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살면 안 돼?”
폴은 할부가 한참 남은 맥북을 조심스럽게 닫으며, 그게 별일도 아닌 것처럼 물었다. 성질대로라면 제 멋대로 쾅! 소리를 내겠으나 그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자본주의 아래의 인간이다. 높낮이 없는 어조가 쨍하게 울리는 문장보다 날카로웠다.
“노력해 보는 중이야.”
무성 영화에 얽매인 배우들은 대본을 손에 들고도 입을 열지 않는다. 한 문장을 끝으로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닫았다. 봄이라고 하면 흔히들 꽃이 피고 인연이 얽히는 시작의 계절이라고 하던데. 걔는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처럼 굴었다. 짧게 친 머리카락을 헤집기를 몇 분, 짧은 침묵이 지나간 자리가 곰보 자국처럼 남는다. 폴은 그 공백이 싫었다. 페벤시는 종종 세상만사의 경중이 다를 거 없다는 듯 군다. 무게추가 고장 난 저울처럼 기울어지지 않으려 한다.
“나, 곧 죽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의 문장들. 페벤시는 제 목숨을 저울 위에 올려두고 다시금 균형을 찾는다. 영점 조절을 기울어진 채로 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를 가지지. 그건 죽음을 말하는 목소리라기엔 가벼웠다. 그렇다고 가벼운 장난이냐 묻자니 얼굴에는 웃음기 하나 없다. 폴은 그 괴리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얼빠진 표정을 하고 뭐라고? 되묻는 게 전부다. 그럼 페벤시의 눈은 흔들리지 않고 그를 바라본다. 가끔은 진도 없는 저 눈이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흔들리는 건 나 혼자뿐이라는 걸 명백히 표명하는 눈이 잔인하다고 느낀 건 언제부터였더라.
“죽는다니까, 죽음.”
죽는 거 모르니? 심장이 안 뛰고, 뇌가 기능을 멈추고, 피가 순환하지 않는 그거. 심폐사, 뇌사, 그래, 그거. 페벤시는 황당하다는 듯 사전적 정의를 짚었다. 왜? 이유를 물었으나 대답을 듣는다고 납득할 리도 없다. 페벤시가 한숨을 한 번 쉬더니, 가볍게 눈짓한다. 그 일련의 동작을 따라 노트북의 화면이 켜진다. 검색창이 전부 들어찰 만큼 긴 이름을 가진 행성인지 별일지 모를 구의 사진이 구글 검색창에 가득 담긴다. 폴은 그 마법 같은 일이 별로 놀랍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는 벚꽃도 개화하지 않은 초봄에 제 귓전을 울린 문장들이 더 충격적이기도 했고. 페벤시는 종종 그랬다. 너무 많이 먹거나, 너무 적게 먹거나, 너무 많이 자거나... 예컨대 인간이 아닌 것처럼 살아왔던 거다. 언젠가는 걔에게 농담삼아 네가 외계인이라고 한들 놀라지 않을 거라 우스갯소리 한 적이 있다. 그때 제 옆에 서 있던 이의 얼굴 근육 하나하나를 다 기억하지 못하는 건 분명히 아쉬운 일이다. 그러니까 5년간 페벤시와 함께한 폴은. 그 이유라도 알아야 마음 편히 하루를 마무리지을 것 아닌가. 사람의 심장이 기적처럼 터져버리는 일은 지구 위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전조 증상을 달고 살아가는데. 페벤시는 건강한 편이다. 앞서 말했듯 불규칙하기 짝이 없는 생활 습관을 가지고도 8시간 숙면을 취하고 온 사람처럼 살았다. 그건 기적 같은 일임과 동시에 이상한 일이었다. 폴은 이유를 묻지 않고 살았다. 그의 일생이 그랬고 천성이 그랬다. 처음으로 매단 물음표에 답변조차 없다면 이는 처음 치고는 너무 잔인한 일이 아니던가.
“지구를 떠날 때가 됐어. 여기 너무 오래 있었거든.”
별을 떠나는 방법이 고작해야 죽음을 통한 영혼의 재상장이라니. 비효율적이기 짝이 없는 방법이다. 과학 문명이 발달하여 달 여행이 화두에 오르는 판국에. 지구를 벗어나는 방법이야 무궁무진하지만, 육체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인간은 없다.
“이거 보여? 내가 사는 별이야.”
패벤시가 가리킨 것은 144p 화질 정도나 될까 한 3초 가량의 짧은 영상이었다. 빛을 발하고 있으니 홍채에 맺혀 신경을 타고 뇌에 당도하기는 했으나 폴은 그게 당최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갔다. 가스로 이루어졌다는 설명이 미리보기로 뻔히 보이는 저 웹사이트를 뚫어져라 응시한다. 그렇게 하면 무언가 달라질 것이라 기대하면서.
“돌아갈 곳이 여기야?”
“응. 현 인류의 기술로는 여기까지 도달하기 50년 정도 걸릴 테니까.”
“그게 왜 죽는 거야. 귀가라는 멀쩡한 표현이 존재하는데.”
“육체를 소각시키고, 잘게 가루 내는 과정을 죽음이 아니면 뭐라고 불러야 해?”
고저 없이 읊는다. 페벤시는 졸려 보였다. 이 대화가 하등 의미 없는 과정인 듯 굴었다. 폴은 그게 한 철 개화했다가 져 버리는 꽃 같았다. 픽 죽어버리는 일이 자연의 순리라는 듯 구는 페벤시는 그런 면이 있다.
“그럼.”
폴은 잠시 고민한다. 잡동사니 공구함을 뒤지며 대체제를 찾아낸다. 겨우 찾아낸 건 초봄과 어울리지도 않는 단어의 집합체.
“엄청나게 긴 이별이라고 불러.”
“죽음이나 이별이나.”
“달라.”
“달라?”
“다시 볼 수 있잖아.”
“네가 130살까지 살아 있다면 그렇겠지.”
“그럼 130살까지 살아 보지 뭐….”
폴은 제 생각을 언어로 정제하는 능력이 없었고, 페벤시는 인류의 사고 메커니즘을 완전히 내재화하지 못했다. 봄과 이별은 평행선을 그리며 잘 섞이지 않는다. 물과 기름처럼 둥둥 떠서 부유한다. 그래, 우주복을 입고 우주를 유영하는 것처럼… 그러니까 네가 하고 싶은 말은. 다시 만날 희망을 남겨두고 가라는 거잖아.
“희망을 가진다고 달라질 일도 아닌데, 그러고 싶니.”
페벤시는 침팬지를 관찰하는 인류와 같은 시선을 하고 묻는다. 그러게…. 본디 폴은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도 아니며 이상주의자도 이타주의자도 아니다. 그렇지만. 너를 떠올렸을 때 슬프기만 하면 어떡해.
상대가 곁에 없다고 해서 살아가지 못할 정도의 강렬한 유대감이 몸을 지배한 적은 없다. 누가 죽어버리든 간에 삶은 적당히 굴러가는 걸 폴은 잘 알고 있다.
그래도, 다음 만남을 기약할 수 있는 약속을 하자.
그럼에도 고집스럽게 제안한다.
너를 떠올렸을 때 언젠가를 기대할 수 있게 해 줘.
제 사욕을 채우겠다며, 정의를 새로 세운다. 페벤시는 가만히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해.
나는 내 육신을 태울 거야. 살고 있던 집도 처분할 거고, 물건도 전부 버리거나 팔아 버릴 거야.
내가 우주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보장은 이 대화 하나밖에 없는 거야.“
긴 여행을 떠나는 이는 짐을 남기지 않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여튼간에 애정이란 것이 남는 관계에서 죄책감을 덜기 위한 도피책 하나에 그치는 속성이다.
”괜찮아.“
폴은 만족스럽게 웃는다. 평생 평행선을 그릴 것 같던 문장들이 교차점을 찾는다. 봄은 새로운 시작을 일컫는다지만 이는 외계인에게 통용되지 않는 말이다.
”그거면 돼. 정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