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면서
바쁜 세상을 숨 가쁘게 살아오면서 나를 되돌아보는 촌각의 시간도 아까와 오직 앞만 보고 달려왔을 뿐인데 자서전 쓰기에 나오면서 과거를 돌아보는 소중한 기회가 내게 찾아온 것 같다.
기껏해야 글을 쓰다가 보면 가끔 옛 추억을 소환하게 되는 일 외에는 단 한 번도 심도 있게 고향과 유년 시절을 회상 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깊이 있게 들여다볼 기회가 될 것 같다.
유년 시절의 추억과 함께 난 내 생의 전환점이 된 퇴직 후의 생활을 위주로 엮어 나갈 계획이다. 나 위주로 앞만 보고 달려 오던 이기적인 생활에서 아들을 군에 보내면서부터 아내를 우리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제주살이를 통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제주 올레길을 완주하게 되고 또 싼티아고 순례길로 이어졌다.
이렇게 만남을 통해 내 삶은 점점 더 활력을 찾게 되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가 새로운 계획을 세우게 하고 또 나를 앞으로 나가게 하는 힘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인생에서 만남은 이렇게 중요하다.
우린 인생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남은 인생이 결정될 수도 있다고 본다. 높이 높이 비상할 수도 또,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이렇게 만남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도 있다. 자서전 쓰기에서 만난 두 분 선생님을 통해 남은 인생이 또 어떻게 변화 되어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또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면서…
자서전 쓰기를 마치면서
자서전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라에선 왜 아까운 나랏돈을 들여가면서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에게 자서전을 쓰게 하는 걸까? 큰 업적을 남긴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사회에 귀감이 될 만한 삶을 산 것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것이 내겐 큰 화두였고 의문이었다.
생각 끝에 스스로 내린 결론이 지금껏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면서 자신이 존재 이유와 가치에 대해 돌아보고 늦었지만 잘못한 일은 반성하고 나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을 찾아가 진심 어린 사과로 용서를 빌면서 남은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이 시간이 그동안의 내 삶을 되돌아보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그저 그렇게 무미건조한 나만을 위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하나하나 쌓인 과거를 들추어 내면서 새로운 내 모습도 보았다.
어렸을 때 힘들고 어려웠던 환경에서 아버지 친구분들의 도움으로 시작한 사업이 정포 공장에서 뉴 대구 택시로 확장 발전하면서, 한때는 남부럽지 않게 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버지의 주식 투자의 실패로 택시회사를 처분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유고로 고향집과 농토만 어머니께로 돌리고 공장을 비롯한 모든 상속을 형님이 받으시게 하는데 형제자매들이 동의하였다. 형제자매들이 그렇게 한 까닭은 아마 아버지께서 생전에 늘 형수님과 어린 조카들을 걱정하시던 모습이 떠올라 그렇게 하는 것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뜻이자 우리 집안을 지키는 일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직장 없이 세상을 등지고 유유자적 세월을 낭비하시는 형님이 돌보셔야 할 가족들을 걱정하는 우애의 발로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91년 내 앞으로 되어 있던 땅을 처분하여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1억 5천만 원의 토지 매각 대금을 형님께 가져다드렸다.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형제자매들의 생각이 거기에까지 이르게 된 것과 나의 행동도 그동안 우리들의 살아온 삶과 무관치 않다고 생각되었다. 장자 우선의 원칙이 엄격하게 지켜지던 대쪽 같은 가정에서 보고 듣고 자라났으니, 성인이 된 후에도 그 생활과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명절이 되거나 가족 행사라도 있는 날엔 온 가족이 큰 집에 모여 여러 날을 함께 보내는 것이 불문율 같은 풍습이 우리 집의 내력이었고, 결혼한 후 에는 자녀들까지 함께 데리고 와서 북새통 속에서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서로 어울리게 하면서 많은 날 들을 그렇게 지내 왔다.
그때마다 형수님은 끼니마다 새로운 반찬과 음식으로 대가족의 식사를 책임 지시면서, 모든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한 끼도 같은 음식이 나오는 법이 없었던 걸로 기억된다.
이러한 일들이 형제자매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물이 자연스럽게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가족 사회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마음먹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따라서 큰 집이 잘 살면 동생들이 힘든 일이 있으면 자연스레 물 흐르듯 언제든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채 몇 년이 못가 큰집 살림은 형수님의 실수로 한 순간 허공으로 사라졌고 지금까지도 그 이유는 모른다. 말씀을 안 하시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형제자매들은 따지지 않았다. 캐묻지도 않았다. 가족 간의 화목과 형제자매 간의 우애가 최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자란 아랫대들이 바람직하게 자라 서로 잘 어울리고 있는 모습들을 보면서 형제자매들은 우리 삶의 흔적을 되돌아보면서도 후회하지 않는다. 형제자매 간의 우애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우리 삶, 최고의 덕목이자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법으로 처리하는 개명된 세상에서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우리 모습을 보고 주변의 많은 어른이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처리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옳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삶은 선택이고 신념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신념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이렇게 사는 삶도 있다는 것이다. 생긴 얼굴 모습만큼이나 사람들의 생각도 신념도 다를 수 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절대 진은 존재 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자 나의 신념이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오면서 배운 것은 비우고 살면 적이 없다. 비우고 살면 맘이 편하다. 비우고 살면 용서가 쉽다. 비우고 사는 삶이 피안에 이르는 길이다.
이렇게 내 삶을 되돌아보면서 아내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고, 이런 나의 삶을 말없이 지켜보며 한 마디 반대도 없이 내 뜻에 따라주며 곁을 지키고 내조해 준 아내에게 고맙고 미안한 생각이 들어 퇴직 후의 삶은 아내와 함께하며 아내를 위하는 삶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살아보니 나이 들수록 같은 생각으로 같은 방향을 보며 함께하는 삶이 아름다운 삶임을 매 순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다.
생전 처음 써 보는 자서전이라 써 놓고 보니 회고록이 된 것 같다.
이런 기회를 제공해 주신 대구 서구 노인복지관과 무더위를 마다치 않고 가르쳐 주신 방종현, 김윤숙 두 분 선생님께도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확인했습니다.
始 終이 좋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내면에 숨은 실력이 글로 세상에 나와 많은 사람들에게
앉아서 세계를 섭렵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