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읍 문산리 파평윤씨 영벽정(暎碧亭)
대구 도시철도 2호선의 달성군 쪽 마지막 역인 문양역 서편 낙동강 가에 20여 호 문산리(汶山里) 파평윤씨(坡平尹氏) 집성 마을이 있다.
이들의 시조는 태조 왕건(王建)의 고려 건국을 도와 벽상삼한익찬공신(壁上三韓翊贊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太師)가 된 윤신달(尹莘達)이며, 중시조는 그 현손으로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은 것으로 유명한 대원수(大元帥) 윤관(尹瓘) 장군이다. 장군의 아들 윤언인(尹彦仁), 윤언식(尹彦植), 윤언이(尹彦頤)의 후손에서 이른바 파윤(坡尹) 8대방파(八大房派)로 나뉘는데 문산리 세거 일족은 소정공파(昭靖公派)라 한다. 그 파조 소정공 윤곤(尹坤)은 태사 윤신달의 14세손으로 아버지가 개성부사 윤승순(尹承順)이며 젊어서 문과에 급제하여 아우 윤향(尹珦)과 함께 문학으로 이름이 높았다. 1400년(정종 2) 이방원(李芳遠, 태종)이 동복형 이방간(李芳幹)이 일으킨 난을 평정하고 왕위에 오르는 데 협력한 공으로, 1401년(태종 1)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에 책록되고,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로 파평군(坡平君)에 봉작되었다. 1406년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로 있을 때 다른 사건에 연루, 파직되어 파평현에 유배되었다가,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평안도관찰사로 기용되었다. 세종은 윤곤이 학덕이 높은 것을 알고 침전에서 환송연을 베풀어 주는 등 크게 총애하였다. 이듬해 9월에 이조판서로 승진되었는데 윤곤의 이와 같은 파격 출세는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 기악(妓樂)을 폐지하여 풍속을 바로잡는 등 치적을 쌓았기 때문이며 그 뒤 우참찬까지 지냈다. 성질이 관후(寬厚)하고 풍채가 매우 좋아 복옹(福翁)이라는 별칭을 받았고 시호가 소정(昭靖)이었다. 그러므로 문산리 세거 일족은 자신들을 파윤 소정공파 통례공(通禮公), 목사공(牧使公) 후 아암공파(牙巖公派)로 일컫는다.
그리고 이곳 다사읍 문산리 405번지 낙동강 가에 영벽정(暎碧亭)이란 조촐한 오랜 정자가 있다. 그 문산리(汶山里) 세거 파평윤씨 입향조인 윤인협(尹仁浹, 1541-1597)이 선조 18년(1585)에 세운 정자라 한다. 윤인협은 자가 덕심(德心), 호 아암(牙巖)으로 고조부는 윤은(尹垠)인데 참의(參議)를 지내고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었고 영천부원군(鈴川府院君)에 봉해졌다. 조부는 윤탕(尹宕)으로 중종 2년 정묘에 별시 병과에 급제하고 지평(持平),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지냈는데, 목사 재임(1524년) 중 경상도관찰사 성세창(成世昌)이 ‘송사를 바르게 하고 백성을 고르게 부린다’는 장계를 올려 임금으로부터 표리(表裏)를 하사받은 목민관이었으며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탕건(宕巾)을 처음으로 제작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인데 조선 중엽 1524-1526에 경상도 상주목사로 재임하면서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알려졌다. 윤탕은 관직에 있는 이들이 맨머리로 집무하고 있는 모습이 조금은 어색한 듯이 생각되어 『탕건을 만들어 임금에게 진상하였는데 중종이 탕건을 살피고 칭찬하여 규격에 맞는 아름다운 두건이니 벼슬하는 자들은 늘 두건으로 쓰도록 하고 윤목사의 이름의 탕(宕) 머리에 쓴 것이라는 뜻에서 건(巾)을 합하여 탕건(宕巾)이라 하였다[朝鮮中宗朝尙州牧使尹宕造宕巾獻于大王前大王玩之贊曰制度精美佳作也有官者常用巾以公之名命於名曰宕巾,中宗二十一年]』라는 내용의 유래비를 그 문중에서 세운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아버지는 참봉 윤응벽(尹應璧)이었는데, 윤입협은 1541년(중종 36) 서울에서 태어나 1568년(선조 1)에 진사시에 입격하고 성균관 진사가 되었으나 이후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영남으로 내려와 산천을 유람하다가 장차 살 만한 곳이라 하여 자리잡은 곳이 곧 오늘날 대구시 달성군 다사읍 문산리였는데 때는 1571년(선조 4)이었다고 한다,
공은 그 곳을 종생할 거처로 정하고 두 해 뒤 영벽정을 지으면서 여생의 은둔처로 삼았는데, 두 해 뒤에 영벽정 원운(原韻)을 지어 그 소회(所懷)를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남으로 와 절승(絶勝) 찾았는데 바로 이 강가로세[南來形勝此江汀]
늙어가며 느긋이 쉬고자 작은 정자 엮었네[老去捿遲築小亭]
홀로서 시서(詩書) 끼고 한가히 누운 지 오래이라{獨抱詩書閒臥久]
세상사 그 많은 뜻 이 가운데 머물었네[風煙多意箇中停]
이 정자를 처음 낙성했을 때에는 강가의 갈대꽃이 석양에 붉게 물든다 하여 처음에는 영홍정(映紅亭)이라 하였다 한다. 그 후 백구(白鷗)가 무리지어 노닐자 다시 영백정(映白亭)으로 바꾸었고, 새들이 날아가고 푸른 물결만 넘실거리자 마침내 영벽정(映碧亭)으로 고쳐 부른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영벽정이 건립된 시기의 문산은 행정구역상 대구부(大丘府) 하빈현(河濱縣) 하남면(河南面) 지리(旨里) 들녘에 해당된다. 당시에는 정사(亭榭) 문화가 성행하여 주변 낙동강 변에 많은 정자들이 지어졌다. 곧 영벽정 상류에는 낙애 정광천(洛涯 鄭光天, 1553~1594)이 지은 아금정(牙琴亭)이 있었고, 하류에는 생원(生員) 윤대승(尹大承)이 건립한 부강정(浮江亭)이 있었다 하나 현재 아금정과 부강정은 흔적을 찾을 길 없다.
지금껏 잘 보존돼 온 영벽정에는 많은 글들이 남아 있다. 정자의 벽면에는 상량문(上樑文), 기문(記文) 그리고 시판(詩板) 등이 여럿 걸려 있다. 정자를 방문하고 글을 남긴 인물들을 살펴보면 임하 정사철(林下 鄭師哲, 1530~1593)·낙애 정광천(洛涯 鄭光天, 1553~1592)·백포 채무(栢浦 蔡楙, 1588~1670)·전양군 이익필(全陽君 李益馝, 1674~1751)·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1833~1906) 등이며, 글을 남긴 전통은 400여 년 동안 이어왔다.
특히 정자 주변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영벽정팔경(暎碧亭八景)이 전하고 있다.팔경은 생원(生員) 윤종대(尹鍾大, 1763~?)란 분이 지었는데 본관은 파평 자는 여효(汝孝)이며, 성주에 거주하였던 선비로 정조22년(1798)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던 인물로 영벽정을 자주 방문한 이었다고 한다. 그가 정하여 쓴 팔경들은 제1경 행탄풍범(杏灘風帆), 제2경 다림연류(茶林烟柳), 제3경 연포호월(蓮浦皓月), 제4경 운정취벽(雲亭翠壁), 제5경 비슬선하(琵瑟仙霞), 제6경 아금어화(牙琴漁花), 제7경 마천조람(馬川朝嵐), 제8경은 봉산석조(鳳山夕照)이며 그 시 원문은 다음과 같다.
暎碧亭八景
第1景 杏灘風帆(행탄풍범):행탄의 돛단배
槐底坡瓈杏外通(괴저파려행외통):회나무 아래 유리거울 행탄 낙강으로 통하고,
夕陽微雨滿江風(석양미우만강풍):석양 무렵 이슬비에 강바람 가득하다.
估兒得意張高帆(고아득의장고범):장사치 젊은이 기세 좋게 높은 돛 올리고,
片片懸歸斷靄紅(편편현귀단애옹):펄럭이며 돌아오는 길 붉은 노을 나누이네.
第2景 茶林烟柳(다림연류):다림의 안개 낀 버드나무
茶園臨水柳千條(다원임수류천조):강가 차밭 버드나무 천 갈래 가지 내리고,
春色偏濃細雨朝(춘색편농세우조):봄기운 무르녹은 가랑비 내리는 아침일세.
會使長煙添繡障(회사장연첨수장):장천의 연하 만남 비단 장막 더하였고,
化工於此戱逍遙(화공어차희소요):조화옹 여기 저기 즐기며 노닐도다.
第3景 蓮浦皓月(연포호월):연포의 밝은 달
紅蓮埋盡白蓮開(홍련매진백련개):붉은 연꽃 다 진 뒤에 흰 연꽃 피어나고,
檻外秋空霽色來(함외추공제색래):난간 밖 가을 하늘 갠 빛으로 돌아왔네.
坐看無形天地外(좌간무형천지외):멍하니 앉아 형상 모를 바깥세상 보면서,
邵翁鞭駕共徘徊(소옹편가공배회):소강절(邵康節) 더불어 말 채찍질 함께 소요하도다. *소옹(邵雍, 1011~1077): 중국 송(宋)나라 때 학자, 시호 강절(康節)
제4경 雲亭翠壁(운정취벽):백운정의 푸른 절벽
彼亭誰以白雲名(피정수이백운명):저 정자를 누가 백운이라 이름했나?
峭翠連簷儘有情(초취연첨진유정):푸른 절벽 처마에 잇닿아 볼수록 유정하네.
安石當年高臥志(안석당년고와지):안석(安石) 은둔하였던 높은 그 뜻을 이어,
閒翁幽趣許平生(한옹유취허평생):일 없는 늙은이 별난 취미 평생을 도모하네.
*안석(安石):진(晉) 나라 때 고사(高士) 사안(謝安)의 자(字), 나라의 부름에도 은거하며 전혀 나아가지 않다가 나라가 위급하게 되자 나아감을 말함.
第5景 琵瑟仙霞(비슬선하):비슬산의 선경(仙境) 노을
缺處雙螺是好山(결처쌍라시호산):모자라는 두 곳이 소라 모양 좋은 산이요,
山名琵瑟更怡顔(산명비슬갱이안):산 이름이 비슬이라 그 모습 화안하네.
仙人綠髮長相對(선인록발장상대):신선의 푸른 머리 언제나 마주하고,
朝暮飛霞共往還(조모비하공왕환):아침저녁 오른 연하(煙霞) 함께 더부르도다.
第6景 牙琴漁花(아금어화):아금의 고기잡이 불
牙琴之水響如琴(아금지수향여금):아금의 물소리 거문고처럼 메아리치니,
千載峨洋此可尋(천재아양차가심):천년 흐른 지음(知音)을 예서 가히 찾도다.
夜夜漁燈孤照處(야야어등고조처):밤마다 고기잡이 불 외로이 비취는 곳,
分明認得古人心(분명인득고인심):분명한 옛사람 마음 알아서 느끼노라.
제7경 馬川朝嵐(마천조람):마천산의 아침 안개 전
北峯秀色護箕躔(북봉수색호기전):북쪽 산봉 빼난 빛깔 별길 따라 휘도는데,
烽火平安二百年(봉화평화이백년):봉수대는 무사한 지 이 백년도 넘었도다.
山氣蔥蘢成饙餾(산기총롱성분류):비취빛 산 기운에 뜸 들이고 데우는데,
早朝開戶望蒼然(조조개호망창연):이른 아침 창문 열고 푸른 산 빛 바라보네.
*기전(箕躔)-기(箕)는 별자리, 별이 운행하는 길, 전(躔)은 궤도를 따라 운행함. 창롱(蔥蘢)-靑翠鮮明盛貌.
제8경 鳳山夕照(봉산석조):봉산의 저녁노을
欲盡夷猶強自明(욕진이유강자명):욕심이 다해 마음 편하기 억지로 밝히지만,
六飛無奈下雲程(육비무내하운정):여섯 용마 어쩌지 못해 구름길 내려오네.
提來孝子忠臣意(제래효자충신의):효자 나고 충신 난 뜻 이끌어 다지지만,
感慨尙存不逮誠(감개상존불체성):정성을 다 못한 감개 여전히 남아 있네.
*六飛는 天子의 수레처럼 생긴 구름의 落照를 譬喩한 듯.
영벽정은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현재의 모습인데, 홍매산·최면암의 중수(重修) 기문이 전한다. 정임하(鄭林下)·권송계(權松溪) 공들과 더불어 수학하며 강론하던 곳으로 기억되면서 영남읍지(嶺南邑誌), 영남여지(嶺南輿誌) 및 대구부읍지도(大邱府邑地圖)에 표기되어 있는 대구의 대표적 정자 중 하나이다. 윤인협 공은 당시 지역의 대표 문사였던 임하 정사철과 송계 권응인 등과 거듭 교유하였는데 임란 중에는 병으로 운신하지 못했고 1597년(선조 30) 서세(逝世)하니 향년 57세였다. 저서로 <아암실기>가 있으며 현재 그 후손은 1,500여 세대 정도로 번성하여 있다고 한다.
예부터 다사 지역은 금호강을 동쪽에 낙동강을 남쪽에 두고 있어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수량으로 일찍이 농경문화가 발달한 살기 좋은 곳이자 삼국 적에는 대가야와 국경을 마주한 군사요충지이기도 했다. 경관마저 수려해 영벽정 일대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을 비롯해 한강(寒岡) 정구(鄭逑),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등 원근의 이름 난 선비들이 뱃놀이를 즐겼던 곳이라 고금을 통하여 다사팔경(多斯八景)이 또한 알려져 있었다.
1. 선사조기(仙槎釣磯) - 선사에서 낚시 놓기
2. 마령청람(馬嶺靑嵐) - 멀리서 보는 마현령의 시원한 바람
3. 낙강모범(洛江暮帆) - 낙동강 해질녘에 돌아오는 돛단배
4. 봉대석화(烽臺夕火) - 마천산 봉화대에서 저녁 불빛
5. 금호어적(琴湖漁笛) - 금호강에서 들려오는 어부들 피리소리
6. 방천철교(防川鐵嬌) - 방천 철교 위를 기차가 지나는 풍경
7. 문산월주(汶山月柱) - 문산 낙동강의 달그림자(음, 7월16일 관람 풍습)
8. 강정유림(江亭柳林) - 강정의 시원한 버드나무숲
위 다사팔경은 『다사향토지』에 수록되어 전하는 것이다. 그 선정 주체와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다사면 역사 시작이 1914년부터이고 『다사향토지』발간이 1977년이니, 선정 년대는 1914~1977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 팔경 가운데 제7인 문산월주(汶山月柱)가 영벽정과 관계가 있다. 이 팔경 속에 20세기에 들어 개통된 경부선 철도가 등장하는 등 제정 시기가 오래지 않은 것 같으나 그 중 제7경의 문산월주는 영벽정(映碧亭) 아래의 선비들의 선유(船遊)문화를 엿 볼 수 있는 특별한 경관이었다고 한다.
혹자는 이 월주(月柱)를 월계(月桂)로 본 이가 있는데, 서산(瑞山) 간월도(看月島) 팔경의 무당월주(無堂月柱)에서 보듯이 달기둥의 월주가 맞는 것이다. 글자 그대로의 해석으로 물 흐름에 따라 흔들리는 기둥같이 생긴 달그림자를 뜻한다. 영벽정에서는 달밤에 만 즐길 수 있는 월주의 신비스럽고 황홀한 경관을 완상하기 위해 적벽강유회(赤壁江遊會)를 열었다고도 한다.
매년 음력 7월 16일 기망(旣望)에 원근의 선비 수 백이 모여 3일 간 먹고 자면서 월주의 신비한 풍경을 즐겼다고 한다. 가장 크고 둥글다는 8월 보름달이 아니고 7월의 기망이었다니 그 역시 특이하다.
낙동강 칠 백리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영남제일강산’ 영벽정은 그 후에도 임제 서찬규, 심석 송병순, 전양군 이익필, 낙애 정광천 등 많은 시인 묵객들이 시문을 남겼다.
이 영벽정 관련 기록에 따르면 본래 정자 아래쪽에 “행탄杏灘”이라는 여울이 흘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영벽정 앞 낙동강은 강이라기보다는 거의 호수라 해야 적절한 수준이다. 일 년 내 강으로 흘러드는 여울은 고사하고 하상(河床)이 전혀 드러나지 아니하게 습지나 모래사장까지도 다 물에 잠긴 모습이다. 영벽정 바로 앞 조망 쉼터에 서면 마치 거대한 댐의 가장자리에 선 듯한 느낌이 된다. 그래서 지금 영벽정 문전에 서서 선인들의 기록을 헤아리면서 낙동강을 조망하면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산천 변전(變轉)을 절감하게 되는데, 그 오랜 세월의 영욕(榮辱)을 300년 넘은 영벽정의 오랜 회화나무도 아쉬워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