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색 소파의 방/편혜영
삼만 원이면 괜찮았을까.
‘진’은 이사를 간다. 위태위태한 직장에서 그래도 잘리지 않고 용케 버틴 끝에 서울로 발령을 받고 가족과 함께 이사를 간다. 그것도 ‘제집 장만’의 꿈을 마침내 이루고서. 갖가지 가구와 가전제품도 큰마음 먹고 장만했다. 동경해마지 않던 크림색 소파도 샀다. 8년 만이라고 한다. 참으로 설레는 이삿길이다. 그러나 이들의 이삿길은 괴기스럽기 짝이 없다. 낡고 좁은 관사를 벗어나 드디어 장만한 ‘내 집’으로 들어가는 날이건만 무언가 예사스럽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잔뜩 물기를 머금고 있던 공기는 기어이 비를 쏟아내고 도로는 자꾸만 진창이 되어가고 아이는 칭얼댄다. 심지어 와이퍼까지 말썽이다. 평소에 와이퍼는 있으나마나 한 것으로 치부되지만 비가 오면 그 존재감은 남달라진다. 빗길에 와이퍼의 고장은 치명적이다. 그러한 치명적 위험을 품고 있지만 비가 오지 않는다면 와이퍼의 고장은 영원한 비밀이 될 수도 있다. 비가 와야만 비로소 봉인된 위험이 드러나는 것이다. 어쩌면 이 가족의 불행은 봉인된 와이퍼의 저주가 풀리면서 시작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와이퍼도 고칠 겸 ‘진’은 급한 대로 눈에 보이는 가까운 주유소에 들른다. 그러나 주유소는 폐업했다. 서둘러 돌아 나와야 할 곳에서 혹여나 하는 기대감에 미적댄 것이 화근이 되었을까. 주유소 사무실에 사람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다가갔지만 그들은 이미 취했다. 그럼에도 ‘진’은 불행의 요인을 감지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도움을 기대한다. 충혈된 눈빛을 보고도 돌아서지 않고 그들에게 선의를 요구하는 ‘진’은 그저 순진한 탓일까, 불운에 대한 감수성이 지나치게 낮은 탓일까. 충혈된 눈빛의 청년은 호의인지 호기심인지 ‘진’의 와이퍼를 고쳐준다. ‘진’은 그러나 그에게 고마워하지 않는다. 사례비로 삼만 원을 꺼냈다가 만 원을 도로 집어넣는다. 그 만 원이 아까웠던 것은 그들의 불손함 때문이었을까. 그 자신의 옹졸함 때문이었을까. 이만 원을 건네받은 청년은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는 ‘진’을 가로막는다. 하긴, 이만 원은 너무 야박하다. 나라면. 그런 상황에서, 그러니까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와이퍼는 작동하지 않고, 카센터는 한참 멀었고, 아이는 계속 칭얼대고, 이삿짐을 실은 트럭은 벌써 어느 만큼 가 버린, 그런 상황에서 나라면, 나였다면, ‘오만 원’정도는 건넸을 것이다. 풋. 오만 원이면 좀 나은가.
불운을 퇴치하는 비용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이만 원은 박하다. 그래도 와이퍼를 고쳐주지 않았던가. 빗길에 와이퍼 없이 운전한다는 것은 사고를 부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상대의 행색이 비록 그 모양 그 꼴일지라도, 그것과는 별개로 내게 절실한 문제를 해결해준 것은 그것대로 가치를 인정해주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어쩐지 거기서부터, 그러니까 삼만 원에서 기어이 만 원을 도로 집어넣은 그 지점부터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이 나의 뒷덜미를 싸하고 지나간다. 실상 인건비만 해도 얼마인가. ‘진’이 그 정도의 ‘시세’를 모르는 사람은 아닐 터인데. 결국 마음의 문제이다. 또한 가치의 문제이다. ‘진’은 그들의 도움을 ‘이만 원’으로 책정한 것이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아내를 흘깃거리던 청년의 불순한 눈빛과 대낮에 빈 사무실에서 술이나 쳐 마시고 있는 젊은 것들의 행태에 대한 반감이 더해져 ‘진’은 기어이 만 원을 빼냈을 터이다. 그러나 이만 원에 만족할 리 없는 청년은 그를 가로막고 현금을 강탈한다. 자신의 노력을 고작 이만 원으로 치부한 ‘진’에 대한 분노 때문에 그나마 있었을지도 모를 호의는 보란 듯 내다버리고 ‘진’의 돈을 빼앗다시피 가져간다.
‘진’은 분하다. 뭣 같지도 않은 것들 때문에 돈을 날렸다. 이미 도움 받았던 사실은 안중에 없다. 그는 경찰에 신고한다, 폐업한 주유소에서 마약을 하는 것 같다고. 아내는 적어도 남편보다는 불운을 감지하는 감수성이 뛰어난 게 틀림없다. 남편의 행동을 불안해하는 것을 보면. 그저 술에 취한 것일 뿐이라고 남편을 말리는 것을 보면. 그러나 분노에 휩싸인 ‘인간’은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다. 분노만이 추진력을 발휘하여 인간을 몰아간다.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던 청년들도 경찰을 마주하고 분노했을 것이다. 두 분노는 충돌하며 각각의 불안을 낳고 종국에는 모두 파멸로 이끈다.
먼저 도착한 크림색 소파는, 그러나 새집에 맞지 않았고, 아무리 끼워 맞추려 해도 결국 계획했던 자리에 놓이지 못한다. 이삿짐센터의 직원은 고객이 원하는 자리에 제대로 가구를 배치해주고 싶지만, 크기가 맞지 않은 소파를 둘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집을 뜯어내든가, 소파를 잘라내든가. 그러나 두 가지 방법 모두 이삿짐센터 직원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소파는 약간 비뚤어진 채로, 어색하게, 이상하게, 거실에 놓여졌다. 그리고 ‘진’은 청년의 분노에 처절하게 파괴된다. 잘못 놓여진 소파처럼 ‘진’은 불편한 자세로 바닥에 나동그라진 채 비를 맞는다.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아이는 울고 아내는 두려움에 떨며 차 안에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는 자꾸만 그 지점을 찾는다. 삼만 원이면 괜찮았을까. 주유소를 들르지 않았으면 괜찮았을까. 처음부터 보험사에 연락했으면 괜찮았을까. 신고를 하지 않았으면 괜찮았을까. 그러나. 그런다고 불운이 닥치지 않을까. 불운은 어디에나 있다. 불운을 불러들이는 것은 무엇일까. 스스로 자초한 것이었을까, 주어진 운명이었을까. 하마르티아, 그것 때문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