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샤머니즘(shamanism), 또는 무술(巫術)은 신적인 존재를 불러들이는 무당(巫堂), 곧 샤먼(shaman)을 중심으로 한 신앙 체계이며, 샤먼은 이상심리상태에서 신령이나 정령 등 초자연적 존재와 직접 교류하고, 이 사이에 예언, 탁선, 복점, 치병, 제의 등을 행하여 샤머니즘 신앙의 중심이 된다.
샤먼’이라는 말은 퉁구스계족에서 주술사를 의미하는 사만(Saman, saman)에서 유래한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 외에 사문(沙門)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의 시라마나(Sramana)나 팔리어의 사마나(samana)로부터의 차용어라든지, 페르시아어의 셰멘(shemen, 우상), 한자에서 사당을 의미하는 사(祠)로부터 전화되었다는 어휘라는 설도 있으며 중국에서는 무(巫, 여성) 및 격(覡, 남성)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샤머니즘에서는 샤먼이 춤·노래·주문 등을 반복하고 간혹 약물 등으로 보조함으로써 엑스터시적 이상심리 상태로 몰입하고, 주장되길 초자연적 신령계에서 나오는 정보를 전달하거나 길흉을 점치고, 귀신을 제거하며 병을 고친다. 샤먼은 초자연력을 가진 인물이거나 아니면 신령(神靈)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진 사람으로 여겨지며, 신자들은 그 힘을 빌려 수렵의 풍요, 가족의 안전, 전쟁의 승리 등을 기원한다. 샤먼은 질병의 치료사, 마술사로서의 역할을 한다.
한국에서는 샤머니즘이 무속 신앙으로 일컬어지며, 역사에 걸쳐 백성들의 정신 생활에 적지 않은 영향을 가져다 주었다.
6세기 중엽 알타이산맥 부근에서 몽골 및 중앙 아시아에 대제국을 건설한 터키 계의 유목국가인 돌궐(突厥)이나 퉁구스계족의 몽골족, 여진족, 거란족 등으로 대표되는 만주나 시베리아의 샤머니즘부터 시작하여 아메리카의 원주민, 아프리카 원주민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샤머니즘은 샤먼인 무격을 중심으로 한 주술·종교적 신앙으로 달리 무속이라고도 한다. 무속의 역사는 오래되어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고대 조선의 부족국가의 제천의례, 곧 동맹, 무천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현행 촌제(村祭)의 원류를 이루는 것이다. 고대에 무속은 국가종교의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신라왕은 무당의 역할을 겸비하였다고 전해져 제정일치(祭政一治)의 특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9세기 곧 신라 말기에 들어서 불교의 영향을 받아 무불 습합화가 진행되고, 개인의 피사진경(避邪進慶)을 구하게 되는 새로운 전개가 이루어졌다. 고려시대에 유교가 채용된 이후 무속은 점차로 억압받는데, 국가적 행사인 기우제나 팔관회는 무격이 사제였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매우 중시하며 무속을 더욱 억압한 결과, 무당들은 팔천(八賤)의 일종, 곧 천민계급으로 규정되었으나,조상신을 섬기는 등의 무속적 문화는 강력히 남아 한국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초자연적 존재를 직접 매개함으로써 해당 민족ㆍ사회의 신관념이나 타계관념을 구상화, 활성화시키고 미개사회의 샤먼은 사회통합의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문명사회에서도 강력한 〈카리스마〉로서 사람들을 규합하고 집단을 형성하는 것은 많은 신종교집단의 예에서 볼 수 있다.
샤먼적 카리스마는 각지의 왕이나 수장, 지도자의 권위의 기초가 되어 있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사마대국의 여왕 비미호(卑彌呼)나 아프리카의 시르크족의 왕 등이 그 대표적인 모습으로 보고 있다.
전통적인 정치ㆍ사회체제가 붕괴과정에 있을 때, 강력한 카리스마적 인물이 체제를 재편성하기에 이르는 예를 많이 볼 수 있는데, 그런 종류의 인물은 대부분 샤먼적이고 종교문화의 주요한 구성요소인 애니미즘, 애니마티즘, 사령ㆍ조령숭배, 신비주의 등의 유지ㆍ존속에 공헌하기도 한다.
2. 무당
무당(巫堂)이란 신내림을 받아 신을 섬기며 굿을 하는 여성 무속인을 뜻한다. 남성을 지칭하는 말로 '박수 또는 무격, 화랭이·양중'이라는 단어가 있다. 그러므로 원래 여성은 무당, 남성은 박수로 구분하여 표현해야 하지만 여전히 혼용된다. 예를 들어 남성에겐 박수가 아닌 박수무당이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이 따르는 신앙을 무속이라고 부른다.[1] 무당과 박수를 합쳐서 무속인이라고 부른다.
무당의 의례는 상당히 다양한데 흔히 알려진 것처럼 몇 시간 동안 원색 천을 흔들며 춤을 추는 의례가 있는가 하면 이와는 정반대로 그저 앉아서 몇 시간 동안 독경을 외는 충청도 방식도 있다. 전 세계적으로 샤먼들은 비속(非俗)의 영역을 표현하기 위해 비일상적이고 충격적인 퍼포먼스를 행하는데 이는 무당도 그러하다. 죽은 돼지를 삼지창으로 꿰거나, 닭의 목을 산체로 꺾어서 죽여 버리거나, 작두 계단을 올라타는 의례가 대표적이다. 굿의 일종인 대수대명 굿에서는 과거에는 산 가축을 굿에서 잡음으로써 산 자의 수명 연장을 기도하였으나 현대에는 이미 도축된 동물로 대체하고 있다.
한민족의 역사를 유목민족 전체 역사에 어떻게 해서든 포함시키려는 유사역사학자들의 단골 떡밥이 되기도 하는데 여기서 떡밥으로 텡그리가 나오기도 한다. 이들의 주장에서 텡그리란 바로 환인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당연히 텡그리 신앙은 지역에 따라서 특성들이 상당히 판이했으며 천신(天神) 신앙 자체가 원래 전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퍼져 있던 신앙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텡그리에 환인의 기원을 귀인하는 해당 주장은 무리수라고 볼 수 있다.
반면 단군 왕검 할 때의 그 '단군'이 '텡그리'와 어원이 같다는 주장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최남선이 무당을 지역에 따라 '당골네'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는 점에서 '당골네'가 '단군'에서 온 말이라는 주장을 세우면서 같이 제기됐을 만큼 상당히 오래된 설이다.
그러나 이는 2023년 기준으로 다시 반박되었다. 고시베리아 제어 자체가 입증되지 못하고 반박되었으며 한국어는 고립어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최남선과 신채호를 인용하며 단군과 탱그리의 어원이 같다고 주장했는데 역시 주류 언어학계에서는 거부한다. 애초에 저 사람들은 전문 역사학자도, 언어학자도 아니며 언어학을 배운 적도 없다. 물론 신채호는 한국 근대 역사학의 시조이기는 하지만 전문적으로 역사학을 배운 적은 없는 사람이다. 이병도 이후 단군과 탱그리의 기원이 같다고 주장하는 학자는 최소 주류 역사&언어학계에는 없다. 이병도는 단군신화를 곰 부족, 호랑이 부족 간의 결합 운운하기는 했지만 전술한 것과 같이 탱그리 신앙과 엮는 시도는 안 했다. 최남선의 만선사관은 처음부터 불손한 의도가 아니었긴 개뿔, 현재는 처음부터 불손한 의도가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단군신화 관련 해석에 대해서는 웅녀 문서 참조.
아울러 고조선의 발원지를 요서지역으로 비정하는 것이 2000년대 이후 고고학계의 통설이다. 요서지역은 몽골의 시초로 여겨지는 동호와 인접해 있으니 자연스레 교류가 잦았을 테고 부여, 고구려, 발해 역시 오랜 기간 동안 만주 일대를 통치하며 읍루, 거란, 선비족, 말갈, 돌궐 등 몽골계, 튀르크계, 통구스계 종족들을 포섭하거나 지배하면서 그들의 고유신앙을 융합시키려는 시도를 자연스레 했을 것이다. 그런 만큼 한국인들의 전통 신앙이 텡그리 신앙의 한 분파였거나 최소한 강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은 있다. 이러한 추정대로라면 고구려는 고조선 계승 의식과는 별개로 고조선 문화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고대에는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신라와 고려의 팔관회처럼 무속 신앙에 관련된 행사가 열렸다. 고려 초기까지만 해도 정식적인 사회 계급으로서 인정받았지만 성리학이 국학으로 올라서자 철저한 탄압을 받았고 근현대 이후에도 비과학적, 비합리적이라고 하여 사회적으로 홀대받는 형편이다. 괴력난신을 인정하지 않는 유학자들의 입장에서 무교는 토속 미신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체계적인 종교의 모습을 잃고 사업가 형태로서 살아남았다.
한국에서 무당이 사회 제도에서 배척받고 민중의 호감을 사기 위한 주술사로서 살아남았는데 '박수'와 '무당'으로 널리 부른다. 지방이나 개인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다른 옷을 입는데 무복이나 화려한 굿의 의복들을 참고하자.
"한국의 무당은 일본의 무녀처럼 아르바이트가 없다"는 말이 퍼져 있는데 일본에도 도호쿠 지역의 이타코(イタコ), 오키나와 류큐 신토의 유타(ユタ)는 한국의 무당과 마찬가지로 신내림을 받으며 한국에서도 무교 행사가 치러져야 할 때는 부채춤[2]을 추는 아르바이트 무녀들을 모집하는 경우가 있다. 현대 한국에서 무턱대고 무녀라는 표현이나 현대 무속 행사를 배척하는 것은 무교가 얼마나 일반인들의 사회에서 밀려난 존재가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예시에 가깝다.
1) 세습무
학자에 따라서 사제무라는 분류명을 쓰기도 하며 고고학적으로는 정주문화의 발전으로 인한 마을 사회의 어르신 내지는 현자의 개념이 발전한 지위로 본다. 마을의 운을 점치고[3] 마을 구성원의 통과의례를 봐주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정주문화가 먼저 발달했고 오랫동안 이어져 온 한반도 남부 무교에서 세습무 특징이 자주 보인다. 현대 이전까지는 각 마을에서 신관에 가까운 입지를 지녔으나 마을 축제의 전통이 대부분 사라진 현대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훨씬 생존에 유리한 강신무보다 찾아보기 힘들다.
특정 지역의 역사적 신앙과 깊이 연관되고 민속학적으로도 주목을 받아서 인간문화재로 지정되는 등의 혜택이 있다. 상기 문단에서 이미 비추어진 바와 같이 충청도는 이런 식, 어느 지역은 저런 식 등의 고장 특유의 무례(巫禮) 방식은 전적으로 세습무에 해당하는 서술이다. 대부분 절기에 따라 때 되면 행사를 진행한다. 이러한 흔적은 강신무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계절의 변화에 맞춰 굿을 하거나 백중과 같은 농경사회 기반 절기에 행사를 진행하는 모습을 현대에도 확인할 수 있으며 국가로부터 지원도 받으니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다. 그러나 부모가 세습 계열의 무당이 아니라면 세습무에는 발도 들여놓을 수 없다. 대신 계보나 서열이 분명하여서 본인을 어필하지 않더라도 본인의 신분이 보장된다. 한편, 도시화로 인해 지역 무속이 쇠퇴하고 있는 과정에 있다는 것도 세습 계열의 무당들에게 좋지 않은 전망이다. 대신 신앙의 색채를 낮추고 지역 축제 개념으로 변화를 모색하는 세습무 무당들도 있다.
2) 강신무
철저히 프리랜서 형태로 이루어지며 행사 등에 초청을 받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 따라서 다양한 홍보전략을 사용하며 행사[4]가 없을 때는 신점을 겸하는 경우가 많고 신점을 계기로 연을 만들어서 행사를 유치하기도 한다. 즉, 일이 잘 안 풀린다고 신점을 보러 온 사람에게 부적 등 비방을 써주며 넌지시 "굿판을 벌이면 좋다"고 처방을 주는 것이다. 강신 계열 무당들의 또 다른 특징은 본인의 전문성을 고객이나 동료 무당들 사이에 상당히 어필한다는 것이다. 21세기에는 유튜브 등의 SNS 활용도 눈에 띈다.
큰 행사를 치르는 경우 여러 명의 강신무들이 협업하기 때문에 이쪽 계열 무당들 사이에서 알음알음으로 본인의 전문성을 알리고 다른 무당들의 전문분야를 알아두는 것이 중요하다. 예컨대 신점에 능하든지, 작두타기에 능하든지 자신의 일을 잘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덕분에 유명한 강신무들은 전문성이 매우 높다. 실제 굿판에서 정해진 분업을 완벽히 해내고 다른 무당들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눈치도 매우 중요한데 행사 중에는 티를 내지 않지만 뒤에서 무당들 사이에서 갈등이 표현화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즉, 팀워크를 잘하는 것이 강신무 계열 무당으로서 필요하다.
3. 굿
마을 행사이자 광대놀이이자 주술적인 기능을 겸하는 제사. 무당이란 말 자체가 굿을 하는 사람을 뜻한다.
전국에는 지역별로 다양한 종류의 굿이 있는데 각 지역마다 효험, 구성, 모시는 신령이나 입는 옷까지 다르다.
무당들이 사용하는 도구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무당이 사용하는 도구도 지역별로 많은 종류가 존재한다.
※ 직접 휘두르거나 몸에 걸치고 사용하는 무구는 ●
※ 굿판을 장식하여 신령을 부르고 영혼을 대접하는 장식물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