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문 시인의 ‘시조로 고전 읽기’5](21)<마음과 마음> ~(25)<어떤 좌우명> ♣ 웹진 《문예마루》 제5호(2026. 3)
문예마루 ・ 18시간 전
URL 복사 이웃추가
(21) 마음과 마음
원효가 입적하자 그의 아들 설총 선생!
콕콕 빻은 유골에다 눈물범벅 상(像)을 빚어
계시던 분황사에다 고이 모셔 놓았다
설총이 모셔놓고 그 옆에서 절을 하자
바로 그 아버지 상이 홀연 돌아봤다는데,
일연이 찾았을 때도 돌아본 채였다는데...*
아무리 아들이라도 아버지가 부처시니
아버지 부처님을 차마 바로 볼 수 없어
옆에서 우러러보며 절을 했던 모양이고,
아무리 부처라 해도 아들에겐 아버지라
다 커도 저 어린 것 어찌 살지 안쓰럽고
자꾸만 눈에 밟혀서 돌아봤던 모양이다.
* 출전: 『삼국유사』, <元曉不羈>.
원효의 소상이 봉안되어 있었던 분황사의 모전석탑(사진 최병섭)
분황사에 세워졌던 원효 비석의 받침대(사진 최병섭)
(22) 참 귀한 손님
손수 가꾼 여덟 개의 화분에 국화가 탐스럽게 핀 어느 해 가을날의 일이었다.
풍류와 낭만이 도저했던 이요정(二樂亭) 신용개(申用漑: 1463-1519) 선생이 집안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저녁 우리 집에 귀한 손님 여덟 분이 오실 것이니, 술과 안주를 푸짐하게 준비하도록 해라.” 그러나 날이 다 저물도록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집안사람들이 의아해 하자, 선생은 그저 “조금만 더 기다려라. 틀림없이 오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윽고 보름달이 휘영청 솟아오르고 환한 달빛이 집안으로 흘러들어와 꽃빛과 달빛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러자 선생이 술과 안주를 가져오게 하고 여덟 개의 화분에 소담스레 피어 있는 국화를 가리키며, “이 친구들이 바로 나의 귀한 손님이다.”라고 하더니, 국화마다 주안상을 별도로 차려 놓고 각각 두 잔씩 술을 주고받는 것이었다.* 이윽고 ‘쿵’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취한 이요정 선생 엉덩방아 소리다.
* 출전: 강효석, 『대동기문(大東奇聞)』.
(23) 뿌린 대로 거두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게 이런 건가 싶습니다.
한 역관(譯官)이 빈손으로 북경에 갔다가 돌아올 때 단골집 주인을 보고 느닷없이 흑흑 흐느껴 울었답니다. 주인이 괴이하여 그 연유를 물었지요. “압록강을 건너올 때 몰래 남의 은전(銀錢)을 숨기고 오다가 발각되어 제 은전까지 관가에 몰수당했습니다. 이제 빈손으로 돌아가 본들 살아갈 방도가 없으니 차라리 여기서 죽고 말랍니다.” 역관이 냅다 칼을 빼어 들입다 자살하는 시늉을 짓자 깜짝 놀란 주인이 다급하게 칼을 빼앗은 뒤에, 몰수당한 은전이 모두 얼마냐고 물었더니, ‘삼천 냥’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내대장부가 제 몸이 없어지는 것을 걱정해야지 어찌 은전이 없는 것을 걱정한단 말이오. 지금 여기서 죽으면 당신의 처자식들은 어떻게 되겠소. 내가 그대에게 만 냥을 빌려드릴 테니, 이 돈을 5년 동안 잘 굴리면 다시 만 냥을 모으게 될 거요. 그때 본전만 나에게 갚으시구려.” 그 역관은 그 만 냥으로 크게 무역을 하여 5년 만에 드디어 거부가 되자, 역관의 명부에 자신의 이름을 삭제하고 다시는 북경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후에 북경에 들어가는 친구에게 가만히 부탁했습니다. “북경에서 그 단골 주인을 만나게 되면 틀림없이 나의 안부를 물을 걸세. 그러면 온 집안이 염병에 걸려 몽땅 다 죽어 버렸다고 말해주게.” 황당하기 짝이 없는 부탁이라 그 친구가 난처해하니, “그렇게 거짓말을 하고 돌아오면 내가 100 냥을 줄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북경에 가서 그 단골 주인을 만났는데, 예상대로 역관의 안부를 묻기에 부탁받은 대로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얼굴을 가리고 대성통곡, 비가 쏟아지듯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탄식했습니다. “하늘이시여, 하늘이시여! 그토록 착한 사람의 집안에 어찌 이토록 참혹한 재앙을 내리시는 겁니까.” 그는 그 친구에게 100 냥을 주면서 부탁했습니다. “그 사람의 처자식까지 몽땅 다 죽어 제사를 지내 줄 사람조차 없게 되었으니, 그대가 돌아가거든 이 돈으로 제물을 마련하고 재(齋)를 올려 내 대신 명복을 빌어 주시구려.” 친구는 양심의 가책으로 마음이 심하게 요동쳤습니다. 하지만 이미 거짓말을 해버렸기 때문에 도리 없이 100 냥을 받아 터덜터덜 돌아와서 그 역관 집을 찾아갔다가, 그만 모골이 송연해져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습니다.
염병에 온 집안 몽땅, 죽고 없었거든요.*
* 출전: 박지원, 『열하일기』, <옥갑야화(玉匣夜話)>.
(24) 급한 일
1905년 11월 어느 날
전 참판 홍만식(1842~1905)은 여주의 살림집에서 어느 손님과 바야흐로 장기를 두고 있다가,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느닷없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두고 있던 장기를 끝까지 다 둔 후에, 천천히 장기알을 통에 담고 나서 함께 두던 손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내가 다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그대는 이제 그만 돌아가시게나.”
바로 그
다급한 일이
목숨 끊는 일이었다.*
출전: 황현, 『매천야록(梅泉野錄)』.
(25) 어떤 좌우명
“그 어느 해, 그 어느 달, 그 어느 날 있었던 일”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다 알고 있는 어느 큰선비의 서창(書窓) 언저리에 이런 뜬금없는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누가 그 글을 보고 ‘그날이 무슨 일이 있었던 날이냐’고 여쭈어보았더니, 그 선비의 대답이 이랬답니다.
“실수로 그만 여종을 범하고 만 날일세.”
*출전: 박세채, 『남계집(南溪集)』. 「기소시소문(記少時所聞)」
이종문 시인
이종문 시인 교수
1955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한문학을 공부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한 시조시인이기도 하다. 그동안 『내 마음 좀 알아도고』 등 다수의 시집과 시선집 『웃지 말라니까 글쎄』, 산문집 『나무의 주인『을 간행한 바 있으며, 『인각사 삼국유사의 탄생』, 『역주 삼국유사』(공역) 등 한문학에 관한 다수의 논저를 집필하였다. 중앙시조대상 등 여러 상을 받았으며, 현재 계명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출처] [이종문 시인의 ‘시조로 고전 읽기’5](21)<마음과 마음> ~(25)<어떤 좌우명> ♣ 웹진 《문예마루》 제5호(2026. 3)|작성자 문예마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