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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기행 / 보고 싶었던 오줌 누는 아이
브뤼셀(Brussels)에서 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는 오줌 누는 아이(Manneken Pis)였습니다. 브뤼셀의 가장 오래 사는 시민(?)이자 가장 유명한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1619년에 태어났으니 소년은 397년을 브뤼셀에서 살았습니다.
사진에서 본 소년의 모습은 당당하고 천진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기에 모조품이 수없이 만들어져 지구촌 곳곳의 공원 연못 광장 등 레저시설의 한쪽에 서서 오줌을 누게 되었을 것입니다.
모조품들이 그의 자손이라면 브뤼셀에서 가장 많은 자손을 퍼뜨린 시민으로서 상도 받아야할 것입니다.
겨울에 이 오줌 누는 아이를 만난 프랑스의 루이 15세는 추운데 벌거벗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다하여 옷을 선물했습니다. 이 일화가 알려지자 세계 각지에서 아이 옷을 보내왔습니다. 덕분에 「오줌 누는 소년」은 세계에서 가장 옷이 많은 소년도 되었습니다. 그렇게 옷이 많지만, 그러나 소년은 크리스마스 이외에는 옷을 걸치지 않습니다. 옷은 시립박물관 3층에 전시되고 있는데 보면 곧 나라 이름이 떠오를 정도로 각 나라의 특색이 살아있는 민속의상들입니다.
오줌 누는 소년상이 만들어진 배경에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어느 날 시장의 아들이 행방불명되자 모두들 법석을 떨며 찾게 되었는데 이 때 아이는 길 한 모퉁이에서 오줌 누고 있는 상태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잔뜩 긴장된 얼굴로 법석을 떨며 찾아다녔던 것과는 반대로, 소년은 너무도 천진스런 모습으로 오줌을 누고 있었다는 것인데, 이 이야기가 장안의 화제가 되자 당시 최고의 명성을 날리던 조각가 "뒤케스누아"가 나서서 그 현장에 "오줌 누는 소년상"을 만들어 세웠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야유의 뜻을 담고 있는데 그 대상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소년이 -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 노트르담 사원을 향해 오줌을 내갈기고 있는 것이 보는 이들을 미소 짓게 할 뿐입니다.
그랑플라스(대광장)에서 시청사로 가는 왼쪽 길로 300m 정도 가면 모퉁이에서 이 "오줌누는 소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유명도에 비하면 초라하다 싶을 정도로 눈에 잘 띄지도 않고, 혼자만 달랑 서 있습니다.
그래서 미려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곧잘 실망하지만, 그러나 소년의 모습은 그래서 더 인기가 있는 건지 모릅니다. 소박한 일상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들에게 소년은, 결코 실망을 주는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작은 나라 안의 두 민족
벨기에는 그 면적이 남한의 3분의 1에 불과할 정도로 작은 나라입니다. 하지만 「유럽의 심장」이라는 무게 있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유럽의 정치사회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EC(유럽공동체)와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본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비중을 엿볼 수 있는데, 지리적으로도 북유럽과 동유럽을 포함한 유럽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부는 둘로 크게 갈라져 있습니다. 게르만 계통의 냉정한 플라망인과 라틴 계열의 격정적인 왈룬인의 대립이 그것인데 이로 인한 문화적인 차이가 정치적 갈등까지 일으키고 있습니다.
전체 인구의 약 3/5 정도인 플라망인들은 네덜란드어에서 파생된 플라망어를 쓰며 주로 벨기에 북쪽의 중, 저지대에서 네덜란드 문화를 바탕으로 살아갑니다. 반면 프랑스어를 쓰는 나머지 2/5 정도의 왈룬인들은 남부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갈등의 원인은 독립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아오던 벨기에는 1830년 반란을 일으켜 이듬해 독립을 쟁취했는데, 왈론인들이 독립운동의 주체였습니다. 따라서 지배권은 왈론인들이 장악하게 되었고 중공업을 발전시키면서 경제적인 번영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반면 북쪽지역의 플라망인들은 대부분 농업과 방직업에 종사하면서 고도성장에서는 소외된 삶을 살았습니다.
수적으로도 많고, 역사적으로 주인의식을 가져온 플라망인들이 독립운동에 주체가 아니었다는 이유에서 왈룬인에게 차별 당하고, 이로 인해 현대화 과정에서 소외당함으로서 경제적인 격차까지 느끼게 되자 갈등이 심화된 것인데, 그것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국왕의 연설조차 동시에 두 가지 언어로 해야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신문 방송 출판은 물론 화폐에까지 두 언어를 함께 사용해야 하는 골치 아픈 나라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벨기에의 이런 모습은 고민하는 유럽의 한 단면이기도 합니다. 유럽 실정에 어두운 사람들은 "유럽을 하나"로 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전연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물결은 움직여도 물 자체는 그대로 있듯, 시대에 따라 지배자가 달라지고 국경은 변화했지만 종족 계보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유럽사회임을 알아야 합니다.
유럽을 하나로 보는 견해는 오랜 세월동안 나라끼리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피가 섞일 대로 섞였을 것이기 때문에 이제는 인종적 특색이나 살고 있는 지역을 나누기 힘들게 되었다는 것이지만, 벨기에를 예로 보아도 천만의 말씀입니다. 국가관은 별로일지 모르지만 종족관은 깜짝 놀라게 분명하고 투철한 것을 그들인 것입니다.
국가관이 희미하기에 "하나의 유럽"은 쉽게 성사되었지만 유럽을 아는 사람들은 그것이 진정한 통합유럽으로 오래갈 것이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유럽을 더욱 세분화하는 정반대의 결과를 조만간 낳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관광의 포인트는 섬세한 예술
벨기에는 역사적으로 프랑스 네덜란드와 동일 시 되는 경향이 많지만 로마시대에 이루어진 풍토 위에 라틴, 게르만 두 민족의 문화가 만난 지점으로 다양성이 매우 풍부합니다. 국민성은 프랑스어계든 네덜란드어계든 모두 근면하고 상식을 존중하며 자립심이 높고 예술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합니다. 손으로 뜬 레이스, 손으로 만든 초콜릿, 크리스털 제품 등이 유명한 것은 그런 국민성의 결과입니다.
중세에는 번영한 도시의 부유한 귀족들이 예술가들의 후원자가 되어 반 에이크, 루벤스 같은 "활기찬 사실 묘사와 기교"를 특징으로 하는 플랑드르파 화가를 출현시켰습니다. 지금의 벨기에 모습은 대체로 이시기에 이룩된 것으로서 건축 조각 등에서도 화려한 장식성이 추구되었지만 이 나라 미술의 중심은 회화였습니다.
따라서 벨기에는 "프랑드르 미술"에 대한 상식을 지니고 미술관을 돌아보는 데 관광의 의미를 가져볼 수 있습니다. 강렬하고 섬세한 기법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탄성을 내지르게 하면서, 이 지방의 역사적 변화를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1872년에 발표된 영국 작가 위더의 동화 "플랜더스의 개"도 이 지방을 무대로 한 작품입니다.
장차 루벤스 같은 화가가 되기를 꿈꾸는 가난한 소년 네로는 충직한 개 파트라슈의 도움으로 우유배달을 하며 어렵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마을에서 쫒겨나고 전시회에 출품한 그림은 낙선합니다. 결국 네로는 크리스마스 밤에 늘 동경하던 교회 안 루벤스 그림 앞에서 파트라슈와 함께 얼어 죽습니다. 동화에 등장하는 루벤스의 성화는 안트베르펜의 노트르담 사원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플랑드르 지방에 있는 안트베르펜은 브뤼셀만큼 잘 알려진 도시는 아니지만 깊이 있는 역사를 가진 유럽의 고도 가운데 하나로 전성기 루벤스가 활동했던 도시입니다.
동화 제목이 "플랜더스의 개"라는 사실에서도 이 나라의 복잡한 언어구조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필자 역시 글을 쓰면서 같은 지방을 플라망이라고 하다가 플랑드르 미술을 논하고 플랜더스의 개를 소개하게 되는데, 플라망은 프랑스어이고 플랑드르는 네덜란드어이며 풀랜더스는 영어이기 때문입니다.
독립 후의 인물 중에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파랑새」의 작가 M.메테를링크가 있고, 음악분야에서는 세계의 바이올린, 피아노 연주자를 위한 콩쿠르를 창설한 엘리자베스 황태후, 또 제2차 세계대전 뒤 난민구제를 위한 여러 사업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피르 신부 등이 우뚝합니다.
교육 문화 종교
교육은 1914년 이래 6세에서 14세까지 의무교육이었으나 83년에 18세까지로 상향 조정되었습니다. 공립학교와 주로 카톨릭 계인 사립학교가 있어, 한쪽에서는 교육의 비종교화를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국가보조 문제를 들어 대립해왔으나 1958년부터 국가보조를 평등화하였습니다. 중등교육기관은 다양해지고 있으며 고등교육기관으로는 헨리, 리에주, 몽스, 안트베르펜 등의 국립종합대학과 루뱅가톨릭, 브뤼셀자유, 안트베르펜 등의 사립종합대학이 있고 그 외에 국/사립 단과대학이 많습니다.
국민의 경제적 문화적 수준은 서유럽 나라들 가운데에서도 높은 편이나 1970년대 이후 불황으로 침체에 빠져 1944년 제정된 여러 사회복지제도의 수정이 재검토될 정도로 재정난을 겪고 있습니다. 종교는 국민의 90%가 가톨릭이며 8% 내외의 프로테스탄트가 있습니다.
축제
2월은 카니발의 계절로 마을마다 카니발이 열립니다. 벨기에의 카니발은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5월의 예수 승천일과 부활절 다음 7번째 일요일 축제가 또한 볼만합니다. 오페라 연극 콘서트 발레 등 공연은 겨울에 많이 열립니다.
지리 기후
우리나라보다 훨씬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나 멕시코 난류의 영향으로 따뜻한 해양성 기후입니다. 여름 평균 기온이 17℃, 겨울은 3℃로 기온차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일 년 내내 안개가 많고 비가 잦아 습도가 높은 단점이 있습니다. 눈이 내리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바람이 차 체감온도는 낮은 편이므로 겨울철엔 스웨터 따위를을 준비해야 합니다.
계절에 구애받으며 방문해야 하는 나라는 아니지만 6월에서 9월 사이가 여행하는 데 좋습니다.
북부 해변은 평탄한 저지대지만 남동쪽은 아르헨 고원지대로 500m 정도의 낮은 산들에 숲이 울창한데 가을 단풍이 볼만합니다. 스헬데 강과 뫼즈 강이 있어 북해로 흘러 들어가는데 지류와 운하가 많아 수로가 발달했습니다.
여행정보
비자 없이 3개월 체류가 가능합니다. 유럽에서 들어갈 경우 파리나 쾰른, 암스테르담 등에서 유레일패스로 입국하는 게 편하다. 브뤼셀을 중심으로 각 도시와 기차로 잘 연결되어 있습니다. 국경에서 가장 가까운 역에 도착하면 이민국 직원이 올라와 여권과 짐 검사를 합니다.
브뤼셀에는 남부 역 중앙 역 북부 역이 있는데 대개는 남부 역이나 북부 역으로 가며 중앙역은 그냥 지나치는 열차가 많습니다. 거리상으로 얼마 되지 않으므로 어디서 내리든지 상관은 없습니다. 역 구내에 시내관광이나 호텔을 소개해 주는 안내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호텔은 비싸므로 패키지여행이 아니라면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대신 유스호스텔이 많은데 대부분 회원증을 필요로 합니다. 유스호스텔 리스트나, 캠핑장 목록은 관광안내소에서 무료로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벨기에의 별미로, 남부에서는 사슴 야조 등을 프랑스식으로 맛볼 수 있는 반면 북부에는 어패류가 풍부합니다. 이곳의 명물인 싱싱한 홍합에 야채를 넣어 삶은 뒤 감자튀김 등과 함께 먹는 "홍합 요리"는 특히 인기가 높습니다.
하지만 음식 값 역시 대단히 비싼 편이어서 가난한 여행객들은 포장마차로 몰리는 경향입니다. 단지 하나, 맥주 만은 종류가 400종 이상 되는 "맥주왕국"으로 커피나 물보다 쌉니다. 물도 물론 사서 마셔야 하는데 그냥 물을 달라고 할 경우 탄산수인 상 가즈(Sans Gaz)를 줍니다. 우리 입맛에 익숙한 보통 물을 마시고 싶은 사람은 스파 렌(Spa Reine)을 달라고 해야 합니다.
앞에서 지적했듯 벨기에는 공용어가 많아 곧잘 여행자를 당황하게 합니다.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독일어 등이 세 가지 공용어인데, 남부에서는 프랑스어, 북부에서는 네덜란드어를 주로 씁니다. 브뤼셀에서는 두 언어가 함께 쓰이는데 영어를 아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택시는 값이 비싸서 권하기 뭣하고, 버스 전차 지하철 등 대중교통은 노선이 복잡해 또한 권하기가 그렇습니다. 조금 힘들더라도 시내관광은 도보로 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벨기에 안에서 통용 되는 여러 가지 패스가 있으나 유레일패스가 있다면 필요 없습니다. 유레일패스로 벨기에의 모든 기차와 버스(시내버스까지도)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자전거 전용도로가 잘 갖춰져 있는데 자전거는 역전 같은데서 손쉽게 빌릴 수 있습니다.
가볼만한 곳
중세와 현대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국제도시 브뤼셀, 다이아몬드로 유명한 항구도시 안트베르펜, 도시전체가 천정 없는 미술관인 브뤼헤, 꽃의 도시 헨트 등은 벨기에를 대표하는 매력적인 도시들로 유럽의 어느 도시 못지않게 여행자에게 즐거움을 줍니다.
유럽 사람들은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을 "작은 파리"라고 부릅니다. 중세 화려한 도시의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구시가와 EC, NATO등 국제기구들이 들어선 현대적 국제도시의 위용이 잘 조화되어 파리 못지않은 아기자기함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스페인 점령시대에는 베네룩스 3국의 중심지였고, 네덜란드 하에서는 왕국의 중심지였으며, 안트베르펜과 더불어 플랑드르파 화가들의 활동중심으로서 문화적으로 상당한 무게를 지니고 있는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도시 중심에 있는 사각형 광장인 그랑 플라스(Grand Place)만 보아도 이 도시의 과거가 얼마나 화려했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고딕과 바로크식 건물들이 현란한 느낌을 줄만큼 장식적입니다.
광장을 둘러싸고 시청사, 왕의 저택(시립박물관), 길드하우스(상인조합) 등이 있습니다. 시청사는 고딕양식의 건물로 96m의 첨탑이 눈길을 끕니다. 420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종루가 나옵니다. 탑 끝에 브뤼셀 수호신을 상징하는 황금색 바람개비가 있습니다.
중세기 300년에 걸쳐 만들어진 고딕양식의 생 미셀 대성당도 볼거리이며,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과 비슷한 양식으로 지어진 왕궁도 훌륭한데 내부는 8월에만 공개됩니다.
왕립미술관은 고전미술관과 근대미술관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플랑드르파 화가들의 걸작을 대할 수 있는 곳입니다. 브뤼겔과 루벤스 두 화가의 작품에 많은 공간이 배정되어 있습니다.
안트베르펜은 플라망어 지역을 대표하는 도시입니다. 시의 중심부인 마르크트 광장에 인접한 노트르담 대성당은 시내 어디에서도 보일 정도의 거대한 높이로 우뚝 솟아있습니다. 높이가 123m나 되는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이 성당은 1352년부터 1521년까지의 긴 세월에 걸쳐서 지어진 벨기에 최대의 성당입니다. 여기서도 루벤스의 그림이 성당을 더욱 빛나게 합니다.
루벤스는 화가로서의 활동시기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내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습니다. 루벤스의 생가를 방문해서 플랑드르 미술을 대표하는 위대한 화가의 숨결을 느껴보는 것도 좋은 시간이 될 것입니다.
벨기에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다이아몬드 시장입니다. 안트베르펜 중앙역 부근에 다이아몬드를 거래하는 보석상들과 세공공장들이 모여 있고 다이아몬드 박물관도 있습니다. 박물관에 가면 다이아몬드 원석과 생산지, 또 그에 따른 품질, 옛날의 세공도구와 방법을 볼 수 있는데 한쪽에 명품 다이아몬드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다이아몬드 세공은 형태그리기, 쪼개기, 절단하기, 둥글게 만들기, 단면 깎기 등 다섯 단계로 소개됩니다. 원석의 형태와 결을 살펴 최대한 가치를 낼 수 있도록 절단되고 둥글게 깎아지면, 최고 숙련공에게 넘겨져 "브릴리언트 커트(Brilliant cut)"라고 하는 단면 깎기에 들어갑니다. 이 작업이 다이아몬드에 있어 제일 중요합니다. 둥근 것을 처음 18면으로 깎고 그 다음 표준 면인 58면으로 깎아 나가는데 각 면의 크기가 일정하고 각도가 정확해서 "균형을 유지한 광채"가 나와야 최고 등급을 받기 때문입니다.
벨기에는 세계가 공인하는 다이아몬드의 중심시장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의 세공이 - 첨단 자동화 시대에 - 아직도 일일이 사람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명품을 만드는 데는 사람의 손보다 나은 기계가 없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