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시집『혼자 춤추는 이방인』
고뇌하는 시인 -金松培 小論
제해만 (시인. 전 서일전문대학교 교수. 작고)
인간은 고뇌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실존한다. 온갖 역경에 시달리면서 인간은 삶 자체보다 존재에 대해 고뇌한다. 시인은 바로 그런 자며 김송배 시인 역시 이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그가 고뇌하는 실존은 '갈대'와 '그릇'으로 투사되어 나타나는데, 갈대는 외형으로, 그릇은 내용으로 변용되어 있다. 말하자면 '흔들리는' 갈대와 '비어 있는' 그릇은 그가 고뇌하는 대상이고 특성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전자나 후자 모두 실존에 상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집『혼자 춤추는 異邦人』의 1부 「갈대, 눈물로 흔들리다」 15편의 시와 2부 「그릇, 그 몇 가지 실험」 14편의 시가 모두 그러하다.
갈대처럼
천성적 연약함으로 너는
비옥한 저 들판에서
서지 못하리라. 서지 못하리라
어느 늪 속, 미풍에도
흔들리는 눈물처럼
온몸 전율하는 생명
돌밭에서 싹틔워진 연약함일지라도
그 귀중한 생명을 끌어안고
잘못 뿌려진 씨앗을 탓하지 않으리라
다시 바람 부는 늪에서
진흙으로 어둠 삼킨 채
오늘은 다만 노래 한 소절만 부르리라
눈물로 흔들리는 노래
갈대의 노래.
--「갈대, 눈물로 흔들리다 · 7」전문
사실, 갈대는 바람에 흔들리기 때문에 갈대로서 존재한다. 이처럼 세상 만물은 고난과 역경을 맛보지 않으면 그 가치가 인식되지 못한다. 더욱이 그것이 인간에 투사될 때 그 존재는 실존적 위치로 전이된다. 비록 이 시의 첫 행에서 갈대가 비유의 이미지로 쓰이고 있으나 그것은 곧 본래적 의미를 획득한다.
여기서 갈대는 인간이고 구체적으로는 시인 자신이 된다는 것은 상식일 터이다. 그러므로 연작의 첫 번째인 이 시는 김송배 시인의 개체적 자아의 탄생을 노래하고 있다. 그것은 '씨앗', '싹틈', '생명'이라는 시어로 확인된다. 이런 개체의 탄생으로부터 비롯된 존재는 한 생애를 역경 속에서 실존적인 삶으로 살아간다.
이 실존적인 고뇌의 이야기가 이들 연작시다. 이는 연작의 차례가 대체로 시인의 전기적 과정을 밟고 있다는 점에서 증명된다. 때문에 연작 전반부 시가 유년기의 체험에 고리가 연결되어 있고 후반으로 오면서 현실적 고뇌라는 사회성에 접맥되어 있다.
‘일찍이 텅 빈 가슴 하나로 살았다'라는 연작 3의 서두가 그러하며, '부질없는 사랑으로 바람은 / 또 다른 사랑으로 눈물을 잉태한 채 / 산골 어스름 길을 떠돌았다 / 문풍지 드렁드렁 울어쌌는 밤이면 / 호롱불 심지 더욱 휘황한데 / 나는 대청마루를 나서는 달빛을 닮았다'가 그러하다.
유년기에 입은 상처(트라호마)에 대한 이런 언술에 이어 연작 4에 제시한 조부, '막은거사(莫隱居士)'에 얽힌 에피소드 역시 그러하다.
그리하여 그는 '눈물 지우며 뒤돌아보는 어머니'와 이별하고 '저 어디쯤에서 엄습하는 먹구름 속/ 내 희끗 희끗한 머리카락마저 젖'으며 빗속을 걷는다. 이제 고통은 더욱 가열해진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으며 '겨울비'조차 내리는 상황에 당면하여 그는 '이 세상 겨울을 혼자 감싸 안을 자 /오직 나뿐일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한다. 아마도 시적 화자가 갈대로 강하게 인식하는 단계는 여기서 부터가 아닌가 한다.
바람 불고 비 오는 추운 겨울의 극한 상황에서 자신을 '흔들리는 갈대’로 인식한 셈이다. 물론 이런 갈대 인식은 자신만이 아닌, 대상과 상황 모두가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너도 갈대 나도 갈대, 그리하여 세상은 모두 갈밭이라는 확신이다. 연작 15는 그러한 확신의 결론이다.
눈물로 흔들리는 갈대
어느 날 당신이 제자리에서만 흔들리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내 스스로 알 것 같다
모두 질금거리는 절망
--- (중략) ---
박토에선 발아되지 않고
마냥 모진 한 생명을 붙들어
어느 날 갈대처럼 흔들림으로 서 있었다
눈물로 다시 흔들리는 갈대
혼자 춤추는 이방인
그래도 한 점 고운 바람을 만나기 위해
내가 서 있는 곳은 날이면 날마다
서있으므로 바람만 불 것이다
--「갈대, 눈물로 흔들리다 · l5」중에서
이 시의 중심 구절은 물론 '혼자 춤추는 이방인'이요, 그는 바로 갈밭과 같은 이 세상에서 눈물로 흔들리는 시적 화자의 모습이다.
시적 화자가 외형적 특성의 자연물로 투사된 것이 '갈대'라고 한다면 무에서 조형된 인격적인 형성체는 '그릇'이다. 그릇은 인격이라는 내용을 담는 용기이다. 말하자면 갈대보다 그릇은 실존으로서의 가치에 더 접근하고 있다고 하겠다.
'네가 불가마에서 달구어지듯 / 나도 신열(身熱)로 감싸인 채 / 그렇게 살아 있음을 보았네'에서 이는 화인된다. ‘존재의 슬픈 확인’이란 부제는 그래서 붙인 것일 터이다.
더욱이 두 번째 시 ‘자성의 유약’에 보이는 '내 가슴 에워싼 그릇은 / 작은 간장 종지에 지나지 않았다'와 같은 구절에서 그릇의 인격적 전이는 잘 드러난다.
그뿐인가. 그는 계속하여 그릇을 '변화'와 '실수'와 '이기'의 상징으로 표출하며 마침내 '비어 있음'으로 추적해 간다.
정갈한 몇 마디의 언어
빈 접시와 나란히
여름 들판에 누워 있다.
나도 가끔 빈 접시가 되었다.
--「그릇, 그 몇가지 실험 · l0」중에서
너의 술잔에는 술이 넘치고
나에게 넘쳐야 할 진실은 비어 있다.
가고 오는 윤회
어쩌면 깨진 술잔에 고이는 한생의 우수
--- (중략) ---
너의 술잔이 빌 때를 기다려도
나의 염원은 아직 채워지지 않았다.
--「그릇, 그 몇가지 실험 · 12」중에서
여보게, 연약한 몸뚱아리를 함부로 굴리지 마라
소리만 요란한 빈 그릇들은
이 세상 어디에서나 눈에 불을 켠다
여보게, 사람과 그릇은 어쩌면
고갈된 목구멍의 풀칠과도 인연이 있을 터
그러나 요란한 빈 몸뚱아리에 담긴 오만
빽과 빽이 빽빽하게 둘러선 나무아래에서
그 알짱한 오만과
그 시퍼런 권력과
그 똥스런 지폐와
그 얇팍한 인격은
모두 덤덤한 표정으로 서 있나니
여보게, 골빈 인간들 틈에서 울리는
빈 그릇들의 소리를 듣고 있는가
하, 비운 마음 한 구석에서 푸드득
날아가는 비둘기의 포물선
언제쯤 무지개의 선명한 색깔을 볼 수 있을까
여보게, 깨지지 않게 몸뚱아리 조심하게나.
--「그릇, 그 몇가지 실험 · 14, 마지막 절규」전문
이런 '깨진' '비어있음' '고갈'은 모두가 외형적 존재로서의 인식이라기보다 실존적 인간 가치의 결손 의식을 표출하고 있는 시들이다.
그 결손은 어쩌면 영원히 채울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인지 모른다. 그것에 대한 애타는 갈구는 이룰 수 없는 꿈이기에 결국 화자 자신을 고뇌와 절망으로 밀어 넣고 만다.
이런 점은 시인이 후기의 시론에서 밝히고 있는 생명의 연약함과 그 유한성에 대한 회한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결국 그는 흔들리는 존재의 연약성을 갈대로 환치하여 표출하였고, 채우지 못하고 마는 실존의 유한성을 그릇으로 상징화 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尋牛圖 감상」에서처럼 불가능한 대로 '무엇을 찾으려'하고 있다. 이런 고뇌가 비록 고통일지언정 시인은 끝내 그것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것이 존재를 실존으로 이끌어가는 분투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가 하찮은(?)시에 매달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시인 김송배는 고뇌하는 시인이다. 그가 비록 일상의 삶에서는 긍정적이고 만족한 듯 하지만 그는 고뇌하면서 살고 고뇌하면서 시에 몰두하고 있는 시인이다.
어쩌면 그는 이런 고뇌를 벗어나는 날,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을지 모른다. 아니 비록 시를 쓰더라도 좋은 시를 못 쓸지 모른다. 이 말은 사실 모든 시인에 다 해당하는 가설일 터이지만 말이다.('95.2. 『예술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