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왕 4년, 마침내 기울어지던 고려는 三傑(삼걸)이라 일컫는 최영, 이성계, 정몽주 등 3인 중에서 당사자 이성계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남은 정몽주가 피살되면서 결국 고려는 망하게 된다.
이제 새나라가 들어서는 과정에서 정몽주에 관한 이야기는 빼놓을 수가 없다. 정몽주는 자는 달가(達可)이고 호는 포은(圃隱)이다. 지주사(知奏使)를 지낸 습명(襲明)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이씨는 만삭이 되어 산기를 느끼던 중 진통이 잠시 멎으면서 꿈을 꾸었다. 그때 백발을 늘어뜨린 도인의 풍체를 갖춘 신인이 나타나 말했다. “그대는 지금 성인의 도(聖道)를 살신성신의 자세로 구현할 귀한 생명을 잉태하였다. 내가 특별히 이 난초를 줄 터이니 그 향기를 길이 보존하도록 하라.”
“신령님, 너무나 감사하옵니다. 난초의 향기가 길이 보존되도록 하겠습니다.” 이씨 부인은 너무나 기뻐하면서 난초를 받아들고 화단으로 가다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황급히 일어나 보니 난초는 하나도 상하지 않고 오히려 봉오리가 맺혔던 것이 아름답게 활짝 피어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좋아하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그로부터 사흘 뒤 아이가 태어났다. 꿈 애기를 듣고 남편은 이렇게 제안 하였다.
정몽주의 부: 부인의 꿈을 듣고 보니 이렇게 이름을 짓는 것이 좋겠소. 꿈몽(夢) 난초 란(蘭), 몽란이라고 말이오. 부인은 어려서부터 몽란이를 철저하고 엄격하게 가르쳤다. 몽란은 총명하였다. 그가 일곱 살 되던 해였다. 어머니가 물레질을 하다가 노곤하여 일손을 멈추고 잠시 졸았는데 꿈을 꾸었다. 장독대가 있는 뒤란에는 마침 배가 탐스럽게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그때 황금빛 어린용이 뒤란에 열린 배를 따먹고 있었다. 어머니는 신기하여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용이 부인을 바라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바로 그때에 어디선가 함성이 일어나고 화살과 창이 용에게 날아와 박혔다. 어머니는 너무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꿈이 너무 이상스러워서 뒤란으로 난 창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용이 배를 따먹던 그 자리에 일곱 살 난 몽란이가 배를 따먹다가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빙그레 웃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꿈 몽 자에 용 룡(龍) 자를 붙여서 이름을 몽룡으로 바꾸었다. 몽룡은 워낙 예민한 데다가 엄격한 어머니의 훈도와 스승의 가르침을 받으며 학업에 정진하여 불과 14세에 진사 시험에 무난히 합격하였다. 16세가 되었을 때는 가르치던 스승도 이렇게 말하였다.
“나로서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습니다. 반드시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입니다.”몽룡이 18세가 되던 어느 날 새벽이었다. 이번에는 그의 아버지가 꿈을 꾸었다. “나는 주나라의 주공(周公)이니라. 장차 그대의 아들은 후세에 길이 그 명성을 떨칠 것이니 소중히 키우도록 하라.”“감사하옵니다. 꼭 명심하여 시행하겠습니다.” 몽룡의 아버지 정관(鄭瓘)은 다시 아들의 이름을 꿈 몽 자에 주공이 썼던 두루 주(周) 자를 따라 몽주로 개명하였다. 20세가 되던 해 아버지 정관이 세상을 떠나자, 정몽주는 사흘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통곡하다가 혼절했다. 묘소 옆에다가 묘막을 짓고 혼자서 산중에서 3년 간이나 지냈다. 당시 공민왕은 특별히 어명을 내리기도 했다. “참으로 지극한 효성이로다. 과인은 특별히 가상히 여겨 그의 집에다 정표(旌表), 효자각을 세워 표창하리라. 즉각 시행하라.”
공민왕 10년(1361년)에 홍건적 20만 명이 쳐들어왔을 때다. 그때 김득배, 정세운, 안우, 이방실 등이 홍건적을 물리치는 데 크나큰 공을 세웠다. 그러자 당시의 세도가 김용이 그들을 모함하여 공을 세운 사람들은 모조리 참살당하게 되었다. 김득배는 정몽주의 스승이었다. 그는 언제나 “너는 언제나 불의에 굽혀서는 아니 된다. 배운 자는 참되게 살아야 하는 법이니라. 알겠느냐?”라며 훈계를 했다. 이에 정몽주는 “스승님의 가르침, 기필코 봉행하겠습니다.”라며 답하곤 했다. 정몽주의 스승 김득배는 공을 세우고도 능지처참을 당했다. 천하의 대역 죄인으로 몰려 목이 잘려서 효시(梟示: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아 뭇사람에게 보임)되었다. 토막 난 시체가 길바닥에 굴러다녀도 누구 하나 나서지 못했다. 간신 김용의 비위에 거슬렸다간 죽음을 면치 못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때 벼슬이 예문관겸열(藝文館檢閱)에 불과한 정몽주가 죽기를 각오하고 어전에 나아가 눈물로 호소하였다.
“전하, 이번 신의 스승인 김득배와 정세운, 이방실은 홍건적을 물리치는 데 너무나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재상인 김용이 적과 내통한다고 거짓으로 꾸며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게 하였습니다. 다시 조사하시면 그 흉계가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옵니다. 모두들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김용의 권세가 무서워 입에 올리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전하, 국가에서 공이 큰 신하를 포상하지는 못할망정 대역무도한 죄인으로 몰아 능지처참을 시켜서야 되겠습니까? 그 시체조차 오가는 행인들의 발길에 채이게 한다면 어찌 군신간에 신뢰 기강이 바로 서겠습니까? 바라옵건데 우선 신으로 하여금 네 장군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지내도록 윤허하소서. 그것이 어려우시면 우선 신의 스승(김득배)의 시신만이라도 장사지낼 수 있도록 윤허해 주시옵소서.”
“방금 그 말이 사실이렷다?” 정몽주; “어느 안전이라고 기군망상(임금을 속이는 죄)의 죄를 범하겠습니까? 신은 목숨을 걸고 아뢰는 바입니다.”바로 그때에 최영이 나서며 말했다. “전하, 신도 이번 사건에 무언가 수상쩍은 점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정몽주 예문관검열의 간청대로 윤허하심이 옳은 줄 아옵니다. 그리고 신에게 처형된 네 장군의 문제를 세세히 다시 조사하도록 어명을 내려주소서. 기필코 진상을 밝히겠습니다.”공민왕: 과인은 이번 문제를 전적으로 경의 처사에 맡길 터이니 잘 처리하오.
정몽주의 간청을 받아들여 최영이 직접 나서서 김득배 등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냈고, 김용(金鏞)이 덕흥군(德興君)을 내세워 역모를 꾸민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결국 김용은 사형을 받았고 김득배 및 억울하게 죽은 장군들은 신원이 복권되었다. 정몽주는 스승 김득배의 장례식을 치르고자 상주로 직접 내려가 제문을 지어 스승의 원혼을 위로하였다. 그로 인하여 정몽주는 충의지사로서 점점 명성이 높아갔다. 정몽주는 과거에 응시하여 3장(場)에 걸쳐 장원급제를 했다. 예문관검열이 된 지 얼마 후인, 그의 나이 불과 25세 때의 일이었다. 정몽주는 벼슬길에 나가서도 더욱 학문에 정진한 결과 후일에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종(祖宗)으로 추앙받게 된다. 목은 이색은 그를 이렇게 평한 바 있다.
“정몽주는 횡설수설하는 말이라도 모두가 이치에 어긋남이 없다.” 정몽주는 관직에 나간 후 탁월한 외교 수완을 보여 그 동안 중국과 일본에까지 그 명성을 널리 떨쳤다. 공민왕 12년, 이성계가 여진족을 토벌할 때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뛰어난 묘책으로 이성계를 도와서 화주에서 승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 지리산 왜구 소탕전에도 이성계와 함께 출전하여 병법이나 지략으로 도우면서 장졸들을 격려하였다. 그 밖에도 권고문을 지어 적병을 회유하고 설득했고 중앙과의 연락, 물자 보급, 백성들을 위무해 주는 역할도 하면서 적개심을 고취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계로 정몽주와 이성계는 누구보다고 친밀하고 각별한 사이였다. 정몽주의 문과 이성계의 무가 혼연일체가 되어 국가에 크게 이바지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한 공적으로 정몽주는 벼슬이 전농시승(典農寺承)에서 다시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승진되었다.
벼슬이 올라갈수록 정몽주는 망해 가는 고려의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고자 힘을 아끼지 않고 더더욱 애를 썼다. 백성들이 억울하게 벼슬아치들에게 곡식이나 토지를 빼앗기는 폐단을 철저히 막기 위해서 그릇된 제도를 개혁하는 데 고군분투하였다. 그리고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세워 유학 진흥에도 힘쓰는 동시에 향교를 세워 후진을 양성하고 학문을 권장하기고 했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후 신세대와 구세대, 문반과 무반 사이에 점점 알력이 크게 작용했다. 문반의 대표자는 정몽주이고 무반의 대표자는 이성계였다. 이성계는 전에 정몽주에게 몇 차례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성계가 삭방도(朔方道)의 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오랑캐 장수 삼선(三善)과 삼개(三介)
가 병사들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그때 정몽주의 협조 덕택으로 물리칠 수 있었다. 또 전라도의 운봉(雲峰)에서 왜구들의 침입을 당했을 때도 판도판서(版圖判書)로서 도와주었고 계해년 동북면에서 나하추가 침입했을 때도 구원병을 파병시켜 도와주었다. 그러나 이성계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기미를 간파한 후부터 서로의 사이가 급격히 벌어지게 되었다. 서로의 견해나 위치가 상반되면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것이 냉혹한 현실인 것이다.
기울어가는 고려 왕실을 다시 부흥시키려는 정몽주와 그 추종자,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흥세력이 팽팽하게 대립하던 때에 결정적으로 서로가 충돌하는 계기가 생겼다. 명장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은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공양왕 4년(1392년), 명나라에 갔던 왕세자가 돌아오는 것을 마중 나가는 길에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낙마를 하여 부상당했다. 이성계가 중상을 입고 호송된다는 소식을 듣고 정몽주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성계의 위세에 기가 질려 떨기만 하는 공양왕을 애써 설득시켰다. 그리하여 유승세(柳勝世) 등을 자객으로 보내어 이성계의 심복들을 먼저 잡아들이게 했다. 이성계의 세력들은 미처 손을 못쓰고 잡혀 들어왔다. 이때 잡혀온 사람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삼사좌사 : 조 준(趙 浚) 정 당 문 학 : 정 도 전(鄭 道 傳)
밀직사 : 남 은(南 誾) 전 판 서 : 윤 소 종 / 남 재(尹 紹 宗 / 南 在)
이들 외에도 줄줄이 잡혀왔는데 그것은 호랑이같이 두려운 존재인 이성계의 발톱과 이빨들을 뽑은 후 이성계를 제거하려는 작전이었다.
그 낌새를 눈치챈 이성계의 셋째 아들 방원이 즉시 아버지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알렸다. 그런데 이성계를 죽이려는 자객 유승세(柳勝世)는 이성계와 길이 엇갈렸다. 그는 일행을 데리고 해주로 가는 도중에 소를 타고 가는 어느 꾀죄죄한 촌로와 마주치게 되었다. 유승세의 부하가 길을 물었다. “여봐라, 노인. 해주로 가는 지름길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알고 있습죠.”“그럼 그곳으로 우리를 안내하라.”자객 일행은 소를 탄 노인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날래 말을 타고서도 느릿느릿 걸어가는 소를 탄 노인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여봐라, 노인. 그렇게 빨리 가면 어찌 하느냐?”“무사님들, 그렇게 느려서야 어찌 목적을 이루시겠소. 어서 오시오.”유승세 일행은 말을 힘껏 몰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유승세는 그제서야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봐라, 노인. 네 정체가 무엇이냐?” “허허허, 나 말이냐. 나는 천운(天運)의 변화를 상징으로 예시하는 임무를 대행할 뿐이로다. 고려는 인륜 도덕이 문란하여 제왕이 모후를 증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미 하늘이 노하신 지 오래니라. 정몽주를 비롯한 충의지사의 뜻은 가상하지만 이미 천의(天意)는 돌이킬 수 없느니라.”“여봐라. 이 요망한 늙은이를 잡아라. 사로잡지 못하면 활로 쏘아 죽여도 좋다!”자객 일행은 노인을 향하여 일제히 활을 쏘았지만 화살은 노인의 몸에 닿기도 전에 힘없이 떨어졌다. 노인은 이러한 말을 남기고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하하하, 하늘의 뜻은 만고불변의 진리니라. 하하하.....”
이상한 노인 때문에 유승세 일행은 공연히 시간만 지체되었고 이성계와 길이 어긋나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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