와대와 대립각을 세우는 것으로 해석되면서 정치적 파장이 커지자 김 대표는 바로 다음 날 “나의 불찰이고 실수였다”며 대통령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청와대의 한 고위 관계자는 김무성 대표 취임 100일을 맞이한 10월 21일 “당 대표 되시는 분이 실수로 언급했다고는 생각을 안 한다”며 김 대표의 언행에 불순한 정치적 의도가 담겼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에 대해 김 대표는 “대통령과 절대 싸우지 않겠다”며 납작 엎드렸다. 김 대표 취임 이후 청와대가 나서 여당 대표의 발언을 문제 삼은 것은 처음이어서 단순한 반응을 넘어 김무성 체제 흔들기와 같은 고도의 정치적 함의와 복선(伏線)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마저 나왔다.
야당도 개헌 논의에 가세했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文在寅) 의원은 “대통령이 국회 차원의 논의를 막는 건 월권(越權)이고 삼권분립(三權分立)을 무시하는 독재적 발상”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박지원(朴智元) 의원은 김 대표의 사과를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면서 김 대표가 치고 빠지는 식의 고도 전략을 펼치고 있다는 해석까지 내놓았다.
87년 이후 政治史는 改憲 논의의 역사
▲ 2014년 10월 17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자신이 전날 중국 상하이에서 “개헌이 필요하다”고 발언한 것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에게 사과했다.
1948년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은 1987년까지 9차례나 개정됐다. 1987년 9차 개헌으로 만들어진 현행 헌법은 대통령 임기를 5년 단임제로 하고 국민의 직접투표에 의해 선출하도록 한 것이 주요 내용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 정치사는 개헌 논쟁의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 가령, 1990년 1월 당시 집권당이었던 민정당의 총재인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은 야당인 김영삼(金泳三·YS)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金鍾泌·JP) 신민주공화당 총재와 함께 내각제 개헌을 매개로 3당 합당(合黨)을 했다. 하지만 합당 후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이 된 YS는 이를 파기했다.
1997년 대선(大選)에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DJ) 후보는 김종필 자유민주연합 총재와 내각제 개헌을 매개로 연대해서 승리했다. 그러나 1999년 7월에 김대중 대통령은 “내각책임제를 하겠다는 그 약속이 연기되고 지연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면서 ‘내각제 DJP 연대’를 파기했다.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은 대선을 1년 남짓 남겨 놓은 2007년 1월 “장기 집권을 제도적으로 막고자 마련된 대통령 5년 단임제는 이제 그 사명을 다했다”면서 이른바 4년 중임제와 대선·총선 동시 선거를 골자로 한 원 포인트(one point) 개헌을 제안했다.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는 “참 나쁜 대통령이다. 국민이 불행하다. 대통령 눈에는 선거밖에 안 보이느냐”며 노 대통령의 개헌 제안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2007년에는 대통령이 개헌을 주도했지만, 작금의 상황은 반대로 대통령이 개헌을 반대하고 있다. 10월 초 CBS의 국회의원 전수조사 결과, 국회의원 231명이 개헌 찬성 의사를 밝혔다. 개헌 정족수(定足數) 200명을 훌쩍 넘는 규모이다. 개헌 찬성 국회의원들은 한결같이 현행 헌법이 “급변한 시대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고 5년 단임제 권력구조는 국가권력이 대통령 1인에게 과도하게 집중돼 있으며 각 정파가 대통령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과정에서 심각한 폐해가 발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개헌 전도사를 자처하고 있는 새누리당 이재오(李在五) 의원은 “박근혜 정권의 지난 2년 가운데 1년은 국정원 댓글로, 1년은 세월호 참사로 보냈다. 현행 제왕적 대통령제 헌법으로는 이렇게 갈 수밖에 없다”며 “1%든 2%든 이기는 쪽이 모든 권력을 다 가져가기 때문에 야당이 싸우지 않을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야가 부지런히 하면 정부가 주장하는 30개 경제 살리기 법안을 연말까지 다 처리할 수 있다”면서 “경제 살리기라는 건 대통령이 취임한 때부터 퇴임할 때까지 해야 하는 일인데, 그걸 이유로 개헌 논의를 하지 말라고 하는 건 (‘지금은 안된다’는 논리에서) 국민적 설득력이 없다”고 박 대통령을 비판했다.
개헌에 찬성하는 의원이 많지만 실제로 개헌이 이뤄질 것이라고 보는 의원은 그리 많지 않다. 그 이유는 국회의원들의 개헌 의지가 높더라도 대통령이 반대하는 한 추진이 쉽지 않고, 1987년처럼 개헌에 대한 국민적 열망과 요구가 없으며, 국회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가 최악이기 때문이다. 세월호도 합의하지 못하는 국회가 더 큰 이해관계가 얽힌 개헌 문제를 처리하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개헌과 관련 일반 국민들의 의견도 통일되어 있지 않은 것도 개헌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엇갈리는 改憲 관련 여론
다음 쪽 <표>에서 보듯이, 개헌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생각과 의견은 여론조사 기관별로 차이가 있을 만큼 일정한 정향을 찾아보기 어렵다.
우선, 개헌 찬성 여부에 있어서는 《문화일보》와 《JTBC》 조사에서는 찬성 비율이 반대 비율보다 높게 나왔다. 《문화일보》 조사 결과, 현행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찬성’(58.7%)이 ‘반대’(32.1%)보다 26.6%포인트 높게 나왔다. 이는 두 달 전(8월 30〜31일) 동일 기관의 조사 때 개헌 찬성(46.5%)과 반대(41.4%) 의견이 팽팽히 맞섰던 것과 비교하면, 찬성 의견은 12.2%포인트 높아진 반면에 반대 의견은 9.3%포인트 낮아진 수치다.
한편, 한국갤럽이 개헌 찬성 여부가 아닌 개헌 필요성에 대해 물어본 결과는, ‘개헌 필요’ 42%, ‘운영상 문제이므로 불필요’ 46%로 나타났다.
둘째, 개헌 시기에 대해서는 조사 기관별로 아주 상반된 결과가 도출되었다. 《JTBC》 조사에서는 청와대와 국민들의 생각 간에 다소 차이를 보였다. 대통령 생각과는 달리 ‘지금 논의’가 36.4%로 ‘나중’(26.6%)보다 높게 나왔다. 반면 한국갤럽 조사에서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개헌 논의는 국가 역량을 분산시킬 수 있으므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박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54%는 ‘공감한다’, 36%는 ‘공감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셋째, 권력구조와 관련해서 어떻게 권력구조들을 비교하느냐에 따라 큰 차이를 보였다. 가령 한국갤럽의 경우, 4년 중임제와 현행 5년 단임제 두 제도만 갖고 물어본 경우, 전자(前者)에 대한 선호도(58%)가 후자(後者·36%)보다 훨씬 컸다.
‘분권형(分權型) 대통령제’ 선호는 2040세대(약 60%), 새정치민주연합 지지층(65%)과 무당층(無黨層·58%) 등 현(現) 정권에 부정적인 야권 지지층에서 높게 나타났다. 새누리당 지지층은 ‘현행 대통령 중심제’ 47%, ‘분권형 대통령제’ 40%로 나뉘었다.
내각제 선호도 낮아
그러나 모든 권력구조들을 포함해 선호도를 물어본 결과, 《문화일보》와 《JTBC》 조사에 보듯이, 4년 중임제가 현행 5년 단임제를 압도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내각제에 대한 선호도는 모두 10% 미만으로 저조했다.
한국갤럽의 11월 첫째 주 조사에 따르면 요즘 국회가 역할을 ‘잘하고 있다’는 응답은 6%에 불과한 반면 89%가 ‘잘못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국회에 대한 국민들의 생각이 이렇게 부정적이기 때문에 순수 내각제든 이원(二元)집정제식 내각제든 개헌을 선호하는 비율이 낮은 것은 당연하다.
여하튼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개헌 관련 여론조사 결과들이 던지는 함의는 국민들은 개헌에 대해 일관성 있고 명확한 입장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국민들은 개헌 문제보다는 먹고사는 문제에 관심이 더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갤럽 조사 결과, 개헌에 ‘관심 있다’(46%)보다 ‘관심 없다’(48%)가 높게 나온 것이 이런 주장을 입증해 주고 있다.
제도만능주의의 환상
▲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은 작년 6월 국회 본회의 연설에서 개헌 필요성을 역설하는 등 ‘개헌 전도사’를 자처해 왔다.
현재 정치권에서 백가쟁명(百家爭鳴) 식으로 분출되고 있는 개헌 논쟁을 살펴보면 몇 가지 인식적 오류(誤謬)와 착각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4년 중임 분권형 대통령제’의 정치적 효과에 대한 착각이다. 정치권에서는 5년 단임제로는 대통령이 책임 정치를 할 수 없고 또한 대선과 총선 주기가 다르기 때문에 재임 중 치러지는 각종 선거로 인해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이 쉽게 나타나 결국 국정 운영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공통적으로 지적한다. 그런데 이런 시각은 국정 운영의 실패를 대통령이 아니라 제도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이재오 의원은 “5년 단임 대통령으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李明博), 박근혜 대통령 모두 사람들이 잘못한 것은 본인의 의지하고는 관계없는 시스템이 문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보다 냉정하게 고찰해 보면, 아무리 권력구조를 바꾸어도 대통령이 국회와 야당을 무시한 채 극단과 배제의 정치에 앞장서며, 집권당을 청와대 여의도출장소 정도로 취급하고, 국회의원들의 자질과 능력이 수준 이하이면 효율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더구나 현재와 같이 정당들이 국민의 이익을 대변하고 갈등을 조정하는 본질적인 기능을 외면한 채 당파적(黨派的) 이익에만 매몰돼 있는 상황에서 권력구조를 바꿔 정치를 정상화시킨다는 것은 제도만능주의에 빠진 사람들의 환상에 불과하다.
4년 중임제가 되면 대통령은 선출되는 그 순간부터 재임 선거를 위해 선거운동에 몰입할 가능성이 크다. 차기 대선 승리를 위해 정부는 인기영합주의적인 정책을 펼칠 수도 있다. 한 번 당선된 대통령은 설령 무능하더라도 낙선하기 어려운 것이 4년 중임제의 특징이다. 따라서 5년 단임제보다 오히려 더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5년 단임 대통령제라도 대통령이 국회와 야당을 존중하면서 소통과 통합의 정치를 펼치면 얼마든지 국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실제로 최근 한국갤럽 조사 결과, 개헌 필요성에 대해 ‘대통령제를 바꾸는 개헌이 필요하다’는 의견은 42%, ‘제도보다는 운영상의 문제이므로 개헌이 필요치 않다’는 46%로 나타난 것도 같은 맥락이다.
‘改憲 골든타임’에 매달리지 말아야
▲ 문희상 새정치민주연합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 10월 30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개헌 로드맵을 제시했다.
둘째, 개헌 골든타임에 대한 착각이다. 새정치민주연합 문희상(文喜相)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 10월 30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경제에 골든타임이 있듯이 개헌에도 골든타임이 있다”며 “대통령 3년차를 넘기면 개헌을 하고 싶어도 어려워진다”며 개헌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올해 내에 개헌 특위를 가동시켜 내년에는 본격적인 개헌 논의를 통해 20대 총선 내에 개헌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개헌 로드맵을 제시했다.
일반적으로 개헌안 발의에서부터 공포까지는 여야협상 기간, 개정안 공고 20일, 공고~의결 60일, 의결~국민투표 30일 등을 감안할 때 최단 4개월에서 최장 5~6개월의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된다. 여야 지도부가 개헌에 적극적이고 개헌안 의결정족수가 확보된 상태여서 대통령의 결심만 서면 개헌은 급물살을 타기에 충분하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헌 논의를 언제 시작할 것이냐는 문제 못지않게 언제 끝낼 것이냐가 더 큰 쟁점이 될 것이다.
만약 정치권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골든타임을 정해 놓고 개헌을 논의하면 그 개헌은 정략적(政略的)으로 치닫게 되어 졸속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1987년 제6공화국 헌법 개정이 대표적 사례이다. 당시 정치권은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제라는 권력구조 변경에만 신경을 쓰고 국민의 기본권 확대, 대통령제의 핵심 기제인 ‘견제와 균형’의 원칙 작동 등과 같은 규정에 대해서는 간과했다. 결과적으로, 국회 예산 편성권 부여, 감사원 국회 이관, 국회의 입법 독점권 등과 같은 제왕적 대통령을 견제할 장치를 입법부(立法府)에 부여하는 개헌에 대해서는 논의조차 하지 못했다.
새정치민주연합 윤호중 의원이 “87년 체제가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었다기보다는 기존 헌법에 직선(直選) 조항만 얹은 형태여서 손봐야 할 부분이 많다”는 의견을 제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국가 백년대계의 초석(礎石)을 놓기 위한 개헌이 되려면 개헌을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시간보다는 어떻게 하면 개헌을 통해 새로운 헌법정신을 구현할 수 있을지에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內治와 外治의 분리 가능한가?
셋째, 권력 분점(分占)에 대한 착각이다. 정치권에서는 대통령이 국방, 외교 등 외치(外治)를 담당하고 총리가 행정, 즉 내치(內治)를 맡아서 하는 ‘분권형 대통령제’만이 ‘제왕적 대통령’을 막을 수 있다는 논리를 편다.
이런 논리에는 치명적인 모순이 내재되어 있다. 하나는 외교가 경제이고, 경제가 외교인 글로벌화된 세계에서 과연 외치와 내치가 분리될 수 있겠는가. 또 다른 하나는 중앙집권의 전통이 강한 한국 사회에 국민이 직접 뽑은 대통령은 상징적 국가수반으로 앉히고 국회에서 뽑는 총리와 내각이 국정운영을 주도하는 것을 국민과 당사자인 대통령이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김무성 대표가 언급했던 오스트리아식 이원집정제의 경우, 국민이 대통령을 직선으로 뽑지만 대통령은 ‘권한 포기’를 통해 총리인 다수당 대표가 정해 준 각료를 임명하며 모든 행정은 총리가 맡는다. 만일 2016년 4월 총선 이전에 오스트리아식으로 개헌하면 박 대통령은 할 일이 없어지고 다수당 대표가 총리가 되어 국정을 맡게 될 판이다. 박 대통령이 어떻게 이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정치권이 2016년 총선 전에 이원집정제식으로 개헌을 한 다음 새로운 권력구조에 따른 국정 운영은 차기 정부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새 헌법 부칙에 규정한다고 합의해도 박 대통령은 급속한 레임덕에 시달릴 것이다. 친박(親朴)을 포함한 집권당 국회의원들이 더 이상 대통령의 눈치를 보지 않고 미래 권력이 될 수 있는 다수당(多數黨) 대표에게 줄을 설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정치권이 이원집정제식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현직 대통령의 강력한 비토를 유발시켜 개헌 자체를 불가능하게 한다. 첨언하면, 김무성 대표의 유약하고 즉흥적인 개헌 논의 철회로 힘의 균형이 대통령에게 심하게 기울어졌기 때문에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 동력은 상실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반대와 김무성 대표의 ‘더 이상 개헌 논의 하지 않겠다’는 입장 표명으로 개헌 논쟁은 다소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개헌은 휘발성이 강한 이슈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다시 부상될 수 있다. 그런데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한 개헌을 할 것이라면 정치권은 최소한 다음의 사항을 명심해야 한다.
첫째, 정치권 이기주의와 정략적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동안 개헌론은 이념과 노선이 다른 정당들 간의 합당, 대권에서 이질적인 세력 간의 연대(連帶), 대선에서 불리한 집권당이 정치판을 흔들기 위한 수단 등으로 활용됐다. 당장 정치권에서는 김무성 대표가 제시한 외치(外治)는 대통령, 내치(內治)는 총리(수상)가 맡는 오스트리아식 이원집정제는 반기문(潘基文) 유엔사무총장을 염두에 둔 포석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에 원 포인트 개헌을 제기했을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대선이 1년도 남지 않은 시점에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대선 구도를 흔들어 놓으려는 ‘정치적 노림수’가 작용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빠른 改憲’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박근혜 대통령이 “개헌 논쟁은 경제를 삼키는 블랙홀이 될 수 있다”면서 반대했지만 정략적 차원의 개헌 논쟁이 전개되면 대통령의 레임덕이 가속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크게 작용한 면도 있다. 여하튼 개헌이 권력구조 개편 논의에만 치중하면 필연적으로 정략적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개헌 논의를 하려면 포괄적이고 전면적인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
국민들도 같은 생각이다. 《문화일보》 조사 결과, 개헌 범위에 대해 ‘권력구조 외에도 경제 및 사회·인권 사항을 포함해 전반적으로 개헌해야 한다’는 응답이 66.6%, ‘현재의 5년 단임 대통령제를 다른 제도로 바꾸는 권력구조 중심으로 개헌해야 한다’는 원 포인트 개헌 지지는 23.2%에 불과했다.
둘째, 빠른 개헌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치권에서는 만약 개헌을 한다면 선거가 없는 내년에 마무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을 정해 놓고 개헌 논의를 하면 오히려 실패하기 쉽다. 변화된 환경에 맞는 국민의 기본권의 정립, 실질적인 분권을 위한 지방자치 제도 혁신, 망국적인 지역주의를 타파할 선거 제도 개혁, 평화 통일에 대비한 통일 헌법의 초석 마련, 여성의 대표성을 제고시켜 실질적인 양성 평등 성취 등의 미래 지향의 개헌이 되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헌 논의를 시작하되 단기간에 끝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셋째, 개헌 논쟁을 둘러싼 열린 소통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최연혁 스웨덴 예테보리 대학 교수는 협의의 민주주의의 전형을 보이고 스웨덴의 정치 구조가 안정을 구가하는 가장 큰 이유로 “협의적 정책 결정 과정에서 야당이나 소수의 목소리도 소외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사회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독특한 장치로서 정부 혹은 의회의 제청으로 임명되는 특별위원회가 내놓는 ‘정책보고서(SOU: Statens Offentilig Utredning)’와 ‘래미스(Remiss)’ 제도를 지적한다.
스웨덴의 改憲
최 교수 분석에 따르면, SOU 제도의 가장 큰 특징은 행정부 산하의 상설 기구가 아니라 정부의 정책 사안의 경중에 따라 1인 위원장 특별위원회 혹은 정당, 전문가집단, 행정관료, 이익단체 등이 골고루 참여하는 특별위원회를 임명하고 다양한 목소리를 취합하여 가장 과학적이고, 학문적 연구결과와 상충되는 이해관계를 골고루 살펴서 결론을 내린다. 이것이 ‘래미스 제도’란 국민 의견수렴 절차이다. SOU가 제출된 후 최소 3개월 동안 이해 당사자인 공공기관, 연구소, 대학, 이익단체, 기업체 등이 서면으로 의견을 제출하는 절차이다. SOU 조사 과정에서 누락되었거나 미처 다루지 못했던 내용, 그리고 바뀐 입장까지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의견 수렴 과정에서 소외되거나 의사가 왜곡 전달되는 경우가 없어 자신의 의사를 정확히 알릴 수 있다. 이렇게 취합된 의견을 분석해 최종보고서를 작성할 때 반영하기 때문에 객관적 의견 도출의 안전장치라고 할 수 있다.
스웨덴에서 특별위원회 임명에서부터, 조사, 연구, 인터뷰, 일반 세미나, 그리고 SOU 보고서 제출, 래미스 이후의 최종 보고서 작성 등의 절차에 소요되는 기간은 평균 2년6개월이나 된다. 다시 말해, 스웨덴의 정책결정 과정은 최소한 2~3년의 준비 기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첨예한 이익이 대립되는 사안에 있어 이해 당사자는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있기 때문에 감정적이고 비이성적 행동이 배제될 수 있다. 스웨덴은 이런 제도적 틀 속에서 1954년 임명된 헌법특별위원회는 1968년까지 지속되면서 스웨덴 헌법을 개혁해 양원제(兩院制)를 단원제(單院制)로 바꿨다. 또한 1979년에 임명된 헌법특별위원회는 기초의회・광역의회・의회선거일 일치, 의원 임기를 3년에서 4년으로 연장 등 중요한 개혁을 위해 조사 보고서를 작성했고, 이 보고서는 1981년 선거 개혁의 중요한 틀로 사용됐다.
2004년에 임명되어 4년간 활동 기간을 거쳐 2008년 12월에 끝난 헌법 개정 특별위원회는 10개의 유관 SOU와 13번이나 전국을 돌며 개최한 세미나를 통해 전국의 국민적 관심을 유도했다. 2009년 1월에 제출된 SOU 보고서는 2권으로 나뉘어 924쪽에 달하는 광대한 작업으로, 헌법의 현대적 문장으로의 수정 작업, 선거구 획정, 선거일, 선거연령, 국민투표, 주민투표, 정부구성과 불신임권, 의회의 행정부 견제세력으로서의 역할, 상임위원회의 역할, 사법개혁, 판사임명 방식의 개혁, 판사의 해임, 자유와 권리에 대한 정의, 차별법에 대한 삽입, 재산권의 보장 등 헌법과 선거제도의 총체적 개혁에 대해 국민 의견 수렴과 의회의 토론을 거쳤다.
한국 사회가 개헌을 둘러싼 갈등과 불신의 골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스웨덴의 SOU 및 래미스 제도를 벤치마킹해서 국민들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될 수 있는 소통 구조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이런 열린 소통 구조만이 개헌을 ‘정치권 이기주의’가 아닌 국민의 시각에서, 국민의 동의를 받아 가며 공론화할 수 있다.
권력구조는 하드웨어일 뿐
넷째, ‘선(先) 정치제도 개혁, 후(後) 개헌론’의 로드맵을 만들어야 한다. 권력구조가 진화하고 발전하려면 우선 뒤틀리고 왜곡된 정치제도를 바꾸어야 한다. 모든 권력구조는 각 나라가 처한 역사와 문화에 따라 효율성이 다를 수 있다. 대통령제도 좋은 제도이고 내각제도 좋은 제도이다.
권력구조 자체는 일종의 하드웨어이다. 문제는 이런 하드웨어가 잘 작동될 수 있도록 정교한 소프트웨어가 개발되어야 한다. 권력구조를 둘러싸고 있는 국회와 정당, 선거와 같은 소프트웨어를 그대로 둔 채 개헌을 해 봤자 그 개헌은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얻어 낼 수 없다.
다른 말로, 현재와 같이 뒤틀리고 왜곡된 정당 체계가 존속하는 한 어떤 개헌을 해도 우리가 원하는 정치적 효과를 얻어 낼 수 없다. 권력구조-국회-정당-선거제도가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다. 개헌을 한다고 잘못된 정당이 저절로 좋아지지는 않는다.
7·30 재·보궐 선거에서 패배한 후 정계를 은퇴한 손학규(孫鶴圭) 전 민주당 대표는 올해 1월 자신의 싱크탱크인 동아시아미래재단이 개최한 ‘통합의 정치와 합의제 민주주의’ 신년 대토론회 기조 강연을 했다. 그는 “이제는 국민을 타협과 합의의 장으로 모을 수 있는 통합의 정치체제가 필요하다”며 “사회갈등의 주요 주체들이 정치적 대표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인물·지역 중심 정당체제를 그대로 둔 채 권력구조만 바꾼다면 오히려 개악(改惡)일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역설했다. 손 전대표의 통찰력에 깊은 동감을 표시한다.
르 봉의 충고
▲ 제도만능주의의 폐해를 경고한 프랑스의 심리학자 귀스타브 르 봉
요약하면, 허약한 정당체제를 개혁하지 않은 채 개헌을 정략적으로 접근하고, 권력구조 개편에만 치중하며, 국민 의사를 무시하고 조기에 마무리하려는 순간 개헌은 물거품이 된다. 한편, 사회통합과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라면 개헌도 주저할 필요가 없고 이를 위한 개헌 논의는 적기 여부에 상관없이 시작돼야 한다.
프랑스 심리학자인 귀스타브 르 봉(Gustave Le Bon)은 《혁명의 심리학》이라는 책에서 군중의 행동을 지배하는 법칙, 성격의 붕괴, 심리적 전염, 무의식에서 형성되는 신념, 다양한 형태의 논리들을 바탕으로 혁명의 현상과 실체를 설명했다. 그는 이 책에서 통치제도에 대해서도 언급하면서 ‘민주주의와 군주주의 모두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중요한 건 통치제도가 아닌 통치를 받는 사람들의 가치이다’고 역설했다.
르 봉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더 이상 제도만능주의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마치 개헌을 해서 현행 5년 단임 대통령제를 특정 권력구조로 바꾸면 우리 시회의 모든 정치 악습(惡習)과 적폐(積弊)가 해소될 것이라고 믿는 것은 환상이라는 것이다. 프랑스는 혁명 이후 100년간 수많은 제도를 바꿨지만 결코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이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김형준 /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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