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원리
태초에 변화가 있었다. 존재는 변화의 통제다. 무엇이 존재한다는 말은 거기서 변화가 통제되고 있다는 뜻이다. 변화는 밸런스 내부에 감추어져 있다가 모순에 의해 밖으로 튀어나온다. 변화에는 방향성이 있다. 모든 변화는 밸런스를 중심으로 안에서 밖으로 멀어지는 방향으로 일어난다.
돌고 있는 팽이는 멈춘 것처럼 보인다. 변화가 밸런스에 잡혀 계 내부에 숨은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우주 안에 없다. 붙잡힌 변화와 드러난 변화가 있을 뿐이다. 돌고 있는 팽이 두 개가 충돌하면 둘의 거리가 멀어진다. 그것은 드러난 변화다. 이것이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일의 전부다.
변화는 일정한 조건에서 일정하게 일어난다. 변화의 조건을 규명하여 변화의 다음 단계를 예측하는 것이 지식의 출발점이다. 밸런스는 변화를 담는 그릇이다. 우주에 드러난 변화와 숨은 변화가 있을 뿐 그 외에 아무 것도 없다. 이것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다. 인류의 모든 지식을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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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하나는 변화를 일으키지 않고 둘이 공존하면 밸런스를 이룬다. 밸런스가 깨지는 것이 변화다. 변화의 방향은 밸런스의 중심과 가까워지는 수렴방향과 멀어지는 확산방향이 있다. 모든 변화는 멀어지는 확산방향으로 일어난다. 그것이 지식의 근거가 된다.
우주 안의 모든 변화가 공유하는 보편원리가 있다.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를 막론하고 해당되지 않는 분야가 없다. 모두 외부 원인으로 가까워지고 내부 원인으로 멀어진다. 내부의 밸런스는 일정하다. 변화를 추적하게 하는 일정한 조건은 내부의 밸런스다.
변화를 통제하는 것은 지렛대다. 밸런스를 뒤집으면 지렛대다. 내부 원인에 의한 변화는 밸런스에 잡혀 있으므로 통제된다. 통제되는 변화는 법칙을 따른다. 변화의 통제가능성이 에너지다. 지식의 본질은 에너지의 통제다. 비로소 인간은 지식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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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되는 변화는 자발적 변화다. 자발적 변화는 밸런스에 잡혀 닫힌계 안에서 나란해진 상태로 일어난다. 밸런스의 축이 하나이므로 자발적 변화는 원인이 하나다. 변화가 하나의 스위치에 의해서 통제되므로 변화의 경로를 추적할 수 있다.
자발적 변화 - 바구니의 과일이 쏟아지는 방향은 내가 통제한다.
외부적 변화 - 외부에서 굴러오는 호박의 방향은 내가 통제할 수 없다.
외부적 변화는 원인이 외부에 있으므로 탐구대상이 아니다. 탐구하려면 닫힌계에 가둬 자발적 변화로 바꿔야 한다. 자발적 변화만 인간의 탐구대상이다. 자발적 변화는 닫힌계 안의 내부 밸런스에 의해 일어나므로 안밖의 경계가 구분된다.
변화의 원인은 밸런스 내부에 있으며 그것은 방향 충돌이다. 그것이 모순이다. 변화는 충돌로 일어나고 충돌 가능성이 소멸되어 멈춘다. 변화의 방향은 수렴 -><-에서 확산<-->이다. 변화는 밸런스를 잃는 엔트로피 증가 방향으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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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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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론은 인류의 가장 위대한 지적 성취다. 구조론은 지금까지 인류가 건설해온 지식체계를 해체하고 원점에서 새로 지식의 빌드업을 시작한다. 구조론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체계와는 다른 방법, 다른 도구, 다른 경로, 다른 방향, 다른 동력원을 사용한다.
구조론은 세상을 구조로 보는 지식체계다. 구조는 매개다. 매개는 차원이다. 차원은 체계다. 체는 의사결정 단위, 계는 동력원이다. 인류는 독립된 단위 중심으로 사고한다. 틀렸다. 계가 깨져서 체가 된다. 동력을 연결하는 매개 중심의 사고로 갈아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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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론은 메타 지식 곧 지식에 대한 지식이다. 객체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주체에서 객체까지 찾아가는 경로에 대한 지식이다. 체가 연결되어 계를 이룬다는 우리의 믿음은 틀렸다. 체는 객체다. 객체 중심의 사고를 버리고 주체 중심의 사고로 갈아타야 한다.
구조는 내부구조다. 그러나 인간은 외부를 본다. 사과가 있다면 인간은 그곳에 사과가 하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사과를 볼 수 없다. 사과를 사과로 결정하는 것은 사과 내부에 숨은 질서다. 사과 외부를 결정하는 색깔은 사과가 아니라 빛에 속한다.
숫자 1은 사과를 가리킨다. 주체에 서서 객체를 바라보면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면서 왜곡된다. 구조로 보면 1은 주체와 객체를 연결하는 라인이다. 주체와 객체를 잇는 관계가 1이다. 사물의 1이 아니라 사건의 1이다. 사물은 외부를 보고 사건은 내부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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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체는 단위다. 자연에는 단위가 없다. 우리가 보는 단위는 인간의 관측 단위일 뿐 자연의 존재 단위가 아니다. 단위 중심의 사고는 관측자 입장이 반영된 것이다. 자연에는 변화가 있을 뿐이며 단위는 변화가 일어나는 지점이다. 변화 중심으로 사고해야 한다.
의사결정은 어떤 둘의 사이에서 일어난다. 사이는 내부다. 인류의 문명사 일만년 동안 인간은 외부를 봤을 뿐이다. 보이는 것은 모두 왜곡된 것이다. 사이를 봐야 한다. 사이에는 의사결정 메커니즘이 있다. 입력부터 출력까지 에너지가 전달되는 경로가 있다.
개가 주인을 보면 꼬리를 흔들고 도둑을 보면 짖는 것은 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단위는 동력이 없어 의사결정할 수 없고 만남의 형태가 존재를 결정한다. 존재가 변하는게 아니라 변화가 존재다. 만남을 도와 변화를 격발하는 매개 중심으로 사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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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이 있고, 결정이 있고, 결과가 있다. 원인은 변화의 동력을 제공하고, 결정은 변화를 격발하고, 결과는 변화를 전달한다. 우리는 결과 중심적 사고에 빠져 있다. 원인 중심적 사고로 갈아타야 한다. 날아온 것은 총알이고 쏘는 것은 총이다. 총알이 아니라 총을 봐야 한다.
결정은 메커니즘 내부에서 일어나고 결과는 외부에 전시된다. 인류는 외부에 전시된 결과에 주목할 뿐 내부에서 일어나는 결정을 보지 못한다. 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깨달아야 할 진실은 원인과, 결정과, 결과를 통일하는 메커니즘이다. 인간은 존재의 반도 보지 못했다.
단어는 결과를 전달하고 문장은 원인을 조직한다. 단어 중심 사유를 버리고 문장 중심 사유로 갈아타야 한다. 단위 중심, 결과 중심, 객체 중심의 사유를 버리고 매개 중심, 원인 중심, 주체 중심 사고로 바꿔야 한다. 변화를 격발하는 의사결정 메커니즘이 존재의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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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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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없으면 볼 수 없고, 입이 없으면 말할 수 없고, 뇌가 없으면 생각할 수 없고, 동료가 없으면 의지할 수 없고, 에너지가 없으면 의사결정할 수 없다. 우리는 프레임에 갇힌 존재다. 의사결정은 메커니즘 내부에서 일어난다. 밖에서 문을 열어주는 매개가 없으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다.
인간은 지식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소통에 막힌다. 노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물리적 장벽에 갇힌다. 외부와 연결하여 소통을 매개하는 도구가 있어야 한다. 언제나 물리적인 도구가 문제를 해결한다. 그것은 선과 악의 논리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열쇠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모자라면 채우면 되는데 없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눈이 나쁘면 안경을 쓰면 되는데 눈이 없으면 방법이 없다. 인간은 지식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지식의 매개가 없다. 배가 없어서 강을 건너지 못하는 형편이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물리적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노력은 해결책이 아니다.
차원의 벽이 있다. 이 단계는 답이 없고 높은 단계로 올라가야 한다. 올라갈 수 없다. 메커니즘은 자체 균형을 깰 수 없기 때문이다. 문이 열리고 높은 단계에서 손길이 내밀어졌을 때 손을 잡아야 한다. 아기는 의심하지 않고 엄마 손을 잡는다. 다른 모든 가능성이 차단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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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으려면 먼저 식탁에 앉아야 한다. 식탁에 앉아보지도 못하고 좌절하는게 보통이다. 거기까지 데려다주는 것이 있다. 반드시 매개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차원이다. 인간은 성공해도 차원의 도움 덕분에 성공하고 실패해도 차원의 장벽에 막혀 좌절한다.
선수가 실력을 발휘하려면 팀에 소속되어 기회를 받아야 한다. 실력은 달라도 기회는 같아야 한다. 금수저는 언제나 식탁까지 데려다주는 사람이 있고 흙수저는 그런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 세상을 움직이는 본질은 매개다. 매개의 존재여부로 차원이 나뉜다.
지식을 매개하는 것은 소통이다. 소통의 장벽을 넘어 지식의 식탁에 앉게 하는 것이 모든 지식에 앞서는 근원의 지식이다. 언어의 장벽을 넘도록 매개하는 것은 구조론이다. 집단의 장벽을 넘게 하는 것은 권력이다. 내면의 장벽을 넘어가는 것은 깨달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