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나에게 처음 선택의 기회를 준 사람
⑧작가의 긴 여행#26》0804 추천으로 들어간 회사생활
by관찰작가의 여유시간
Aug 4. 2026
기술을 배우기 위해 여러 작은 공장을 옮겨 다니던 시절이었다.
내게 직장은 오래 다닐 곳이 아니었다. 월급보다 기술이 먼저였다. 익힐 것이 남아 있으면 남았고, 더 배울 곳이 보이면 미련 없이 옮겼다.
그렇게 여러 공정을 익혀 가던 어느 날, 나를 처음 액세서리 공장으로 이끌어 준 공장장이 나를 불렀다. 공대를 나온 사람이었다.
"이제는 큰 회사에 가서 배워라."
짧은 말이었지만 그 한마디에는 믿음이 담겨 있었다. 그분의 소개로 나는 뚝섬에 있는 주식회사 청신산업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서울의 액세서리 업계는 그리 크지 않았다. 사선, 씨링, 프로펠러, 꼬체인 같은 제품을 만드는 회사들도 손에 꼽을 정도였고, 서로 가격과 신제품을 경쟁하던 시장이었다. 그 가운데 청신산업사는 규모가 큰 회사였다. 나는 처음으로 큰 공장의 분위기를 경험하게 되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선반 앞에서 작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선반은 쇳조각이 사방으로 튀는 작업이라 가까이 다가오면 위험했다. 고개를 숙인 채 가공에 몰두하고 있는데 누군가 작업 반경 안으로 들어왔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선생님, 조금만 뒤로 물러나 주세요. 칩이 튀면 다치십니다."
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다. 그저 현장에서는 안전이 먼저라는 생각뿐이었다.
퇴근 무렵 사무실에서 나를 찾았다. 들어가 보니 낯선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분이 먼저 웃으며 말했다.
"아까 선반에서 일하던 사람이 자네였나?"
그제야 알았다. 그분이 일본에서 한 달 동안 액세서리 기술을 연구하고 막 돌아온 공장장이었다. 공장장은 내 작업하는 모습을 한참 지켜봤다고 했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열심히 하더라. 마음에 든다."
그날 이후 공장장은 가끔 나를 사무실로 불렀다. 일 이야기도 하고, 살아온 이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말을 했다.
"넌 이 회사에서 나갈 생각은 하지 마라."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웃으며 덧붙였다.
"친구 있으면 데려와."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니, 그분은 기술보다 사람을 먼저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가능성을 먼저 믿어 주는 사람. 내가 큰 공장에서 처음 만난 공장장은 그런 사람이었다.
돌이켜 보면 사람의 인생은 실력만으로 바뀌지 않는다. 먼저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 하나가 새로운 길을 열어 줄 때가 있다.
내게 청신산업사는 큰 공장이었던 것보다, 그런 사람을 만난 곳으로 더 오래 기억된다.
- 브런치 작가 여유시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