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1년 (숙종 37)에 진사가 되고, 1713년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군자감직장에 처음 제수되었다. 1715년 전적·병조좌랑·지평을 역임하고, 1717년 용인현감이 되어 부모를 봉양하였다.
이 때 병신처분(丙申處分)으로 광주(廣州)로 물러나 있던 소론의 실세 최규서(崔奎瑞)와 많은 논의를 하였다. 그 뒤 1722년 병조좌랑·지제교를 역임한 뒤 이듬해 삭녕군수(朔寧郡守)로 나아갔다. 1728년(영조 4) 장령, 1743년 병조참지를 거쳐 1747년 승지가 되었다.
1749년 한성부우윤, 1751년 형조참판을 거쳐 호조참판이 되었다. 그 뒤 1753년 노인직(老人職)으로 지중추부사가 되었고, 1754년 공조판서에 이르러서는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문장에 매우 능하였고, 만년에는 『주역』을 연구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다. 80세에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고, 편서로 『완악편(玩樂編)』 3권·『경사증역(經史證易)』 2권·『좌역참증(左易參證)』 2권 등이 있다. 시호는 양효(良孝)이다.
조선의 문신. 초명은 중흠(重欽), 자는 석여(錫餘), 호는 오천(梧泉). 시호는 양효(良孝). 본관은 풍산(豊山). 판서 만조(萬朝)의 아들. 진사에 합격하고 1713년(숙종 39) 문과에 제3위로 급제, 벼슬은 양사(兩司) 참의ㆍ참판 등을 거쳐 공조 판서에 이르러 기사(耆社)에 들어간 후 80세가 되어 숭록(崇祿)에 올랐다. 문장에 능하고 만년에는 주역(周易)을 깊이 연구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다.
조선 후기의 문신. 영조 때의 제주목사. 초명은 중흠(重欽)이며 자는 석여(錫餘)이고 호는 오천(梧泉)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판서 만조(萬朝)의 아들이다. 1711년(숙종 37) 진사가 되고, 171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고 1723년(경종 3) 7월 병조정량에서 경기도 마전군수(麻田郡守)로 전출되어 이듬해 계파(啓罷)에 의해 사지하고 떠났다. 1728년 장령, 병조참지를 거쳐 1747년(영조 23) 승지(承旨)가 되었다. 그 후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 형조참판을 거쳐 호조참판이 되었다. 1753년 노인직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고 이듬해 공조판서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문장에 능했고, 만년에는 주역(周易)을 연구, 많은 저서를 남겼다. 시호는 양효(良孝)이다. 편저(編著)로는 「완악편(玩樂篇)」, 「경사증역(經史證易)」, 「좌역삼증(左易三證)」, 「사평(史評)」 등이 있다. 1738년(영조 14) 10월 목사 이희하(李希夏)이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1739년 9월에 신병으로 인하여 떠났다. o 이도원(李度遠) · 김계중(金繼重) 항목을 보라.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석여(錫餘), 호는 오천(梧泉), 초명은 중흠(重欽), 시호는 양효(良孝). 아버지는 형조판서 홍만조(洪萬朝)[1645~1725]이다.
[활동사항]
1713년(숙종 39) 증광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723년(경종 3) 7월 병조정랑에서 경기도 마전군수로 전출되었고, 1728년(영조 4) 사헌부장령을 지냈다. 1738년(영조 14) 10월 이희하(李希夏)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고 1739년(영조 15) 9월에 신병으로 인하여 떠났다.
제주목사에 부임하자 흉년이 들어 조정에 진휼을 요청하였다. 조정에서 공급된 나포미(羅?米) 3천 5백 석, 상진황모(常賑還?) 5천 석, 저치미(儲置米) 1천 5백 석, 씨콩 7백 석을 도민에게 나누어 주고 후일 상환하도록 하였다. 유생들을 예의로서 대접하고 향교의 「청금생안(靑衿生案)」을 마련하여 토목 역사 등을 면제해 주었다.
제주목사를 떠난 이후 병조참지, 승정원승지, 한성부우윤, 형조참판, 호조참판을 거쳤다. 1753년(영조 29) 노인직으로 지중추부사가 되었고, 1754년(영조 30) 공조판서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저술 및 작품]
문장에 능하였고, 만년에는 주역을 연구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다. 편저에 『완악편(琓樂編)』·『경사증역(經史證易)』·『좌역삼증(左易三證)』·『사평(史評)』 등이 있다. 또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동에 있는 용연 바위에 ‘취병담(翠屛潭)’이라 음각된 마애명(磨崖銘)이 남아 있다.
[상훈과 추모]
후일 도민들이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비(碑)를 세웠다.
(홍중징 묘소) - 배방읍 세교리에 위치
공조 판서 치사 봉조하 오천 홍공 묘지명 병서〔工曹判書致仕奉朝賀梧泉洪公墓誌銘 幷序〕
예전에 내가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내고 정익(貞翼)이라는 시호를 받은 홍공(洪公)의 묘갈명을 외람되이 지은 기억이 난다. 공의 막내아들 공조 판서 치사공(致仕公)이 졸하여 장사를 지낸 뒤에 그 효자 생원(生員) 순보(純輔)가 먼 고을로부터 상복 차림으로 찾아와서 묘지명을 부탁하니, 내가 감히 사양할 수가 없다. 살펴보건대, 공은 풍산(豐山)의 세가(世家)이니, 시조 지경(之慶)은 고려조(高麗朝)에 벼슬하여 관직이 국자 직학(國子直學)에 이르렀다. 그 아들 휘 간(侃)은 지제고(知制誥) 벼슬을 하였고 호가 홍애(洪厓)이니, 문집이 세상에 전한다. 후에 벼슬한 분이 대대로 이어지다가 휘 이상(履祥)이 있었으니, 경술(經術)로 우리 목릉(穆陵 선조(宣祖))을 섬겨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다. 호는 모당(慕堂)이요, 문봉서원(文峯書院)에 배향되었으니,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 휘 탁()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부사(府使)를 지내고 좌참찬에 추증되었고, 조부 휘 주천(柱天)은 현감을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부친 휘 만조(萬朝)는 바로 정익공이니, 세상에서 명절과 덕망을 완비한 분으로 일컫고 있다. 모친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돈녕부 봉사(敦寧府奉事)를 지내고 이조 참의에 추증된 진(瑱)의 따님이요, 부마(駙馬) 길성위(吉城尉) 대임(大任)의 손녀이다. 뒤에 정경부인(貞敬夫人)의 봉작을 받았다. 임술년(1682, 숙종8) 겨울 12월 14일에 공을 낳았다. 공의 초명(初名)은 중흠(重欽)이었다. 어렸을 때에 꿈에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말하기를, “어찌하여 ‘징(徵)’으로 이름을 쓰지 않는가. 훗날에 반드시 크게 현달하리라.” 하였는데, 정익공이 이 이야기를 듣고 중징(重徵)으로 개명토록 하고 자를 석여(錫余)로 지었다고 한다. 공은 기국과 도량이 진중하고 원대하여 장난치고 노는 나이에 이미 촉망을 받았다. 정익공이 무릎 위에 앉히고는 공을 노룡(老龍)으로 지목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집안을 크게 일으킬 사람은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 하였는데, 마침내 문장에 진력하니, 뭇사람들이 미치기 어려운 공의 필력(筆力)에 굴복하였다. 신묘년(1711, 숙종37)에 진사가 되었고, 3년 지난 계사년(1713)에 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규례대로 군자감 직장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뒤에 장악원으로 옮겨졌다. 을미년(1715)에 전적(典籍)으로 있다가 병조 좌랑에 제수되고, 또 그날로 지평에 의망(擬望)되었으니, 세상에서 이른바 통청(通淸)이라는 것이다. 가을에 대부인(大夫人)의 상을 당하였다. 정유년(1717)에 용인 현감(龍仁縣監)으로 나갔으니, 부친을 봉양하기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당시에 상공 최규서(崔奎瑞)가 벼슬에서 물러나 그 고을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사람을 대할 때마다 노상 공을 칭찬하기를, “내가 이 고을에 거주한 뒤로, 읍재(邑宰)가 된 자로서 실제에 힘쓰고 명예를 구하지 않는 자는 오직 이 사람뿐이다.” 하였다. 경자년(1720)에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 임인년(1722, 경종2)에 병조정랑 지제교(兵曹正郞知製敎)에 제수되었다. 병조의 아전 중에 은총을 믿고 간교한 짓을 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에게 발각되었다. 관장(官長)이 기필코 비호하려고 하였으므로 공이 다투어도 소용이 없었다. 이에 즉시 정사(呈辭)하여 그만두고자 하니, 관장이 뉘우치고 사죄하였고 마침내 법대로 처리될 수 있었다. 계묘년(1723, 현종3)에 외직으로 나가 삭녕 군수(朔寧郡守)가 되었다. 다음 해에 체차되어 돌아왔다. 또 이듬해 가을에 장령에 제수되었다가 사복시 정으로 옮겨졌다. 겨울에 정익공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무신년(1728, 영조4) 봄에 상기를 마치자 또 장령에 제수되었다. 당시 고향 집에 있었는데, 나라에 역란(逆亂)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졸지에 듣고는 달려가 임금에게 문후하기 위해 즉시 길을 떠났다. 길을 우회해 가며 난관을 뚫고 도성에 득달해서는 곧장 입궐하여 숙배한 뒤에 도로에서 들은 바를 진달하였는데, 창졸간에 질문에 따라 적절히 응답하였는데도 핵심을 짚어 낸 것이 많았으므로 상이 자못 가납하였다. 당시에 국옥(鞫獄)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는데 적괴가 몰래 달아나 숨자 공은 여러 대신(臺臣)들과 소장을 올려 역적이 체포되기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파가저택(破家瀦澤)과 노적(孥籍)의 형전(刑典)을 시행하기를 청하였다. 여름 4월에 상이 애통해하는 교서(敎書)를 내렸는데, 간곡하고 안타까워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공이 역란이 일어나게 된 근본 원인을 파헤쳐 아뢰기를,
“양역(良役)을 변통(變通)하는 문제는 전후의 연대(筵對)에서 발언한 것이 매우 많았지만 끝내 하나로 귀결되지 못하여 그대로 답습하면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방치해 두고 있습니다.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도는 백성들이 서로 이끌어 도적의 소굴로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백성을 편안히 하는 계책은 수령을 잘 고르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으니, 수령이 적임자가 아니면 전하께서 아무리 날마다 덕음(德音)을 내리더라도 결국에는 여리(閭里)에까지 파급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당시 궁가(宮家)의 절수(折受)와 여러 도(道)의 물선(物膳) 및 승여(乘輿)나 복식(服飾) 등의 도구와 백사(百司)의 시급하지 않은 비용을 혁파하라는 명이 내렸다. 공이 또 이로 인하여 근원적인 처방에 대해 논하면서 권면하여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천하의 일은 임금의 일심(一心)에 근본하니, 천리(天理)와 인욕(人慾)이 호리(毫釐)에서 나뉘지만 국가의 존망이 여기에 매여 있다고 합니다. 근일의 일을 놓고 보건대, 이는 바로 천리가 발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참으로 이 같은 마음을 항상 지니고 이를 확충하여, 난역이 이미 평정되어 생민(生民)들이 다소 안정되었다고 하지 마시고 의리로써 재단하실 수 있다면, 옛말에 이른 바 ‘깊은 근심이 성군을 만들고, 많은 어려움이 나라를 일으킨다.’라는 것이니,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입니다.”
하였는데, 뒤에 비지(批旨) 가운데에 이 대목을 거론하면서 특별히 칭찬한 것이 세 차례나 되었다. 7월에 종부시 정으로 있다가 순천 부사(順天府使)에 제수되었다. 경술년(1730, 영조6)에 인수(印綬)를 풀어놓고 돌아와 오촌(梧村)에 터를 잡고 살면서 오천(梧泉)이라 자호하였다. 정사년(1737)에 사성(司成)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파직되었다. 무오년(1738, 영조14)에 장악원 정에 제수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나갔다. 제주는 옛날의 탐라국(耽羅國)이니, 남쪽의 아주 먼 바다 가운데에 있다. 지역이 멀고 일이 번다하여 사람들이 대부분 기피하였는데, 공은 명을 받고는 부임하여 당무(當務)에 마음을 다 쏟으니, 섬 백성들이 편안해하였다. 기미년(1739) 가을에 체차되어 돌아왔다. 경신년(1740)에 형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이듬해에 외직으로 나가 봉산군(鳳山郡)에 보임되었고 또 그 이듬해에 파직되어 돌아왔다. 정묘년(1747) 여름에 은대(銀臺 승정원)에 들어갔다. 뒤에 연이어 장연(長淵)과 영해(寧海) 두 고을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겨울에 또 은대에 들어갔다. 응제(應製)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초모(貂帽)를 하사받았다. 가을에 한성부 우윤에 발탁되었다. 경오년(1750)에 또 형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계유년(1753)에 특별히 호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상이 공의 노쇠한 모습을 보고는 섭양(攝養)을 잘하도록 하고, 또 등과한 해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은 올해 나이가 일흔둘이고, 계사년(1713, 숙종39)에 등과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기억하기로, 옛날 계사년에 어용(御容)을 받들고 강도(江都)로 들어갈 때에 경의 선친이 경기 감사로서 배행했었다. 경은 그해에 등과한 것이다.”
하고, 이어 승지에게 전교를 쓰라고 명하고 특별히 지중추부사에 제수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선조(先朝)께서 연로하고 덕망 있는 신하를 생각하여 일찍이 경의 선친과 한두 신하를 인견(引見)하시면서 몸소 옥음(玉音)을 내어 말씀하기를, ‘경들이 왔는가?’ 하였는데,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이 하교를 생각할 때마다 서글픈 감회를 이기지 못하겠다.”
하였다. 공은 이어 사은숙배하고 국조(國朝)의 고사(故事)에 따라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그 이튿날 영수각(靈壽閣)의 어첩(御帖)을 봉심(奉審)하였다. 갑술년(1754, 영조30) 봄에 공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당시 선원전(璿源殿)을 개수(改修)하고 있었으므로 빨리 전내(殿內)에 입시하라는 명이 있었다. 상이 또 이르기를,
“계사년(1713, 숙종39)에 어용을 받들고 강도로 들어갈 때에 경의 선친이 배행했었는데 경이 그해에 급제하였다. 지금 또 진전(眞殿)을 개수하는 일에 참여하였으니, 희귀한 일이다. 내가 특별히 제수한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어서이다.”
하였다. 그날 밤에 선온(宣醞)하여 세 차례 행주(行酒)하였는데, 상이 별도로 2작(爵)을 하사하여 다시 은근한 뜻을 보였다. 병자년(1756) 가을에 내전(內殿)의 하교를 받들어 기로소의 신하들에게 음식을 하사하고 초상을 그려 첩(帖)으로 만들어 기로소에 보관하도록 명하였다. 무인년(1758) 겨울에 상이 기로소의 신하들을 소견(召見)하였다. 상이 먼저 《대학(大學)》의 1장(章)을 읽고 신하들에게 차례대로 읽도록 명하고 이르기를, “이는 걸언(乞言)하는 뜻이다.” 하였는데, 공이 이로 인하여 진달하기를, “본래 밝은 덕은 인욕에 의해 흐려지지 않습니다.”라고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 읽은 것을 아직까지 이해하고 있는가?” 하였다. 경진년(1760, 영조36)에 이르러 또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 아래에 모이라고 명하였다. 액례(掖隷)로 하여금 부축하여 섬돌을 오르게 하고 음식을 하사하였다. 일이 끝나자 상이 친히 어제(御製)를 써서 기각(耆閣)에 현판으로 걸고 또 그림을 그려 첩을 만들도록 명하고서 여러 신하에게 반사하였다. 공이 출반(出班)하여 아뢰기를,
“선신(先臣)이 누차 치사(致仕)를 청하였건만 허락해 주시는 은혜를 입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신이 몹시 늙어 귀도 들리지 않고 눈도 보이지 않는 몸으로 침묵한 채 지금에 이르렀으니, 만약 신의 딱한 처지를 헤아려 주시는 은혜를 입는다면 미처 펴지 못한 선신의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에 공에게 물러나 쉬는 것을 허락하고 다달이 쌀과 고기를 보내도록 하였으며, 여덟 구로 된 시를 친히 써서 내렸다. 공이 앞으로 나아와 공경히 받고서 물러나니, 보고 듣는 이들이 모두 놀라워하였다. 공이 정익공(貞翼公)의 사당에 고유제(告由祭)를 올리고 집안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제는 나의 소원을 다 이루었다.” 하였다.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한 채 매화와 대나무에 뜻을 부쳐 세월을 보내면서 탄신일이나 문후할 일이 있으면 때때로 병구를 이끌고 반열에 참석하였다. 신사년(1761)에 나이가 여든에 차서 규례에 따라 품계가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올랐다. 4월에 또 음식물과 옷감을 하사받았다. 7월 19일 미시(未時)에 가벼운 병(病)으로 도성 서쪽의 빌린 집에서 고종명하니, 향년 80세였다. 부음이 아뢰어지자, 이틀 동안 정조시(停朝市)하고 조제(弔祭)하며 장례를 돕는 것을 규례대로 하였다. 동년 10월에 용인(龍仁) 하동촌(下東村)에 장사 지냈는데, 자리가 좋지 않은 것으로 인하여 온양(溫陽) 자은교(自隱橋)에 있는 정익공의 무덤 동쪽 신좌(申坐)의 언덕으로 개장(改葬)하였다. 공은 자품(資稟)이 중후하고 흉회가 대범하여 아무리 경황없고 다급한 때라도 일이 없는 듯 태연하였다. 그렇지만 조정에 선 40년 동안 일을 만나면 곧장 앞으로 달려 나가 꺾이거나 굽히는 일이 없었다. 사람을 대할 때에는 격의 없이 웃고 이야기하였다. 누차 주군(州郡)을 맡았지만 가산이 빈한한 것이 여느 선비의 집안과 다를 게 없었다. 규모(規模)는 대체(大體)를 견지하는 데에 힘썼으니, 공평한 마음으로 남의 처지를 헤아려 노여운 목소리와 표정으로 꾸짖지 않았다. 일찍이 자신에 대해 말하기를, “내게 다른 장점은 없다. 사마공(司馬公 사마광(司馬光))이 말한, ‘평생토록 남에게 말하지 못할 일을 한 적이 없다.’라고 한 것에는 혹 가까울 수도 있다.” 하였다. 어버이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는, 공적인 일이 아니면 반드시 어버이 곁에 있었다. 만년에 지은 집이 옛날 집과 다소 떨어져 있었는데 밤에는 반드시 어버이가 주무시기를 기다린 뒤에야 물러 나왔고, 새벽닭이 울면 문득 동복(童僕)으로 하여금 가서 어버이가 편안하신지를 시침(侍寢)했던 사람에게 알아보게 하였다. 새벽에 일어나 소세하고 문안드리는 것을 매일 한결같이 하였다. 작은누님이 일찍 과부가 되자 특별히 어버이의 마음을 생각해서 보살펴 주었다. 누님이 귀녕(歸寧)했을 때에 역질에 걸려 증세가 매우 위중하였으므로 온 집안 식구가 역질을 피해 다른 곳으로 이접(移接)하였다. 공은 차마 누님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정익공에게 청하고서 떠나지 않고 홀로 남아 몸소 약시중을 들었다. 그렇지만 이내 불행히 목숨을 잃으니, 치상(治喪)에 예를 다하고 빈렴을 마친 뒤에 비로소 나왔는데, 공은 끝내 무사하였다. 조상을 받드는 도리는 늙어 갈수록 더욱 독실하였다. 기제(忌祭) 때에는 변두(籩豆)에 올릴 제품(祭品) 일체를 집안사람들을 지휘해 가며 일일이 점검하고 살펴서 정례(情禮)에 흡족하게 된 뒤라야 마음이 편안하였다. 문장은 완곡하고 넉넉하여 고심해 가며 어렵게 지은 태가 없었으니, 그 체재와 격식은 구양자(歐陽子 구양수(歐陽脩))로부터 얻은 것이 많았다. 만년에는 《역(易)》에 대한 연구가 정밀하여 그에 관한 저술로 《완락편(玩樂編)》 3권, 《규반록(窺斑錄)》 1권, 《경사증역(經史證易)》 2권, 《좌역참증(左易參證)》 2권이 있고, 또 《사평(史評)》 2권과 시문 약간 권(卷)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부인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학생(學生) 조(琱)의 따님이니, 통정대부 군수(郡守) 하(何)의 증손녀요, 나암(懶菴) 상국(相國) 언신(彥信)의 후손이다. 기미년(1679, 숙종5) 8월 13일에 태어나 계해년(1743, 영조19) 4월 6일에 별세하였다. 정경부인에 추봉(追封)되었다. 성품과 행실이 정숙하여 종족들이 그 아름다움을 칭찬한다. 공의 무덤에 부장하였다. 아들과 딸을 각각 하나씩 낳았으니, 아들 순보(純輔)는 생원이고, 딸은 사인(士人) 목성리(睦聖履)에게 시집갔다. 순보는 3남 1녀를 낳았다. 장남 계한(桂漢)은 딸 둘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차남 제한(梯漢)은 문장과 행실이 있었으나 요절하여 재종형(再從兄) 수한(授漢)의 아들 낙수(樂叟)를 후사로 삼았다. 막내 욱한(旭漢)은 딸 하나를 두었는데 어리다. 딸은 사인 이지한(李趾漢)에게 시집가서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이백숭(李百崧)이다. 백숭은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어리다. 목성리는 1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목조흥(睦祖興)이다. 목조흥은 딸 하나를 낳았는데 어리다. 딸은 사인 강윤겸(姜允謙)에게 시집갔다. 이어 생각해 보니, 내가 공과 즐겁게 사귀었는데 나이는 내가 한 살이 더 많다. 비록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마음만큼은 거울이 비추듯 서로 통하여 어제 본 듯하였다. 성인께서 말씀하기를, “친구를 버리지 않으면 백성들이 각박해지지 않는다.” 하였으니, 공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내가 머리가 다 빠지도록 죽지 않고 있다. 비록 억지로 붓을 들어 글을 짓고자 하나 이미 정신이 나가 글자를 이루지 못하니, 이는 유명(幽明) 간에 마음을 저버린 것이다. 다만 본래의 가장에 의거하여 묘지명을 짓기를 평소 주고받는 편지글처럼 하였을 뿐이니, 공이 만약 영혼이 있다면 필시 지상에서 괴로워하는 나를 비웃을 것이다.
선비는 중후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 士不可以不重 중후하면 위엄이 있게 마련이라오 / 重必有威 위엄이란 사물의 작용이니 / 威者物之用也 마치 반석이 스스로 견고하매 사람들이 그 움직이기 어려움을 아는 것과 같다오 / 如盤石自固而人知其難動 공이 만년에 영광과 은총을 입은 것은 / 公之晩年遭逢光寵 사람 때문이 아니라 길몽 때문이라오 / 匪人也維吉有夢
[주D-001]노룡(老龍) : 문원(文苑)의 대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송대(宋代) 용도각(龍圖閣)의 직각(直閣)을 소룡(小龍), 직학사(直學士)를 대룡(大龍), 학사(學士)를 노룡이라 했던 데에서 온 말이다. 《泊宅編 卷上》 [주D-002]역란(逆亂) : 영조 4년(1728)에 일어난 무신란(戊申亂)을 가리킨다. 이인좌(李麟佐), 박필현(朴弼顯), 정희량(鄭希亮)의 주도로, 독살된 경종(景宗)의 원수를 갚고 밀풍군(密豐君) 이탄(李坦)을 추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무력에 의한 정권 찬탈을 기도한 반란이다. 충청 병사 이봉상(李鳳祥)을 죽인 다음 진천(鎭川), 안성(安城), 죽산(竹山) 등으로 진격하였으나, 용인(龍仁)에 은거 중이던 최규서(崔奎瑞)의 고변(告變)으로 출동한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에 의해 대패하였으며, 이인좌는 죽산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참형에 처해졌다. 《이성무, 조선왕조사, 동방미디어북스, 2002, 776~780쪽》 [주D-003]애통해하는 교서(敎書) : 무신란이 평정된 뒤에 중외(中外)의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기로(耆老), 군민(軍民)에게 내린 교서를 가리킨다. 《英祖實錄 4年 4月 22日》 [주D-004]걸언(乞言) : 옛날에 임금이 나이 많고 덕이 높은 원로들에게 때때로 술자리를 베풀어 가르침을 청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문왕세자(文王世子)〉와 〈내칙(內則)〉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