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이씨(永川李氏) 군위군(軍威郡) 우보면(友保面) 미성리(美城里) 마을-경북 군위군 우보면 미성리
우리 나라 이(李)씨의 연원은 옛 신라 전신(前身)인 사로(斯盧)의 육촌(六村)을 유리왕(儒理王) 9년(2365)에 육부(六部)로 개칭하면서 촌장들에게 성(姓)을 하사하되,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을 급량부(及梁部)로 칭하고 그 촌장(村長) 이알평(李謁平)에게 경주이씨(慶州李氏)를 사성(賜姓)함으로부터 비롯한다.
고려초에 득성(得姓)한 영천이씨(永川李氏)의 시조(始祖)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이문한(李文漢)인데, 이알평의 후손이라 하나 그 사이의 소목(昭穆)이며 댓수(代數)는 확실하지 않다.
영천시 오미동(五味洞)에 시조 고울군(高鬱君) 이문한(李文漢)과 2세 어모교위(禦侮校尉) 이연재(李延才), 3세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 이배(李倍), 4세 증(贈) 금오위장군 이유상(李有尙), 5세 금오위장군 이조잠(李朝箴)의 묘단(墓壇)을 설단(設壇)하여 후손들이 받들고 있다.
영천(永川)은 경상북도 영천시 일원의 옛 지명으로 고대 골벌국(骨伐國)이었던 것을 초기 신라 때에는 절야화군(切也火郡)이라 하였고, 757년(신라 경덕왕 16)에는 임고군(臨皐郡)으로 개칭하였다. 925년(경애왕 2)에 고울부(高鬱府)로 고쳐 불렀고, 도동현(道同縣)‧임천현(臨川縣)‧맹백현‧이지현(梨旨縣) 등의 현들을 관할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는 도동‧임천현을 합하여 영주군(永州郡)이라고 불렀으며, 995년(성종 14)에 자사(刺史)를 파견하였다. 1018년(현종 9)에 경주(慶州)에 편입되었다가, 1172(명종 2)에는 감무(監務)를 두면서 독립하였고, 후에 주(州)로 승격되었다. 1414년(태종 14) 영천군으로 개칭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대구부 영천군이 되었고, 1896년에 경상북도 영천군이 되었다. 1914년에 군면 폐합으로 신녕군(新寧郡)이 영천군으로 폐합되어 영천면을 신설하였다. 1937년 영천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81년에는 영천읍이 시로 분리 승격했고, 1995년 영천군을 영천시에 통합하였다.
이문한의 6세손 이극인(李克仁)은 아우 이수춘(李守椿)과 함께 고려 신종(神宗) 때 경주(慶州) 별초군(別抄軍)이 운문적(雲門賊)과 부인사(符印寺), 동화사(桐華寺)의 승도(僧徒)를 이끌고 일으킨 반란을 진압한 공이 있어 상장군(上將軍),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가 되고 익양군(益陽君)에 봉해졌다. 이후 후손들이 문한(文漢)을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을 이극인의 봉지(封地)인 익양이 뒤에 영천(永川)으로 고을 이름이 바뀌었기 때문에 영천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상게 이극인의 후손에 대한 기록이 없으므로 이후 영천이씨는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을 지내고 영양군(永陽君. 영양은 영천의 다른 이름)에 봉해진 이대영(李大榮)을 중시조로 하는 파와 고려 때 영동정(領同正)을 지낸 이박(李磚)을 1세조로 하는 파 등 여러 계열로 나뉘어 각각 족보를 간행하였다. 예를 들면 안동 도산면(陶山面) 분천리(汾川里)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1467∼1565) 선생,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선생은 영양군(永陽君)의 계열로 소윤공파(少尹公派)이고, 의성군(義城郡) 산운리(山雲里) 세거 영천이씨는 영동정공파(領同正公派)에서 나뉜 감사공파(監司公派)이며, 영천시 대전리(大田里)의 충장공(忠莊公) 이보흠(李甫欽) 및 군위군(軍威郡) 우보면(友保面) 미성리(美城里) 세거 영천이씨 제학공종회(提學公宗會) 일족은 영양군 계열의 남곡공파(南谷公派)라 한다.
영천이씨 영양군파조(永陽君派祖) 이대영(李大榮)은 고려(高麗) 진사(進士) 신호위 대장군(神號衛大將軍) 봉(封) 영양군(永陽君)으로 생몰 연대가 실전되고 익양군(益陽君) 이극인(李克仁) 계에 연계(連繫)하지 못하여 후손 중시조 1세로 족보에 기록하고 있다. 영양군파는 영천이씨 자손 70% 내외의 대파문중으로 고려 말엽 지하(支下)에 소감공파(少監公派), 판서공파(判書公派), 남곡공파(南谷公派), 소윤공파(小尹公派), 감사공파(監司公派), 생원공파(生員公派) 등 6개 파로 나누어진 문중이 전국에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다.
그 중 장파(長派)가 소감공파(少監公派)인데, 영양군 6세 고려말 소부소감(少部少監) 이백고(李伯古) 문중으로 영천 관향지에 세거하다 단종사화 때 화를 당하여 영남(嶺南) 일원에 분산 피난하였다. 소감공 2세 참판(參判) 이선(李宣)은 세종(世宗) 기유(己酉, 1429)에 급제하여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올랐으나 금성대군(錦城大君)과 단종(端宗) 복위를 도모한 충장공(忠莊公) 이보흠(李甫欽이 역신(逆臣)으로 몰리는 화를 당하여 아들 이인근(李仁近) 대에 살아남기 위한 피난 잠적 300여 년으로 상하 7, 8대의 묘소(墓所), 배위(配位)와 사적(事蹟)을 일실(逸失)한 안타까운 연유가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멸문지화를 당한 충장공 이보흠은 위 소감공파와 같은 영양군파 지하(支下)로 고려말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에 오른 영양군 6세 남곡(南谷) 이석지(李釋之, 두문동 72현)의 후손인 남곡공파(南谷公派)이다. 조선조 초까지는 3대 5제학의 명문으로 종파(宗派) 외 지하에 6파(아래의 孝友堂公派∼副使公派)가 형성되어 경기, 영호남 및 호서(개성/황주/중화/장연)지방에도 고루 분포되고 영천이씨 전체 자손의 추계 30%를 상회한다.
그 중 종파인 장남 제학(提學) 이안우(李安愚)는 한성판윤(漢城判尹)에서 참판(參判)에 오른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으로 8개도 관찰사를 지냈다. 위에서 이미 보았듯이 군위군(軍威郡) 우보면(友保面)에 남곡공파의 종파로서 제학공종중(提學公宗中)이 형성되어 있다.
차남 이안직(李安直)은 정종(定宗) 기묘(己卯, 1399)년 문과(文科), 태종(太宗) 병술(丙戌, 1406)년에 중시(重試)로 지제교(知制敎)를 거처 직제학(直提學)에 올랐다 아들 형제 중 쌍계(雙溪) 이종검(李宗儉)은 세종 기유(己酉, 1429) 문과(文科)에 올라 한림(翰林), 직제학, 대사간(大司諫)을 지내고 문종(文宗) 사호(賜號) 효우당(孝友堂)으로 안성 덕곡에 정려(旌閭)와 담양 대치(大峙)에 쌍계당(雙溪堂)이 있으며 단종대왕 충신으로 공주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고 안성, 여주, 이천, 양주, 음성, 경산, 담양 대치에 효우당공파(孝友堂公派) 문중이 형성되었다. 양주 땅에 정착한 이종검(李宗儉)의 5세 이율(李律)은 경상감사를 거치고 선조 17년(1589)에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올랐으며, 동생 이선(李選)은 호조참의를 거처 판서를 지낸 기록이 왕조실록에 전한다.
이종검(李宗儉)의 아우 암곡(巖谷) 이종겸(李宗謙)은 세종 임자(壬子, 1432)에 문과,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집현전제학에 올랐으나 단종사화 때 외종(外從) 사육신 충경공(忠景公) 유성원(柳誠源)과 종형제 되는 이보흠(李甫欽)의 피화(被禍)에 연루되어 대사간으로 있던 형 이종검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낙향 은둔하였다. 자손은 순천, 광양, 하동, 황해도 장연에 암곡공파(巖谷公派) 문중이 형성되었다.
이석지의 제3자 서파(西坡) 이안유(李安杻)는 태종 을유(乙酉, 1405)에 문과, 사간원 헌납, 이조정랑을 지내고 고향 영천에 낙향하여 영천, 영덕, 김해, 양산에 서파공파(西坡公派) 문중이 형성되었다.
제4자 노전(老田) 이안실(李安實)은 봉선대부(奉善大夫) 군기시(軍器寺) 부정랑(副正郞)을 지내고 자손이 황해도 황주, 중화에 이거 정착하였으며, 일부 자손은 영천, 신령, 청송에 정착하여 정랑공파(正郞公派)를 형성했다.
제5자 이현보(李玄寶)는 부사직(副司直)을 지내고 용인(龍仁)에서 떠나 제3형 이안유(李安杻)와 함께 영천(永川)에 이거 정착하였으나 아들 형제 중 충장공(忠莊公) 이보흠(李甫欽)이 금성대군(錦城大君)과 함께 단종(端宗) 복위를 도모하다 역신으로 몰려 3대 멸족의 피화로 후손이 거창 웅곡(熊谷, 곰실)에 잠적하였으며 후에 주손은 군위에 피난 정착하여 충장공파(忠莊公派)를 형성하였다.
이보흠의 동생 이보관(李甫款)은 세종 경신(庚申, 1440)문과를 거처 풍저창 부사(豊儲倉府使)를 지내다 형의 피화(避禍)로 이름을 세보(世輔)로 고치고 대구 팔공산 자락에 은거하고 일부 자손은 경남 고성, 통영에 피난 정착하여 부사공파(副使公派) 문중이 형성되었다.
군위읍에서 우보면(友保面) 소재지를 지나 영천(永川), 신녕(新寧) 방면으로 주행하다 보면 오른쪽 28번 국도변 미성리(美城里) 마을 입구에 “영천이씨(永川李氏) 남곡공파(南谷公派) 제학공종회(提學公宗會)”라고 쓴 큰 석물(石物)을 만난다. 동리 안에 2002년에 지어진 남곡서원(南谷書院)과 효충사(孝忠祠)가 있는데, 영양군(永陽君) 6세로 고려 후기 인물인 남곡(南谷) 이석지의 장남 제학(提學) 이안우(李安愚)의 주손이 살고 있는 곳이다.
남곡서원(南谷書院)은 남곡 이석지(李釋之)를 배향하고자 또 효충사(孝忠祠)는 남곡 및 그의 아들 5형제(상게 李安愚∼李玄寶)를 봉향하고자 현대에 후손 재력가가 지은 바였다.
남곡 이석지는 고려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이흡(李洽)의 아들로 이곡(李穀)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341년(충혜왕 2)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함께 성균시(成均試)에 급제하여 진사(進士)가 되었고, 1347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간언(諫言)을 잘하여 이색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과 함께 조정에서 잘못한 일을 직간하다가 재상의 뜻에 거슬려 외직으로 좌천되었고, 그 후에도 여러 번 배척을 당하였다.
경상도(慶尙道) 안렴사(安廉使)와 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을 거쳐 판도판서(版圖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명(明)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고려의 국운을 직감하고 남곡(南谷, 龍仁 근역)으로 옮겨 은거하였다. 이석지의 호를 남곡이라 이른 것도 그 남곡에 우거하고부터이다. 이석지가 남곡에 은거한 모습은 이색의 남곡기(南谷記)가 전하였는데 요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선생은 남곡에 살고 있는데, 토지와 가옥이 있어서 관혼빈제에 쓸 비용으로 충분하므로 세상의 명리(名利)에 무심한지 오래이다. 그러나 은자(隱者)로 자처하지는 않았다. 해마다 서울로 올라와 친지를 방문하고 마음껏 술을 마시고 담소하였다. 서울을 오가는 도중에는 초라한 아이 종과 여윈 말에 채찍을 들고서 시를 읊조리곤 하였다. 수염은 백설처럼 희며 붉은 뺨에는 광채가 돋았다. 만약 그림을 그리는 자에게 그의 모습을 그리게 한다면 삼봉연엽도(三峰蓮葉圖)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남곡은 산에 가면 나물을 캘 수 있고, 물에 가면 낛시질을 할 수 있으니 세상에서 다른 것 구할 것이 없이 스스로 만족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동국여지승람 제10권 용인현조>.
남곡에 거처하면서 당시 문장가로 이름난 한수(韓修)와 조선 개국 초기 명신이었던 성석린(成石璘) 등과 교유하며 시문을 화답하였다. 그는 조선이 건국하자 전조(前朝)에 대한 절의를 지켜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남았다.
군위 남곡서원의 경내에 남곡선생사적비(南谷先生事蹟碑)가 있고, 장자인 한성판윤(漢城判尹),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 이안우유적비(李安愚遺蹟碑)가 있으며, 서원은 본원과 효충사(孝忠祠)로 구분되는데, 효충사에는 남곡을 주벽(主壁)으로 그 다섯 아들의 위패를 모셔 양력 4월 5일에 봉향하고 있다.
남곡의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고림동 오리골에 있으며, 전남 담양 대치서원(大峙書院, 1766년 창건)에 배향되었으나 고종 무진년(1868) 서원 철폐와 함께 훼철되어 지금은 유허비만 남아 있다. 충장공 이보흠이 살았던 영천시 대전리(大田里) 가까운 쌍계(雙溪)는 남곡의 제3자 서파(西坡) 이안유(李安杻)가 우거하였던 곳인데, 그곳 구인사(求仁祠)에 남곡을 주벽으로 하고 서파공(西坡公)과 쌍계(雙溪) 이종검(李宗儉)을 봉향하였다. 또 전남 광주시 대치사(大峙祠)에 배향(配享)되었고,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주불리 남곡재(南谷齋)에서도 향사하고 있으며, 최근에 고려역사선양회가 개성 남쪽 파주시 오두산 옆에 고려통일대전(高麗統一大殿)을 건립하였는데, 그 통일대전 정절실(旌節室)에 또한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