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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000년대 젊은 시의 지형도
서정의 본질과 미래
―문태준, 손택수, 박성우의 시를 중심으로
하상일|문학평론가
1. 다시, 서정을 말하다
지금 우리 평단에서는 다시 ‘서정’에 대한 논란이 점화되었다. 서정의 본질을 논리적으로 설명한다는 사실 자체가 끊임없는 오류의 과정을 답습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지속적인 변화를 시도해 온 서정을 둘러싼 논의는 여전히 우리 시단의 뚜렷한 쟁점으로 남아 있다. 특히 20세기 말 서정의 해체와 상실을 앞세운 탈서정의 양상들이 전통서정의 자리를 밀어내고 우리 시단의 중심을 차지하면서부터 서정과 탈서정의 경계는 더욱 모호해졌고, 이때부터 우리 시단에는 무수히 많은 ‘서정’의 변종들이 저마다 ‘서정’이란 이름 아래 제자리를 새롭게 구축하려는 치열한 양상을 드러냈다. 전통적 서정시학의 주체중심적 논리 대신에 자본과 문명을 앞세운 기술시학의 탈중심적 언어와 문법으로 미래사회를 대비하는 시학의 변화를 모색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논의들은 대체로 전통서정의 본질이 반시대적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비판함으로써, 서정의 미래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려는 반서정 혹은 탈서정의 시학을 구체화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서정을 논의하는 자리는 ‘서정 아닌 것’들이 끝끝내 자신을 일컬어 ‘서정’이라고 부르는, 그것도 기존의 서정과는 전혀 ‘다른 서정’으로 인식해 달라는 요구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예전과는 사뭇 다른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게다가 ‘서정 아닌 것’들의 새로운 지향성이야말로 진정으로 21세기를 선도할 ‘미래파’적 표상이라고 명명함으로써, 전통서정을 고수하며 문명적 세계와 맞서는 오래된 시정신을 견지하는 시인들의 미래를 마치 ‘과거파(?)’인 것처럼 몰아가고 있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쯤 되면 그들이 내세운 미래파의 내부에 어떠한 서정의 원리가 내재하고 있는지 그 실체를 명확하게 보여주어야 할 텐데, 오로지 명명과 선언만 있을 뿐 미래파들의 서정은 그림자조차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오리무중일 따름이다. 새로움은 언제나 끊임없는 자기갱신에 대한 강박을 뛰어넘기 어려워 또 다른 새로움에 의해서 여지없이 낡은 것으로 치부되는 당대적 한계에 직면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새로움을 표상한 것만이 시적 진정성을 지닌 것으로 평가되는 요즘 시단의 흐름을 생각할 때, 오히려 새롭지 않은 것이 더욱 새로운 것으로 인식되는 아이러니적 현실을 간과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 지금 우리 시단은 낡은 것이 오히려 진정한 새로움의 가치를 발휘하는 지독한 역설의 순간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다시, 서정을 말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낡고 오래된 것이 더욱 새로운 가치를 생성하는, 그래서 진정으로 미래를 지향하는 시적 변화는 뒤를 돌아보면서도 앞을 향해 달리는 양가적 모순의 긴장 속에서 창조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새로움’' 혹은 ‘다름’은 언제나 전통을 수용하면서 배반하는, 이중의 전략을 구사하는 갱신의 징후가 되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이중성이 전통으로의 회귀나 복고적 양식을 합리화하는 과거 추수적 논리로 귀결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다만 소통불능의 외계어만이 가장 미래적인 가치를 생성하는 혁신적 시어로 평가받는 지나친 주관화의 위험에 대해서만큼은 단호하게 대처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지금, 다시, 서정의 본질과 미래를 깊이 탐색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지혜’를 찾기 위한 시적 고투(苦鬪)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2. ‘오래된 미래’의 현재화와 순간의 시학
서정시는 순간성의 장르다. 과거와 미래가 모두 현재의 순간으로 통합됨으로써 ‘영원한 현재’를 표상한다. 여기에서 현재는 시인의 의식상에서 많은 과거들과 체험들이 동시적으로 공존해 있는 순간이다. 따라서 서정시는 외부 사건의 연속보다도 체험 의식, 곧 내적 경험의 순간적 통일성에 의존한다. 다시 말해 시인의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기억 가운데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시간에 따른 잡다한 체험들을 선택하고 결합하여 하나의 의미 있는 통일체로 변용․창조하는 것이 바로 서정시의 순간이다. 이러한 서정시의 시간 의식은 서정시를 가장 서정시답게 하는 필수적인 조건인 동시에, 서정시를 언제나 현재적 문맥 속에서 의미화하는 결정적 조건이 된다. 결국 낡고 오래된 것이든, 추상적 미래상이든, 그것이 서정적 문맥 속으로 들어올 때는 동일하게 현재적 순간으로 형상화되는 것이다.
문태준의 시는 유독 이러한 ‘순간’에 초점을 맞추어 세계를 바라보려 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는 “어두워지는 순간에는 사람도 있고 돌도 있고 풀도 있고 흙덩이도 있고 꽃도 있어서 다 기록할 수 없”(「어두워지는 순간, <맨발>)다는 언어의 근원적 한계를 자각하는 데서부터 새로운 시안(詩眼)을 열어나가고자 한다. 그래서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 즉 “한 호흡”(「한 호흡」, <맨발>)의 순간으로부터 시의 우주를 발견하려는 야심 찬 기획을 펼친다.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던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의 움직임에서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맨발」, <맨발>)이라는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이끌어내는 것은 순간을 포착하는 예리한 시선에 담긴 서정의 힘을 깊숙이 내장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사람들이 변을 보려 묻어둔 단지, 구더기들, 똥장군들.
그런 것들 옆에 퍼질러앉는 저 소 좀 봐,
배 쪽으로 느린 몸을 몰고 가면 되새김질로 살아나는 소리들.
쟁기질하는 소리, 흙들이 마른 몸을 뒤집는.
워, 워, 검은 터널을 빠져나오느라 주인이 길 끝에서 당기는 소리.
원통의 굴뚝에서 텅 빈 마당으로 밀물지는 쇠죽 연기.
그러나 不歸, 不歸! 시간은 사그라드는 잿더미에 묻어둔 감자 같은 것.
족제비가 낯선 자를 경계하는 빈, 빈집에 들어서면
녹슨 작두에 무언가 올리고 싶은, 도시 회고적인 저 소 좀 봐.
―「회고적인」, <수런거리는 뒤란>(이하 <뒤란>으로 약칭) 전문
오늘날과 같이 급속도로 변화하는 세상의 중심에서 문명의 속도를 거스르며 사는 일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의 풍경을 저만치 여유롭게 바라보는 일도 가당치 않다. 모든 것이 미래를 향해 질주하는 무한 속도의 경쟁 속에서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 현대인의 모습이다. 이럴 때일수록 인간은 세상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미래를 앞당기려는 악전고투의 일상을 당연한 삶의 원리로 받아들이기 일쑤다. 따라서 현대인들에게 “회고적인” 의식과 태도는 곧바로 시대에 뒤떨어진 복고적 감상주의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어떻게 해서라도 붙들어보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어 우리 시대의 표정으로 바라보기에는 참으로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퍼질러앉는”, “느린 몸”, “되새김질”, “쇠죽 연기” 등에서 연상되는 “회고적인 저 소”의 능청스런 여유 속에 내포된 진정한 의미는, 무한 경쟁의 속도를 의도적으로 거스르려는 시인의 의식이 역설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구더기들”, “똥장군들”, “마른 몸”, “텅 빈 마당”, “사그라드는 잿더미”, “녹슨 작두” 등은 흙과 바람에 썩고 메마른 자리에 신생(新生)의 기운이 새롭게 솟아나길 기대하는 소멸의 미학을 표상하고 있다. 이처럼 문태준의 시는 “회고적인” 시선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소통시키고 이를 현재적 의미로 재현하는 서정적 시간의식에 절대적으로 기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통합적 시간의식은 과거로의 회귀와 미래로의 지향이 현재의 위치에서 팽팽하게 맞서는 극도의 긴장(tension)을 구조화한다. 따라서 낡고 오래된 것을 향한 구심력(intension)과 변화된 미래를 내다보는 원심력(extension)은 서로 맞물려 조화로운 세계를 이루는데, 손택수의 시는 이러한 시적 긴장을 통해 언어의 힘을 극대화함으로써 서정의 본질에 더욱 깊숙이 다가가려 한다. “언뜻 내민 촉들은 바깥을 향해/기세 좋게 뻗어가고 있는 것 같지만/실은 제 살을 관통하여, 자신을 명중시키기 위해/일사분란하게 모여들고 있는 가지들”(「화살나무」, <호랑이 발자국> ; 이하 <호랑이>로 약칭)의 세계는 바로 이러한 서정적 순간의 절정과 긴장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와 같은 팽팽한 시적 긴장의 세계는 그의 시에서 ‘기억’의 현재화로 구체화되는데, 여기에서 ‘영원한 현재’로서의 서정시의 시간의식은 탯줄의 상상력으로 이어져 세대 간의 동일성을 심화시킨다.
어느 날인가는 시큼한 홍어가 들어왔다
마을에 잔치가 있던 날이었다
(중략)
나는 고기가 한점 먹고 싶고
김치라도 한점 척 걸쳐서 오물거려보고 싶은데
웬일로 어머니 눈엔 시큼한 홍어만 보이는 것이었다
홍어를 먹으면 아이의 살갗이 홍어처럼 붉어지느니라
지엄하신 할머니 몰래 삼킨 홍어
불그죽죽한 등을 타고 나는
무자맥질이라도 쳤던지
(중략)
죄스런 마음에 몇 번이고 망설이던 어머니
채 소화도 시키지 못한 것을 토해내고 말았다는데
역류한 바닷물이 눈으로 넘쳐나고 말았다는데
요즘도 나는 어쩌다 그 홍어란 놈이 생각나는 것이다
세상에 나서 처음 먹는 음식인데
언제가 맛본 기억이 나고
무슨 곡절인지 울컥 서러움이 치솟으면
어머니 배 속에 있던 열 달이 생각나곤 하는 것이다
―「홍어」, <목련 전차>(이하 <목련>으로 약칭) 중에서
“두엄더미 속에서 푹 곰삭은 홍어회를/오도독오도독 씹어먹고 싶은 마음에 안달이 다 났”지만, “아기가 홍어처럼 납작해지기라도 할까봐 엄두를 내지 못했”(「닭과 어머니와 나」, <호랑이>)던 어머니의 마음은 온전히 자식에게로 이어져, “세상에 나서 처음 먹는 음식인데/언젠가 맛본 기억이 나고”, “어머니 배 속에 있던 열 달이 생각나”게 한다. 시간의 단절과 공간의 벽을 허물어뜨린 자리에 “무슨 곡절인지 울컥 서러움이 치솟”는 ‘순간’, 서정시는 이러한 순간의 세계를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합하는 새로운 시간의식으로 변용해 낸다. 그것은 “스윽, 제비 한 마리가, 집을 관통했”던, “그야말로 무방비로/앞뒤로 뻥/뚫려버린 순간”(「放心」, <목련>)의 세계다. 그 순간을 세심하게 포착하고 역동적인 언어로 형상화하는 것이야말로 서정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다. 거기에는 ‘오래된 미래’를 통해 현실의 환부를 치유하려는 시인의 자기 성찰적 태도가 내면화되어 있다. 이러한 성찰적 태도에는 자연을 인격화하는 동일성의 전략이 두드러지게 부각되는데, 여기에서 자연의 시간적 질서는 인간의 운명과 연결되는 실존적 시간의식으로 형상화된다.
공중에 발자국을 찍으며 나는 새가 있다
제 존재를 끊임없이 확인하기 위해
지나온 흔적을 뒤돌아보며 나는 새가 있다
그 새는 하늘에 발자국이 찍혀지지 않을 땐
부리로 깃털을 하나씩 뽑아 던지며 난다
마지막 솜털까지 뽑아낸 뒤엔
사람의 눈으로 추락하며 생을 마감한다
오늘은 내가 그 새의 장례식을 치른다
저 하늘의 새털구름,
그 새의 흔적이다
―「새」, <거미> 전문
박성우의 「새」는 시간의 질서에 순응하며 죽음을 향해 날아가는 새의 운명을 인간의 삶과 동일한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의식의 지향성이 드러난다. “제 존재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현재적 자아의 모습은 “지나온 흔적을 뒤돌아보”는 과거로의 지향에 기대어 있다. 그리고 그 현재는 “부리로 깃털을 하나씩 뽑아 던지”는 것과 같은 치열한 삶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하지만 이러한 치열성도 자연의 순리를 거스를 수는 없어 새도 인간도 죽음으로 시간의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결국 시간의 끝을 놓치지 않으려는 인간의 욕망은 과도한 허위의식에 의해 “추락”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화자는 스스로 “그 새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그 새의 흔적”을 발견하려 한다. 여기에는 죽은 새와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인간으로서의 깊은 성찰이 내재되어 있다. 이러한 성찰의 자리는 자연의 질서로 구획된 근대적 시간의식을 초월하는 순간의 사유에서 빛을 발한다. 따라서 서정시는 시간의 흐름 속에 과거와 미래를 가리키는 질서와 방향과 같은 기본적 요소들이 이미 포함되어 있는 ‘표면적 현재(specious present)’를 본질적 시제로 삼는다. 서정시가 신화적 세계나 원시적 세계와 같은 근원적이고 총체적인 세계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시간의식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미래는 무조건 앞으로만 나아가는 자의 몫이라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 지금, 다시, 서정의 본질이 지향하는 미래의 참모습은 ‘오래된 미래’에 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3. 가족공동체의 상실과 농경문화적 상상력의 심화
전통적으로 우리 사회는 가족을 중심으로 수직적으로 위계화된 생활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은 근대적 주체와 개인의 위상이 강화됨에 따라 가족공동체의 유형이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변화되면서 그만큼 가족의 기능과 역할은 축소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가족의 외형과 사회적 기능들은 상당히 축소된 반면, 오히려 가족 내부의 정서적 공동체의식은 더욱 강화되는 아이러니가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가족은 축소되었지만 ‘가족주의’는 더욱 확산되었다는 것이 근대적 가족제도의 ‘틈새’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틈새를 파고드는 것이 서정시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가족주의’는 가족제일주의로 귀착되는 권력의 장치로 작동함으로써 위반과 탈주의 욕망을 규제하고 억압하는 제도적 장치로서의 부정적 기능을 노출하기도 한다. 반면 ‘가족주의’는 공동체의 상실에 따른 개인주의의 만연과 해체주의적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심리적 기제로 작용함으로써, 조화와 통일을 지향하는 서정시의 본질에 충실히 다가서는 근원적 토대가 되기도 한다. 지금 서정시가 지향하는 가족공동체의 회복은, 후자의 경우에서처럼, 파편화되고 상실된 주체의 내면을 되찾기 위한 동일성의 전략을 드러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외할머니가 홀깨로 훑은 벼처럼 세월의 흔적이 그러하다
인기척 없고 뜰팡 하나 없이 집터만 남은 세월
십년 동안의 몽유
봄날 미나리꽝을 지나가는 텃물에 손목을 담근 것 같다
내 몸을 눕히면 봄볕을 받아주던 마루
깊은 젖가슴을 드러낸 아궁이
한때 이곳은 꽃의 구중궁궐이었으나
―「옛 집터에서」, <맨발> 전문
문태준에게 ‘집’은 “옛 애인은 가고 없어 능구렁이처럼 나 홀로 흉가에 들어앉는 것”(「내 마음이 흉가에」, <뒤란>)과 같이 “이물스럽”(「빈집 3」, <뒤란>)고, “무너지는 무덤”(「묵정밭에서」, <뒤란>)가에 “오도 가도 못하는 귀신 같은 흰나비의 발자국 몇 개”(「흰나비재」, <뒤란>)만이 남아 있는 황폐한 공간으로 인식된다. 사람의 정취를 전혀 느낄 수 없는 “집터만 남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비를 만난 개미둑처럼 집들은 죄다 허물어”(「오래된 악기」, <뒤란>)져 버린 것이다. 결국 가족의 울타리를 지켜주는 최소한의 버팀목인 집의 파산은 더 이상 가족공동체의 따뜻함을 꿈꿀 수 없는 적막하고 스산한 풍경을 보여줄 뿐이다. “하릴없이 전나무 숲이 들어와 머무른 때”가 있어 잠시나마 행복을 느낄 때도 있지만, “전나무 숲이 들어앉았다 나가면 그뿐, 마음은 늘 빈집”(「빈집의 약속」, <가재미>)일 따름이다. 따라서 지금 시인에게 진정으로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내 몸을 눕히면 봄볕을 받아주던 마루/깊은 젖가슴을 드러낸 아궁이”가 있었던 “옛집”을 복원하는 데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구중궁궐”의 영화를 다시 기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저 소박하게 “어둠이, 흔들리는 댓잎 뒤꿈치에 별을 하나 박아주었던”(「수런거리는 뒤란」, <뒤란>), “누군가 공중에 이처럼 푸른 여울을 올려놓은 것”(「대나무숲이 있는 뒤란」, <맨발>) 같은 “뒤란”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가 꿈꾸는 서정은 “가을강처럼 슬프게” “저물게 저물게 이곳에 허물어지는 빛으로 서 있”(「어느 날 내가 이곳에서 가을강처럼」, <가재미>)는 풍경에 가만히 귀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족공동체의 상실과 이를 회복하기 위한 서정시의 전략은 박성우, 손택수의 시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형상화된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족은 아버지의 상실 혹은 부재라는 체험 속에서 육화되어 있는데, 이러한 상실과 부재로 인해 어머니를 비롯한 남아있는 가족들이 짊어져야 했던 삶의 무게는 더욱 깊은 상처를 남겨놓았다. 우선, 박성우의 시에 형상화된 아버지와 시인의 관계는 “감꽃”이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나의 출생을 기념하기 위해 심었던 감나무가 언제부턴가 “담장으로 톱질당한” 채 “더 이상의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처럼, 시인 역시 “아버지 안에서/나는 그렇게 베어졌다”는 상실감과 좌절감을 겪으며 살아왔다. 심지어 “아버지는 지난겨울에 흙집으로 들어가셨”고, 이때부터 “사람들은 가장 큰 안식을 얻었다”(「감꽃」, <거미>)는 지독한 아이러니를 드러낼 정도로 아버지에 대한 시인의 의식은 너무도 음울하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불신이 너무도 깊어 죽음의 순간에서조차 용서를 할 수 없는 닫힌 마음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직면한 가족공동체의 현실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삶의 고통을 물려주고 간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커녕 가슴속 깊이 아버지를 향한 연민과 그리움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 이는 죽음에 이르러서도 서로 화해하지 못한 아들과 아버지의 끈을 이어주고 싶은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을 담아낸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버지 산소에 다녀오신 어머니는
고사리와 취나물을 잔뜩 뜯어 오셨어요
(중략)
가족사진에 한참이나 감전되어 있던 어머니가
취나물을 다듬기 시작했어요
어머니는 웬일인지 연속극을 보지 않으셨어요
왜 그랬을까요 어머니는
아버지 냄새에 취해 있었던 건 아닌지
느그 아부지는 …… 느그 아부지는 ……
취나물은 다른 때보다 아주 천천히 다듬어졌어요
느그 아부지는 취나물을 별시랍게도 좋아혔는디,
어머니가 갑자기 훌쩍거리기 시작했어요
그러게 취나물은 뭣허러 뜯어와서 그려요,
그런 어머니가 미워서 나는 방을 나왔어요
사실은 나도 울 뻔했으니까요 그리고 다짐했어요
내일 아침상에 올라올 취나물은 쳐다도 안 볼 거라고,
별들도 이 악물고 견디고 있었어요
―「취나물」, <거미> 중에서
“아버지는 빚 때문에/그해 겨울도 돌아오지 못했”고, “우리들은/남의 집 반찬에 익숙해져 갔”(「생솔」, <거미>)던 유년시절의 지독한 가난에 대한 기억은 시인을 비롯한 가족들의 내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게다가 삶과 죽음의 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아버지의 자리는 항상 비어 있었으므로, 오래 전부터 가족들 가운데 누군가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시인에게 어린 자식들을 양육해야 하는 어머니의 자리는 근원적 모성성의 세계가 아닌 부성성의 역할로 각인될 뿐이다. 그러므로 “느그 아부지는 취나물을 별시랍게도 좋아혔는디”라며 눈물 흘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며 원망과 슬픔의 양가적 감정이 교차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겉으로는 “그런 어머니가 미워서 나는 방을 나왔어요”라고 말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시인 역시 가족의 근원적 슬픔과 고통을 “이 악물고 견디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내성(耐性)은 “여린 곁가지에 젖을 물려주던 마음/젖꼭지처럼 붙박여 있”는, “세상의 상처”에 생긴 “옹이”(「옹이」, <거미>)를 닮았다. 즉 가족의 결핍을 회복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매달렸던 모성적 세계로부터 상처를 치유하는 근원적 생명력을 찾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모성성의 세계는 자연과 더불어 더욱 풍성해짐으로써 그 자체로 성숙된 풍경을 창조해낸다. 비록 화려하고 눈부신 풍경은 아닐지라도 자연 속에서 저절로 우러나는 소박한 마음으로부터 신생(新生)의 가치를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다.
손택수의 시에는 이와 같은 모성적 상상력의 세계가 도저하게 펼쳐져 농경문화적 전통의 세계에 깊숙이 맞닿아 있다. 이 또한 아버지로 표상된 가족공동체의 상실을 극복하기 위한 근원적 시의식을 지향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대부분의 성장과정을 담은 시가 그러하듯, 그의 시 역시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통과제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아버지의 말과 아버지의 삶을 거부하는 데서부터 그의 시의 동력은 생성된다. 이에 반해 평생을 “죽어서 매를 맞는” “소가죽북”(「소가죽북」, <호랑이>)처럼 살아왔으면서도 “병든 사내를 버리지 못”한 채 아버지의 곁을 지키고 있는 어머니의 삶은 시인에게 근원적인 연민과 사랑의 대상으로 내면화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근원적인 모성성의 세계는 그의 시에서 “할머니”의 표상으로 자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인데, 이는 모성적 상상력의 깊이를 보다 근원적인 세계로 이끌고 가서 신화적이고 주술적인 세계의 표상으로 재현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그래서 할머니의 세계는 땅과 더불어 호흡하고 별들과 더불어 말을 하는 우주적 원리를 형상화한다. 이는 모성적 상상력이 대지적 상상력과 한데 어우러질 때 생명의 근원을 찾아가는 시의 길은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시인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매달 스무여드렛날이었다
할머니는 밭에 씨를 뿌리러 갔다
오늘은 땅심이 제일 좋은 날
달과 토성이 서로 정반대의 위치에 서서
흙들이 마구 부풀어 오르는 날
설씨 문중 대대로 내려온 농법대로
할머니는 별들의 신호를 알아듣고 씨를 뿌렸다
별과 별 사이의 신호를
씨앗들도 알아듣고
최대의 發芽를 이루었다
할머니의 몸속에, 씨앗 속에, 할머니 주름을 닮은 밭고랑 속에
별과의 교신을 하는 무슨 우주국이 들어 있었던가
매달 스무여드레 별들이 지상에 금빛 씨앗을 뿌리던 날
할머니는 온몸에 별빛을 받으며 돌아왔다
―「달과 토성의 파종법」, <목련> 전문
할머니의 파종법은 그다지 특별한 것이 없다. 그저 “문중 대대로 내려온 농법대로” 씨를 뿌리는 것이 전부일 뿐이다. 그런데 그 “농법”이란 것이 수많은 세월을 땅과 더불어 살면서 숙성되어 나온 알토란과 같기 때문에, 어떠한 교과서보다도 자연의 이치를 깊이 체득하고 있다는 데서 중요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래서 할머니는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땅심이 좋은 날”을 알게 되었고, “별들의 신호를 알아듣”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삶의 일부로 내면화하게 된 것이다. 하늘[天]과 땅[地]과 인간[人]이 서로 소통하는 교감의 순간이야말로 “최대의 발아를 이루”는 풍요로움을 안겨준다. 이런 점에서 “할머니 주름을 닮은 밭고랑”은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우주의 비밀을 고스란히 간직한 서정적 유토피아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농경문화적 상상력은 문명적 세계의 허위성으로 황폐화되어 버린 인간의 삶터를 다시 옥토로 만들기 위한 진정성 있는 실천을 지향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우리 서정시가 전통적 복고주의에 안주하지 않고 현재와 미래를 갱신하는 생명의 사유를 깊숙이 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주목해야만 한다.
4. 근대의 허위성과 생명의식의 내면화
생명시학은 모더니즘의 자아중심주의, 전통 부정, 인간 중심적 가치관 등의 문제의식을 넘어 주체에서 타자로 근대에서 전통으로 인간에서 자연으로 그 관심을 확대해 왔다. 민중시 이후의 김지하와 해체시 이후의 황지우가 공통적으로 서정 본연의 양식을 통하여 새로운 관계론의 지평을 열어 나갔던 것은 바로 이러한 지향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새로운 관계론의 지평은 문명의 허위성이 파생시킨 근대주의의 반생명적이고 해체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뚜렷한 성찰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의 속도와 자본의 가치는 물질적 행복과 삶의 편리를 가져왔지만, 그 속에 감추어진 진실은 유기체적 생명의 질서가 사라진 표피적이고 파편적인 근대라는 아이러니가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문명의 허위성을 가로지르는 인문학적 실천은 오늘날의 시인들에게도 새로운 미래를 여는 중요한 문제의식으로 작용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모든 것이 문화로 수렴되는 일방향적 진실 속에서도 오히려 문학의 전통성을 고집하고 실천하는 젊은 서정시인들의 시적 성취야말로 아주 특별하고 새롭다. “목련 전차”를 타고 이 땅의 “수런거리는 뒤란”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그들의 시선에는 결코 예사롭지 않은 시적 진실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적 태도가 바로 자기표현이나 새로움에 들린 근대시의 주류적 흐름을 극복하고 전통을 복원하면서 생태학적 실천의 장으로 나아가는 진정성 있는 시적 갱신이고 시적 미래라고 할 수 있다.
아파트 18층에 누워 살면서 밤은 꿈도 없이 슴슴해졌다
소꿈은 길한 꿈이라는데 뜨막하게 소꿈을 꾸는 때가 기중 좋다
내 소꿈은 소와 자꾸 싸우는 소꿈이다
내 걸음걸이는 얼른얼른 어딜 가자는 것 같고
소는 또 그럴 생각 없이 머뭇거리고 목을 젖혀 뻣뻣하게 버틴다
간혹 혀를 빼 누런 소가 길게 울기도 한다
들에서 돌아오는 아버지를 마중 나가 아버지로부터 받아오던 그 소와 아주 닮았다
내 소꿈은 소와 자꾸 싸우는 소꿈이어도
소꿈을 꾸는 날에는 하루가 빈 걸상도 있고 악기점도 있고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길이 수유리까지 멀리 나 있다
―「꿈」, <가재미> 전문
“아파트 18층”의 문명적 공간은 근대의 공포와 억압이 자리잡고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도 없이 슴슴해”질 수밖에 없다. 꿈조차 자연스럽게 꿀 수 없는 삭막한 불모지에서 근대의 문명을 예찬하고 발전의 속도를 기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부질없는 허욕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를 사는 인간의 욕망은 이러한 허욕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채, 욕망의 극단을 향해 자꾸만 “얼른얼른 어딜 가자는” 몸짓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이 헛된 욕망의 소산이란 사실을 깨닫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이러한 삶의 태도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비판적 입장을 취하지만, 정작 자신은 문명의 속도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중성을 드러낸다. “소꿈을 꾸는 때가 기중 좋다”라고 느끼면서도, 꿈속에서조차 “소와 자꾸 싸우는” 꿈을 꾸게 되는 것은 이러한 이중적 내면의 은폐된 실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문명의 꼭대기에 살면서 꾸는 “소꿈”은 “자꾸 싸우는” 꿈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지켜내야 할 소중한 꿈이다. 그 꿈속에는 근대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근원적 표상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년 시절 “들에서 돌아오는 아버지를 마중 나가 아버지로부터 받아오던 그 소”는 문명적 근대의 횡포에 길들여진 시인 자신을 근본적으로 성찰하게 하는 시적 힘을 내면화하고 있다. 그것은 “시인이랍시고 종일 하얀 종이만 갉아먹던 나에게/작은 채마밭을 가꾸는 행복”(「벌레詩社」, <가재미>)을 심어주는 것과 같은 의미를 심어준다. “검푸른 감나무 속으로 매미 한 마리가 들어”(「감나무 속으로 매미 한 마리가」, <가재미>)서듯, 시인 역시 자연의 품안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근대문명에 대한 성찰과 자연친화적 정서는 서정시인들의 내면 속에서 주체를 탈각시킴으로써 더 이상 자연과 인간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는 통합적 세계인식으로 심화된다. 여기에서 인간적 시점은 사라져 “나는 나를 잠시 버리기로 합니다”(「봄소풍」, <거미>)라는 탈주체화를 통해 주체와 타자의 통합된 지형으로 서정시의 풍경을 새롭게 열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이파리 무성한 등나무 아래로
초록 애벌레가 떨어지네
사각사각사각,
제가 걸어야 할 길까지 갉아먹어서
초록길을 뱃속에 넣고 걸어가네
초록 애벌레가 맨땅을 걷는 동안
뱃속으로 들어간 초록길이 출렁출렁,
길을 따라가네
먹힌 길이 길을 헤매네
등나무로 오르는 길은 멀기만 하네
길을 버린 사내가 길 위에 앉아 있네
―「길」, <거미> 전문
“이파리 무성한 등나무”와 “초록 애벌레”가 보여주는 생명의 질서는 인간의 길과는 사뭇 다른 자연의 이법(理法)을 충분히 담아내고 있다. 마치 모든 사물과 자연이 순환의 고리 속에서 타자를 향해 나아가면서 자신의 삶을 완성해 나가듯, “초록 애벌레”의 “길”은 통합된 자연이 인간의 내면을 끌어안는 아주 자연스러운 생명의 풍경을 펼쳐 보이고 있다. “제가 걸어야 할 길”, “뱃속으로 들어간 초록길”, “등나무로 오르는 길”은 모두 한 가지 길이며, 그 “길 위에 앉아 있”는 “길을 버린 사내” 역시 이미 자연과 한몸이 되어 진정한 자연인의 모습을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의 길에는 어떠한 구분도 경계도 없다. 경계를 구획하고 주체와 타자를 구분하는 발상 자체가 이미 반자연적이고 반생명적인 근대의 폭력이기 때문이다. 근대의 편리에 길들여진 인간의 어리석음은 “바다에 와서야 비로소 이제껏 헛돌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튜브 속에 거북한 바람을 품지 않고/고무 타는 냄새 없이도/질주할 수 있다”(「바다를 질주하는 폐타이어」, <호랑이>)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는 경험을 할 수밖에 없다. 자연은 그 자체로 신비로운 체험의 공간이므로 “딴은 꽃가루 날리고 꽃봉오리 터지는 날/물고기들이라고 뭍으로/꽃놀이 오지 말란 법 없”(「어부림」, <목련>)다는 시적 발상이야말로 진정한 자연의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어부림”이란 말이 충분히 환기하는 것처럼, 모든 사물이 온전히 ‘어불려’ 환상의 축제를 연출하는 장관이야말로 자연 아니면 창조해낼 수 없는 그 자체로 한 편의 시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두엄자리에서 지렁이가 운다. 지렁이 울면 낭창한 대 하나 꺾고 낚시를 가시던 할아버지.//그날 붕어조림을 삼키면서 나는 붕어가 삼킨 지렁이,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헛구역질을 하고 말았는데//지렁이가 할아버지를 삼킬 줄은 꿈에도 모랐다. 할아버지가 삼킨 붕어와 붕어가 삼킨 지렁이 잘디잔 흙 알갱이가 되어 지렁이 주둥이 속으로 빨려들 줄은 몰랐다.//비 내린 뒤의 영산강변 할아버지 무덤가에 지렁이가 기어간다. 그래 지구상의 모든 흙은 한번쯤 지렁이의 몸을 통과했다.//머잖아 저 몸속에서 붕어를 삼킨 할아버지와 내가 머리 딱 부딪치며 우르릉 쾅쾅 천둥번개 치는 시간 있겠구나.//주물럭주물럭 시간대를 마구 뒤섞는 장운동, 저 몸속으로 산맥 하나가 통째로 빨려들어 가고 말랑말랑한 반죽물 밭이랑 논이랑이 되어 꿈틀꿈틀 빠져나올 수도 있겠구나.//강 주둥이에 아침부터 누가 철근을 박고 있다.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시멘트를 퍼붓고 있다. 컥컥 헛구역질을 하며 강이 움찔거린다.
―「내 목구멍 속에 걸린 영산강」, <목련> 전문
“지렁이”, “할아버지”, “붕어”, “흙”, “영산강”이 모두 한데 어불려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소위 먹이사슬의 수직적 위계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오로지 “철근”, “시멘트” 등으로 상징화된 문명의 횡포에 “컥컥 헛구역질”을 하는 영산강의 이물감이 있을 뿐이다. 즉 자연은 또 다른 자연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만, 자연을 파괴하는 문명의 횡포 앞에서는 여지없이 이물감에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물감은 한때의 순간적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비롯한 모든 자연의 내면에 더욱 극한적인 이물감을 남김으로써, 결국 자연과 인간의 생태계는 송두리째 무너져 폐허화되고 만다. 자연은 이처럼 정직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냉혹하리만치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며 살려고만 한다. 그 결과 순간의 편리에 점점 익숙해져 영원한 폐허를 견디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미래를 예견하지 못하거나 자꾸만 외면하려고만 할 따름이다. 그래서 시인은 “목구멍 속에 걸린” 자연의 고통을 자연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주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근대의 속도와 방향에 매몰된 오늘날 삶의 지형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지혜와 통찰이 필요하다. “가지런하게 한쪽 방향을 향해 누운 물고기 비늘 중엔 거꾸로 박힌 비늘이 하나씩은 꼭 달려 있”는 것처럼, “역린(逆鱗), 유영의 반대쪽을 향하여 날을 세우는 비늘”(「거꾸로 박힌 비늘 하나」, <목련>)과 같은 역설적 힘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첨단 문명의 속도로 유영하는 근대의 일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이러한 “역린”의 지혜는 반드시 필요하다. 낡고 오래된 서정의 자리가 더욱 절실해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태도가 바로 지금 서정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새로운 미래의 방향인 것이다.
5. 서정이라는 역설과 새로운 미래
지난 90년대 초반 우리 시단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바탕을 둔 시학의 급속한 변화로 서정 상실의 징후를 몹시 걱정했고, 이러한 흐름은 시의 위기론으로까지 심화되어 전반적으로 서정시의 침체를 불러왔다. 그런데 해체시, 도시시, 문화시 등 다양한 명칭으로 확산되었던 탈서정 혹은 탈중심의 현상이 잠시 주춤했던 것은 90년대 중반 정신주의를 강조한 서정성의 회복이라는 담론이 새롭게 부각되면서부터이다. 서정의 위기가 다시, 서정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불러오는 역현상이 당시 우리 시단의 중요한 화두로 쟁점화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서정을 둘러싼 쟁점은 탈서정 혹은 반서정의 양상이 두드러지면 질수록 더욱 강력한 담론으로 작용해 왔다. 지금 우리 시단에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서정담론의 실상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과 어느 정도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을 듯하다.
지금 우리 시단은 ‘미래파’적 경향을 지니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시적 성취의 기준으로 인식될 만큼, 전통서정으로부터의 위반과 전복이 가장 시적인 것을 구현하는 태도로 평가받고 있다. 자칫 시의 미래는 이러한 한 가지 경향이 전부인 것처럼 온통 외계어들이 난무하고 있어서, 시인과 독자 사이의 최소한의 소통조차 기대하기 힘든 지경에 도달한 것이 사실이다. 차라리 이러한 현상을 두고 지난 90년대 초반과 마찬가지로 탈서정의 심화라고 한다면 왜 지금 ‘탈(脫)’이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시대적 논리만 파악하면 되겠지만, 지금의 변화는 지난 90년대와는 너무도 다르게 이러한 위반과 전복조차 ‘서정’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더욱 혼란스러울 따름이다. 이쯤 되면 더 이상 ‘서정’의 본질과 개념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모든 것이 ‘서정’으로 귀속되는 시단에서 굳이 ‘서정’의 의미를 탐색해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최근 서정을 둘러싼 쟁점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오늘날 서정시의 위상은 근본적으로 ‘역설’의 정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미래파’가 외적으로 기괴한 형상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탈서정’이 아닌 ‘다른 서정’을 주장하는 이유는, 서정에 대한 비판이야말로 진정한 서정의 정신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는 ‘역설’의 전략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변화된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서정시에 대한 위반과 전복 역시 서정 내부의 획기적인 자기성찰에서 비롯된 것이지 서정을 떠난 담론전략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낡고 고루한 전통서정에 대한 가장 첨예한 반성의 결과가 ‘다른 서정’의 양상으로 구체화되었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식의 논리라면 ‘서정’과 ‘탈서정’의 이분법적 논리 역시 무의미한 담론의 각축장으로 세속화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시가 어떻게 변화하면서 전통을 지켜나갈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중요한 문제이지 서정과 탈서정의 명명이나 개념화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지엽적인 문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적 모순과 오류를 무릅쓰고라도 ‘서정’을 강조하는 이유는 ‘역설’의 정신이야말로 우리 시단을 이해하는 가장 확실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과 기술이 주도하는 세계의 변화는 끊임없이 시의 변화를 요구했고, 그 결과 ‘시적인 것’의 혼란이 가중되면서 다시,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 문제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서정이든 탈서정이든 서정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개념적 시도는 우리 시의 미래를 읽어내는 이정표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미래파’라는 개념이, 명명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급속도로 담론적 확산을 이룰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 우리 시단은 혼란의 정점에 있으므로, 누군가가 먼저 나서서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조타수 역할을 해주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이 서정의 본질적 이해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라 현상적 문제를 분류하는 데 그쳤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을 따름이다.
새로운 천년에 대한 기대감과 두려움이 교차했던 지난 2000년대의 시작은 어쩌면 상징적 퍼포먼스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사실상 숫자놀음에 그쳤던 변화를 두고 모두들 특별한 의미부여를 하기에 급급했다. 그리고 어떻게든 20세기와는 다른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지독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낡고 진부한 모든 것을 버리고 첨단문명의 선두로 질주하는 과도한 제스처에 얼마만큼의 진정성이 있었는지 이제는 진지하게 성찰할 때이다. 이러한 새로움에 대한 강박관념은 우리 문학에서도 급격한 변화를 불러왔다. 변화는 언제나 새로움의 가치로 포장되었고, 전통은 정체된 운명으로 폄하되기 일쑤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새로움을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할 것인가의 문제는 지금 우리 문학이 당면한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는 문학의 윤리를 해명하는 통로이기도 한 것이다. 서정시가 내재하고 있는 ‘역설’의 정신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깊숙이 내장하고 있다.
시가 읽히지 않는 시대에 대한 성찰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다. 시의 대중성을 고민하기도 했고, 시와 인접예술의 관계를 모색하기도 했고, 오히려 시의 본질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야 한다는 문제제기도 있었다. 결국 가장 중요한 문제는 독자와의 ‘소통’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하는 데 있다. 시가 오로지 시인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이제 시인들은 독자들과의 소통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그것이 방법론적이든 주제론적이든 시가 독자와의 교감의 영역을 잃어버린다면 더 이상 시의 미래는 없다. 이러한 혼란과 혼돈의 시대에 ‘윤리적 주체’의 정립이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윤리적 주체의 정립이야말로 내용과 형식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시의 미래를 열어낼 수 있을 것이다. 윤리는 도덕의 차원을 훨씬 뛰어 넘는 미래적 가치를 지향한다. 윤리는 내용과 형식의 오래된 경계를 가로지를 수도 있고, 인간의 내면과 외면을 동시에 들여다보는 성찰적 태도를 내재화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현실적 자아도 억압된 내면도 모두 윤리적 주체의 정립을 통해 새로운 시의 길을 열어나가야 한다. 이것이 앞으로 우리시의 미래가 짊어져야 할 화두임에 틀림없다.
하상일․평론집 <전망과 성찰> 등
․현재 동의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