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해도 잘 할꺼야”
-가메다 히사오(亀田 壽夫, Hisao Kameda) 선생님
김 종 근
“사기 아닌가?”
연구실 세미나 시간에 나의 발표를 유심히 들은 가메다 선생님이 냉정한 표정으로 평가한 첫마디였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수개월 준비한 나의 야심 찬 연구결과였기에, 나 자신도 이렇게 좋은 결과에 내심 놀라고는 있었지만, ‘사기’라고 느낄 정도로 설득력이 부족한 발표였는지 낙담했던 것 같다. 연구에 대한 나의 윤리성, 창의성과 정확성에는 자신이 있었기에 꽤 억울했었던 것 같다.
“2-3주 시간을 주시면 보완한 내용을 다시 발표하겠습니다.”
이렇게 발표는 마무리 지었다. 반성도 하고 인정받지 못했다는 섭섭함도 컸지만, 좋은 내용으로 인정받을 가능성을 보았다는 기쁨도 꽤 컸다.
일본 문부성 국비장학생으로 선발되어 1987년 8월에 도쿄에 있는 전기통신대학 정보공학과의 가메다 히사오 선생님의 연구실에 연구생으로 입실을 허락받았다. 일본의 대학에서는 대학원에 정식 입학하기 전에 연구생이라는 신분으로 연구실에 참여해서 자질을 검증받은 후 시험을 거쳐 정식으로 대학원에 입학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전에 2년간 일본 도쿄에 있는 컴퓨터 관련 회사에서 프로그래머로 근무한 이력이 있어 일본어 의사소통에는 거의 문제가 없었지만, 한국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에 바로 입학을 희망하는 나에 대해 가메다 선생님은 의구심 반, 기대반으로 맞이해 주셨다. 장학생 신분이라 생활비를 비롯한 모든 학비는 학업을 수행하는 동안 문부성이 충분하게 지원해 주기 때문에 경제적인 고민은 거의 없었다. 모든 역량을 학업에만 쏟을 수 있는 환경이라 큰 다행이었다.
가메다 선생님은 동경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시고 전기통신대학(電気通信大学)에 부임하신 후 I.B.M 왓쓴 연구소 방문연구원을 거치면서 컴퓨터 분야 연구를 시작하셔서 운영체제, 분산처리 등에 큰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 이후 컴퓨터 관련 기기의 성능향상에 큰 관심을 가지셨고, 큐잉이론 등을 활용한 성능평가 분야에서는 일본에서 최고로 꼽히는 저명한 분이시다. 연구실에서 수행하는 연구 내용은 컴퓨터 및 분산처리 시스템의 새로운 구조 제안과 큐잉이론과 같은 상당히 어려운 수학을 이용하는 평가 작업을 주로 수행하고 있었다. 연구실에서는 매주 일주일간의 연구 혹은 공부한 내용을 정리 발표하는데, 입실한 이후 선생님은 몇 개의 연구 논문을 주시면서 읽어보고 정리한 내용을 세미나 시간에 발표하게 하셨다. 비교적 쉬운 내용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수많은 수학 표현이 들어간 내용을 파악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수개월 동안 헤매는 과정을 통해 조금씩 적응이 되어가던 때에 다행히 박사과정에 정식 입학할 수 있었다.
입학 후에는 학점 취득을 위한 수업내용도 쉽지 않았지만, 연구에 대한 요구 수준도 높아졌다. 그때 선생님이 평소에 관심이 많은 내용이지만 그동안 다른 학생들이 잘 파악하지 못했던 내용이라면서, 논문 하나를 주시면서 열심히 읽어보라고 하셨다. 주신 논문은 Tantawi와 Towsley의 “Optimal static load balancing in distributed computer systems”였다. 분산시스템의 수학적인 모델을 대상으로, 시스템의 전체 최적화 방안을 연구한 것으로 편미분한 모델 함수들을 단계적으로 풀어 해를 구하는 방식으로 최적해를 찾아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사실 단 세 줄로 표현한 위의 연구 내용을 어느 정도 파악하는 데는 고통스러운 6개월 정도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어느 정도 내용이 파악되자 갑자기 ‘이 문제를 왜 이렇게 어렵게 푸는가’라는 의문이 생겼고 고민하고 있던 중에 해결의 실마리가 꿈속에서 갑자기 보였다. 이미 컴퓨터를 활용하는 프로그래밍에는 어느 정도 경험을 가지고 있던 터라, 이진 탐색법과 같은 알고리즘을 잘 적용하면 동일한 모델에서 최적해를 훨씬 빠르게 찾을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새로운 방안은 기존논문의 모델 함수는 그대로 이용하고, 중간의 단계적 함수 해결 과정은 생략하고, 새로 제안하는 알고리즘으로 목적하는 최적해를 바로 찾아내는 방안을 제시했다. 새로 제안된 방식의 정확성과 유효성을 평가하기 위해, 기존 방식의 단계적 함수 해결 과정과 새로 제안된 알고리즘 기반 해결 과정을 수개월에 걸쳐 모두 FORTRAN 프로그램으로 구현하고 비교 평가하였다. 상당한 인내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성능평가 결과는 놀라웠다.
그 당시는 컴퓨팅 환경이 열악했기에, 컴퓨팅 자원의 절약이나 컴퓨팅 시간의 감축은 성능향상에서 중요했다. 동일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제안한 알고리즘 기반의 새로운 방식은 자원은 1/n정도 사용하고, 처리시간은 1/3정도 소요되는 결과를 얻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문제해결 방식을 이해하는데, 훨씬 쉬워서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다양한 파라메타 환경에서 두 방식을 비교하였는데, 모든 최적해 결과는 정확하게 일치하면서, 성능향상 차이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보완된 실험 결과와 기존 방식과의 차이를 열심히 정리한 내용을 가지고 다시 세미나 시간에 발표했다.
“아, 지난번엔 이해가 부족했다. 정말 대단하다!”
정말 흔히 볼 수 없었던 감탄을 가메다 선생님이 해 주셨다.
“제대로 보완하면 박사학위 논문 내용 수준으로 손색이 없다!”
그다음에 또 보완된 내용으로 발표했을 때 가메다 선생님이 보이신 반응이셨다.
연구실에는 일본인 학생들과 더불어, 중국인, 인도인, 브라질인 등 외국 유학생이 많았지만, 한국인 유학생을 처음으로 연구실 멤버로 받으신 선생님은 처음에는 지켜보기만 하셨다. 나는 가족을 한국에 두고 혼자서 유학을 갔던 터라 빠른 연구성과가 절실히 필요했기에, 일요일을 제외한 6일간은 매일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당시에 일본은 토요일이 휴무라 토요일에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연구실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연구실에는 자연스럽게 나 혼자만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토요일에도 자주 연구실에 나오시던 선생님과 가끔 차나 점심식사를 같이하면서 친밀감을 높여갔던 것은 참 좋은 기회였다. 연구실 분위기에 완전히 적응하고, 어느 정도 연구 성과가 나오기 시작하자, 내가 잘 모르는 일본의 학교생활, 연구자의 생활, 일본의 문화 등에 대해서도 많이 가르쳐 주셨다.
사실 이전에 2년 정도 도쿄에서 회사원 생활하는 동안 어지간한 곳은 거의 가 보았기 때문에 특별히 돌아다니거나 가보고 싶은 곳도 별로 없었다. 시부야 근처의 도쿄대 교양학부가 있는 캠퍼스 근방에 문부성 국비유학생들 전용의 유학생회관이 있는데, 이곳에 거주할 수 있어서 거주 정착에도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일요일이면, 전용 테니스장에서 유학생들과 어울리는 것이 큰 즐거움의 하나였다.
여름에는 희망하는 유학생들을 데리고 선생님이 직접 운전하여 동해안 쪽에 있는 섬에도 가고, 태평양 쪽의 섬에도 놀러 가곤 했다. 섬 주변의 자연환경 보존이나 일본 민박의 즐거움을 잘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여행에서 무엇보다 즐거움은 민박집의 현지 식재료로 만들어주는 저녁과 아침 식사였다. 특히 섬의 민박집에서는 양동이를 주면서 소라나, 조개 등을 직접 잡아 오라고 해서 잡아 온 것이 저녁 요리로 나왔는데, 해변에는 소라나 조개가 지천으로 널려 있어, 정말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약간 깊은 바위틈에 전복이 보여, 동료에게 나의 몸을 위에서 눌러달라고 부탁하고 잠수하여 전복을 따오는 것를 보고, 선생님은 “김군은 못하는 것이 없네”라며 기뻐해 주셨다.
전기통신대학 정보공학과 박사학위 취득을 위한 심사조건에는 국제 저명 논문지에 최소한 논문 한편 게재, 국제 저명 학술대회에서 최소 논문 한편 발표라는 조건이 있었다. 가능한 빨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고 싶어 하는 상황을 이해하신 선생님은 내가 제안한 알고리즘 기반 최적화 방식 해결방안 내용의 정확성과 가치를 높이는 데 많은 도움을 주셨다.
그래서 비교 대상 논문인 T&T방식에 대해 K&K(Kim&Kameda) 알고리즘을 비교 평가하는 논문으로 작성해 당시에 상당히 저명했던 IEEE Transactions on Computers 논문지에 투고하게 되었다. 좋은 내용의 논문이라 하더라도, 재심사 등을 거치면 게재까지 1~2년 정도의 시간은 걸리는 게 일반적이지만, 선생님은 이 논문은 좀 더 빠르게 게재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자신을 보이셨다. 정말 기쁘게도 투고 후 몇 달 만에 약간의 수정 후 바로 게재라는 놀라운 심사결과가 날아온 것이다. 그리고 보완한 내용이 ‘An algorithm for optimal static load balancing in distributed computer system’ 제목으로 몇 개월 후에 논문지에 게재 확정되었다.
가장 어려운 학위 심사조건 하나를 통과한 것을 선생님은 본인의 일처럼 기뻐하셨다. 사실 같은 해에 정보공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한 동기가 5명 있었는데, 박사과정 3년 내에 국제저명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한 사람은 혼자 밖에 없었고, 3년 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입학동기도 혼자 밖에 없었다.
박사학위 취득이 거의 확실해지는 분위기가 되자, 어느 날 선생님이 식사에 초대해 주셨다. 일본에서는 같이 식사를 한다고 해도 대부분은 각자가 자기 먹은 것을 계산한다. 선생님이 밥을 사 주시겠다고 나를 데려간 것이다. 내가 한국에 빨리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은 충분히 알지만, 전기통신대학에 교원으로 남을 생각이 없느냐고 물어 주셨다. 물론, 굉장히 감사하고 좋은 기회인 것은 맞지만, 일본에서의 회사생활 경험과 가메다 선생님의 교수로서의 생활 패턴을 잘 알고 있던 나는 선생님만큼 열심히 일에 매달려 살 자신이 서지 않았다. 또 다행히 국내에서도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기관들이 몇 군데 있었기에, 상황을 설명하고 감사드렸다.
무난히 학위취득이 확정되고 귀국이 가까워지던 때에, 선생님이 조언 하나 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김군은 앞으로 무얼 해도 잘해 나갈 것 같네, 대학이 평생직장이 된다면 가능하면 본부 보직은 사양하고 학생교육과 연구에 집중하는 것도 큰 보람을 가지는 것이네.”
가메다 선생님은 이후 쯔꾸바 대학에서 정년퇴임 하셨고, 퇴임 이후도 연구 활동에 관심이 많으셨다. 3년 반 동안 가메다 선생님 옆에서 배우고 느낀 것들은, 이후 나의 교직과 연구생활에서 큰 이정표가 되었다.
첫댓글 김 교수님, 고맙습니다. 일본에서의 박사과정 학생이 입학하고 연구를 진행시키는 과정과 컴퓨터 공학에서 새로운 분야를 발견해 나가는 학생의 진지함을 눈에 선하게 그리셨네요. 그런 날들의 긴장과 결기가 있어 대학에서 후학들을 맞는거지 싶습니다. 원고 내내 '김군'과 '선생님'도 일본 문화를 그대로 느끼게 합니다. "대학이 평생직장이 된다면 가능하면 본부 보직은 사양하고 학생교육과 연구에 집중하는 것도 큰 보람을 가지는 것이네."라고 하시는 학자의 음성도 깊게 닿습니다. 물론 국비 장학생이라 경제적 어려움은 없으셨다니 읽으면서도 반갑구요.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