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우리 어머니( 1 )
2015-01-11 17:37:49
어머니 우리 어머니!
이 세상 모든 어머니는 위대하다.신사임당에 버금가는 자애와 교육애를 간직하고 혼신을 다 해 펴오신 분들이다.
사범학교 졸업앨범 주소록 말미에 좌우명이 밝혀저 있는데 내 좌우명은 `어머니의 사랑`이다.언제 봐도 좀 남다르다.왜 그랫을까? 내가 5살(만 3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랑, 찾을 길 없고 오직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과 은혜만 내 가슴 속에 꽉차 있었음이 드러난 것일 게다.
어머니는 화순군 한천면 정도리, 기암이 솟아있는 용암산 기슭에서 능성 구씨 용모, 광산 김씨 지순 외조부모 사이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나 16살 어린 나이에 14살 아버지께 시집오셨는데 아버지는 글공부만하는 선비셨고 어머니는 규수로서 갗출 길쌈,예절,일상은 물론 한글 해득을 하셔서 한글 소설을 자주 읽으셨고 `사둔서`,를 잘 쓰셔서 마을 처녀들이 시집갈 때 어머니가 쓰신 사둔서를 지참하고가서 시어머니께 드리면 사둔 내외가 안사둔의 간절한 당부를 마음에 새겨 며느리를 곱게 받아드리는 정감응 갖게 하셨다.
어머니가 시집올 때만해도 상머슴을 드려야 할만큼 마을에선 부자집이였기에 시부모로부터 애틋한 사랑을 많이 받아 '시집 잘 왔구나' 하는 생각도 많이 했었는데 시부모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그 부를 지키지 못하고 지인의 허황된 유혹에 빠저 전답을 팔아 순천에 비단가게를 차려 글 밖에 모른 선비가 장사를 시작하셨으니 탈이 날 밖에, 처음부터 만류 하셨지만 `여필종부`라 따르지 않을 수 없으셨단다. 시작한지 채 2년도 못되 빛더미에 않게 되자 4남매를 데리고 귀향해 소작농을 얻어 굶어 죽지 않도록 온갖 힘든 일을 혼자서 감당하셨단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 2
2015-01-11 20:07:46
이 모두가 내가 철들기 시작했을 때 몇번 지나가는 말로 들려주셨고 조부모님 아야기는 몇번 들려주셨지만 아버지 이야기는 입을 다무셔서 궁금한 게 있어도 여쭙지 못했다.
보통 체격에 조선 여인상 그대로 연약하기만한 여인은 그때부터 강인한 어머니로 변해 어려운 세파를 이겨내시며 오직 4남매 양육과 교육에 헌신하시면서도 전답을 늘리셨다.초저녁 한잠으르 피로를 푸시면 이른새벽부터 낮 동안 소작농과 자작농의 논밭에서 `사모곡에 나오는 노랫말처럼 호미자루 벗을 삼아 쉴 새 없이 일하시다 끼니 때가 되면 종종걸음 집으로 오셔서 밥이든 죽이든 자식들의 배를 채워주셨던 어머니,효를 하고싶어도 눈물 말고 무었으로 갚으리까 어머니!
그 가난 속에서도 큰누님은 일제 말 국민학교를 졸업시켜 시집을 보내셨다.식구를 줄여 가난을 덜기도 했지만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는 만행을 피하는 수단이고 길이였단다.형편이 그러함에도 큰아들에 대한 기대와 남다른 교육열로 국민학교 졸업하던 해에 광주B중학교에 진학시키므로서 학비조달에 이중고를 격으셔야만 했다.
작은누님은 국민학교 졸업하던 해부터 재봉틀을 사다가 삯바느질로 가정경제를 돕도록 하셨다. 당시로서는 참으로 지혜롭고 현명하신 처사였지만 아들 편애의 틀은 깨지 못하셨으니 그 안타까운 심정이 오죽하셨을까.
형이 광주 유학생으로 가끔 주말에만 내려오니 집에 남자라고는 나뿐이였으므로 국민혁교 고학년 때부터 논밭에 나가 쉬운 일부터 어머니를 도왔다.내가 6학년 때 6.25 전쟁이 터저 몇달간 휴교가 되기도해 교육과정을 제대로 이수하지 못한체 1951년 3월 실력이 형편 없는 졸업생이 되고 말았다.학년 초 2개 반이였던 학생 수가 졸업할 때는1개 반으로 줄었고 중학교 잔학은 겨우 10여명, 진학할 수 없기는 나도 마찮가지였다.
졸업과 동시 어머니를 도와 머슴처럼 일을 했다.어머니는 밭,나는 논에서 김매기,벼베기,물가두기,풀 베어다 퇴비만들기,땔감 베어나르기 그래서 이웃사람들은 날 능주댁(어머니 택호) `담사리라 별칭하기도 했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 3
2015-01-12 02:47:53
내가 18살 봄에 형이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휴전협정 전의 치열한 공방전에 병력이 부족하자 바로 입대영장을 받았다,.
논산훈련소를 거처 전방부대로 배속받아 3년넘게 군생활을 하셨다.난 형님의 제대를 생각하고 연습삼아 광주 소재 중학교 두 곳에 원서를 내고 응시를 했지만 모두 낙방했다.하지만 그걸 거을삼아 2천문답집을 사고 6학년 1.2학기 교과서를 모두 구해놓고 어머니의 승락까지 받아 본격젹인 주경야독의 진학공부를 했다.가을 수학이 끝나자 6학년 때 담임이셨던 문제덕선생님이 그 해에도 6학년담임을 하셨기에 찾아뵙고 뜻을 밝혔더니 4년 후배들과 청강수업을 쾌히 허락하시면서 격려까지 해주셨다. 후배들 사이에 끼여들자니 부끄럽기도 했지만 오직 한 길 향학의 불은 모든 걸 다 태울 수 있었다.
1955년 봄 부푼 꿈으로 특기모집인 사범병중 ,전기인 서중을 차례로 응시했지만 낙방 또 낙방 후기인 북중에 응시해 합격했다.천행이였다. 뛸듯이 기뻤다.드디어 꿈이 이루어졌다.
입학 하자마자 잠자는 시간 말고는 학교공부만 했다.땡볕 아래 농사짓는 일에 비하면 그야말로 눠서 떡먹기였다.그 결과 1학기말 전학년에서 3명 뽑는 `특대생`(장학생)이 되어 어머니의 학비부담을 덜어드리게 되었다.3년 내내 그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주말마다 집에 내려가 어머니 농사일을 돕고 월요일 새벽 화순역 시오리길 걸어 통학열차로 등교하려니 때로는 숙제를 다 못 해 벌을 받았고 수업시간에 꾸뻑 졸다가 화들짝 놀라 허벽지를 꼬집어 졸음을 쫓기도 했다.그러나 어머니의 고생을 생각하며 고생이라 여기지 않았다.논을 팔아서라도 고등학교 졸업을 약속하셨던 어머니의 사랑과 교육열,이 세상 모정은 위대하고 아름답다 여기지만 서른셋 꽃다운 나이에 홀로되셔서 먹고살기에도 피눈물 나는 그 기ㅡㄴ 세월 난 어머니의 한숨이나 눈물을 단한번도 보고 들은 적이 없었다.보이지 않으려 심지를 굳히고 살으셨음을 난 알기에 때로는 애처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난 어머니의 권유로 사범학교에 진학하기로 했고 천행으로 합격했다. 3년간 국민학교 교사의 자질을 갖추는데 게을리하지않았다.1961년 봄 졸업과 동시에 자격증을 받았지만 내 나이 만22세 5.16군사정권이 기피자로 낙인 찍어 발령을 받을 수가 없게되자 자원입대하여 3년간의 군복무를 마친 뒤에야 교사발령을 받았다.어머니의 기뻐하심에 조금의 효를 했구나싶어 나도 기뻤다. 완도 학산초등학교 첫 발령을 시작으로 벽지,면소재지,읍소재지 광주동운초등학교에서 정년을 할 때까지 38년간 사랑과 열정으로 가르쳤던 제자들 줄잡아 2,500명, 경향 각지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보람 아닌가! 돌아보는 삶에 어찌 후회가 없으리오마는 38년 교단생활 내가 섰어야 할 그 자리에 난 누가 뭐라해도 자부와 긍지를 갖고 각자가 지닌 잠재력을 키우고자 열정을 쏟았다
남은 삶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날로 새롭게, 무엇보다 즐겁게 살면서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할 준비도 하리라.
아내는 어머니께서 회갑 지난 섣달 그믐을 며칠 앞두고 내가 서른살 때 결혼했으니 벌써 49년째 제법 잘 사는 집에서 시집와 쥐꼬리만한 월급봉투에 의지해 4남매 양육과 교육을 당차게 해내면서 가정경제를 일궈낸 아내에게 마음속으로만 간직헸던 말 "정말 고생 많았소. 당신 고생 덕분에 자식들 건강히 잘 자라 독립했고 예쁜 손주들 재롱보며 노년이 이리 편안하고 즐거우니 참으로 행복하오. 지하에 계신 양가 부모님들도 모두 기뻐하실 것이오.선영님들께 지성 다하며 남은 생도 열심히 행복하게 삽시다. 참으로 고맙소. 사랑하오."
어머님, 빙모님, 감사합니다.가난 극복속에서 날 가르치셨고 빙모님께서는 신접살림에 식구는 불어나고 박봉 쪼게계돈넣어 불리는 알뜰한 딸 마음고생 헤아려 가을이면 보내주신 쌀가마 그 은혜 갚고자하나 무슨 소용입니까.살아실 제 못한 효 애닯다 어이합니까.무덤 앞에 절하고 읍하며 가슴으로 우옵고 마음으로 보답합니다. 이승에서 베푼 착한 삶은 저승에서 극락이라 했습니다. 부디 극락 영생하십시요.어머니 ! 어머니 !
출처 : 죽연 이승정 카페(https://cafe.daum.net/jy480801)에서 복붙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