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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3년쯤 #하와이 에 도착한‘사진 신부’들이에요.
'100년을 울린 겔릭호의 고동 소리’
▲ 먼저 도착한 #하와이이민자 들이 새 이민자들을 환영하고 있어요.
‘사진으로 보는 미주 한인 이민 100년사’
1903년 1월 13일, 조선인 102명이 #하와이 땅을 밟았습니다. 이들을 시작으로 1905년까지 7000명 넘는 #조선인 들이 하와이로 삶의 터전을 옮겼습니다. 거의 모두 남자였어요.
요즘은 해외에 대한 정보가 넘치지만, 그때는 하와이가 어딘지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간 사람이 많았답니다. 그런데도 이민을 결심한 건 하와이가 '풍요의 땅'이라고 상상했기 때문이었죠. 쇠락해가는 조선에서 고생스럽게 살던 백성들에게 하와이는 배불리 먹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꿈의 땅'이었어요.
하지만 현실은 달랐답니다. 조선인 근로자들은 일요일만 빼고 하루 10시간씩 일해야 했어요. 그렇게 일해봤자 임금은 하루 70센트에 불과했지요. 문화적 차이도 고통을 더했다고 합니다. 남녀가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푸에르토리코 노동자들의 파티를 보고 조선 사람들이 기겁했다고 하네요. 미국 역사학자 웨인 패터슨이 쓴 '하와이 한인 이민 1세'라는 책 속에 "조선에서 여자가 춤추고 노래하는 건 기생이나 무당만 하는 일이라 큰 충격을 받았다"는 조선인의 회고담이 나올 정도랍니다.
영어를 한 마디도 못 했기 때문에 식료품 구하기도 어려웠어요. 어떤 조선인은 달걀을 사려고 자기 주먹에 흰 손수건을 둘러씌운 뒤 엉덩이에 가져다 대고 닭이 알 낳는 소리를 흉내 내 달걀을 샀다고 해요. 보는 이들에겐 재밌는 광경이었을지 몰라도,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식료품점에서 암탉 흉내를 내는 심정은 썩 좋지 않았을 거예요.
◇ 사진만 보고 바다를 건넌 새 신부
하와이 이민을 선택한 조선 사람들은 이런 어려움을 딛고 정착하는 데 성공했어요. 많지 않은 액수나마 고향에 남아있는 가족에게 송금하기도 하고, 고생 끝에 약간의 재산을 모으기도 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가정을 꾸리고자 하는 바람이 생겼습니다. 하와이에 온 이민자들은 노총각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사진결혼 이 등장했어요. 조선에 있는 처녀와 하와이에 있는 노총각이 사진으로 선을 보고 결혼을 약속하는 거예요.
이때 하와이로 건너간 여자들을 #사진신부 라고 불렀어요. 중매쟁이들은 조선 처녀들에게 "하와이로 시집가면 끼니도 땔감도 걱정할 필요 없다"고 설득했다고 해요.
결혼을 결심한 처녀들은 우선 남자 호적에 등록한 뒤, 긴 여행을 준비했어요. 서울에 가서 비자를 얻고 미국 영사관에서 신체검사를 받는 게 시작이었죠. 출발하는 날까지 영어 공부도 해야 했고요. 그리고 부산으로 가서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탔어요.
그리고 일본 요코하마에서 다시 한 번 #신체검사 를 받았습니다. 기생충 검사를 주로 했는데, 이때 검사에 걸리지 않으려고 건강한 사람 대변을 자기 것으로 바꿔 통과하기도 했대요. 이어 하와이 호놀룰루까지 9일 동안 배를 타고 갔어요. 거기서 마지막 신체검사와 간단한 영어 시험을 봤지요. 이 힘든 절차를 거쳐야 신랑을 만날 수 있었어요.
◇ 현실과 이상의 차이
이상형을 만났다면 해피엔딩이었겠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았겠지요. 하와이 총각들이 보낸 사진은 실물과 차이가 컸어요. 대부분의 남자들이 여자보다 두 배는 나이가 많았어요. 아열대기후에서 고된 노동을 하느라 그을린 얼굴이었죠. 비싼 양복을 빌려 입고 좋은 집 앞에서 사진을 찍었지만 실제론 집도 돈도 없는 경우조차 있었어요. 하지만 사진 신부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집으로 돌아갈 돈이 없는 데다, 결혼을 취소하면 집안 망신이라고 여겨졌어요.
하와이에 정착한 조선인들은 나중에 더 나은 생활을 위해 미국 서부로 이주하기 시작합니다. 오늘날 미국 서부에 한인들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서부터 한인들이 퍼져나갔기 때문이에요.
1924년 미국이 일본인 이민을 금지하면서 미국으로 가는 조선인 사진 신부들도 사라졌어요. 우리나라가 1910년 #일본 에 #강제병합 됐기 때문에, 새 #이민법 을 적용받았던 거죠. 미국에 있는 한국인들은 #독립운동 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미국사회 에서 인정받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했어요. 오늘날 미국 동포들의 성공 뒤에는 이민 초창기 세대들의 고생이 있었답니다.
출처: 프리미엄조선|[안영우]명덕고 역사교사
기획·구성=유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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