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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해진 목에 모래자갈이라도 섞인 것처럼 묽고 거친 침을 억지로 넘겼다. 숨 막힐 듯한 공허한 적막만이 내 주위를 감쌌다. 눈을 깜빡이는 일도, 하다못해 고개를 돌리는 일도 내 멋대로 되지 않았다. 그저 두 손으로 틀어막고 있는 입 사이로 잘근잘근 조각나고 있는 불규칙적인 숨소리에만 온 정신을 쏟아 부을 뿐이었다. 이내 경수가 갈라지는 갈증을 다 적신 건지 수도꼭지를 잠그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오늘따라 유난히도 크고 낯설게 느껴졌다. 점점 더 크게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내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굳이 숨겨야 할 것들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떻게든 정답을 내려야 한다면, 이 자리에서 빨리 벗어나는 게 해답이었다.
“왜 거기 있어?”
“조용……!”
심드렁한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경수의 시니컬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말보다 행동이 먼저 반응했다. 무작정 손을 들어 놈의 입가를 틀어막은 거였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몰려오는 무안한 감정에 급하게 손을 떼고 등 뒤로 숨겨버리는 바보 같은 짓까지 릴레이로 이어졌다.
“보, 보건실이잖아.”
“…….”
“떠들면 안 되니까.”
참 대단한 변명이었다. 전국 방방곡곡을 뒤져도 양호실 앞에서까지 침묵을 지키자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은 아마 한 명도 없을 거다. 제대로 된 오버를 한 셈이었다. 그런 내 말도 안 되는 변명에 조금 당기듯 입꼬리를 올리며 옅은 미소를 띠우는 경수였다. ‘아, 역시 내 허술한 연기력이 제대로 들통 났구나.’라는 긴장감에 심장소리는 점점 더 큰 메아리가 되었고, 조금 더 큰 울림이 되어 금방이라도 앞에 있는 놈에게까지 들릴 것만 같았다. 일단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빠져나갈 대책을 세우기 위해 요리조리 눈을 굴리는 사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제 허리를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추는 도경수가 보였다. 벅찬 시선이 나란히 맞물렸다. 아마 놈이 오늘은 꼭 날 설렘사시키려고 작정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내 심장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드럼 스틱이 정신없이 내 가슴을 쾅쾅 내리치며 날 어지럽히기까지 했다.
“○○○.”
“……응?”
“거짓말도 너답게 한다.”
사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변백현의 얼굴을 볼까 새삼스레 두려움도 몰려왔다. 따지면 나도 도둑질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지않느냐. 변백현과 김종인의 이야기를 몰래 엿들은 죄. 걷잡을 수 없이 커진 혼란스러움이 멀쩡하게 뱉어내던 숨통까지 조여왔다. 맞다, 그런 말을 들었다 해도 성급히 일반화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일부분이니까. 초점을 잃고 방황하는 내 눈동자가 이내 내 옆자리로 꼼짝없이 멈췄다. 따지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변백현의 행동들이 생각났다. 난 그저‘아, 저게 습관인가 보다, 그렇겠지.’라는 스스로의 최면으로 아무렇지 않게 가벼운 문제로 생각했지만.
“김칫국도 너무 많이 마시면 탈나.”
장난스럽게 내게 했던 놈의 말이 생각났다. 그래, 김칫국도 너무 많이 마시면 탈나. 지금 나 너무 많이 마신 건지도 모르겠다. 때에 맞춰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셨고, 더 이상의 고민을 할 틈도 없이 시작된 수업이었다. 분필을 들어 오늘 배울 소단원의 제목을 써 내려가는 선생님의 손에만 집중하자고 생각했다. 그러자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으니 들려오는 말은,
“오늘 백현이 조퇴했으니까 짝꿍이 프린트 좀 챙겨줘.”
“네? 변백현 조퇴했어요?”
“그래, 많이 아파보이던데.”
거기까지는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그에 자연스럽게 인상이 구겨졌다. 왜인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에 큰 돌이라도 박힌 듯 숨통조차 막혀오는 거였다. 생각할수록 답답한 문제였다. 점점 더 커지는 공허감에 그저 묵묵히 입을 다물고 가만히 아래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혼자서 집으로 걸음을 옮기는 길이었다. 그렇다고 발걸음이 병신처럼 가볍지도, 또 죄인처럼 무겁지도 않았다. 그저 평소와 다름없는 무게의 걸음이었다. 이상하리만큼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건 좀 무섭다고까지 느껴졌다. 그저 얼른 집에 들어가 가만히 잠을 청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왜 하필 지금인지는 모르겠지만 기가 막힌 타이밍에 교복 주머니에 감춰있던 휴대폰 진동 소리가 요란하게도 울려댔다. 꼭 전화를 받으라는 일종의 협박과도 같이 느껴졌다.
[변백현]
수신자의 이름부터 확인하자 우선 놈의 상태부터 확인하고 싶었다. 차례대로 따지고 보면 그날 감기는 나 때문에 걸린 게 맞으니까. 앞뒤 생각 안 하고 무작정 수락 버튼을 옆으로 밀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여보세요’라고 답하니 가뜩이나 지끈거리던 머리가 이번엔 흉부 쪽으로 이어갔다. 그건 아침보다 더 갈라진 목소리로 답해오는 변백현 때문이었다.
-나 오늘 조퇴했는데, 나 없어서 아무것도 못했지?
“…….”
-존나 고마워해라, 그래서 전화했잖아.
“변백현.”
-응?
“너 별로 안 아프다며, 괜찮다며 조퇴는 왜했어?”
-…….
“너 안 아프다고 해서 그렇구나 하고 급식실 갔는데 그렇게 조퇴해버리면 내가 어떨 거 같아?”
-너 화났냐?
“그렇게 말했으면서 아무 말 없이 조퇴해버리면 내가 무슨 생각을 했을 거 같냐고!”
-……○○○.
“앞으로 한번만 더 그러면 진짜 화낼 거야, 끊어.”
이렇게 대화를 끌고 나갈 생각은 아니었지만 늘 내가 생각한 대로 돼는 법은 없었다. 그저 괜찮으냐고 이제 안 아프냐며 조근 조근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늘 그렇듯 내 예상과는 반대로 터져 나온 날 선 말에 희뿌연 안개가 두 눈 가득 차오르는 것 같았다. 그건 내 꽉 막힌 속상함 때문이라고 정의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와‘이게 아닌데!’하며 마구잡이로 미친년처럼 머리를 헝클이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의미 없는 후회를 했지만 돌아오는 건 너무나도 매정히 전화를 끊어버린 아까 전 상황에 대한 데자뷰 뿐이었다. 왜 나는 내가 생각하는 대로 말을 못하는 가에 대한 의문점이 계속해서 내 머리를 콕콕 찔러왔다. 그에 머릿속은 어지러워 그대로 고개를 파묻고 진득한 후회만 반복했다. 소용없었다. 이래나 저러나 엎질러진 물이었다.
왜 하필 이런 날에만 눈이 일찍 떠지는 건지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신을 향해 무작정 원망부터 하고 싶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지각을 해서 변백현보다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하자는 기가 막힌 계획을 세웠지만, 밤을 지새우자는 생각으로 휴대폰만 만지다 그대로 잠들어버린 게 원인인 듯싶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평소보다 20분이나 더 일찍 일어난 내 자신이었고, 최대한 느릿하게 준비하자는 생각은 날씨가 춥다며 오랜만에 차를 타고 가라는 아빠의 영양가 없는 배려에 산산조각이 난 것이었다. 그 덕분에 매미처럼 교실 뒷문에 붙은 채 요리조리 주변만 둘러보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야.”
“엄마!”
“뭘 그렇게 놀라.”
“아, 아니……갑자기 와서. 뭐야, 변백현 너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일찍 오면 안 돼? 교실 안 들어가고 뭐하는데.”
“지, 지금 들어가려고 하잖아…….”
“너 뭐 숨기냐? 수상한데.”
“……뭐가 수상해 뭐가! 하나도 안 수상해!”
하필이면 변백현일 줄이야. 능청스럽게 내 앞에까지 다가와 무언가 수상하다며 꽤나 비열한 눈빛을 보내오는 그 얼굴을 그대로 장난스럽게 밀어버리는 나였다. 나 때문에 헝클어진 앞머리를 두어 번 단정하게 정리한 뒤, 얼른 들어가자며 내 가방 윗부분을 잡아버리는 변백현 때문에 꼼짝없이 추한 몰골로 거북이 마냥 뒤뚱뒤뚱 어정쩡한 자세를 취해야만 했다. 어제 나랑 싸운 사람이 맞냐 이거였다. 난 최대한 널 마주치지 않기 위해 이렇게 어울리지도 않는 007작전을 다 해보는데, 넌 뭐가 그렇게 태평하냐. 그럼 또 나 혼자 과장 해석하는 것 같지 않느냐.
“야, 변백현!”
“응?”
“너 잠깐만 이리 와봐.”
“아, 왜.”
“오늘 우리 반 애들이 너네 반 애들이랑 축구하자는데?”
“진짜? ○○○ 잠깐만, 먼저 들어가 봐.”
“축구? 너 아프잖아.”
“아니? 나 이제 괜찮은데? 어제 네가 걱정해줘서 다 나았어.”
“누가 걱정해, 누가? 그리고 어떻게 사람이 하루 만에 나? 그러다가 더 심해지면 어떡할 건데.”
“제 여자친구세요?”
“…….”
“아, 나 관리 심한 여자친구는 별론…….”
“축구 안 하기만 해봐! 안 하면 가만 안 둬 진짜.”
“그래야지, 역시 우리 밥통 다루기가 쉬워.”
이게 이제 그냥 나를 똥강아지 취급하네. 이번에도 내 성질을 자극하며 유유히 김종인네 반을 향해 걸어가는 변백현의 뒷모습이 두 눈에 박혀왔다. 놈과 친해지기 전부터 변백현이 축구에 대한 열정이 꽤나 큰 건 익히도 유명한 사실이었다. 단순히 좋아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쉽게 말하면 변백현은 누구나 관심 가지고 보는 탁월한 축구 유망주라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서로 시간을 맞추는 것으로 보아 아마 오늘 중으로 옆반과 축구 경기를 할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다 이내 다시금 교실로 몸을 돌리는 나였다. 성격이 좋은 건지, 멍청한 건지 그게 궁금했다. 놈이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니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변백현이 내 말에 상처받지 않았다면 더 다행인 일이었다. 소용없는 후회만 반복했다. 이제 더 이상 필요 이상으로 화내지 말자고. 이 이상으로 필요 없는 착각은 하지 말자고.
“여기 앉자, 민예야.”
“아, 여기 모래 너무 많은데.”
“…….”
“○○○, 너도 얼른 앉아!”
“응? 응…….”
쓸데없이 오지랖 하나는 넓은 우리 반 여자아이들이었다. 축구를 잘하기로 소문난 우리 반과 김종인네 반이 점심시간에 축구를 한다는 건 같은 학교 아이들이 느끼기에는 엄청난 메인 매치이긴 했지만, 그런 좋은 구경에 단 한 번도 안 빠지고 참석하는 내 친구들도 새삼스레 대단하다 느껴졌다. 고음의 돌고래 주파수를 소유한 여자아이들의 응원 소리가 커질수록 더 멋지게 보여야한다는 사명감을 느낀 건지 점점 더 과격해지는 축구 시합이었고, 그럴수록 넓은 운동장에 아이들은 미친 듯이 자기가 응원하는 반을 향해 데시벨을 키워갔다. 그에 나도 질세라 우리 반 남자아이들을 향해 핏대까지 세우며 엄청난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김종인 잘해라!”
주먹을 꽉 쥐며 자기 반을 응원하는 도경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입꼬리가 당겨졌다. 여태까지 봤던 도경수와는 다르게 느껴졌다고 하면 꽤나 타당한 이유였다. 내가 지금 축구를 보러 온 건지, 도경수를 관람하러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친구들과 함께여서 그런지 간간이 작은 욕설을 뱉어내는 도경수를 바라보니 거지같게도 또 그 모습마저 멋져 보인다는 게 유독 나를 한심하게 만들었다. 한참을 도경수에게로 시선을 고정시키며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마침내 골이 터지기라도 한 건지 양쪽 반에서 각기 다른 느낌의 함성 소리가 들려오는 거였다. 도경수네 반은 탄식이, 우리 반에는 함성이. 처음부터 이 의미를 다시 짚어보면 지금 이 함성의 뜻은……골이다!
“골이다 골!”
“골? 누가 넣었어? 누가?”
“변백현, 변백현! ○○○ 우리 골 넣……!”
“…….”
순간적으로 굳은 얼굴의 친구가 첫 번째로 눈에 들어왔고, 두 번째론 세한 느낌이 들었다. 그에 느릿하게 고개를 내려, 치마 쪽을 바라보니 웰치스를 먹다 흥분한 친구가 나와 얼싸안으며 춤을 추다 그대로 내 어깨에 부딪혀 차가운 보라색 액체를 내 치마 위로 쏟아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에 자연스럽게 내 치마와 허벅지는 안타까운 몰골로 처참히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게토레이도 아닌, 사이도 아닌, 보라색의 액체가 빠르게 내 스타킹과 치마 사이에 빨려 들어가는 모습에 나보다 더 놀란 친구들이 큰 소리로 난리라는 난리는 다 쳐대는 바람에 주변 스탠드에 앉아있던 다른 아이들까지 내 다리 쪽으로 온 시선이 집중되기 시작하는 것 아니겠냐. 젠장, 이게 아닌데. 여전히 허벅지 밑으로 뚝뚝 떨어지는 웰치스보다 내 치마와 다리 사이로 집중되는 시선이 더 자욱하게 퍼져갔다. 분주하게 눈동자가 움직였다. 친구들의 담요라도 덮을 생각이었다. 소름끼치는 당혹감은 정신까지 놓게 만들었다.
“일어나, 화장실 같이 가줄게.”
“……응?”
그래, 이건 전혀 내 시나리오에 없던 일이었다. 갑작스럽게 내 앞으로 다가와 화장실에 데려다 준다며 내 팔 부분을 끌어당기는 도경수의 모습에 제대로 당황을 해버린 나였다. 지금 내가 맞닥뜨린 이 상황이 현실이 맞는 건지 아닌 건지 그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놈의 얼굴만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한 번 더‘일어나’를 반복하는 입모양을 보고서야 번뜩하고 현실 직시를 할 수 있었다. 아, 이거 진짜구나. 진짜 도경수가 나한테 손을 내밀었구나. 천천히 다리를 펴고 일어나려 힘을 주는데 그런 내 무릎 위로 순식간에 덮어지는 두꺼운 후드 집업에 꼼짝없이 그 자리에서 다시 일시정지가 돼버리고 말았다. 집업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땀에 젖은 머리와 고르지 못한 숨소리를 내뱉으며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오는 변백현이 아니겠냐. 그와 동시에 보이는 놈의 행세에 난 그대로 경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땀이 흐르고 격한 운동을 한다고 해도 변백현이 지금 입고 있는 건 반팔이었다.
“야, 너 뭐하는 거야?”
“입 다물고 그냥 덮고 있어.”
“…….”
차마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호히 말꼬리를 잘라버리는 놈이었다. 그에 후드 집업을 빼려는 내 손목을 강하게 잡고 차근차근 제대로 옷을 덮어주는 손길이 이어졌다. 천천히 허리를 들고 나를 내려다보던 변백현과 도경수가 나란히 눈을 맞췄고, 어떠한 말도 오가지 않는 이 기막힌 상황 속에 무참히 죽어가는 건 다름 아닌 나였다. 변백현이 빠진 이 시점에 도저히 경기가 되지 않던 건지 꽤 거친 말로 놈을 부르는 다른 남자아이들이었고, 몇 초 동안 도경수와 의미 없는 아이컨텍을 하던 변백현이‘아, 미친…….’이라는 말을 끝으로 다시 경기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진득한 침이 갈라진 목울대로 넘어갔다. 목이 바짝 타들어갔다. 마치 햄버거 사이에 낀 토마토라도 된 것 같더라. 눈동자만 움직여 경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이게 뭐야. 어색해 죽겠다, 진짜.
아무리 최대한 물로 응급처치를 했다고 한들 끈적거리는 기분 나쁜 느낌은 영 지워질 생각을 안 했다. 머쓱히 뒷머리를 긁으며 화장실에 나오자 보이는 것은 약속대로 나를 화장실까지 데려다준 도경수였다. 갑작스럽게 도경수가 그런 행동을 했다는 건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꽤 묵직한 변백현의 후드 집업을 들고 있는 놈에게로 도둑고양이마냥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저, 도경수…….”
“…….”
“나 때문에 축구도 못 봐서 미안해.”
“별걸 다 미안해하네.”
“……지, 지금 보러갈까?”
“너 치마 젖어서 추울 텐데.”
“아니야! 괜찮아, 거의 다 말랐어!”
“너 그러고 싶으면 그래.”
“그래, 가자.”
지금 난 누구의 눈치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난생 처음 내게 먼저 다가 온 도경수인지, 자꾸 오해하게 만드는 행동을 하는 변백현인지. 그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난감해지는 이 상황을 어떻게든 회복하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 내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던 경수가 먼저 뒤를 돌아 다시 운동장으로 걸음을 뗐다. 혹시라도 놓치기라도 할까 그 모습을 빠르게 눈에 채워 담고 걸음을 떼는데…….
“아, 변백현 병신 새끼야 제대로 안 하고 뭐하는데!”
“저새끼 왜 저래 시발!”
“야, 제대로 하라고!”
온갖 독이 발려있는 날카로운 말들에 빠르게 나아가던 다리가 거짓말처럼 정지됐다. 꼭 그 가시는 내 가슴께를 이곳저곳 쑤시는 것 같았다. 여전히 우악스러운 남자 아이들의 목소리에 다시금 고개를 들어 운동장을 바라봤지만, 그 용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깡그리 사라져버렸다.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어제 양호실 앞에서 들은 이야기가 시야 앞을 떠다녔다.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고 싶어도 어떻게든 그쪽으로 연결하는 내가 싫었다. 뒤따라오던 발걸음 소리가 없어지니 의아함을 느낀 경수가 보기만 해도 저릿한 얼굴을 비췄다. 낮고도 깊었지만 애써 밝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저, 도경수……그냥 교실 가면 안될까.”
경기가 다 끝나고 하나둘씩 교실로 들어오는 순간에도 난 책상 위로 고개를 파묻고 그 어떠한 제스처도 취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내 옆자리에 느껴지는 인기척은 그렇게나 선명하게 박혀올 수가 없는 거였다. 여전히 진지함이라고는 하나 없는 말투로‘자냐.’부터 시작해서‘야, 아까 도경수가 너 도와준 거 대박이야 시발.’로 이어진 말은‘도경수도 너한테 아예 관심이 없는 건 아닌 거 같다.’로 마무리 짓는 변백현의 장난섞인 음성이 들려왔다. 엎드려 있는 내가 자고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무슨 생각으로 저 혼자 신 나서 입을 열어대는지 그것 또한 의문이었다. 분명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도경수가 나에게 아예 관심이 없지는 않다니까. 그럼에도 난 쓴 약을 삼키듯 고통스런 숨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 말에 가슴은 뛰었지만 몸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몸과 행동이 다르게 움직인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순간이었다.
“야자 하느라 수고했고, 내일 보자.”
“네, 안녕히 가세요!”
공부할 때는 지독히도 길었던 네 시간이 다른 날에 비해 오늘만큼은 빠르게 느껴졌다. 마침내 시체 놀이의 진수를 보여준 야자 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에 책상 위에 널브러져있던 아이들도 주섬주섬 일어나 짐을 챙겼고, 그에 나도 천천히 가방 지퍼를 열어 하나둘씩 책을 구겨 넣었다. 변백현 이 자식은 공부를 할 생각은 정말 쌀 한 톨 만큼도 없는 건지 오후 수업이 끝나자마자 내 앞으로 개구진 인사를 하며 도망치듯 교실 밖을 나가버린지 벌써 한참 전 일이었다. 당장이라도 집에 들어가 뜨끈한 물로 온몸을 씻고 싶었다. 오늘도 반나절을 학교에서 보낸 탓에 몸이 이만저만 피곤한 게 아니었다. 녹초가 된 몸으로 교실에서 나와 정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초겨울이라 그런지 매서운 칼바람이 더욱이 내 볼을 따갑게 때렸다. 몸을 움츠리고 미간 사이를 좁히며 외로운 전쟁의 서막을 알렸다. 그런 내 앞으로 보이는 것은, 거울을 보는듯한 포즈로 제 머리칼을 휘날리며 힘겹게 걸어가고 있는 도경수였다. 그런 놈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몸이 먼저 반응했다. 왜인지는 몰랐지만, 이제 그 정도는 혼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오늘따라 더 좋았다. 그 순간만큼은 변백현에 대한 구석진 답답함도 사라지는 게 여간 신기하기까지 했다.
“바람 너무 많이 불어!”
“너 머리 다 망가졌다.”
“아, 그런 거 보지 마.”
“옆으로 고개 돌리면 보이는데 어떡해?”
“아, 진짜!”
아마 요즘 애들이 날 놀리는 게 재밌나 봐. 내 반응이 그렇게 웃긴가. 아니고서야 이럴 리가 없지. 누가 말랑거리는 짝사랑 상대에게 산발이 된 머리를 보여주고 싶을까. 야속한 칼바람이 내 앞머리를 망가뜨릴 때마다 다급하게 머리를 정리하랴, 도경수 눈치를 보랴, 이것저것 때문에 여러모로 정신이 혼미해져 머릿속이 난리였다. 그런 내게 되도 않는 장난을 도경수의 말에 씁쓸한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왜 나는 매일 당하고만 살까 하는 뜬금없는 의문까지 들었다.
“그때 네가 그랬잖아.”
“응?”
“변백현 때문에 나랑 친해지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나랑 친해지고 싶은 거라고.”
“아, 응……!”
“근데 나 그 말 되게 좋았어.”
갑작스럽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 타이밍도 그렇고, 또 그러기에는 내 앞머리나 추한 몰골도 그렇고 너무도 의아하지 않느냐. 슬쩍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봤다. 옅은 미소가 유난히도 밝은 별을 닮았구나. 저 얼굴 예쁘다. 평생 기억해야지. 어느새 다다른 경수네 집이었다. 혼자 걸을 땐 몰랐는데 둘이 걸으니까 왜 이렇게 짧은 건지. 그런 내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경수가 마지막까지 환하게 웃으며‘내일 봐.’라는 말을 끝으로 등을 보이는 모습이 선하게 가득 차올랐다. 저 모습도 기억해야지, 생각했다. 오늘은 기억할 게 유독 많은 밤이 될 것 같았다. 뒤이어 익숙하게 코너를 돌아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었다. 혼자라는 사실을 더 확연하게 증명해주고 싶은 건지 골목 사이사이마다 고장난 가로등이 여간 소름끼치는 게 아니었다. 잔뜩 주눅이 든 어깨에 간절한 힘을 주고 사람 하나 없는 한적한 골목에 저절로 으스스 공포감이 돋아 조금 더 발걸음을 빨리 하는데.
‘툭.’
“…….”
‘툭.’
“…….”
‘툭’
연속 세 번을 걸쳐 나는 소리에 공포심이 극에 달한 내가 굳어버린 몸과 함께 발걸음을 멈추니 그런 나를 따라 조용하게 스며드는 낯선 소리였다. 괜히 어두워 정신이 예민해진 탓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발을 떼도 점점 더 일정하게 좁혀지는 소리에 급속도로 두려움이 몸을 타고 올라와 호흡이 불규칙적으로 내쉬어지기 시작했다. 다급하게 휴대폰을 들어 전화할 사람을 찾기 위해 마구잡이로 전화부를 뒤져봐도 왜 하필 이럴 때만 그토록 많던 친구들의 이름이 내 눈에 띄지 않는 건지, 달달 외웠던 가족들의 전화번호는 생각나지 않는 건지, 날 죽이려는 그림자마냥 가까워지는 소리와 함께 금방이라도 눈물이 차올라 기절이라도 할 것만 같은 극도의 공포감이 차올랐다. 속으로 엄마만 연신 외쳐대며 필사적으로 아랫입술을 깨물고 떨리는 손목을 쥐어 잡는데, 갑작스럽게 내 어깨를 잡는 낯선 느낌에 놀라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으니.
“○○○.”
“…….”
“괜찮아?”
얼마만큼이나 빨리 달려온 건지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경수를 보자마자 저도 모르는 안도감에 다리부터 풀려버리는 나였다. 힘이 빠진 몸을 축 늘어뜨리고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해진 정신을 잡지 못하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안심하라는 듯 속삭이는 포근한 손길이자, 목소리였다. 천천히 고개를 올려 속삭임에 주인공을 바라봤다. 나만큼이나 초췌한 모습으로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는 눈길이 그렇게나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도경수가 있다. 내 앞에 도경수가 있다.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다.
“넌 진짜 보고만 있어도 매일 이러는데 내가 보지 못할 때는 무슨 사고를 칠까 걱정된다.”
“…….”
“……조심해.”
“미안해…….”
“네가 미안한 게 아니라 걱정돼서 그러는 거잖아.”
“…….”
“보고 있어도 불안한 애는 네가 처음이다.”
“…….”
“……일어나, 데려다줄게.”
방문을 잠그자마자 또다시 힘이 풀려버린 다리 탓에 그대로 침대에 곤두박질해버린다. 느릿하게 등을 돌리고 누워 가쁜 숨을 진정시켰다. 여전히 그 골목 속에 혼자 있는 듯한 느낌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머릿속까지 울리는 심장 소리가 아까의 공포감 때문인지 혹은 도경수 때문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그저 요란스럽게 뛰고 있다는 사실만 존재할 뿐이었다. 여전히 이유를 모른 채 터질 것 같은 심장 소리만이 허전한 침묵을 감싸고돌았다. 그런 내 기분을 녹여주기라도 할 심산인지 제발 전화 좀 받으라고 재촉하는 듯한 진동 소리가 계속해서 나를 거슬리게 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휴대폰을 주워 수신자를 확인하는 것도 잊은 채 냅다 귀 쪽으로 들이대고 봤다. 지금의 난 제 정신이 아니었다. 아직도 쿵쾅거리는 가슴 부근이 그걸 증명해주는 셈이었다.
-○○○.
“…….”
휴대폰을 타고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정말로 확실한 안도감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내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에 아, 정말 현실이구나라는 느낌이 들어 그대로 참았던 눈물도 터져버린 것이었다.
-○○○ 너 왜 그래?
“야, 변백현…….”
-너 어디야, 집이야?
“집이야, 집인데…….
-똑바로 말하라고, 근데 왜 울어. 집인 거 확실해?
“맞아, 집 맞다고……맞아.”
-근데 너 지금 왜 우냐고!
“……아, 진짜.”
-너 거기서 꼼짝 말고 있어.
다급하게 끊긴 전화에 그저 하염없이 눈물을 쏟을 뿐이었다. 정말로 변백현의 목소리를 듣고 눈물이 터져 나온 거라면, 그거부터 아이러니한 문제였다. 그 흔한 집 전화번호도 생각 안 나는 빛 하나 없는 암담한 현실 속에서 도망친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인지도 구분이 잘 안 지만, 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거짓말처럼 모든 안개가 걸쳐지고 태양빛만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제야 현실이라고 깨달아 버린 거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어린아이처럼 엉엉 한참을 울었을까. 갑작스럽게 울리는 초인종 탓에 온몸을 타고 올라오는 설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뭐에 홀린 사람처럼 대충 보이는 흰색 목도리와 가디건을 걸치고 현관문을 향해 달려가 문을 여니.
“…….”
“……변백현.”
주책도 이런 주책이 없었다. 억척스러운 아줌마라도 된 것 마냥 놈의 얼굴을 보자마자 더욱이 흐르는 안도감의 눈물이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란 건지 황급히 다가와 내 앞에 서는 놈에 모습에 또다시 주저앉게 되는 나였다. 그런 나를 따라 천천히 무릎을 굽혀 앉아 지긋이 바라보며 나와 눈을 맞추는 변백현이었고, 난 추한 내 몰골도 생각 못한 채 계속해서 흐르는 것을 제 손으로 거칠게 닦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변백현도 그리고 나도. 제 엄지손가락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고 다시 손을 펴 내 볼을 따뜻하게 감싸는 놈이었다.
“괜찮아.”
“…….”
“이제 괜찮아.”
“…….”
“오다가 무슨 일 있었어? 이상한 사람 만났어?”
그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놈의 행세를 제대로 살필 수 있었다. 얇은 티셔츠 하나만 걸친 채 찬 숨을 내뱉으며 벌게진 코끝에 자연스레 가슴에 응어리가 지듯 무언가 저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변백현 너 또 감기 걸리려고 얇게 입고 왔지…….”
“…….”
“그러다가 또 감기 걸리면……”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야?”
“…….”
“응?”
“……그래, 너 걱정하는 거야.”
“너나 나 걱정하게 하지 마.”
“…….”
“이래도 또 걱정시킬 거지만.”
“……목도리, 내 목도리라도 하고 가.”
“괜찮아, 추우니까 들어가.”
“고집부리지 말고 목도리 하고 가.”
그 정신없는 혼잡한 상황 속에서도 목도리를 챙겨오기 잘했구나. 천천히 내 목에 칭칭 둘려있는 목도리를 풀어 내 앞자리에 주저앉아있는 변백현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런 내가 좀 더 쉽게 목도리를 두를 수 있도록 살짝 고개를 숙여 좀 더 내게 가까이 다가와주는 놈이었다. 추운 날씨 탓에 한번 숨을 내뱉을 때마다 나오는 입김만이 지금 이 상황에서 유일하게 오가는 소리였다. 마침내 목도리를 다 두른 내가 눈동자를 굴리며 놈을 바라보니, 꼼짝없이 가까운 거리에서 제대로 눈을 마주하고 있다는 상황인 걸 그제야 인식해 버린 우리였다. 나보다 먼저 고개를 돌리며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변백현을 따라 뒤이어 나도 무안한 모양새로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누가 봐도 어색한 헛기침을 하는 변백현덕분에 더 민망해져오는 분위기를 애써 참으며 고개부터 숙였다.
“목도리 내일 줄게.”
“……응.”
“……그리고 앞으로 집에 혼자 가지마.”
“…….”
“도경수도 혼자 이 쪽에 사니까 매일 같이 가자고 그러면 되잖아. 그럼 너도 빨리 친해지고.”
“……알겠어.”
“그래야 너도 좋고…….”
“…….”
“나도 좋은……일이잖아, 바보야.”
내 머리를 두어 번 두드리며 말없이 뒤를 도는 변백현이었다. 또 그 모습이 그렇게나 쓸쓸해 보일 수가 없는 거였다. 양호실에서 들은 말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랐다. 그렇게 되면 난 변백현을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가 없었다. 놈의 입에서 어떠한 말이 나오지 않는 이상 확신할 수 없는 문제지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난……방금 전, 놈이 했던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게 돼버리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