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외계인* - 최서정
분홍장갑을 남겨놓고 지상의 램프를 껐어요
눈 감으면 코끝으로 만져지는 냄새
동생은 털실로 짠 그 속에 열 가닥 노래를 집어넣었죠
온종일 어린겨울과 놀았어요 어느 눈 내리던 날
장롱 위에서 잠든 엄마를 꺼내 한 장 한 장 펼쳤죠 (우리 막내는 왜 이렇게 손이 찰까)
그리우면 손톱이 먼저 마중 나가는
어린, 을 생각하면 자꾸만 버튼이 되는 엄마
눈사람처럼 희고 셀러리보다 싱싱한 이제는 나보다 한참 어린 엄마
소곤소곤 곁에 누워 불 끄고 싶었던 적 있어요
그녀 닮은 막내가, 바닥에서 방울방울 웃어요
놓친 엄마 젖꼭지를 떠올리면 자장가처럼 따뜻해지던 분홍
그녀, 마지막 밤에 파랗게 언 동생 손가락을 털실로 품은 걸까요
반쯤 접힌 엽서를 펼치듯 창문을 활짝 열면
어린 마당에 먼저 돌아와 폭설로 쌓이는 그녀
더는 이승의 달력이 없는, 딸기 맛처럼 차게 식은
별똥별 나의 엄마
꼬리 긴 장갑 속에서 씨앗처럼 동그랗게 잠든 동생의 손이
주머니 속 캥거루처럼 쑥쑥 늙어가요
*엄마는 외계인 - B회사에서 판매하는 아이스크림 이름 중 하나
<시 심사평-백귀선>
배귀선(시인·문학박사)
“문맥을 통솔하는 이미지가 신선, 상당한 습작과정 엿보여”
2024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는 도내 거주자 및 출신자 대상으로 공모되었다. 이는 지역 문학 발전을 위한 전북도민일보의 관심에서 비롯된 실험적 방안이자 2024년 전라북도특별자치도 선정에 즈음한 지역 작가의 기회 창출을 염두에 둔 과정이라 판단된다. 지역을 한정한 만큼 응모 편수의 저하와 작품 수준의 미흡이 염려되었다. 그러나 시 부문에 상당량의 편수가 응모되었고 무난한 작품 또한 엿보였다. 심사자는 응모작 중 우선 5명의 작품을 본심에 올리고 고민 끝에 김겨울의 「의자」와 최서정의 「엄마는 외계인」을 당선작 최종 후보로 압축했다.
「의자」는 “오랫동안 말을 다뤄온 언어들”에서 보이는 ‘말[馬]’과 ‘말[言]’처럼 시적 대상과 시적 자아를 동일화하는 동화(同化)적 구성이 돋보였다. 다만, 이러한 감각적 문장들이 확장되어 주제 구현을 감당하지 못하고 미온에 머문 점이 흠이었다. 이는 주관적 관념을 객관화하는 과정에서 독자를 설득할 만한 이미지 제시의 결여로 이러한 현상은 「의자」와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에서도 드러나 있었다. 즉, 시의 중심축이 되는 일련의 서사적 구성이 변환 혹은 전환을 통해 확장되지 못하고 평면적 서술에 그친 점이 그것이다.
「엄마는 외계인」은 정제된 시어와 절제된 문장이 눈길을 끌었고, 문맥을 통솔하는 이미지가 신선했다. “그리우면 손톱이 먼저 마중 나가는” 시행이 보여주는 것처럼 어휘와 문장이 상보적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촘촘한 긴장감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 주관적 관념을 형상화하는 치밀함도 돋보였다. 아쉬운 것은, 시 전반을 훑는 상실에 관한 암울한 정서의 부유가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선하기에는 미흡했다. 그러나 다행히 ‘~요’체의 경쾌한 어미 작동이 우려의 추(錘)를 일정 부분 상쇄하고 있었다. 차분하고 조용한 가운데 주제를 밀고 나가는 힘 또한 심사자의 시선을 붙들었다. 이는 시인이 언어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주체가 되도록 한 발 뒤로 물러서 견자의 입장을 취할 때 가능한 것으로, 응모자의 상당한 습작과정을 엿볼 수 있었다. “눈사람처럼 희고 셀러리보다 싱싱한”에서처럼 침윤된 내면의 무게를 서정으로 감량할 수 있는 능력에 더해 나머지 응모작 두 편을 관통하는 직관과 통찰 또한 더 나은 앞날을 기대하게 하여 당선작에 선했다. 당선자는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정진해주길 바라며, 낙선한 응모자에게는 위로와 격려의 말을 전한다.
심사위원 = 배귀선(시인·문학박사)
<시 당선소감- 최서정>
최서정 씨
“이제 대한민국의 여러 배꼽들을 찾아다니면서 여행의 껍질을 천천히 벗겨 먹고 싶다”
어릴 적 학교 가는 길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마음 눅눅한 날 그 아래 가만히 서 있으면 나무는 내 젖은 마음을 잘도 말려주었다. 그랬던 것이 지금은 몰라보게 성장해 아름다운 왕소나무가 되었다. 어느 날 나는 그에게 ‘생각하는 나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빼곡하게 달린 솔방울을 보면 그가 나보다 훨씬 생각이 깊고 넓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성탄 끝에서 가슴 떨리는 축하소식을 들었다.
오래전 아주 잠깐 꽃이 피었다. 그 후 강풍이 오래 불었다. 긴 시간동안 시 앞에서 영혼의 발이 시렸고 슬펐다. 그때 K교수님을 만났다. 창백한 방황을 끝내고 원고지 속에서 다시 일어서기까지 아주 많은 물음표와 느낌표가 나를 관통했다. 그분의 격려로, 시를 붙드는 법을 다시 배웠다. 지상에 없는 길을 발굴하는 것이 시 쓰기임을 이제는 조금 안다. 매번 넘어졌지만, 상처가 아물고 딱지가 떨어지는 동안 나는 단단해졌다. 이제 다시는 시의 손을 놓지 않을 확신이 생겼다. 그 자신감을 심어준 K교수님께 특별한 사의를 표한다. 지금도 시 안에서 성장하고 있을 다줌과, 다락방 문우들에게 조금만 더 견디라고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오늘의 나를 위해 크고 작은 빛이 되어주셨던 여러 교수님들께도 깊이 감사드린다.
내게는 또 한 분의 아주 특별한 그녀가 있다. 이 세상에 시를 단 한 편도 남기지 않았지만, 평생이 시였던 한 여자. 호미로 밭고랑을 원고지 삼아 온몸과 정신으로 육필시를 쓰다 저세상으로 가신 내 어머니! 나보다 먼저 이 소식을 알고서 지금 하늘에서 크게 기뻐하실 줄 안다. 나의 아버지도 함께 지게 춤을 추고 계시리라. 집안 고모님이신 도타원 최선국 원불교 교무님과 사랑하는 가족, 벗들, 낮달, 나비, 또랑또랑 흐르는 절골 도랑물소리 등 수많은 당신들께도 고맙다고 적는다.
소중한 기회를 주신 배귀선 심사위원님과 전북도민일보 관계자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한다.
지금까지 무딘 감성을 매번 다시 일으키며 사물들과 말문을 트려고 애썼던 나의 고독이여, 고맙다. 세상을 읽어내는 관찰력과 사유의 눈썰미가 한층 더 예리해져야 함은 변함없는 나의 숙제다. 이제 얼마 동안은 대한민국의 여러 배꼽들을 찾아다니면서 여행의 껍질을 천천히 벗겨 먹고 싶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린다.
[출처] 2024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최서정의 <엄마는 외계인>|작성자 박남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