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더 브레이브>를 보고 ‘복수’를 말하다
옛(!) 선생께선 은원불망이라는 신념을 품고 사셨는데, 영화 <더 브레이브: True Grit> 따위를 본 뒤 선생이 왜 ‘복수’에 집착하노라 공공연히 밝히셨던가에 새로운 감회가 일어 굳이 이 글을 남긴다.
1. 다시, 복수를 생각한다.
널리 알려진 대로, 강자는 처벌하거나 응징할 뿐, 도무지 복수하지 않는다. 아니, 오로지 복수하지 않음으로서만 강자들은 그네들의 강자됨을 증명하기에, 복수는 오로지 약자의 몫이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를 떠올려보시라. 가시덤불 위에 누워 쓸개를 핥는 일의 목적이랄 것이 있다면, 배때기와 자의식에 비개가 붙지 않게 하려는 의도 외에, 다시 말해, 약자가 놓인 자리에 스스로를 꼼짝없이 못 박아 보려는 몸부림 외에 아무것도 없다. 복수의 다른 말(이라기 보다는 더 적확한 표현)은 바로 ‘기억’인데, 기억 역시도 약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기억과 생존이 얽혀있기에 약자는 기억의 주체다.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표현을 잦게 쓰고 있는 당신은 이미 강자다. 웃는 얼굴로, “지난번에 뵈었더랬지요? 어쩌죠...... 죄송한데, 성함이? 제가 기억력이 영 좋질 않아서요.”라고 인사 아닌 인사를 남용하는 당신은 강자 중에서도 강자다. 잊는 순간 죽고야마는 약자는 외우고 외우고 또 외운다. 갓 군 입대한 이들 모두는 암기왕이 된다는 사실, 찌라시 정보를 꼼꼼히 주워섬기고 있는 이들이 사회경제 및 심리적 차원에서 안타깝게 닮아 있다는 사실, 대체로 가정주부들이 후천적 기억력 항진증으로 의심되는 증상을 앓는다는 사실만을 추려보아도, 기억이야말로 약자라는 삶의 원인이자 결과임을 쉬이 알 수 있다. 약자는 기억하고, 기억하면 약자인 셈이다. 그러니, 복수는 약자, 그것도 기억하는 약자의 몫이다. 약자라는 기억이 살아있는 한, 완료형 시제나 종결형 어미를 얻을 수 없는 복수는 유령같이 떠돌며 시간과 공간 속에서 강자를 괴롭힌다.
2. <더 브레이브>, 복수란 없다.
복수란 시간과 공간을 허송하는 누군가의 유령 같은 삶에서야 가능할 일이므로, ‘시공간압축’(D. 하비) 때문에 잴 것도 없이 평평해진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복수가 없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지 싶다. 현대의 영웅인 배트맨이나 스파이더맨은 따라서 복수 대신 응징밖에 할 수 없는 애매한 처지에 놓이게 되고, 무뎌진 복수의 칼날을 억척스레 어깨에 걸머진 채 아직 살아가는 이들은 ‘복수라는 환상’을 향해 중세와 현대가 뒤섞인 동양을 찾기 마련으로, 이를 가리켜 ‘복수라는 오리엔탈리즘’이라 해도 좋겠다(‘복수’나 그 짝패인 ‘용서’에 천착하는 한국 감독들은 이 새로운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지 갑작스레 몹시 궁금하다.) 시간비용을 치르지 않고 발랄하게 등장하여 곧장 복수에 돌입하는 <더 브레이브>의 소녀와 3년을 식물인간으로 허송세월한 뒤 자리보전에서 벗어나자마자 곧장 일본이라는 동양을 향해 제 복수를 ‘인정’ 받고자 떠나는 <Kill Bill>의 ‘금발의 여전사’는 사뭇 대조적이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니, <더 브레이브>는 ‘복수’와는 무관한 이야기이거나 ‘(없는) 복수’에 대한 이야기다. 분노의 머릿김이 복수라는 물질로 맺히는 유일한 증류관이라 해도 좋을 시간성에 대해 영화는 작정이라도 한 듯 인색하다. 주검이 된 아비 얼굴에 입 맞춰도 좋다는 장의사에 말에 ‘왜 이리 돈이 많이 들었는지’만을 추궁하는 소녀가 목숨 걸고 좇고 있는 진짜 대상은 제 아비의 살해범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살해범이 지니고 있을 제 아비의 자그마한 금괴에 가깝다. 아비 잃은 소녀의 설움을 바라보는 눈빛이 이리 서늘해서야 쓰겠는가 싶어 다시 마음을 곱게 먹어봐도, 영화가 들려주거나 보여주는 것은 ‘앙갚음’이라는 차원의 단순한 복수가 아닌, 사유재산권침범이라는 극악을 다스려야만 정의사회가 구현된다는 현대 자본주의 안에 담긴 서부적 신화에 대한 고찰 정도로 차분히 내려앉는다.
인간과 인간 사이 ‘교환관계’가 종말한지 오래인 자본의 시대에도 복수라는 가면 뒤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연극적 행위가 있다면, 그 실체는 복수의 아우라를 덧씌운 ‘계약관계’의 송사나 소란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아느냐가 <더 브레이브>를 서부영화사의 끝물 정도로 타락시키지 않을 최소한의 관람조건이라 할 수 있다. ‘문명 대 야만’ 이라는 서부영화의 묵은 갈등구조나 ‘지켜야할 공동체’ 그리고 ‘우리의 영웅’을 등장시키는 대신, 신생 개인-자본이라 할 수 있는 고용주 소녀와 닳고 닳은 개인-노동력이라 할 수 있는 피고용인 ‘꾼’을 등장시킴을 통해 <더 브레이브>는 서부영화라는 장르영화의 역사적 인식에 충실함을 증명하는 동시에1), (복수라 이름 붙일 수는 없는) 계약관계의 이행 속에서 어느새 계약 밖에 자리한 공동체로 번져나가는 개인들을 묘사함을 통해 복수라는 형식 자체가 불가능해진 현대에 (없는) 복수를 말하며 서부영화의 계보에 새로운 물꼬를 터간다.
3.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복수.
이쯤에서, 영화 <더 브레이브>의 원제가 <True Grit>란 사실을 살피자면 참 재미난데, ‘grit’라는 어휘에는 ‘용기’라는 뜻 말고도 ‘먼지’라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먼지의 본질 자체가 시간의 바스라짐임을 떠올려본다면, <동사서독東邪西毒 Ashes Of Time>이나 <연연풍진戀戀風塵 Dust in the Wind>의 (영문)이름은 탁월하다). 물론, 코엔 형제는 앞서 말한 대로 이 영화에서만큼은 시간성에 대해 작심한 듯 무심하기에, 영화 속 주인공은 시간과 더불어 온 존재가 바스라지는 대신에 잘라낼 것(영화 말미에 급작스레 독사에 물려 검게 변한 팔)을 잘라내고 살아남는다. ‘복수’에 대한 영화가 아니기에 <더 브레이브>에는 분노라는 괴물, 혹은 괴물이 되어버린 분노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음도 눈여겨 볼만하다. 제 아내의 살인자에게 복수코자, 그를 잡아다 사설감옥에 가둔 채 거둬 먹이며 말 한마디 건네지 않으며 죽음보다 섬뜩한 외로움으로 복수하다가 결국 이녁마저 살인자와 함께 유폐되는 인물을 그려낸 <엘 시크레토: 비밀의 눈동자 The Secret In Their Eyes>나, 박찬욱의 복수 3부작 속 복수인들이 그러하듯, 복수는 복수의 주체를 공격하는 자가면역질환의 양상을 띠며 주체를 천천히 갉아먹다가 결국 (객체가 아닌) 그 주체의 파멸과 함께 완결된다. 시간 속에서 증오나 분노는 어느 정도 마모되기 마련이기에, 복수의 주체가 분노와 함께 불타오르는 것만으로 복수가 이루어질리 없다. 가연성 분노를 비가연성 습관으로 바꾸는 일이 복수의 관건으로, 이를 위해 복수의 주체는 특정 사건/상처를 중심축으로 삼아 삶의 소소한 요소들을 그 사건/상처 주변에 섬세하게 배치해 나간다. 이런 비용을 치르는 인생에게, 아니 오직 그 인생에게만 복수는 무의식으로 잠적하지 않은 채 의식 위에서 내내 자리한다. 잊지 않기 위해, 아프게 기억하고 그 기억대로 살기 위해 시간을 거스르며 투쟁하는 삶은 치명적이다. 복수를 위한 삶에서 남은 것이라고는 ‘기억’과 그 기억에 무비판적으로 반응하는 기계 혹은 좀비 같은 몸뿐으로, 복수가 이렇듯 물질이 되었다면 이제 복수는 ‘기억’이라는 이름 대신 ‘괴물’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그리하여 정작 복수의 주체가 복수의 객체와 대면하게 될 즈음에는 분노도 원한도 남아 있질 않다. 복수를 다짐했던 그 때 그 사람은 이미 시간 속에서 바스라져 먼지가 된 것이다.
복수가 ‘시간’의 문제이고 ‘바스라짐’이 문제이기에, 복수는 인간적, 너무나 인간적이다. 모범적인(?) 복수인의 삶이라면 차라리 일관된 ‘생활’의 한 형식이라 해도 좋을 지경이다. 시간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도사’들이나 시간 속에서 바스라지지 않는(다고 믿어지는) ‘신’에게 복수란 없다. 신과 인간 사이에 교환관계가 성립하지 않듯, 당연히 신은 복수하지 않는데, 인간들의 복수를 대리하여 처리해주는 신이 있다 해도 이는 강자의 응징이나 처벌일 뿐, 인간사에서 주고받는 박잡한 차원의 복수와는 그 층위가 영 어긋난다. 그럼에도 구약성서는 야훼를 굳이 ‘복수의 화신’으로 그리고 있어 ‘사랑과 용서의 화신’으로 예수를 등장시키는 신약성서와는 아주 딴판인데, 물론 복수 대신 사랑을 택한 예수는 ‘신성神性’을 향해 크게 한걸음 나아감과 동시에 ‘인성人性’으로부터는 조용히 한걸음 뒷걸음질 친다. ‘분노/처벌’ 대신 ‘사랑/용서’를 밑절미로 채택한 결과, 사막지역의 민족종교였던 유대교가 기독교라는 이름의 신경증을 타고 세계로 퍼져나갔음은 익히 알려졌다. 세상 많은 이들이 예수를 좋은 역할 모델이나 선생으로 삼는다지만, 정작 그를 따라 살기 위해 요구되는 기나긴 신경증이라는 비용에 대해서는 별 말들이 없다2)는 사실은 여전히 신기한 일이다.
성서학자였던 리꾀르는 복수는 정의가 아님을 주장하면서 윤리적인 것보다 더 윤리적인 것, 즉 ‘사랑’이라는 ‘약속의 극단적 형식’을 요청했으며, 그의 조교 데리다도 그 선생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입장을 내비친 바 있고(‘윤리는 위험한 것이다’), 나치즘을 살아낸 아렌트마저도 용서와 사랑을 내내 놓지 않는다. 오직 인간에게, 그것도 약하디 약한 인간에게만 허여되는 ‘복수’라는 특권을, 자본주의에서는 이제 찾으려야 찾을 수 없다는 ‘복수’라는 틈새를, 오로지 이 좋은 선생들의 이 좋은 말에 힘입어 코푼 휴지처럼 내쳐야 하는 것일까. 신학이나 윤리학처럼 사람됨을 뛰어넘으려는 고고한 욕망에 지질함이라는 재갈을 물리며 굳이 사람됨의 한계를 잘 부려보겠노라 공부하는 이들이라면, 조금은 더 질기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복수’를 버텨 살아야 하는 일은 아닐까.
그렇다면, 내 오른쪽 뺨을 이유 없이 때린 너에게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내 왼쪽 뺨은 결코 내어줄 수 없으니 네 오른쪽 뺨을 후려 갈길 기회를 쫓아다니며 오늘도 내일도 마냥 괴물로 변해야만 하는가. 예수의 뜨거운 사랑 혹은 그 사랑을 붙들려다 얻은 신경증이 아니라면, 무사의 서늘한 검劍 혹은 그 검을 붙들려다 얻은 자상刺傷만이 우리에게 놓인 선택지의 전부란 말인가. 몇 가지 선택지 정도는 더 있어야 할 일이 아닌가. 우선 김규항의 <예수전> 한 대목을 좀 길지만 하나의 선택지로 덧붙여 본다.
예수에 관한 가장 흔한 오해 가운데 하나는 예수가 무조건적인 용서를 설파했다는 것이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갖다 대라’는 그의 말(마태5:39)은 불의와 폭력에 대한 무기력한 순응을 강요하는 데 활용되어 온 가장 유명한 경구다. 그러나 오늘 좀 더 섬세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이 경구가 오히려 저항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아챈다. 사람은 대개 오른손잡이다. 오른손은 ‘바른손’이며 고대사회에선 더욱 그랬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뺨을 때린다는 건 오른손으로 상대의 왼뺨을 때리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오른뺨을 때리면”이라고 했다.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으로 때렸다는 말이다. 손등으로 때리는 행위는 당시 유다 사회에서 하찮은 상대를 모욕할 때 사용되곤 했다. 그렇게 모욕당한 사람에게 예수는 ‘왼뺨도 갖다대라’고 말한다. ‘나는 너와 다름없는 존엄한 인간이다. 자, 다시 제대로 때려라’하고 조용히 외치는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용서하고 순응하라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단호하게 저항하라, 불복종을 선언하라는 것이다. (187,8)
오른뺨을 맞았으면 왼뺨을 돌려대라. 그것이 바로 가장 여문 복수다. 성질이 못됐거나 급해서 죽어도 왼뺨을 돌려대기 힘들다면, 내 오른뺨을 때린 그의 왼뺨을 야물게 치라. 내가 오른뺨을 맞았다고 상대방의 오른뺨을 건드리지는 않는 일, 받은 것 보다 조금 더 성숙하게 갚아주는 일, 이것은 조금 덜 여문 복수다. 이 광명 천지에 어두침침한 ‘복수’를 다시 이야기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허나, 나는 아직도 ‘제대로’ 왼뺨을 얻어맞아 시원하게 쌈박질 한바탕 했다는 이들을 거의 만나본 적이 없다. 내 주변에서 살아가는 이들 대부분은 벌겋게 달아오른 오른뺨을 허겁지겁 가리며 아무 일 없다는 듯 시키지 않아도 잠잠하다. 이 작고 낮은 삶에는 오른 뺨을 맞았을 때 가만히 왼뺨을 돌려댈 용기가 들어설 자리가 없어 뵌다. 문제는, 이 용기를 얻지 못하는 삶에게는, ‘복수’가 불가능하다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드는 인생에게는, 그 좋다는 ‘사랑과 용서’를 향유할 기회마저도 원천적으로 차단된다는 사실에 있다. 복수할 깜냥이 안 되는데 무슨 수로 사랑을 한단 말인가. 사랑은 복수보다 무서운 짓이 아니던가. 그러니, 우선 복수해야 한다, 제대로 복수해야 한다. 사랑과 용서의 시작은 복수에만, 제대로 된 복수에만 있다. 조바심에서 말하지만, 그래도 ‘원수불망’이 아니라, ‘은원불망’이다. 괴물로 바스라져 완결되는 복수 그 너머를 꿈꾼다면, 오른뺨을 가격했던 나에게 자신의 왼뺨을 조용히 대어주었던 그 크고 너른 은인들의 얼굴을, 내 오른뺨을 가격하고 나 몰라라 튀어버린 한줌도 안 되는 원수들의 얼굴과 함께 뼈에 새겨야 한다. 홀로 기억을 붙들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애증의 괴물이 되어갈까 두려워 은인도 원수도 마냥 잊으려 애썼다면, 이제부터는 바스라지는 시간의 매캐한 먼지 속에 자욱이 흩뿌려진 애증을 나와 더불어 되삼키며 ‘은원불망’이라는 외로운 기억의 투쟁에 동참해 줄 사람들과 함께 억세게 기억해 가야한다.
4. Welcome to Community of Revenge
‘왼뺨 대 왼뺨’의 진지한 대결을 피한 채 사라진 원수가 한번쯤은 스쳐 지나가리라 여겨지는 사막 한가운데서 홀로 잠복하여 숨죽이는 대신, 보란 듯 여럿이 벌쭉하니 터를 잡고 살아가는 삶이 있다. 사막을 헤매다 기적처럼 마을을 발견한 누군가가 마지막 힘을 짜내어 그 터에 다가서더니 우물가에 서 있는 한 사람에게 물 한 모금을 간청한다. 우물 속 두레박을 퍼 올리던 손은 삶이라는 갈증으로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게 일그러진 메마른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생수 한 사발을 건넨다. 생수 한 모금에 해갈의 기운이 완연히 퍼져 끝 모를 절망 같던 주름들마저 하나, 둘 온전히 펴져 결국 그 감겼던 눈마저 살쩍이 떠지는 순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알아보는데, 목마른 자의 눈에 이제야 비친 것은 푸른 오아시스가 된 사람들과 그 장소를 알리는 다음과 같은 작은 푯말 하나 뿐: Welcome to Community of Revenge
***
1) 영웅이 아닌 ‘꾼’의 등장은 서부영화의 계보학에서 살펴야 그 의미가 분명하다: “ ‘전문가’ 웨스턴은 심리적 웨스턴에 대한 할리우드의 대답이다. 일반적으로 심리적 웨스턴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즉 윤리적으로 올바르고 사회적으로 자립적인 서부 사나이가 어떻게 억압적이고 제도화돼 있으며 겁에 질려 있고 감사할 줄 모르는 공동체를 미치지 않은 채 계속 보호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전문가 웨스턴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다음 두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한다. 첫째, 서부 사나이는 돈을 받고 일을 하는 것이다. 즉 서부 사나이는 자신의 특별한 재능을 공동체가 평가한 대로 파는 것이다. 둘째, 그렇지 않으면 무법자가 되는 것이다. (할리우드 장르의 구조, 토마스 샤츠, 101)”
2) 이를 테면, 성경(누가14:27,8)에는 예수를 좇는 삶에 대한 이런 ‘경고’ 혹은 ‘주의사항’이 엄연히 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 가운데서 누가 망대를 세우려고 하면, 그것을 완성할 만한 비용이 자기에게 있는지를, 먼저 앉아서 셈하여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첫댓글 참으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두고두고 생각하게 되더군요. 그 생각의 한 갈래가 최근에 본 영화 안티 크라이스트로 이어졌어요. 정확히는 그 영화에서 '아이'가 상징하는 바였는데요 "은원불망이라는 기억의 투쟁"과 속절없이 죽는 것들(폭력의 연쇄를 단절시키는)의 윤리가 만나는 지점은 어떻게 그려질까 하는 것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