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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101112골1장9절a
골로새서 1장 9절에 보면
골 1: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이렇게 되어 있죠. 기도 하는데, 기도 내용이 뭐냐 하면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그들이 가득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하는 그런 기도를 한 겁니다. 이 내용을 골로새서 교회의 성도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런데 이 편지를 만약에 여러분 집에 각각 편지가 배달된다면 “혹시 여기 골로새 성도 계십니까?” 물으면 “우리는 그런 사람 없습니다.” “편지내용이 뭡니까?” “편지 내용이 신령한 것으로 채우기를 어떤 분이 기도 한답니다.” “누가요?” “사도 바울이 그렇게 기도 한답니다.”
“우리 집에 그런 사람 없습니다. 그런 편지받을 만한 사람 없습니다.” 이 편지가 만약에 택배로 보낸다면 우리가 받지요. 카드 새로 신청하면 직접 집으로 배달되잖아요. 비씨카드 이런 것은 받는 데 “신령한 지혜로 채워지기를 바란다는데 받겠습니까?” “아 우리 집에 그런 것 받을 사람 없습니다.”
골로새 편지인데 받을 사람이 없어요. 왜? 안 좋아하니까 이런 유의 편지를 안 좋아하니까, 안 좋아한 다는 말은 여기 골로새서에 나오고 있는 성경이 어떤 내용인지 우리는 거기에 관심이 없어요. 이 편지 내용대로 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반기거나 좋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더 쉽게 말하면 편지받을 만한 성도가 없는 거예요. 성도가 없으니까 다른 말로 줄이면 교회자체가 없는 겁니다. 교회자체가 없는 것을 더 나아가서 성도가 없고, 교회가 없음을 아쉬워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뭐냐 하면 천국이잖아요. 천국이 없어져도 무방한 세계, 현재 우리가 좋아하는 세계가 이 세계입니다. 천국이 없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이 양천구 신월동, 천국이 없어도 아무 지장 없이 오늘도 막걸리 들이키면서 짙은 담배 연기 속에서 하루의 스트레스를 풀고 있는 사람이 시장가에 있습니다. 아무 문제없는 이 골로새의 편지를 몰라도 사는 데 전혀 행복에 지장이 가지 않는 그런 분위기가 안개가 되어서 온 천지가 시커먼 어두운 세력이 자욱하게 우리주변을 내리깔고 있습니다.
차 앞에도 뒤에도 지붕위에도 세워놓은 자전거위에도 갖다버린 쓰레기 봉지 위에도 자욱하게 모든 것이 어둠이 끼워있고 가끔 거기에 툭툭 던져진 것을 보면 ‘홈뱅킹 하세요.’ 이런 전화번호, ‘화끈하게 뭐 어떻게 합니다.’ 그런 광고 쪽지, ‘태진아 26일에 옵니다.’ 하는 이런 것들, G20 이런 것은 방송에 나오죠. 방송에 골로새서 1장 9절 이런 것이 뜨지를 않죠.
이 처럼 편지는 하늘에서 보냈는데 받을 마음은 전혀 없는 것, 그것을 수취인불명이라 하죠. 수신자가 없는 편지, 받고자하는 선뜻 나서서 “나한테 왔네. 편지가 왜 이제 왔어, 벌써 한 달 늦었잖아!” 이런 식으로 반가워하지 않는, 하나님 주신 편지를 전혀 달가워하지 않는 우리도 이미 어느새 황사 낀 검은 안개에 푹 젖었습니다.
교회 없어도 괜찮고 천국 없어도 괜찮고 그것이 우리 사는데 전혀 지장이 안 된다고 얘기해요. 맞습니다. 여러분 사는데 지장이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 영광에는 지장이 됩니다. 하나님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철로 노선이, 하나님이 저쪽에 계시는데 우리는 점점 더 멀어지는 아스라이 무너진다 하죠. 주님이 커보였는데 날이 갈수록 점점 작았다가 나중에는 어느 새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그런 사방을 둘러봐도 복음이 없어져 버렸어요.
예를 들어서 어떤 집이 있는데 이 집 사방에 교회가 있다 합시다. 사방에 교회가 있어서 교회가 흔했고 그런 교회가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이야기했던 그런 교회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여기만 해도 의존교회, 열방교회……. 둘러봐도 네 군데 더되는 것 같아요. 이렇게 교회가 많아도 여기서 교회 다니는 사람조차도 교회에 대해서 중요시하지 않는 그런 시대, 교회 다니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그리고 교회 다니는 것을 후회스러워 합니다. “괜히 교회 다녔어, 안 다닐걸......”
결국은 골로새서의 편지내용처럼 하나님은 일을 하십니다. 여기 1장 16절 보면 유명한 말씀 있잖아요.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중요한 말씀인데 이러한 말씀을 모른 채 그렇게 살아가는 그런 것이 오늘날 젊은 애들 또 우리 후손들도 그렇고 사회 분위기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골로새서를 쓰는 사도바울 입장에서는 이 편지를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 즐거운 거예요. 결국은 지금까지 강의 한 이야기를 한마디로 하면 ‘교회가 없다’, ‘교회는 없다’ 그러나 ‘교회가 있더라.’ 이것이 굉장히 신기한 겁니다. 교회가 있더라 이 말입니다. 교회가 있다는 것은 편지를 받아들고 편지가 하나님이 나한테 보낸 편지라고 알아먹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굉장히 신기하다 이 말입니다. 신기하게 느껴져야 되지요. 이것이 골로새서를 우리가 해석하는 하나의 길이 되는 겁니다.
교회는 없어요.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복음에 대해서 아십니까??” 길에 나가 물어봐도 아무도 몰라요. 그럼 우리는 결론을 내려요. “아하 신월동에는 교회가 없다. 교회는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종교단체이고 노는 단체이고 진짜복음 때문에 모여든 사람이 있을 수 없는 거다.”
그리고 교회가 없는 것을 신기하게 여기지 마시고 교회가 있는 것을 신기하게 여겨야 돼요. 왜냐 하면 교회라는 것이 우리생활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항상 마음가짐을 그렇게 가져야 해요. 교회라든지 성경이라든지 하나님이든지 천국은 우리생활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교회 같은 것이 사라진다할 지라도 “나는 전혀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있음으로서 약간의 부담은 되었습니다. 아이 교회가 없다니 속이 시원합니다. 이제부터 교회 없이 살지요. 이제는 주님 없이 살지요. 천국 없이 살지요. 천국 있으나 마나 누가 가 본 사람도 없고 그냥 남들 보통 사는 것처럼 살아갑시다.” 라는 마음이 우리의 정상적인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정상적인 마음가짐입니다.
그런데 골로새에 편지가 왔다는 것은 수신자도 없는데 편지만 덜렁 날라 온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한 겁니다. ‘아무도 이 편지를 이해 할 사람 없고 받아 줄 사람도 없을 거다.’ 라고 생각 했는데 오늘 9절에 보면
골 1: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방금 9절을 봤지만 6절에 보면 어떤 소문이 났냐 하면 골로새에 교회가 있더라는 성도가 있더라는 소문이 난거예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굉장히 반가워 한 겁니다. 없어야 된다니까요. 사람들은 교회를 찾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천국을 찾지 않습니다. 사람은 주님을 찾지 않습니다. 왜? 그거 없어도 고등어 잡아 구어 먹고, 콩나물 잘 사먹으니까 그거 없어도 카드로 버스 잘 타고 다니고 그거 없어도 화장실 가는데 전혀 지장 없습니다. 천국 없어도…….
그래서 교회 없는 게 정상입니다. 천국 안 믿는 게 정상이고 하나님 모르는 게 정상이고 예수 없이 사는 게 정상이에요. 그리고 하늘나라를 인정해요. 워낙 세상이 악하니까 사람이라 하는 것은 유유상종이라 합니다. 유유상종이라고 하는 것은 깃털이 같은 것끼리 모인다는 것입니다. 같은 유끼리 논다는 겁니다. 사람은 사실 따지고 보면 똑같아요.
니가 좋아하는 것 같이 좋아하는 겁니다. 저는 개고기 안 좋아 하지만 개고기 좋아하면 좋아하게 되고 사람은 전염이 돼요. 서로 싸우다가 나중에 서로 좋아하지 않던 것을 같이 좋아하게 됩니다. 처음에 부부가 싸우다가 나중에는 같이 살다보면 같이 좋아하지 않던 것도 좋아하게 됩니다. 영화 볼 때 “나는 취미에 안 맞는데” 했다가 잔소리 듣고 난 뒤에 “알았다 앞으로 취미 바꿀게”하고 좋아하게 돼요. 똑같아 져요. 섞이다 보면 어느새 하나가 되어 굴러간다 이 말이죠. 이것을 적응이라 하지 않습니까! 학생들도 처음에 학교 갔을 때 서먹서먹하다가 나중에는 친구 되어서 빼빼로데이에 빼빼로 보내고 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사람은 사람 말 듣게 되어 있지 사람은 절대로 사람 말 외에 다른 말은 안 듣습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사람이 최고 좋고 위로가 되고 의지가 다시 돼요.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을 섬겨도 사람 없는 곳에 가면 쓸쓸하고 외로움을 탑니다. 사람이 왜 처녀로 못 사느냐 하면 얼마나 외롭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뭐라 합니까? 처녀로 그냥 살아라. 괜히 남편 있으면 남편을 위해서 어떻게 기쁘게 할까 하다가 점점 주님과 멀어진다. 그러니까 그냥 처녀로 살아라. 처녀들한테 이야기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좋은 사람 생기면 그만 가버립니다.
제가 언제 그런 설교했죠. 사람이라 하는 것은 간단해요. 남들 하는 것 다하고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남들 하는 것 다하고 남들은 뭐했는데 자기 안하면 자기가 손해 보는 것 같고 인간 아닌 것 같고 하는 그런 느낌 들잖아요. 그래서 지금은 어떤 시대? 지금은 천국이 필요 없는 시대, 지금은 교회가 필요 없는 시대, 지금은 사도의 편지를 수취인불명, 편지를 받을 사람이 없는 시대에요. 그런 시대가 골로새 시대뿐 아니라 오늘 이 시대도 편지를 받을 사람이 없다니까요. 천국의 편지를 받고 싶은 사람도 없고 받으면 찢어버리고 ……. 그렇게 내 쫓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그런 시대에 한 귀퉁이에서 소문이 나기를 예수 믿는 사람이 있데요. 그 뭐가 좋다고 예수 믿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지도 않은 예수, 생활에 도움도 안 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생겼는데 그것을 가지고 8절 보니까 성령 안에서……. 참 성경이 이래서 어려워요. 사람들은 절대로 예수를, 하나님을 필요치 않습니다. 그런데 그게 우리가 알고 있는 기본상식이고 의례 그런 것으로 알고 있어요. 우리는 아예 마음을 그렇게 먹습니다. 은혜도 없고 성도도 없다. 왜? 너나 나나 똑같은 인간이니까 사람, 세상 좋은 것 너도 좋아? 나도 좋아 한다. 좋은 거 좋고 나쁜 거 나쁘고 이게 똑같은 거예요.
똑같은데 예수 믿을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판에 어떤 지구 한 구석에서 예수 믿는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사도는 분명히 이것은 성령이 찾아갔다. 성령이 찾아갔기 때문에 생긴 아주 희한한 현상이다. 이럴 수는 없어. 예수를 믿다니 인간으로서는 그럴 수 없는 거야. 쓸모없는 예수를 왜 믿어요. 바로 골로새 편지는 그때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안 믿어도 되는 예수, 그리고 그리워하지 않아도 되는 천국, 그런 것 생각하지 않아도 능히 살아갈 수 있는 시대에서 어떤 부류가 예수님을 믿고 천국의 소망을 갖고 “하나님의 뜻이 무슨 뜻입니까?” 하고 궁금해 하는 그런 일단의 무리들이 발생했다는 겁니다. 말라리아, 콜레라, 전염병 퍼지는 거예요. 법정 전염병 퍼지는 것처럼 지금 희한한 현상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성령이 임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성령 안에서 성령이 임한 것으로 봐요. 그러면 1장8절인데요. 그 성령 안에서가 무슨 의미인지를 이제부터 정리해 보겠습니다. ‘성령 안에서’라는 이 말은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예수를 믿는 것은 성령 안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예수 믿다가 한 6개월 만에 그만둘 사람이고 1년 만에 예수 믿는 거 때려치울 사람, 교회 안 다닐 사람입니다. 믿는 척하다 안 믿는 것은 우리가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어차피 자기 갈 길로 힘들어 못 믿겠다고 때려치울 사람이니까 문제는 성령에 의해서 믿는 사람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 그림은 하나교회에서 한 건데 그림을 여러분들이 못 보신분이 있을 거예요. 한번 그려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세례요한 때 세례 받겠다고 우르르 몰려왔습니다. 세례요한이 협박을 많이 해 놓으니 겁이 났던 모양이죠. 도끼 이야기, ‘도끼가 나무뿌리를 작살낸다.’ ‘보라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 하고 시한부 종말론 비슷하게 하고 겁을 확 주니까 가까이 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가까이 왔다.’ 하는 것은 보통 몇 개월 이야기하는 건가요? ‘가까이 왔다.’ 하는 것은 올해 넘기기 힘들 것 같다. 이런 뜻이잖아요. 연세 많은 시부모가 아플 때 의사에게 “우리 아버님 어떻습니까?” “가까이 왔네요.” 하면 ‘가까이 왔네.’ 하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10년 후를 말하는 거예요? 아니잖아요. “올 겨울 넘기기 힘들겠습니다.” 그런 뜻이잖아요.
‘심판 날이 가까이 왔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 요엘서에서 예언한 대로 그대로 마지막 하늘에서 무서운 심판 날이 온다.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진다. 타작마당 불 싸지른다. 험한 용어를 다 끄집어내면서 도끼 이야기했거든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겁이 났는지 우르르 와서 물세례 받았다 말이죠. 결국 이것은 세례요한이 어떻게 이야기했던 간에 그 듣는 사람은 그냥 종교죠. 다른 말로 하면 그냥 종교라고 하면 평범한 거거든요.
사람이 바쁜 일상 쪼개서 교회 가는 것은 평범한 겁니다. 이것은 성령 받은 게 아니고 그냥 죽고 난 뒤를 위해서 보험 하나들어 놨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죽고 난 뒤에 혹시나 안 믿는데 혹시나 천국 있으면 곤란하잖아요. 그러니까 보험 안들은 것보다 보험 들어 놓은 게 낫다 이 말 이죠. 교회 다니는 게 낫다 이 말이죠. 행여나, 혹시나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것은 아주 평범한 일이에요. 그런데 이 평범한 일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세례 받는데 평범한 일인 것이 아니고 여기 하늘에서 비둘기같이 뭐가 떨어졌습니까? 성령이 주어졌고 음성이 들렸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내 기뻐하는 자라’ 이렇게 성령이 내려왔습니다. 평범 속에 특이한 현상이 일어났어요. 특이한 현상이 예수님 때 일어났거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올라가 버린 거예요. 승천해서 올라가 버리니까 예수님 위에 성령이 임했으니까 예수님이 올라간 높이만큼 성령이 성령세례를 주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성령세례를 이렇게 주게 되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승천했다는 이 말은 성령이 안 오래야 안 올 수 없어요. 성령이 죽죽 내려오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문제는 성령을 주신다는 것이 예수님 뜻인데 받은 사람이 없는데 그럼 거짓말이잖아요. 성령이 왔다는데 “너 받았나?” “응? 안 받았어." 성령을 안 받은 거예요. 성령을 안 받으면 여러분, 그냥 평범하게 사시면 되는 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어떤 사람이 교회오라 했는데 안 나왔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합니까? 교회 안 나오면 돼요. 그리고 예수님 안 믿으면 됩니다.
지금 예수님이 안 믿어지는데 믿었다 하게 되면 진짜 믿는 사람이 손해를 보게 되어 있어요. 왜, 그쪽이 가짜거든요. 그런데 가짜가 진짜 영역에 자꾸 들어오게 되면 진짜도 뭐로 판단이 되느냐 하면 자꾸 가짜인 것처럼 오해를 받는다 이 말입니다. 진짜는, 성령 받은 사람은 안 믿으려야 안 믿을 수가 없는데 가짜는 성령 받은 척을 하니까…….
분명히 백조와 오리의 동화를 보면 오리가 노는데 백조가 들어왔을 때 그 오리들이 백조를 오리라고 쳐 주겠습니까? 안 쳐주지요. “너, 왜 자꾸 오냐? 나가라” “너는 성령 안 받았으니 나가라” 이것이 바로 골로새서의 편지 위력입니다. 이 편지 내용대로 하게 되면 “성령 안 받은 사람 나가 주세요.” 그 이야기라는 말이죠. “성령 안 받아놓고도 성령 받은 채 몰래 들어온 사람들 제발 좀 나가주세요.” 어차피 못 갈 천국, 같이 교회 다닌다고 섞여서 그냥 들어가는 법이 없거든요.
예수 안 믿어지면 안 믿으시면 되는 겁니다. 안 믿으시고 나가서 예수 욕하고 돌아다니면 돼요. “예수쟁이들은 천국 있다고 하는데 누가 가 본 사람 있나? 그 사람들 참 너무 불쌍해요. 보이지도 않는데 왜 믿는지 몰라” 라고 이야기 할 때 우리는 할 말이 있죠. “나도 당신하고 똑같은 생각이다.” “똑같은 생각이면 교회에서 나오지 왜 있느냐?” “나도 똑같은 생각인데 성령이 와 버렸는데 어떻게…….” “성령이 어디 있어?”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성령이 오니까 하나님께서 이 모든 사실을, 주님이 하신 일을 깨닫게 되었단다.” 라고 할 때부터 이 골로새서의 내용이 우리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겁니다.
제가 길게 30분 이상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제발 골로새서를 공부하지 말라는 거예요. 공부하지 말고 공부해서 이것을 흉내 내려 하지 말고 지금 성령이 이런 식으로 나에게 이것을 이야기 하려고 나에게 찾아 왔구나. 골로새서의 이런 내용들을 이야기 해주려고 왔구나! 모든 세상 만물은 예수님을 인하여 만들어졌고 예수님께서 지금도 모든 운영을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성령 받은 사람에게만 편지 수신자로 깨닫게 해서 알게 하셨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골로새서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우리가 이것을 공부해서 깨달을 것 같으면 우리도 공부해라 해야겠죠. 하지만 이것은 공부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받아야 비로소 알 수 있는 내용들만 여기에 기록 되어 있습니다.
제가 정리해 보면, 교회는 없습니다. 교회는 없는데 성령께서 임하면 골로새 교회가 되지요. 그래서 골로새 교회냐 아니냐를 어떻게 아느냐 하면 엉터리 같은 인간들도 참여 할 수 있지만 결국은 그것이 나중에 발각돼서 쫓겨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편지가 주어지기 때문에 이 편지를 보고 이 편지 내용이 깨닫게 되면 그 사람은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이고 이 편지 내용에 대해서 “이것은 몰라도 밥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는데, 이건 뭐 별 관심이 없네.” 하고 별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그 사람은 몰래 들어온 가짜로 발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기본은 인간의 힘으로서는 교회도 없고, 예수도 없고, 천국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이런 건 몰라도 우리가 살아가고 출세하는데 전혀 지장되는 것도 아니고 이것 없이도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기본 마음을 갖추기 바랍니다. “주여, 이 골로새서 없어도 행복합니다. 그런데 웬 은혜입니까? 웬 기적입니까? 웬 특이성입니까? 왜 나로 하여금 이런 운명으로 왜 자꾸 몰아넣으시는 겁니까?”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은 사람으로 인하여 외롭지 않습니다. 사람이 없어서,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든지 하여튼 주위에 사람이 없고 떨어져 나간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외롭지가 않습니다. 전에 성령을 안 받았을 때는 사람 때문에 살았기 때문에 사람이 없으면 기어이 아무거나 해서라도 사람과 같이 어울려야 행복을 느끼는데 지금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이 없는 것이 자기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는 요인이 될 수가 없어요. 제가 지금 성령 받은 특징을 골로새서 하면서 하나 둘 끄집어 낼 겁니다. 끄집어내면서 성령 받은 것과 받지 않은 것이 골로새서의 내용에 따라서 이렇게 큰 차이가 있구나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아시면 되는 겁니다.
1장 9절을 봅시다. 9절 중간에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우리를 하나의 도자기로 본다면 도자기 안에 무엇으로 채우신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시고 그냥 지혜가 아니고 신령한 지혜로 여기를 채우고, 그 다음 하늘의 총기, 총명이라 하는데 하나님의 신령한 지혜와 신령한 총명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철철 넘치는 것으로 가득 채우기를 원하는 그러한 사람, 이것이 골로새의 편지 속에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만큼은 채워져 있지요?”라고 묻는 거예요. “골로새의 교인들이여, 여러분들은 성령 받았지요?” “예!” “그러면 신령한 지혜와 총기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지요?” “예” 이렇게 주고받기가 가능할 때 그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다 이 말입니다. 편지수신자가 편지를 볼 때 “딱, 내 얘기이네” 딱 받아 드립니다.
그렇다면 항상 우리 속에 또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나는 성령 없어도 산다는 그 욕구가 있잖아요. 그렇다면 신령한 지혜와 총명이라 할 때 이 신령한의 반대말은 무엇이겠습니까? 반대말은 ‘육적이다, 세속적이다,’입니다. 육적과 세속적이라는 말이 뭐냐, 육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계시고 인간이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육적으로 모르잖아요. 모르는데 무슨 수로 하나님의 뜻을 압니까? 우리는 육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 모르면 계속 모르면 되지요. 계속 모르면 되는데 신령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안다. 그러니까 신령한 사람과 육적인 사람의 차이가 뭐냐 하면 ‘똑똑하다.’ ‘똑똑하지 않다.’의 차이가 아니고 신령하다는 말은 결국은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하나님 쪽에서 어떤 작업을 걸어온 거죠. 그 작업을 아까 뭐라 했습니까? 성령이죠. 그러면 신령한 것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성령에 의해서만 주어진 내용이 신령한 것이 됩니다.
신령한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기도원에 가서 기도한다든지 방언한다든지 하면 안 됩니다. 신령한 것은 성령이 알려준 것만 신령한 겁니다. 그러면 성령과 하나님 사이에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예수님의 이야기가 여기 들어가죠. 결국 신령한 것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말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뭘 했는가? 어떤 은혜를 주셨는가? 그것을 알면 신령한 것이 되고 예수님께서 해주신 것보다도 내가 도 닦아서 깨우치는 것, 온 우주의 신비, 이런 것은 신령의 티를 내는 신비주의 포함됩니다. 신비주의지 신령한 것은 될 수 없습니다.
신령한 것은 14절에 보면 “골 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이것이 바로 신령한 겁니다. 죄 사함이 예수님 때문에 이루어 졌다는 것을 믿는 것이 신령한 거예요. 신령하니까 우리가 갑자기 혈압이 올라간다던지, 체온이 올라온다든지, 갑자기 뭔가 뭘 본거 있고……. 그런 게 필요 없지요. 예수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것이 죄 용서가 된다는 것을 아는 것 자체가 신령한 것이 되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떤 신령한 것도 다 삭제가 되는 겁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뒤쪽에 나오는 겁니다. 골로새서 2장 18절에 보면
“골 2:18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그런 것에 마음 뺏기지 마라……. 이런 것이 쭉 나온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육적인 것에서 나온 신령한 것이 있겠죠. 그것이 육, 육체가 피곤할 때, 몸이 피곤할 때는 환상을 보게 되고 내가 그동안 보지 못한 기이한, 꿈속에 도인이 나타난다든지 이런 것을 본다 이 말이죠. 그런 것들은 신령한 것들이 아니고 신비한 건데 그런 신비로운 것들은 마귀가 자꾸 만들어내요.
육이라는 것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환상을 자꾸 만들어 내요. 여러분 어릴 때, 그 때, 그 시절로 한번 돌아가 보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까? 어릴 때 놀던 시절, 그 세계관, 그런 관점, 그렇게 세상을 봤던 그런 생각들로 돌아가 볼 생각이 없습니까? 그렇게 돌아가 어릴 때 놀던데 한번 가보고 싶다 할 때에 그것이 싫다고 하는 이유가 이미 죄 용서를 받은 상태에서는 그쪽 시점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 자체가 죄용서 받기 전에 죄짓던 상태이기 때문에 아무리 돌아가려고 해도 그것이 시시해 보이고 멋쩍어 보이죠. 별로 달갑지 않습니다. 진짜 죄 용서받게 되면 …….
죄용서 받고 난 뒤에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려면 돌아가려야 갈수가 없어요. 예수 믿고 난 뒤에 죄 짓고 싶어도 죄지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죄가 나온다는 것은 죄가 뭔지 알고 나온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나오지만 일부러 죄지을 수 없는 것이 죄라고 하는 것은 내가 만든 환상에 내가 뿅 하고 가는 것이 죄거든요. 어릴 때는 생각의 문이 좁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자꾸 환상을 만들어내요.
저기 뒤에 엎드리고 있는 두 학생, 두 사람 지금 무슨 환상을 생각하고 있어요. 무슨 생각하고 있지요? 어쨌든 생각하고 있지요? 나중에 나이 70이 된 할머니 되어서 한번 엎드려 볼래요? 시시하겠지요? 시시하다 이 말입니다. 저 학생이 만약 여기 앞에 어린 학생처럼 앉아서 해 보면 시시해서 못해요. 왜요? 그 때 환상은 지금 보니까 굉장히 우습게 보이거든요.
그래서 사람은 10살 때 생각이 20세 때 보면 “그건 환상이야, 내가 상상한 거야” 라고 한다면 그렇게 생각한 그것도 30대 되어서 다시 20대를 돌아보면 그것도 “그 때 왜 그런 고민을 했나, 낙엽 떨어진다고 울었는데, 그 때 왜 울었지?” 이렇게 생각한다 이 말이죠. 그때 아무리 자기가 심각하고 진지해도 나중에 뒤돌아보면 내가 커서 보면 내가 꾸며낸 내 상상에 스스로 속아 넘어간 겁니다. 자아도취된 겁니다. 육이라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자아를 도취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성령은 “너, 상상 많이 했어, 환상 많이 했어? 실컷 해봐. 어떤 상상이라도 해봐. 하지만 그 전체가 죄고, 나는 그 죄를 이미 용서했거든” 이렇게 나온단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상 속에서 어떻게 울고불고 싸우고 찢고 좌절하고 낙담하고 몸부림치더라도 시간이 약이라고 조금만 시간이 6개월만, 7개월만 지나가 버리면 다 잊어버려요.
10월 달에 김현식이란 가수가 죽은 지 24주년 되어서 24주년 기념 발매하고 후배가수들이 노래하는데 처음에는 많이 참석할 거예요. 나중 되면 그것도 귀찮아요. 왜? 김현식에 완전히 매료 되었던 그때 그 시절의 감이 안와요. 그때는 어릴 때거든요. 어릴 때 김현식에게 매료 되었고 또 김광식이란 가수에게 매료되어서 죽을 때 같이 죽겠다고 하고 이성재란 가수가 죽었을 때, 따라 죽겠다고 하는 아가씨도 있었거든요. 나이 60 되어서 따라 죽겠습니까? 다 6개월, 몇 년 만 지나고 나면 그때 내가 만들어낸 세계관, 내가 만들어낸 환상에 내가 스스로 넘어가서 그게 세상의 전부가 아닌데 마치 그게 전부인양 그렇게 그것 아니면 안 되는 것처럼 그렇게 느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세월이 지나가면 “아이고, 철도 저렇게 철이 없었나!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해서…….” 자매간에 어릴 때 얼마나 싸웁니까? 언니하고 동생하고 “옷 빌려줘” “새 옷인데 너 빌려주면 안 된다. 주름진다.” “내가 주름 안 지게 해 줄게” 되지도 않는 것 옷가지고 싸우고 꽃핀 가지고 싸우고 “갑자기 로션이 왜 이만큼 줄었니?” 하며 싸우고 만날 자매간에 그런 거 가지고 싸우잖아요. 많이 싸우는데 나중에 커서 뒤 돌아보면 각자 각자가 꾸며낸 환상 때문에 싸울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싸운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과거를 뒤돌아보면서 “나는 반성한다. 이제는 싸우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하지만 그것 자체도 내가 꾸며낸 환상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영이 와 버리면 그런 육적인 노선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네가 환상을 천개를 만들었던 만개를 만들었던 70이 넘어서 10대를 후회하던 후회하지 않던 관계없이 일체 묻거나 따지지 않고 어쨌든 간에 너는 예수님의 공로로 이미 용서 받았다 이 말이죠. 그리고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니까 그렇게 네가 철딱서니 없이 노는 그것도 다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만 높이기 위해서 그렇게 철딱서니 없게 살아 온 거예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완벽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만 구원받는 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정말 철이 그렇게도 없을 수 없는 그런 식으로 나밖에 모르고 “언니한테 핀 하나 그냥 빌려주는 건데 안 빌려준다고 삐져서 울며 가다가 전봇대에 머리 받혀서 째져 수술하고 내가 핀만 빌려줬어도 이 상처 아니면 시집 좋은데 갈건 데…….” 그렇게 과거에 대해서 육적이라고 세속적이라고 생각하는 기준이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신령한 공로에 근거해서 바라보는 사람이 특이현상이 되는 겁니다.
정리한다면 신령한 것은 뒤돌아보면서 모든 것이 육적이었고 세속적이었고, 내 중심이었고, 앞으로도 내 몸이 있는 한 그럴 것이고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의 공로로 이미 다 용서가 된 상태에서 그게 파괴가 된다는 거, 그게 바로 아주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젊을 때는 월급이 적니 많으니 그 몇 푼 안 되는 것 가지고 노조 대모 했던 것이 나중에 나이 들면 “아이고 직장 있는 것도 고마운 걸 모르고……. 괜히 앞에 나대다가 나만 잘리고” 그런 것이 그 당시에는 마치 그것을 앞장서야 내가 대장 된 것처럼 영웅인 것처럼 여겨지는, 내가 설치지 않으면 복음도 전파 안 되고 내가 설교 안하면 사람들 구원 못 받는 것처럼 그렇게 착각했던 그 모든 그 시대에 그 나이 대에 맞는 환상 속에 우리가 헤어나지 못했던 것 그것이 다 육이고 바로 세속적이고 신령하지 않았던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또 더 나가서 내가 25살 때 기도하는데 주께서 나타나서 “근호야, 너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 이런 거 그것조차도 돌아보니까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한 거예요. 그런 것은 기독교 영화 두세 편 보고 나면 잔상이 남아서 꿈에 많이 나타나요. 흔히 계시 받았다는 사람 이야기 들어보면 그 사람이 본 만화책 내용을 알 수 있어요. 무슨 드라마를 봤는지 다 나와요. 사람은 들었던 것이 모자이크처럼 중구남방으로 편집이 안 된 상태로 섞여 있다가 몸의 균형, 몸의 세포의 느낌 따라서 막 발작을 해서 꿈속에 툭 튀어 나오는 거거든요. 그 꿈에 사람들은 뿅하고 넘어 가는 거예요. ‘꿈에서 뭘 봤다.’ 하고 가위질해서 편집을 한 겁니다.
그래서 골로새서에서 어차피 인간들은 육의 사람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를 안다는 것은 특이 현상이고 놀라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새 언약이라고 하죠.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의 중심으로 모든지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지옥 간다는 그것이 신령한 뜻이에요. 신령한 뜻은 점점 더 압축이 되죠. 무엇으로 압축이 됩니까?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 이것으로 결국은 압축이 되는 겁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이끌어 내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태어날 때 무엇으로 태어났습니까? 예수님의 어머니는 마리아인데 아버지는 누구였습니까? 예수님께서 무엇으로 태어났습니까? 성령에 의해서 태어났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가기까지 성령이 떠났습니까? 안 떠났습니까? 계속 성령이 역사했죠. 계속 성령 때문에 귀신 내 쫓고, 병고치고 심지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도 히브리서에 의하면 성령에 의해서 복종했고, 성령에 의해서 죽었으며 성령에 의해서 되살아났다고 되어 있어요. 성령께서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성령이 주어진다면 예수님은 죄 없는 상태에서 성령이 왔지만 우리는 죄 있는 상태에서 만날 우리가 지어놓은 환상 속에 빠져서, 자아도취에 빠져서 시나리오 쓰고 소설 쓰고 오늘은 이런 기도 내일은 저런 기도 하면서 “주여, 이 뜻대로 해 달라고”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시나리오 쓰는 그런 죄짓는 가운데 성령이 와 버리면 이 성령은 예수님은 죄 없는 가운데 십자가로 가지만 우리에게는 뭐가 따라옵니까? 결국은 다 이루신 십자가가 항상 우리를 성령과 함께 와서 우리가 어떤 죄를 짓더라도 다 이루었다는 십자가로 우리를 인도하는 겁니다.
이것을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하면 “학생들, 공부 못해도 되고 시험 못 쳐도 괜찮아, 대학 안 들어가도 괜찮아. 성령만 있으면 구원받아” 정답입니까? 아닙니까? 정답 맞잖아요. 성령의 말씀으로 구원받죠. 대학 들어간다고 구원받고 공부잘한다고 구원받는 거 아니잖습니까? 그러면 애들은 이런 이야기 들으면 자기 나이 때의 환상을 해요. “아하, 성령을 받으면 공부 안 해도 되고 대학 안가도 된다. 그러면 놀아야지” 하고 또 소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학생들도 그렇지만 어른들도 마찬가지에요. 여러분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 하니까 그러면 “일부로 죄를 지어봐? 용서되는지 안 되는지 확인해봐?” 또 환상 속에 있는 겁니다. 그것이 인간의 육이니까 그것을 이상스럽게 여기지 말고 자연스럽게 여겨야 되요. 그런 식으로 가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이런 이야기 했다고 “앞으로 내가 예수 믿거나 하는 그런 환상을 안해야지”라고 하는데 그런 환상을 만들지 않겠다는 것도 자기가 각본대로 자기를 멋있게 꾸미는 거예요.
이제부터는 어려운데, 성령을 받게 될 때에 성령 받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본론에 들어갑니다. 여러분들이 이해 안 되도 할 수 없어요. 이것은 여러분들에게 강요할 수밖에 없는데 인간의 세계는 두 개가 있어요. 하나는 명제가 있고, 하나는 언표가 있어요. 이 두 개가 차이가 나요. 명제가 뭐고 언표가 뭐냐? 예를 들면 쉽습니다. 명제라는 것은 어떤 상황에든지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육적인 상태에서 육적은 어떤 식으로 환상을 만들어내는가? 그것을 설명합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인간은 육이 어떤 식으로 환상을 만들어 내는가를 설명합니다. 명제라고 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진리가 되는 것을 명제라고 생각해요. 누가? ‘성경이’ 아니요. ‘인간이’ 그것도 더러운 인간이, 우리같이 더러운 인간이 만들어 낸다 이 말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를 들어서 장례식을 한다 합시다. 장례식을 하는데 손님이 왔어요. 손님이 처음에 스무 명 올 줄 알고 사이다를 스무 병을 준비했는데 손님이 더 왔어요. 그래서 사이다를 10병을 더 준비 했습니다. 20병 더하기 10병은 몇 병? 30병이죠. 이게 장례식이라는 것 때문에 20+10이 30됩니까? 장례식과 상관없이 30병이 되는 겁니까? 이것은 장례식과 상관없이 사이다 20병+10병은 총 30병이 되는 겁니다. 20+10=30은 어떤 상황에서도 다 통하는 명제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육적으로 진리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언표는 뭐냐 하면 상황 따라서 의미가 바뀌는 것을 언표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밥을 먹었나?”라고 이야기 할 때 이것을 첫 번째, 병원에서 하는 이야기와 두 번째 춤 교습소에서 이야기와 야구장에서 하는 이야기를 해 봅시다.
병원에서 “밥 먹었나?” 하는 것은 “환자분 금식인줄 아시죠? 그런데 밥 먹었어요? 내가 먹지 말라고 했잖아요.” “밥 먹었어요? 금식 중인데 몰랐어요?” ‘그러면 안돼요. 밥 먹으면 안돼요.’ 이런 뜻에서 ‘밥 먹었나?’ 똑같은 뜻이에요. 금식중인데 밥 먹지 말란 뜻이죠.
두 번째, 춤 교습소에서 남자 파트너가 여자 파트너에게 “밥 먹었어요?” 이 말은 “갑자기 파트너가 왜 이렇게 몸무게 무겁지? 댄스 하는데 왜 잘 안 딸려오지” “밥 먹었어요?” “왜 갑자기 뚱뚱해 졌어요?” 이런 뜻이다 이 말이죠.
세 번째는 “너는 왜 그렇게 힘이 없어? 밥 먹었어? 밥 먹었는데 왜 그렇게 홈런을 못 쳐” 같은 “밥 먹었나?”가 상황에 따라서 다 다르죠.
그러면 의미는 뭡니까? 의미는 어디서 결정하는 거예요? 진리라는 것은 내가 말한 진리가 아니고 그 말을 유발 시킨 상황에서 따라서 진리냐 진리 아니냐가 다 틀리게 나오죠. 이것을 ‘언표’라고 합니다. 언표라는 것은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고 이런 말이 나오게 된 그 구조, 그 상황에서 언표라는 것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명제는 장례식이던 결혼식이던 한국이던 교회이던 관계없이 사이다 20병 더하기 10병은 무조건 30병이다. 이 변함없는 것, 그게 진리라고 보는 겁니다.
사람들은 진리를 놓치지 아니하고 그리고 진리를 기본으로 깔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언표 쪽으로 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교회에서 진리가 뭡니까?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을 이것을 명제로서 진리로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자기는 때에 따라서 그때그때 사는 겁니다. 이게 믿음입니까? 이것은 믿음이 아니거든요. 이거는 핑계죠. “목사님 믿습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 거 믿습니다.” 해 놓고 실제 행동은 나는 명제를 알았기 때문에, 진리를 알았기 때문에, 챙겼기 때문에 나는 지금 죽어도 구원받고 그 다음 나머지 모든 행동은 “목사건 뭐건 간에 나에게 관섭하지 말라 말이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산단 말이야.” 이렇게 나온다면 이게 바로 언표다, 육적인 태도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 언표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상황과 구조가 나오죠. 상황과 구조를 언표라 할 때 “너 밥 먹었어? 너, 왜 이렇게 뚱뚱해?” 이런 말을 할 때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주체”가 나와요. "주체", 내가 나오고 나는 뭐냐? 권력이 주름 잡힌 것, 권력의 표본, 권력이 뭉쳐져 있는 것, 힘이 뭉쳐져 있는 이것이 솟구쳐 올라오면 그것이 주체가 돼요. 여러분 바닷가에서 갑자가 백상어가 올라오면 옆에 물기둥이 올라오죠. 그 물기둥이 권력이라면 그 물기둥에 휩싸여 올라오면서 형성된 것이 “나, 이런 놈입니다.” 하는 주체가 형성됩니다. 그 주체라고 하는 것은 상황 따라서 다 달라요.
에너지를 개발한다고 10년 동안 해외에 나가서 죽도록 고생해서 우리나라 5천만 인구를 10년 동안 먹여 살릴 수 있는 에너지를 개발하고 방금 인천공항에 내렸습니다. 인천공항에 내려서 사진기자가 사진 찍고 훌륭하다, 큰일 했다 할 때에 그 사람이 거기서 담배를 피우면 됩니까? 안됩니까? 인천공항에서는 담배를 못 피우게 되어 있지요? 그런데 5천만 명 국민들을 10년 동안 먹여 살릴 에너지를 개발했는데? 거기서 담배를 피우면 돼요? 안돼요? 안되지요. 왜 안 됩니까? 에너지 개발을 할 때의 주체가 어디로 이동했습니까? 에너지 개발할 때 큰 주체가 이동했죠. 그 주체가 인천공항 실내에서는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됩니다. 하는 새로운 상황에서 주체는 그 쪽 주체에 맞춰서 “어, 여기는 금연이네. 여기는 담배피면 안되네.” 하고 담배를 피우지 말았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인간의 주체라고 하는 것은 그때그때 다른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육적이란 환상이 조작해 인간이 이렇게 만들어 냅니다. “내가 에너지를 개발했는데 담배 좀 피면 어때?” 이렇게 하게 되면 그거는 혼납니다. 벌금 5만원 물립니다. “나가서 피우세요. 나가서 피우고 훈장을 받던 상장을 받던 영웅이 되던 여기서는 담배 피면 안 됩니다.”
젊은 목사가 나이 많은 사람에게 설교하는 것은 좋아요. 그런데 젊은 목사가 나이 많은 사람에게 반말하고 찍찍 대고 “내 말 안 들으면 저주받아!” 이러면 돼요? 안 돼요? 이것은 상황 따라 주체가 달라진 것을 모르죠. 그러니까 다음 시간에 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가 신앙에만 핑계 데고 육적인 환상을 어떤 식으로 만들어 내는지를 10분 쉬고 이야기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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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성령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환상을 만들어 내는가! 그 만들어 내는 방법에 대해서 우리가 이런 식으로 만들어 냅니다. 어떤 식이냐 하면 바다가 여기 있는데 갑자기 돌고래가 확 올라오게 되면 물이 확 튀죠. 수영선수가 팍 올라올 때 물이 확 튀잖아요. 여기 주변에 있는 물방울이 무엇 인가 하면 권력이라는 겁니다. 권력이 탁 튀면 이 앞에 물방울에 휩싸여있는 이것을 주체, 다른 말로 하면 ‘나’ 또는 ‘자아’ 라고 합니다.
‘나는 이렇다.’ 할 때 ‘나는 그냥 나가 아니고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야 까불지 마.’ ‘나는 이정도야’내가 이정도 라고 주변에 둘려 차 있는 힘이 있어요. 나라는 것이 줄기차게 올라온다 이 말이죠.
여기 초등학교 6학년이라고 합시다. “너 누구야?” 하면 “나, 6학년이에요.” “어느 학교?” “나는 어느 학교 6학년이에요.” 6학년이라는 힘이 “나는 노는 애가 아니에요 나는 깡패가 아니에요 학생이에요.” 이것이 뭐냐 하면 여기 물줄기가 쫙 올라오면서 주체가 형성되는 겁니다. 이것을 권력이 집중한다. 권력에 의해 돌돌 휩싸이는 것, 힘들이 싸이는 겁니다. 그런데 이 바다에 또 다른 주체가 올라와요. 이 사람은 이명박이에요. “나, 초등학교 6학년이에요.” 이렇게 하고 있는데 여기 뭔가 또 올라와요. “아저씨는 누구에요?” “나는 대통령이에요.” “어허” 그럼 이 권력, 대통령을 둘러싸고 있는 권력이 어느 권력보다 더 커요? 이 물방울이 초등학교 6학년 물방울보다 더 세니까 기가 팍 죽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 돌고래가 뭐를 부러워하느냐 하면 이명박 대통령이라는 경호원 쫙 깔려있고 리무진 타고 다니는 그러한 자기한테 없는 물방울에 휩싸이는 이명박 대통령을 굉장히 부러워하는 거예요.
같은 반이라도 마찬가지에요. 초등학교 6학년이라도 자기 반에서 20등 한다면 이 아이는 1등 한다면 주변서 칭찬이 많아요. 칭찬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 아이 주체가 부러운 거예요. “나는 그 아이 앞에 빛을 잃어버리고 나는 학생도 아니야. 걔는 너무 칭찬을 많이 받아. 걔는 나중에 출세할 거야. 걔는 나중에 훌륭한 사람 될 거야” 이렇게 칭찬한다 이 말이죠. 이런 것이 주체가 올라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불쑥불쑥 올라오는 주체들이 물방울이 되는데 이 지점에서 이렇게 올라와요. 초등학교 6학년인 이 1등 하는 아이가 미국에 이민을 갔어요. 미국에 가니까 영어를 할 줄 알아요? 몰라요? 영어를 못하니까 자기 반에서 꼴찌가 되는 거죠. 대한민국 신월동 초등학교 6학년에서 1등 했는데 주체가 올라왔는데 여기 주체, 물방울이 사라지고 미국이라는 물방울이 올라오니까 여기서 주체는 여기가 만약에 5미터라면 자기 물방울은 20센티미터 다른 얘들은 전부 다 이 만큼 되는데 자기는 20센티미터라 주체라는 것이 똑같은 인간인데 자기가 미국이라는 환경에 가보니까 완전히 기가 죽은 거예요. 왜, 내세울 것이 없으니까 자기를 둘러싼 권력이 얼마 되지 않으니까...... 결국 여기 주체라는 것은 자기가 속해 있는 권력을 얼마나 끌어 모우냐에 따라서 주체가 얼마나 근사하냐. 근사하지 않느냐가 결정되는 겁니다.
자기 주변에 있는 권력들을 얼마나 끌어 모으느냐……. 여기 교회가 있다 합시다. 교회가 있는데 그 앞에 큰 교회를 짓는다. 그러면 큰 교회라고 하면 교인수가 많잖아요. 그리고 헌금이 많이 들어오잖아요. 그러면 이만큼 그게 뭐가 돼요? 하나의 물방울이죠. 만약에 소망교회라고 하면 소망교회가 크다는 것은 그만큼 소망교회 주체를 만들 때 그만큼 물방울이 많다는 뜻이고 의존교회 같으면 물방울 몇 방울 되지도 않고 전부 가족들뿐 이고 ……. 주체가 없다 이 말이죠.
이런 주체들이 불쑥불쑥 올라오는데 이것이 천개의 고원이라 하면 어디서 많이 들었죠. 철학자 들뢰즈의 책, 천개의 고원입니다. 이것이 천개의 고원이 되는 거예요. 주체가 불쑥불쑥 나무주석처럼 올라오는데 이런 주체들을 주님께서 어떻게 감당하는가 보세요. 여기에 예수님이라는 주체가 어떤 힘을 갖고 예수님위에 서버리면 모든 사람은 자기 보다 더 센 예수님을 부러워하겠죠. “나는 이명박이지만, 나는 대통령이지만 나는 예수님이 더 부러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러워 할 때 이 주체는 뭐냐 권력이 만든 주체이기 때문에 이것을 두자로 “악마”라고 합니다. 구체적인 것은 겨울 수련회 때 할 겁니다.
악마는 권력들이 주체를 만드는 식으로 이 지상에 나타난 게 악마입니다. 권력에 둘려 싸여서 주체가 형성 되는 것,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가 불쑥불쑥 올라오는 주체, 자기가 20살 때, 30살 때 다 달라요. 상황에 따라 다 달라요.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해외 나가서 에너지 개발해서 들어오는 데 김포공항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아야 된다는 겁니다. 에너지 개발했기 때문에 담배 피워도 된다는 것, 이런 것은 성립이 안 되잖아요. 인천공항이라는 새로운 상황 속에서는 담배를 안에서 피우지 말고 밖에서 피워야 된다는 것이 새로운 구조가 되듯이 ‘나’라는 주체가 자기가 대장처럼 설치면서 담배를 피웠어도 인천공항에서는 담배를 꺼야 하는 겁니다.
상황에 따라서 거기는 새로운 주체가 요구되는 거예요. 사람이라 하는 것, ‘나’라는 주체가 권력이 없으면, 내세울 것이 없으면, 자랑할 것이 없으면 나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되는 거예요. 어디 가서 큰소리치려면 그 방면에 뭔가 내가 아는 게 있어야 되고 자랑할 것이 따로 있어야 돼요. 그래야 내가 내세울게 있습니다. 새로운 직장을 구했다고 하면 그 직장에서 원하는 것이 뭡니까? “야, 너 인간이야?” 이런 것을 묻는 게 아닙니다. “너 뭐할 줄 알아? 이 힘 있는 단체에서 어떤 힘을 부여할 수 있어? 어떤 힘을 제공할 수 있어 ? 네가 힘을 제공하면 그만큼 내가 월급 줄게.” 이거다 이 말죠.
왜냐 하면 회사라 하는 것은 하나의 주체니까 그래서 큰 회사, 큰 교회, 큰 집단 이런 집단에 오면 여기에 들러붙어 있는 나는, 큰 집단에 속에 있는 나는, 작은 주체로서 큰 주체 속에 소속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이 주체예요. 인간의 주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전지전능함을 내가 모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모습이 뭐냐 하면 바로 성경에서는 악마라고 비유합니다.
그러면 골로새서 1장15절에 예수님은 뭡니까? 예수님은 닫혀있어요. 닫혀있는데 여기 구멍이 없어요. 구멍이 없는데 예수님께서 여기에 만약에 구멍이 생기게 하면 이 구멍 속에는 어떤 주체도 다 담을 수 있는 빈자리, 이명박이든 누구든 어떤 누가 와도 충분히 소멸시킬 수 있는 빈자리, 없애버리는 빈자리, 우리주체를 없애 버릴 수 있는 무한한 큰 자리 그게 바로 예수 안, 성령 안입니다. 주체를 키운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어떤 주체에 있던지 간에 촐랑 되고 깝죽거리고 폴짝거리다가 갑자기 예수 안에 들어 왔을 때는 내가 따로 권력을 모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함몰되는 겁니다.
여러분, 사막에 가면 그런 것이 있답니다. 사막에 늪이 있어서 한번 빠져버리면 모래더미에 쌓여서 거기서 질식해서 죽는 답니다. 사막에 모래가 있는 데 갑자가 모래가 푹 꺼진답니다. 푹 꺼져 버리면 만약에 여기에 도달했다가 푹 꺼져 버리면 사막의 모래가 쏟아 져서 이 안에 있는 사람은 죽는 거예요. 여기 이 자리가 주체를 없애는 자리 인 동시에 주체를 함몰시키는 자리, 그것을 좋게 해석해서 뭐든지 받아주는 자리, 우리가 어떻게 까불든지 간에 잘난 체하든지 간에 상관없이 다 거두어서 품안에 받아주는 그 자리가 바로 현재 예수님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을 탱크도 장갑차도 다 집어넣어도 넘친다는 소리를 하지 않고 아직도 자리가 모자란다 할 정도로 뭐든지 다 집어넣은 거, 우리가 아는 성경지식도 거기다 집어넣어 없애버리고 우리가 받았던 은혜도 거기다 집어넣어 없애버리고 우리가 했다는 개척교회 몇 군데 했니 기도를 오래 했니 헌금을 많이 했니 ……. 그런 것도 모든지 다 집어넣어서 전부 다 사라지게 하는 그 함몰의 자리, 그게 바로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악마의 자리는 우뚝 서는 자리, 계속해서 힘을 끌어 모아서 내 힘 되게 하는 자리, “여기부터 여기까지는 내 힘이야, 여기부터 여기까지는 내 영역이야 건드리지 마!” “그것도 내꺼야!”하는 내 것 추스른 것은 바로 스스로 악마가 되는 자리입니다. 왜 그런지 성경적으로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성령 안에서 육이 하는 일은 환상을 만드는 일이다. 환상을 어떻게 만드는가, 권력을 다 끌어 모아서 네 것 내 것 떼면 돌고래처럼 솟아오를 때 이것을 주체라 합니다. 하지만 이 주체는 고정되어 있다? 변형된다 했습니까? 계속해서 어떤 자리에 가면 A라는 자리에서 B라는 자리 가면 또 여기서 또 권력을 끌어 모아서 C라는 자리, D라는 자리 자꾸 이동가게 되면 이동한 그 자리 마다 뭐가 생깁니까? 내가 새롭게 내 주체를 만들어 내는 겁니다.
그리고 또 자리 뿐 만 아니라 나이가 들어서 20대 30대 40대 계속가게 되면 그 자리에서 주체를 만들게 되는 데 이 주체는 권력을 끌어 모아서 만든 자리다 이 말이죠. 그러면 권력 끌어 모았으면 주체가 이 안에 실제로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물방울 모으면 그것이 쇳덩어리 됩니까? 안되지요. 여러분 솜사탕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솜사탕 안에는 아무 것도 안 들어 있고 그냥 솜사탕만 들어있죠. 이처럼 ‘나’라는 힘들을 끌어 모으는데 그 힘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가면 나는 어디 있습니까? 없죠. 그러니까 자살하잖아요. 그동안 모아 놓았던 내 것이 따 떨어지면 자살하잖아요. 여러분 주식이 내가 아니잖아요. 주식이 폭락하면 우리는 자살하잖아요. 왜? 그동안 주식이 뭐였다? ‘나’였다. 주식이 올라가면 나였다는 거예요.
돈이 있으면 나였다는 거예요. 돈이라는 것은 종이입니다. 종이는 내가 아니에요. 내가 아닌데 종이를 모아놓으면 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돈이 없어지면 갑자기 돈이 없어 진 것하고 내가 없어지는 것하고 아무 관련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돈이 없는 것 때문에 자살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동안 돈이 있는 가운데 내 주체를 형성하다보니까 돈이 사라져 버리니까 나도 같이 사라져 버린 거예요. 내가 없으니까 내가 살 이유가 없는 거예요. “나는 돈이 있어야 난데, 돈이 없는 나는 내가 아닌데” 내가 아닌 것은 내가 그냥 둘 수가 없어요. 없애버려야 지요. 옛날 돈 꽤나 행세했고 잘나가던 그때 그 이미지 그 기억이 바로 난데 지금은 노숙자 되는 신세가 내가 아니니까 없애버리면 뭐가 남겠어요? 내가 아닌 것을 없애버리면 뭐가 기억나겠습니까?
옛날 잘나가던 내가 기억이 나겠지요. 그게 바로 환상이라는 거예요. 그게 악마가 그렇게 한 거예요. 악마라는 것은 우리라는 것이 없는데 악마가 힘을 만들어서 자꾸 우리를 만드는 거예요 시집가기 전에는 그렇게 고상 떨고 천사표고 그야말로 이슬만 먹는 것처럼 살다가 시집가고 난 다음에는 남편 앞에서 방구 뿡뿡 뀌고 부끄러운 것도 없고 자리 나면 제일 먼저 뛰어가 앉고 이렇게 아줌마가 되었을 때 그때 그렇게 하면서 뭐라 하느냐 하면 “여보, 나를 아직도 여자로 보나?” 이렇게 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옛날에 남이 가지고 있는 미스코리아, 고현정, 좋은 피부, 이런 것들을 끌어 모아서 나도 비슷하게 만들어서 고현정은 피부가 좋다는 거예요. 나는 피부가 그 정도는 안 되도 어느 정도 처녀 때는 모양새를 내는 거예요. 나는 그냥 ‘나’가 아니고 앞에 ‘피부 좋은 나’, 고현정의 50%까지 따라 잡은 나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시집가서 살림하다보니까 그 피부가 없어지면 뭐가 그리워지느냐 하면 내가 그때 처녀 때는 고왔던 두 손이 지금은 거북등이 다 되었다 이 말입니다. 왜 자꾸 과거 환상을 생각합니까? 그게 바로 난데, 지금은 그때 내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 때 고왔던 피부가 떨어져 나가고 두툼한 것이 있으니까 내가 보기에 영 싫다는 거예요. 고현정은 계속 더 예쁜데 어찌된 사람인지……. 예뻐야죠. 전문가인데, 그것 가지고 밥 먹고 사는데 예뻐야죠. 고현정이가 수학을 하겠습니까? 컴퓨터를 잘하겠습니까? 이것만 해야 할 사람인데 그렇지 않아요? 늙으면 다 마찬가지이지만……. 그러니까 이런 것을 보면서 “나는 예수님보다도 옛날 그때 그 시절이 좋아”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신 흔적을 지워버리는 악마의 모습이 되는 겁니다.
악마라는 것은 바다에서 올라온 권력을 말해요. 짐승, 바다에서 오는 짐승은 지상에 있던 모든 것을 권력으로 끌어 모아서 하나의 “너는 이런 인간이야” 라고 자꾸 우리를 부추기는 그런 액션을 취하는데 이것이 성령 안에서 볼 때 우리는 이 짓을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목사님 저 예수님 믿습니다.” “예수 믿어요. 이제부터 주님께서 나한테 어떤 힘을 줄 겁니까?” 보세요. 사고방식이 예수 믿고 난 뒤에 예수 믿기 전에는 초라하게 살다가 예수 믿고 난 뒤에 복 받아서 그동안 내가 원했던 권력들을 끌어 모아서 그런 추출을 할 때 그 때 그 사람의 예수는 바로 마귀가 예수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겁니다. 마귀가 가짜 예수역할을 하고 있는 겁니다. 진짜 예수님은 이런 모든 것을 집어넣는, 없애버리는 손을 씻기는 넉넉한 구멍입니다. 한 없이 넓은 구멍입니다. 넉넉한 구멍이 되어서 무엇을 넣어도 다 소화시키죠. 그래놓고 뚜껑을 덮습니다. 이 안에 있는 사람은 내 사람, 정죄하지 마라. 이 사람들은 내 안에 들어와서 소멸될 사람이니까 마귀가 어떤 식으로도 정죄 못해요. 예수 안에서, 품에서 새롭게 들어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책임은 누가 지는가? 예수님의 주체가 책임집니다. 이렇게 소멸되게 되면 예수님은 이 소멸 안에는 죽음보다 이긴 강한 삶, 부활이죠. 여기는 죽음을 이기는 부활생명의 영이 이 안에 역사하게 되는 겁니다.
골로새서1장9절을 다시해 보겠습니다.
골 1: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권세를 다른 말로 하면 권력이죠. 더 이상 우리가 다른 주체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냥 녹이시기 바랍니다. 형성된 권력도 전부다 예수님 앞에서 스스로 알아서 녹여 버리세요. 아이스크림 불에 데면 다 녹잖아요. 녹아서 물 되잖아요. 우리 자신을 주저앉듯이 주님 안에서 녹여 버리는 거예요. 녹여 버리면 그 다음은 주체가 우리가 아니고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이 그 일을 그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구멍, 함몰된 구멍만 나타나 있어요.
직장생활 할 경우에 직장에 갔다. 상사가 이야기 합니다. “너 컴퓨터 할 줄 알아?, 영어회화 할 줄 알아?”라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이렇게 있습니다. 예수님 안이고 우리는 이 안에 있습니다. 함몰 되었습니다. 바깥에 있는 주체가 말합니다.
기업이 삼성그룹이면 삼성전자 과장이 있다 합시다. 취직을 했는데 예수 안에서 취직을 했습니다. 묻습니다. “너, 이번 프로젝트에 영어가 능통해야 돼. 너 영어 할 줄 알아? 수준급으로 할 줄 알아?” 했습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나 주체 없다고 “음, 음” 하면 안 되잖아요. “할 줄 알아? 몰라?” “음, 음” 답변은 간단해요. 지금 이 과장은 ‘나는 이정도 됐어! 나는 이 힘으로 과장이 됐어!’ ‘너는 뭐를 걸쳐서 대리 값을 하겠냐?’ 이렇게 묻는 거예요. 나와 같은 주체를 끄집어내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주체를 예수 안에서 소멸시켰잖아요. 주체가 없잖아요. 그럴 때 어떻게 하느냐, 묻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영어를 잘 할 수 있습니까?” 이 한마디 하게 되면 누가 기분이 업 돼요? 누가 기분 좋아요? 이 과장님이 기분이 째지는 겁니다. “야, 열혈 팬이 하나 더 왔구나! 우리 회사에” “영어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하면서 폼 재면서 영어를 해요. 그러면 “아, 과장님 이 영어는 번역이 잘 된 겁니까?” “아이 남들이 다하는 거 왜 그리 못해” 비아냥거리면서 “그건 이렇게 하는 거야” 합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주체가 어디로 가버렸어요? 자기 주체는 없고 어느 주체에 속했습니까? 과장에 속해 버렸죠. 뭐로? 함몰된 구멍으로서 속해버렸죠. 과장이 보기에는 주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주체는 없고 자진해서 자기가 기어 들어온 거예요. “형님, 살려주십시오!” 하고 들어온다 이 말이죠. 이 사람이 얼마나 예쁜지…….
여러분 회사 생활 이렇게 하는 겁니다. 주체를 내세우면 안돼요. “과장, 지가 뭐야?” 이러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돼요? 이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아, 사람 귀찮게 하네! 알아서 좀 해!” 하면서 기분은 좋은 거예요. “쟤는 내 밥이야 밥. 나 없으면 안 돼” 이렇게 과장을 높여 주는 거예요. 높여 주면서 사실은 과장은 구멍입니다. 결국 과장은 내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죠. 왜? 과장은 주체가 있으니까 항상 두렵잖아요.
언제 이 주체가 깨지면 자살할지 모르니까 이 자리가 얼마나 존재할지 모르니까 두렵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두려움을 극복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으로 다가선 거예요. 주체가 없이 다가선 겁니다. 제가 안산 강의에서 그런 강의 했지만 사람은 누구를 만나면 만나자마자 내가 착한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따지는데 따지지 말고 그냥 그 사람한테 맡기는 거예요. 그쪽에서 판단하게 “나 착해요? 안착해요?” 그 사람에게 묻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쉽게 나를 요리하려고 할 거예요. 그러면 그것이 뭐냐, 우리가 쉽게 주님께 함몰된 그것을 그 사람에게도 쉽게 함몰 되어 버리면 주님 앞에 이미 주체가 없어진 상태에서 그 사람에게 쉽게 요리가 되는 듯이 보이죠. 그러면 그 사람은 나를 공격 대상으로 봅니까? 안 봅니까? 공격 대상으로 안 보잖아요.
직장생활하기 짱이죠. 직장생활뿐만 아니라 가게 할 때 봐요. “어서 오세요?” 제가 어느 가게 가니까 나이가 75세 되어 보이는데 인사를 거짓말 안하고 45도가 아니고 90도 하는 사람이 있어요. 75세 된 노인분이 옛날 제가 그 가게에 갔을 때 제가 그 때 40대 이었는데 40살 먹은 나에게 90도로 인사를 해요. 안 갈수가 없어요. 그 다음에 또 가는 거예요. 자기 주체를 상실해 버리고 40살 먹은 젊은 나에게 흡수 되어 버렸어요. 그런데 나는 인사를 받는 동시에 그 사람이 존경스러우면서 그 사람과 나는 대결 상대가 아니고 내가 좋아 하는 사람으로 남게 되는 겁니다. 내 주체를 따지기보다 그 사람 주체가 더 좋아 보인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 주체는 아예 없어요. 주체가 있으면 공격의 대상이 되는데 애들이나 어른이든 간에 고개를 90도로 숙이니까 주체가 없는 거예요. 시비 걸 것이 없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성도를 그런 식으로 만들어 내는 겁니다.
남들 마귀 싸움 할 때 그거 되지도 않는 싸움에 왜 끼어드느냐? 누가 더 크냐? 그런 싸움에 왜 끼어드느냐 말이죠. 지면되고 양보하면 되고 숙이면 될 문제를 어차피 우리는 이미 우리 주체는 누가 감당합니까? 책임을 누가 집니까? 주님께서 책임지는 문제를 왜 내가 독자적으로 또 마귀처럼 권력 끌어 모아서 외로운 싸움을 하느냐 말이죠. 그럴 필요가 뭐가 있느냐 말이죠.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배치물인데 모든 것은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로 말미암아 그래서 예수님 때문에 생긴 것들이라면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 가신 그 길을 십자가에 자기 주체를 없애는 그 길속에 있는 것이 진정한 총명이고 지혜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세상 한번 그런 식으로 살아 보세요.
학생들이 공부를 못할 때, 시기 하지 말고 공부 잘하는 학생 찾아가서 묻는 거예요. “나는 수학문제 세 시간 아무리 해도 못 풀겠는데 너는 어떻게 풀었어? 요령이 뭐야?” 묻게 되면 귀찮아하면서도 한두 개씩 가르쳐 줍니다. 이게 붙임성인데 어디를 가도 그렇게 하는 거예요. 절대로 폼 재지 마세요. 그 쓸데없는 권력, 텃새 하면 안 됩니다. 사람이 도박에서 못 빠져 나오는 것이 하나밖에 없어요. 그것은 자기 주체가 살아 있기 때문에 도박에서 못 빠져 나오는 겁니다. “언젠가 내가 여기서 돈 벌고야 말 거야” 자기 주체가 살아 있으니까 그 도박에서 못 빠져 나오는 겁니다.
도박만 그런 것이 아니고 세상 모든 것이 도박이거든요. 그런 도박에서 진정한 승리자는 자기를 낮추는 겁니다. 예수님처럼 자기를 낮추사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의 마음이니 모든 것을 세상에 함몰 시키는 예수님,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의시될 수 있는 주체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없애 버리는 “나는 하나님 아니야! 나는 죄인이야!” 그 모습으로 살아 간 거예요. 사실은 그 안에 하나님이 들어 있지만 …….
자기를 죽기까지 복종하는 모습이 하나님의 모습이다 이 말이죠. 예수님은 이 모습인데 우리는 얼마나 그동안 예수 믿고 잘난척하려고 시도 했습니까? 성령께서는 이런 악마적인 권력을 추구해서 자아도 없는 게 자아 있는 척 하는 것, 없는 게 있는 척 하는 것, 모르는 게 아는 척하는 것, 이렇게 척척 하는 것 이런 것들을 없애서 아예 넉넉하게 구멍을 만들어서 거기다 다 집어넣는 오늘도 집어넣고 내일도 아침 되면 주체가 또 생겨요. 오늘은 또 어떤 식으로 나를 빛내볼까? 하나님이 어떤 복을 주셔서 내가 잘난 것을 과시 할 수 있을까? 이렇게 가다가 “이리와 너는 없는 존재야” 라고 주님이 십자가 구멍 속으로 넣어 버려요. “너는 아예 없어! 누구를 만나든지 너는 없는 존재야!” 항상 자기 자신을 비우고 낮추면서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골로새서에서 말하는 그렇게 어렵던 사도바울의 지시와 명령이 그런 정신 하에서 움직이는 겁니다. 그래서 골로새서가 참 어려워요.
만약에 골로새서를 이렇게 보지 않고 여기 나오는 대로 신령한 것 총명한 것 이런 것을 만약에 지키려고 한다면 여기에 우리(돌고래)가 있는데 여기에 착함을, 말씀대로 지키려고 한다면 우리 속에 있는 것은 시커먼 마귀, 악마인데 악마를 무엇으로 덮습니까? 선한 척, 천사인척 훌륭한 척, 말씀 지킨 척, 그 다음에 목사네 장로네 하면서 이런 거 지키게 되면 점점 더 이것은 속이 썩어져 가는 거예요. 위선자가 되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위선자가 되는 겁니다.
성경 신학자들이 이것을 몰라요. 목사들이 교인들을 위선자로 양성해 내고 있습니다. 선할 수 있는 주체를 없애면 되는데 선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울산, 대구에서 그런 강의를 했습니다. 교인들보고 제발 좀 악해져라. 부탁하오니 악해져라. 범사에 악해져라. 모든지 죄 짓고 악해지라고 했어요. 왜? 워낙 선한 체 하기 때문에……. 악해지라 하면 누가 악해지겠어요? 악하지 않으려고 하겠지요? 악하지 않으려고 하면 뭐가 없어지겠습니까? 주체가 없어지겠지요. 왜, 주체 있으면 악해지니까. 그게 제가 바라는 노림수 아닙니까! 아예 여러분이 악하던 선하던 선한 것도 걸칠 막대기도 없고 악한 것을 거칠 막대기도 없고 이미 나라는 인간은, 나라는 주체는 주님의 함몰된 구멍 속에서 이미 사라졌다고 생각을 하시고 착하지도 말고 악하지도 말고 주께서 부딪치는 대로 항상 자기를 낮추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이미 다 이루었다 여기시고 그렇게 살아가요. 모든 것이 주님께서 뜻 안에서 이루었어요. 그게 바로 골로새서의 많은 성도의 삶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구하노니 여러분 제발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의 뜻이 바로 가득 담기기를 원한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다시 13절, 14절을 봅시다.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 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체를 없애는 이유가 뭡니까? 죄라는 것은 악마의 모습을 본받는 것이 죄이거든요. 악마는 바다에서 온 짐승이라서 권력을 가지고 집체성 한다 하죠. 권력을 끌어 모으죠. 권력의 농도가 주체입니다. 주체가 이렇게 점이라고 할 때 가장 짙은 점이 바로 주체에요. 주변에는 내 것이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어요.
예를 들면 여러분 박지성 아세요? 박지성이가 뭐예요? 주체는 축구 선수지요. 박지성이 가지고 금융인 하면 안 됩니다. 교사, 선생님 하면 안 됩니다. 축구 선수입니다. 그러면 박지성이가 야구를 좋아해요? 안 좋아해요? 같은 운동선수이니까 좋아하겠죠. 같은 운동선수이니까 싫어할 리가 없잖아요. 하지만 야구는 멀다 이 말이죠. 자기 팀인 맨스타 유나이티드가 지게 되면 울고불고 난리 나죠. 자기가 약간 좋아하는 야구팀이 지면 울고불고합니까? 안합니까? “아이고 뭐 질 때도 있지 뭐” 이렇게 하죠. 그만큼 멀리 있는 점선은 주체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에 아픔이 적은 거예요. 그런데 자기가 축구 선수이기 때문에 맨스타 유나이티드에 대한 것은 뭐든 집중하는 겁니다. 그런데 박지성이 좋아하는 우리나라 팬들이 박지성이 때문에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맨스타 유나이티드 팀을 좋아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박지성이 만약에 그 팀에서 강제로 퇴출당해서 바이에른뮌헨에 가면 그 다음부터 맨스타 유나이티드 팀을 좋아합니까? 안 좋아합니까? 박지성이가 뮌헨에 갔는데 안 좋아하지요.
그렇다면 박지성만 그래요? 나도 그래요? 나도 군에 가면 졸병 때 심정 다르고 고참 때 심정 또 달라요. 졸병 때는 얻어맞아서 나는 안 때려야지 하면서 선임 되면 더 패요. 이것이 주체가 권력 따라 이동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이거 하나는 꼭 알고 가세요. 주체가 없어요. 주체가 없고 그때그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끌어 모으면 그것이 점들이 조밀하게 움직일 때 그것이 주체에요. 이것이 바로 내가 만든 ‘나’라는 환상입니다. 이것 때문에 울고불고 난리 나요. 이것을 아예 없애 버리란 말입니다. 이 점선을 없애버리고 구멍을 내요. 구멍을 낼 때 이 구멍이 우리의 죄라는 것은 악마적인 것, 나밖에 모르는 것이 죄인데 그것에서 구속, 용서를 받았죠. 이 구멍에다 뚜껑 피로써 이 안에는 죄가 들어있고 뚜껑, 피로써 용서를 받았어요. 용서가 주어지는 거예요. 이 안에 있는 것은 피 앞에서 “아하, 내가 이런 것이 바로 죄구나! 환상 속에서 사는 게 죄구나!” 라고 늘 깨닫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성도의 삶이다 이 말입니다. 늘 구원받은 것에 감사하며 사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목사를 했어요. 목사일 때 쫓아다니면서 열심히 성경 공부합니다. 그런데 목사하면서 어려우니까 무엇을 하느냐 하면 김명현 목사님 보고 하는 말 아닙니다. 누구라도 그럴 수 있습니다. 저도 그럴 수 있습니다. 목사를 하다가 만약에 장사를 한다고 합시다. 목사 할 때는 설교를 해야 하기 때문에 좋던 싫던 무엇을 연구합니까? 말씀과 가까이 하다가 영업을 하니까 점점 더 조밀한데서 벗어나서 흩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말씀에 관심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그동안 말씀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말씀이 좋아서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생계 수단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너무 아픈 데를 ……. 제가 어렵네요.
주체가 이동한거예요. 이제 나는 목사라는 주체는 걷어치우고 차 영업을 멋들어지게 잘하는 나는 새롭게 거듭났다. 새롭게 거듭난 거예요. 주체는 그때마다 이동하는 겁니다. 그 이동이 사람이 육이 있는 한 이것이 변함이 없어요. 죽을 때까지 계속 되는 겁니다. 계속되는데 늙어죽으면 그때부터 이야기 하면 걸리는 분이 많아서…….
사람이 늙으면 어린 아이가 됩니다. 어린 아이보다 더 못한 짐승이 돼요. 요거 혼내 줘야 돼요. 거의 치매 수준, 짐승이 되죠. 짐승이라는 것은 파충류가 사는 하부, 먹는 것 싸는 것 밖에 모르는 거. 먹고 싸고 자고 그것 밖에 모르는 짐승 수준이 돼요. 그때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하는 것은 다 날아가 버립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짐승이 인간이 원래 감추었던 비로소 늙어서 노출된 주체였습니다. 사람은 몸이 피곤하면 결국 남는 것은 만사가 귀찮고 찾아오는 것도 귀찮고 그저 누가 밥이나 먹여주고 놀아주고 재롱부리고 재워주고 가려운데 긁어주면 그걸로 만사형통이라고 여기는 시절이 저와 여러분에게 찾아 올 겁니다. 그러나 찾아오기 전에 죽을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이고 짐승적인 요소 있는 대로 다 끄집어내서 나올 때 처음에는 자식보기에 부끄럽지만 나중에는 자식도 안 부끄러워요. 자식보고 아저씨라고 합니다. 기가 막힙니다. 자기 아들 보고 ‘오빠 왔나?’ 이렇게 합니다. 실제상황입니다.
옛날에 강의 잘하고 설교 잘하던 그때 그런 사람 아닙니다. 이것이 인간의 주체에요. 먹는 거 입는 거 그것뿐입니다. 그냥 짐승입니다. 이래서 죽어서 흙이 되는 겁니다. 그동안 우리는 속아 온 겁니다. 누구한테 속아온 겁니까? 마귀한테 홀딱 속아온 겁니다. 너는 아름답다. 천사될 수 있다. 훌륭하게 될 수 있다. 고상하게 될 수 있다. 착하게 될 수 있다. 성경말씀대로 실천할 수 있다. 전부다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 자신을 없애는데 분주 해야 돼요. 우리를 사라지게 만들어야 합니다. 누구 앞에서도 없어지게 하는 게 최고 좋아요. 그런데 사람이 강한 사람 앞에서는 잘 없어지는데 이명박 대통령 앞에서는 없어지는데 꼭 자기보다 만만한 인간 앞에서는 자기가 폼을 내요.
여러분, 오늘 점선 하나 이거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점선 안에는 주체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점뿐입니다. 권력뿐인데 권력이 모이니까 그것이 악마의 얼굴이 돼요. 희한해요. 자아가 없는데 내 몸은 있는데, 내 몸은 세포 덩어리지 60조개의 세포덩어리지 나라는 것은 없어요. 그냥 우리 몸을 뜯어보면 세포로 되어 있어요. 거짓말 하는 게 아닙니다. 머리카락 뜯어서 보세요. 세포로 되어 있어요. ‘나’가 어디 있어요? 영혼, 없어요. 찾아보세요. 물리적인 활동이 수반되어 파생된 것이 정신적 활동이에요. ‘나’라는 게 없다니까요. 그런데 영적인 마귀가 우리를 ‘나’라는 계속 권력을 유지해서 모으게 하는 겁니다.
나중에는 모을 권력이 없으니까 그동안 꿈 모았던 것을 다 끄집어내요. 내가 되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즐기고 싶은 것들을 손에 쥐인 것도 없으면서 ‘나, 이정도로 잘나간다.’ 하면서 사기치고 돌아다니고 있어요. 죄 지을 생각도 하지 마시고 선한 척 하려 하지 마시고 자아를 이미 우리는 죽은 몸으로 간주하시는 주님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주여, 이미 우리는 죽었습니다.”라고 사는 것이 성도의 바른 모습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드디어 문제 되는 16절입니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여기에 보이는 것들은 알겠죠? 그런데 보이지 않는 것들이 뭘까요?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합니까? 존재하지 않습니까?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모든지 그렇습니다. 없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라는 것을 예배당을 세우면 교회라 생각하는데 예배당이 불타고 없어지면 뭐가 없어진 겁니까? 예배당이 없어졌는데 우리는 뭐라 합니까? 교회가 없어졌다고 하지요. 처음부터 교회의 개념이 잘못된 거예요. 교회는 보이지 않는 체계입니다. 체계자체가 보이지 않습니다. 왜? 성령이 함께 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아요. 사람들만 모이면 교회 아닙니까? 하는데 성령이 함께 있어야 교회입니다. 교회는 보이지 않는 거예요. 그리고 마귀도 보이지 않는 겁니다. 결국 보인다는 것은 사람만 보이죠.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 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모인 것을 교회라 할 수 없고 반드시 교회라고 하는 것은 거기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개입해 줘야 된다 이 말입니다.
한 가지 예로 우리 몸을 가지고 뭐라 합니까? 우리 몸은 성전이지요. 우리 몸이 성전인 것을 어떻게 증거합니까? 증거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실 때 성령이 되는데 성령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보이죠. 성령이라는 것은 말뿐이지 이것은 보이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이 보이지 않는 것이 우리 자아가 있으니까 보이고 안보이고 판단하지만 우리 자아가 보이지 않는 주님 앞에 없어져 버리면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라는 것이 한꺼번에 다가오는 거예요. 발걸음을 세시고 세상 움직이는 모든 것, 북한이 핵 개발한 것도 모두다 주님 손에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내가 나서버리면 “북한 핵개발 그거 김정일이 한거야 왜, 예수님이 거기 가담하는데 예수님은 관계없어!”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나 자신부터 예수님에 의해서 함몰 되니까 “김정일도 나하고 똑같은 신세야! 주님께서 붙잡아 주지 않으면 너는 핵개발 못해! 주님께서 다 허락하신거야!” 라는 그런 안목이 생기는 겁니다.
자기만 주님 앞에 함몰되어 버리면 세상이 모든 것이 범사에 감사하게 돼요. 주의 뜻이 하나도 아닌 것이 없게 되는데 내가 등장하니까 내가 주체가 되니까 주님도 멀어지고 저 사람에게도 주님이 떠나버리고 그냥 맞장 뜨잖아요. “인간 대 인간으로 한번 해보자, 누가 이기나?”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교회끼리 축구 시합할 때 그러잖아요. 기도할 때는 주님께 우리가 함께 영광 돌리자 해 놓고 축구 시합 시작하면 주님은 없고 돈내기 하느라 바쁘잖아요. 왜냐하면 축구할 때 지면되는데……. 마지막입니다. 이제부터 축구하면 무조건 지세요. 지면되는데 이기려고 하니까 이기면 이겼다는 권력이 쌓이니까 나는 새로운 주체로서 거듭나게 되잖아요. 이것이 바로 마귀의 모습이 되는 거예요. 기도하실 때 “주여, 이기던 안 이기던 주의 뜻대로 하게 하옵시고 다만 여기 참석한 것을 감사히 여깁니다.” 이런 식으로 축구하면 되고 또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사시면 됩니다.
새로운 부부, 결혼하고 오늘 처음 봤는데 제가 듣기에는 둘이 사이가 너무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싸우는 일이 있더라도 그때는 주체가 너무 살아있기 때문에 싸웁니다. 서로 싸우더라도 “내가 잘못이야” 그런 싸움을 하세요. “내가 잘못했어.” “아니야 내가 당신을 감싸지 못했어.” 이렇게 서로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싸웁니다. 싸웠다는 이야기 제가 들은 적 없어요. ㅎㅎ 없는데 아무튼 서로 낮추기, 주체 없애기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이 성경말씀 지키는 그 순간부터 또 주체는 살아나고 내가 잘난 존재가 되고 남보다 더 뛰어난 존재로서 의시대고 싶은 이런 악마의 모습이 튀어나옵니다. 이런 속임수, 환상에 그만 속고 우리는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끌려 갈수밖에 없는 그런 주님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오직 모든 것이 주의 뜻대로 이루어진 다는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12.04. 녹취 : 김창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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