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의
가면을 쓴 욕망의 존재론
-펑
샤오강 감독 <야연(夜宴)>-
몇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셰익스피어의 연극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고 있다. 이러한 영향력은 셰익스피어 작품들의 연극적 참신함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오히려 그의 작품들이 인간관계와 심리의 다양하고 복잡한 결들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슬로베니아 철학자 지젝의
말처럼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특히 그의 4대 비극은 “욕망의 드라마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을 존재하게끔 하는 필연적 상수(常數)이지만
만족의 순간 ‘허상’(nothing)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되는 그 욕망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욕망이란 것이 ‘아무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어 우리에게 무한한 행동과 영감의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수많은 인간들이 상처입고 파멸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만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은 욕망의 허망함과 불길한 결말을 알면서도, 그것을 욕망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부여받는 가엾은 존재들이다. 욕망을 향한 천형(天刑) 같은 시지푸스적 노동이라니!! 얼마나 역설적인 비극인가?!
영화화된
셰익스피어 작품은 대략적인 통계만으로도 2백편이 넘는다고 한다. 아마 단일 작가로는 최고일 것이다. 심지어 <셰익스피어 인 러브>같은
패러디 영화까지 포함한다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서구 영화의 셰익스피어 수용은 종래의 해석을 넘지 못한다. 그 결과 영화 속
셰익스피어 작품들은 원작에 충실하거나 심각한 변형을 가하더라도 그에 대한 관객의 예상을 넘지 못한다.
‘레이디
햄릿’을 표방하는 펑 샤오강 감독의 <야연(夜宴)>은 햄릿 비극의 갈등구조를 비틀고 확대해서 이른바 ‘욕망의 존재론’을 펼쳐놓는다.
<햄릿>처럼 <야연> 역시 복수 드라마로 겉치장을 하고 있지만 그 경계를 훌쩍 뛰어넘는다. 아버지를 독살하고 어머니
완(장쯔이)과 재혼한 삼촌 리(갈우), 복수를 꿈꾸는 황태자 우(대니얼 우)의 ‘삼각관계’는 연극 <햄릿>의 그것과 흡사하다. 하지만
그 어머니가 원래는 황태자 우의 연인이었다는 ‘뒤틀린’ 관계 설정을 통해 영화는 복수와 멜로 사이에서 교묘하게 갈지자(之) 걸음을 걷는다. 이로
인해 복수의 목적은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연인이자 어머니이며 숙모가 되어버린 완을 찾기 위한 것이기도 하며, 황제가
되어 부도덕한 숙부를 벌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는 등 복잡한 양상을 드러낸다.
<야연>의
매력은 퍼즐을 푸는 듯한 재미를 선사하는 등장인물들의 복잡한 심리묘사에 있다. 이 영화에는 선/악의 단순 구도로 잴 수 있는 인물들은 하나도
없다. 심지어 왕위를 찬탈하고 형수를 취한 황제 리마저도 마지막 밤의 연회에서 황후의 음모가 서린 독배를 스스로 들이킴으로써 비장한 죽음을
‘선택’한다. 황후 완은 두 남자를 남편으로 ‘선택’했으면서도 우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않고, 권력마저 욕망한다. 우는 약혼녀 칭(저우신)의
눈물어린 호소에도 불구하고 숙부에 대한 분노와 완을 향한 욕망 사이에서 나약함을 드러낸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강한 캐릭터는 여성들이다. 황후 완은 스스로 황제가 되어 권력과 사랑을 동시에 거머쥐려는 욕망을 노골적으로 내보인다. 칭은
연인 우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 “약한 자여, 당신의 이름은 여자”라는 연극 <햄릿>의 대사는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목숨마저 내던지는
여인들 앞에서 무효가 되어버린다. 물론 완마저 ‘알 수 없는’ 권력의 비수에 희생되어버리지만 말이다. 권력과 영화(榮華)의 찬연함 이면의
무상함, 바로크 미학의 세계관을 새삼 확인하게 하는 대목이다.
<야연>은
궁이라는 제한된 공간에도 불구하고 잘 짜여진 내러티브의 극적 긴장감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첫 시퀀스의 대형 무대에서 노래하는 우와 가면무
무희들의 춤사위, 주변의 풍경은 선(禪)적 분위기를 강화한다. 클로즈업과 상징적인 인서트 숏, 색채와 색채로 이어지는 연속적 씬들의 절묘한
배치는 인물들의 감정선을 따라잡으면서 시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이 영화의 백미는 중국 무협영화 특유의 요란함과 호들갑스러움이 없다는
것이다. 완과 우가 벌이는 검무(劍舞) 시퀀스는 무용처럼 아름다운 선(線)을 유지하면서 두 사람의 ‘애증’을 시위한다. 우를 살해하려는 근위
무사들의 액션마저도 박진감과 함께 음악적 리듬이 살아 있어 묘한 긴장을 유발한다. 우리는 <야연>을 통해 ‘무협의 가면을 쓴 존재론적
철학’이라는 중국 영화의 새로운 트렌드를 다시 확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