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빙글리는 재세례파와 달리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스위스인들의 독립을 방해하고, 스위스를 병들게 하는 용병제도의 철폐를 위해서 로마 교황청에 반기를 들었다. 츠빙글리는 비밀위원회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주장이 의회(소의회와 대의회)의 의사결정에 반영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선지자적 신정정치를 꿈꾸면서 종교의 자유를 쟁취하려 했던 츠빙글리와는 조금은 결이 다르게 칼빈 또한 제네바와 교회의 자유를 위해서 투쟁하였다. 유럽 주변국들과 후세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츠빙글리와 칼빈의 개혁 이념에 대한 내용, 조용석, 『츠빙글리, 개혁을 위해 말씀의 검을 들다』를 구분선 아래에 타자 쳐 붙인다.
츠빙글리가 개혁적 행동을 추진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은 의회이다. 한 사람의 막강한 통치자가 존재한다면, 츠빙글리와 같은 일개 목회자가 취리히 정치구조에 쉽게 영향을 미칠 수 없었을 것이다. 절대권력의 통치자에 의해 취리히의 정책이 결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531년 카펠 전투에 종군사제로서 참전했던 츠빙글리의 모습은 그가 이해하던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추측하게 한다. 알프레드 파너(Alfred Farner)는 그의 교회정치적인 이념을 '선지자적 신정정치' 라고 규정한다. 그가 의회 비밀위원회에서의 정치적 활동과 그로스뮌스터 대성당에서의 목회사역을 통하여 발휘한 선지자적 카리스마는 당시 로마 가톨릭의 성직자 중심주의적인 권위와는 질적으로 상이했다. 그의 선지자적 신정정치는 민주화된 의회를 통하여 구현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민주주의 개념을 오늘날의 민주주의 개념에 비추어 이해해서는 안 된다. 츠빙글리가 활동하던 16세기에는 플라톤적 전통에 입각하여 민주주의를 폭력적 소요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츠빙글리에게 있어서 올바른 귀족정치(Aristokratie)의 실현과 오늘날의 의회민주주의 제도는 부합할지도 모른다. 올바른 기독교 신앙과 정치의식을 갖춘 귀족들이 활동하는 의회는 오늘날의 시각으로 볼 때 대의민주주의 제도로 운영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16세기에 취리히 의회는 대의회와 소의회로 구성되었다. 엘리트 중심으로 구성된 소의회가 중요한 정치적 사안을 다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운동은 중소상공업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대의회의 지지를 받으면서 관철되었다. 당시 취리히의 소의회와 대의회는 정치적 갈등 상황에 놓여 있었지만, 츠빙글리는 소의회와 대의회에 직접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는 소위 비밀위원회 일원으로 참여하면서 의사결정과정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뿐이다. 이 비밀위원회는 취리히 종교개혁운동을 성공시킨 중요한 기관이었다.
여기서 츠빙글리가 이해한 국가와 교회 간의 관계를 조금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그는 교회가 취리히 의회와 밀접한 관계를 지녀야 하며, 교회정책의 결정과정에 의회가 최종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의회와 교회는 상호존중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더 나아가 의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종교개혁 프로그램을 관철시키고자 노력했다.
예를 들면 용병제도 철폐를 취리히 종교개혁운동의 가장 중요한 선결과제이자 핵심적인 복음의 실천과제로 인식했던 츠빙글리는 의회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했다. 의회와의 우호적 협력관계를 통하여 그는 스위스 연방 및 유럽 대륙 전체로 자신의 종교개혁 프로그램을 확대·적용하려 했으며, 이로 인하여 불가피하게 루터와 대립하게 된다.
의회의 적극적인 협력 아래 종교개혁운동을 추진한 그의 개혁의지는 교회와 국가의 엄격한 분리를 주장하던 급진적인 재세례파들과의 접촉을 통하여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재세례파 운동이 간과할 수 있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면서 취리히 교회의 국가교회적인 특성을 부각시키고 강화시켰다.
이와 같은 스위스의 정치적 환경 속에서 시도된 츠빙글리와 칼빈의 종교개혁운동은 두 사람을 개혁자라기보다는 선지자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실제적으로 츠빙글리는 '예언'이라는 말을 선호했다. 츠빙글리의 「이사야, 예레미야 주석」은 그의 정치적 · 신학적 이상이 투영된 성경주석으로서, 그가 왜 구약성경 중에서 선지서를 선호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문헌이다.
칼빈은 츠빙글리와 달리 예언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이르러 칼빈은 츠빙글리와 같은 선지자로 칭송된다(칼 바르트). 적어도 칼빈이 시도한 교회 중심적인 사회개혁은 츠빙글리의 개혁운동과 유사하다고 평가되기 때문이다. 칼빈은 츠빙글리처럼 용병제도의 철폐를 중요한 사안으로 다루지 않았지만 제네바의 자유를 위하여 투쟁했다. 제네바를 지배하던 사보이 공국이 물러나고 베른이 제네바를 간접적으로 통치하려고 시도할 때 칼빈은 격렬하게 저항한다. 베른이 제네바를 통치한 방식은 직접적인 정치적 지배가 아니었지만 제네바 교회예식을 베른 교회와 동일하게 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해 반대했던 칼빈은 1538년 제네바에서 추방당하고 스트라스부르로 망명을 갔다.
이는 칼빈이 맞이한 새로운 시대의 변화된 국면을 의미한다. 츠빙글리가 1291년부터 시작된 스위스 연방의 독립운동을 일종의 민족주의적 열정을 가지고 했다면, 칼빈에게 중요한 것은 교회의 자유, 즉 신앙의 자유였다. 직접적으로는 제네바 교회의 자유였을지 몰라도, 그는 줄곧 조국 프랑스를 염두에 두고 프랑스 개신교회의 신앙의 자유를 꿈꾸었다. 츠빙글리 또한 프랑스가 종교개혁운동으로 로마 가톨릭의 정신적 지배에서 벗어난다면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리라고 믿었다.
루터는 프랑스 종교개혁운동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책자를 통해 전해진 루터의 신학사상은 에라스무스를 비롯한 프랑스 가톨릭 성서인문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츠빙글리는 자신을 신성로마제국의 위대한 종교개혁자 루터보다 약자라고 생각했는지, 프랑스의 프랑소와 1세에게 자신의 저서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에 대한 주해」(1525년)를 헌정하며 잘 보이려고 애썼다. 독일에서는 지방 변두리인 스위스 산악지역에서 목청껏 외치는 자신의 목소리가 루터로 인하여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지만, 만일 독일의 영원한 라이벌인 프랑스가 자신의 외침을 받아준다면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의 한계가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비록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1536년 프랑스 왕실의 박해를 받아 칼빈이 피신한 스위스 바젤은 프랑스, 독일, 스위스가 만나는 접경지역에 위치한 도시다. 이곳에서 칼빈은 프랑스의 종교개혁운동을 결코 포기하지 않은 채, 신앙적 열정을 가지고 「기독교 강요」 초판을 출판했다. 이후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프랑스 교회의 자유, 신앙의 자유와 같은 철저한 신학적 신념은 제네바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교회 예식의 동일화를 요구한 베른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은 것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이유로 제네바에서 추방된 후, 1541년 다시 제네바에 돌아오고 나서도 교회의 자유를 위한 칼빈의 투쟁은 지속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츠빙글리가 줄곧 추구한 스위스 연방의 자유를 혹시 칼빈이 교회의 자유로 받아들인 것인지 질문해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프로그램을 전폭적으로 수용한 베른이 제네바에 또다시 종교적 압박을 가하는 것을 보면서 칼빈은 신앙의 자유, 교회의 자유를 외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츠빙글리와 칼빈이 외친 자유의 개념은 질적으로 다른 것인가? 결코 아니다. 다른 시대적 상황에서 자유를 외쳤을 뿐, 그들이 외친 자유는 루터의 칭의론이 피력하고 있는 개인적 차원의 자유의 영역을 넘어 민족과 교회의 영역을 포함한 공동체적인 자유를 향한 이상을 심어주었다.
츠빙글리와 칼빈의 신학적 이상, 즉 하나님 말씀에 입각하여 실현되는 공동체와 개인의 자유라는 이상은 영국 가톨릭 왕실의 압제 아래 고난당하고 있던 스코틀랜드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었다. 또한 성공회의 불완전한 개혁 조치에 만족하지 않았던 청교도들에게 참된 개혁을 위한 신앙적, 신학적 근거를 제시해주었다. 역설적이지만 츠빙글리와 칼빈의 개혁 이념은 박해받는 소수민족, 험난한 지정학적 위치에 처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따라서 츠빙글리와 칼빈의 신학적 유산에 대한 공감 없이 척박한 지형적 조건 속에서 불굴의 의지로 생존의 에너지를 주었던 네덜란드 개혁신학의 파토스(Pathos)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는 불가능하다.
조용석, 『츠빙글리, 개혁을 위해 말씀의 검을 들다』(서울: 익투스, 2014), pp. 95~101.
첫댓글 넓은 의미의 개혁주의 서클을 이루지만 칼빈과 공통점도 차이점도 있을 겁니다. 좋은 포스팅을 올려 주셨네요.
공감합니다.
알프레드 파너는 츠빙글리에 대한 연구를 한 전문가인데, 조용석님은 파너의 다음 책을 참고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Alfred Farner, Die Lehre von Kirche und Staat bei Zwingli (Tubingen, 1930). 츠빙글리의 교회와 국가에 대한 가르침 정도로 번역되겠네요.
그렇군요. 그래도 독일어 원서를 읽고 참도했나 봐요. o.k.
취리히 Zurich
요약) 취리히는 1218년에 자유도시가 되었으며, 1336년 길드 구조에 근거를 두고 다양한 동업조합·상인·귀족들의 세력을 아우르는 민주적인 헌법을 받아들였다. 1830년대에는 시민이 선출하고 시민이 정부의 행정 부서들과 입법부에 강한 통제력을 행사하는 자유민주주의적인 질서가 등장했다.
20세기 후반 들어 한때 흥성했던 직물공업이 쇠퇴하고 중공업(특히 기계생산)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도시의 관광업도 활발해 도심지 반호프슈트라세는 세계의 큰 상점가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국제회의도 자주 개최된다. 700년대에 샤를마뉴가 세운 로마네스크 양식의 그로스 뮌스터, 13세기의 장크트페터 교회, 현재 일부가 고급 음식점이나 시민 활동을 위해 쓰이고 있는 길드 집회장들과 귀족의 저택들이 있다.
이하 Daum 백과 링크 참조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20c3700a
츠빙글리 이야기할 때 자주 나오는 도시 이름이네요^^
사보이 공국
사보이아 공국(이탈리아어: Ducato di Savoia 두카토 디 사보이아[*])은 1416년부터 1860년까지 사보이아 가문이 통치했던 나라이다. 사보이아 공국은 오늘날 이탈리아 북부와 프랑스, 스위스의 영토 일부를 포함하였다. 사보이아 백국을 계승했으며, 상부 라인강 서클의 일원으로서 신성로마제국에 종속되어 있었다.
이하 위키 백과 참조
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B%B3%B4%EC%9D%B4%EC%95%84_%EA%B3%B5%EA%B5%AD
회중교회 신조나 호텔 이름 등으로 많이 들었는데, 이태리 기반 가문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프랑소와 1세
... 프랑스에서 종교적인 분란이 발생했을 때 왕은 증가하는 광신주의를 완화하기 위해 노력했다(그는 관용적이고 쾌락적이었으며 네덜란드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의 예찬자였고 또 종교개혁가인 필리프 멜란히톤의 독자였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풍자작가 라블레의 후원자였음). 그의 대신들이 열렬한 가톨릭교도였던 것에 비해 그의 누이와 정부는 종교개혁을 모두 지지했다.
그러나 종교개혁가들은 모두 공화주의자로 간주되었으며 장작더미 위에서 이단자들을 화형시키는 일이 시작되었다. 프랑수아는 임종시에 왈도파에 대한 공격명령을 읽지도 않고 서명했는데, 왈도파 절멸작업은 5년간이나 끌었던 것이다. ...
나머지 내용은 Daum 백과 링크 참조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23p4339b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칼빈이 헌사를 증정한 이는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이군요. 이름이 비슷하지만 다른 왕이네요.
@노베 프랑소와가 영어 식으로 읽으면 프란시스(Francis)입니다.
@노베 같은 왕 맞습니다. 마르궤리트가 누이인데 생김새가 많이 닮았네요. 칼빈이 앙굴렘 지역으로 피신했을 때 마르궤리트가 이 지역의 왕비로 있으면서 개혁자들을 후원했었죠.
@노베 아래 링크 보세요. 마르궤리트가 나와요.
https://m.cafe.daum.net/1107/YrXT/8?svc=cafeapp
좋은 교회사의 컨텐츠를 읽게 되어 저에게 유익함이 있습니다.
네, 저도 그래요. 공감합니다.
츠빙글리가 살아 있었다면 베른 교회가 제네바 교회에 교회예식을 통일하라고 여전히 압력을 넣었을지 궁금해지네요. 이것이 좋지 아니하냐며 설득은 할 수 있겠지만 강요하는 것도 교회와 신앙의 자유를 침탈하는 건 맞죠.
네, 좋은 의견으로 참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