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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올려진 화은당실기 워드본은
제가 읽었던 “강증산의 도를 찿아서”블로그에 있는 내용인데
얼마전에 구입한 위의 사진상 재간본(1989)하고 편집이 다른 것으로 보아
1960년대 발행된 초판본인것 같습니다.
재판본에는 수록 되어 있지 않은
제2.교단의 위기극복...상제님 사후양자라고 하는 강경형씨가 상제님성골 반환 소송건이라든지
제 3장 교단의 발전기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서 문(序文)
대한증산선불교는 증산천사의 영적명령을 받드는 선사를 중심한 교중 형제자매들의 혈심으로서 이루어졌으니, 본교를 창설하신 선사의 경력은 곧 본교의 연혁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는 천사님의 오직 하나의 혈식으로서 후천 용화세계를 건설하실 제반도수를 물 샐 틈 없이 짜 놓으신 아버님의 참 도덕을 사의에 사로잡힌 일부 인사들이 자의로 교의 해석을 하여 닦아 올리신 빛나는 대도를 오히려 세상의 비소거리가 되게 하는 딱한 현실을 도저히 좌시할 수 없다 하여, 생사를 무릅쓰고 성부님의 홍대무량한 참 도덕을 세상에 들어내 놓고 말겠다는, 그 한마음 간절하게 용솟음쳐 천애고아의 처지에서 그의 손발을 묶는 마구니의 갖가지 책략을 박차고 일어서 오로지 성부 성모님을 위하는 출전지 효심과 천지를 대하여 성.경.신을 다하신 공덕의 기초 위에서 이룩된 것이 오늘날의 우리 교단이다.
쉴 줄 모르고 불태워 올리신 일편단심 밖에는 딴 마음을 가질 여가마저 없이, 일심으로 일하여 오신 피맺히는 서러움으로 얽힌 생애와 노정의 발자취는 곧 본교의 육기초공사의 진행과정이기 때문이다. 이에 본교의 정사는 선사께서 천의에 따라 선화하신 후 막막하고 우울한 심정을 정리하고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 여기 선사의 경력을 대강 주름잡아 기록하게 되었으니 화은당실기라.
본교의 연혁사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을 그렇게 이름 함은 오로지 부모님의 대도를 빛내고자 하는 혈심만으로 일하고 가신 화은당의 생애를 기념코자 함이다.
무릇 같은 뜻을 지닌 신앙동지들이 모여서 한 교단을 이룩하였을 때, 거기 모인 사람들은 적어도 교의 생성의 내력을 확실하게 알아야 할 것인즉 선사 생존 시에 천명을 봉승하여 현현묘묘한 시기에 의한 것임을 상고할 때 화은당실기는 마땅히 우리 교우들의 일상 신앙을 위한 좋은 반려가 되어질 것을 믿어 마지않는 바이다.
모든 교우들은 더욱 분발하여 아무쪼록 너기 어려운 마지막 고비를 잘 넘어서 원원한 천지의 큰 기운을 받아 내 몸에 생화시킴으로써 용화극락회상에 더불어 동참하기를 빌어 맞이 않으며 시일관계로 불비한 점이 적지 않음을 자인하면서, 우선 발간케 되는 실기의 서문에 대하는 바이다.
檀紀 4293年 庚子 11月 5日 冬至
整師 金 炳 徹 謹書
재간사(再刊辭)
세월이 쉬지 않아 초간 발행한지가 어언 삼십년이 지나가고, 그 동안 실기가 품절되어 보급이 중단 된지 십 수 년이 지난 오늘에야 재간하게 되니 감개무량하다.
중화경과 화은당실기를 재간하는데 많은 비용이 소요되어 크게 우려 하였으나, 기사 정월 이십팔일 수련에 발의하니 내외수도 여러분의 아낌없는 협조로 재간이 성사되었음을 진심으로 감사한다. 실기내용에 있어서 증보한 기록은 정사일기를 참조하였고, 초판의 내용이 연대의 선후도착 및 문장의 구성과 낱말의 선택 등 수정을 요하는 부분이 있으나, 저자의 뜻을 존중한다는 뜻으로 부분적인 수정을 하였을 뿐 전반적으로 초판에 따르기로 하였다.
따라서 문장의 구성이 매끄럽지 못한 점도 있고 문맥의 차질도 없지 않으며 표준말이 아닌 방언 등의 문제가 있다. 그러나 깊은 생각으로 살펴 읽으면 선사님의 일대기가 우리의 수도에 분원임을 각성하게 될 것이니, 우리 모두 진실한 원리를 바로 보고 성지우성으로 고해를 벗어나 밝은 저 언덕 위 지상선경으로 힘차게 다함께 마음과 힘을 합하여, 일보 우 일보 전진하기를 바라노라.
己巳 九月 旣望에 法宗師 金 大 洙
화은당 선사님과 증산법종교 초기의 도인들
(재판발행본)
목 차
서문&재간사&목차-화은당실기
제1장 유소시대...............................................17
제2장 일기초공사 전주 노송동.........................33
제3장 이 기초공사 금성곡................................49
제4장 삼 기초공사 장대곡................................87
제5장 사 기초공사 구미안................................139
제6장 오 기초공사 동곡...................................173
제7장 육 기초공사 오리알터...............................191
제8장 선 화
부록
*증산법종교 홈페이지에 있는 재간본 링크
제1장 증산상제님과 후천선경의 파종(播種)
증산법종교 교조(敎祖)이신 증산상제님은 천기1년(4204, 1871, 辛未)9월19일에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全羅道 古阜郡 優德面 客望里) 현 전라북도 덕천면 신월리에서 하늘의 상제의 자리에서 사람의 몸으로 화현 탄강하시었다. 교조의 본체(本體)는 미륵존불(彌勒尊佛)이시며 상제(上帝)이시니 제불보살과 제대성현들의 갈앙리(목마르게 기다림)에 후천개벽의 천지공사(天地公事)로 삼계를 제도하시기 위하여 화현하신 것이다.
성은 진주 강씨(晋州姜氏)요, 이름은 일순(一淳)이며, 호는 증산(甑山)이시니, 진주 강씨의 먼 조상의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로 전하여지고 있고, 진주강씨의 도시조이신 고구려 강이식(姜以式) 장군의 43대손 되시며, 아버지는 흥주(興周)이고 어머니는 안동권씨이다.
교조께서는 어머니 권씨가 하늘이 남북으로 갈라지며 큰 불덩이가 내려와 몸을 덮음에 천하가 광명하여지는 몽조를 얻고 잉태하여 역석달 만에 탄생하시었는데, 탄생하실 때에 이상한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하고 밝은 기운이 집을 둘러 하늘에까지 뻗쳐서 이레동안 계속되었다고 하며, 하늘나라의 선녀들이 산실(産室)에 내려와서 출산을 도왔다고 전한다.
교조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풍체가 장엄하였으며, 호생지덕(好生之德)이 많으시어 위기에 빠진 생명을 보시면 힘써 구하셨다고 한다.
또한 7세시, 독선생으로부터 천자문을 배우실 때, 하늘(天) 땅지(地) 두 글자만 읽으시고는 더 이상 읽지 아니하므로 그 연고를 물으니, “하늘 천(天)자에 하늘 이치를, 땅 지(地)자에 땅의 이치를 알았는데 더이상 무엇을 배우리오.”하시고는 훈장을 돌려보내시었고, 9세시 지으셨다는 「遠步恐地坼 大呼恐天驚」이라는 한시가 전하여지니, 교조의 경천동지할 총명과 기상을 어찌 가히 헤아릴 수 있으리오.
교조님이 28세 되시던 해에 광구천하(匡救天下)의 큰 뜻을 품으시고 주유천하(周遊天下)하시며 천하의 대세와 세상의 인심, 풍속과 민생의 고통을 두루 체험하시고, 드디어 교조님의 나이 31세에 전주 모악산(母岳山) 대원사(大院寺)에 들어가시어 삼계대도(三界大道)를 수정(修正)하시고, 12월 3일에 대우주심판공사의 권능을 가지시게 될새, 후천선경(後天仙境)건설을 위한 천지공사(天地公事)를 시작하시어 천기39년(4242, 1909, 己酉)까지 9년간 많은 공사를 행하시고, “내가 천지운로(天地運路)를 뜯어고쳐 물샐 틈 없이 도수(度數)를 굳게 짜 놓았으니 제 도수에 돌아 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고 말씀하시고 그해 6월 24일, 전주군 우림면 청도리 동곡(현 전북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에서 재세(在世) 39세를 일기로 화천(化天)하시었다.
교조의 체백(體魄)은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용화동 434-2번지 증산법종교 본부인 오리알터(鳧卵基)에 오좌자향(午坐子向)으로 안장되어 한국민족종교 여러 종단의 참배 성지로 되어있다.
제2장 교단의 창업기
1. 화은당 선사(華恩堂 禪師)
1) 화은당 선사의 탄생
증산법종교의 창교주(創敎主)이신 화은당 선사는 증산 선생님의 오직 하나뿐인 혈식(血息)으로서, 천기 34년(4237, 1904, 甲辰) 정월 15일 자정에 아버지 증산 상제님과 어머니 하동정씨(河東鄭氏)사이에서 현 전라북도 정읍군 덕천면 신월리에서 탄생하시었다. 성은 진주강씨(晋州姜氏)이고, 이름은 순임(舜任)이며, 도호는 화은당(華恩堂)이시다.
하루는 정씨 성모(聖母)께서 꿈을 꾸는데, 하늘로부터 아름다운 풍악소리가 들려오더니 그 소리를 타고 많은 선관들이 하강하는 중에 한 선녀가 품에 안기어 춤을 추었다. 이로부터 정씨 성모께서 잉태하시어 열달이 되자 자정에 해산을 하셨다.
그의 출생시, 할머니는 산모의 첫국밥을 지으려고 밖에 나가셨는데, 많은 신명들이 기치창검을 들고 온 집안을 둘러싸고 있는 중에, 난데없는 지동소리가 들려오는지라, 혼겁을 하고 방안으로 쫓겨 들어가 몇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나가 첫국밥을 지으셨다.
성부께서는 화은당 위로 이남이녀를 두셨는데, 하나같이 용모가 비범하여 조부께서는 무한한 애정을 두셨으나, 성부께서는 웬일인지 집에 오시면 그 아이들은 눈앞에 서지도 못하게 하시고 조부님께 말씀하시기를, “저 아이들은 모두 칠, 팔세가 되면 죽을 것이니 정을 두지 마시옵소서.”라고 당부하셨는데, 그 후 사남매는 모두 말씀대로, 칠 팔세에 죽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에 정씨 성모는 또 출산하게 되었으나, 여식일 뿐 아니라 이 아이도 단명하여 죽으리라 생각하니 기가 막히고 애통하여 아이를 거둘 생각도 없이 정신을 잃고 누워있었다.
오후가 되어 성부께서 집에 오시어 아이를 보시니 하룻밤 반나절을 방구석에 밀쳐 놓은 채 그대로 있었는지라, 아이는 푸른 독기가 서리어 곧 절명할 지경인 것을 아시고 성부께서 크게 슬퍼하시면서 앞집 사는 안칠용을 불러 돼지를 잡아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버리고 가져오게 하신 후, 아이를 강보에 써서 그 속에 하룻밤을 넣어두시니, 갓난이에게 서리었던 독기가 빠지고 소생하였다. 성부께서는, “이 아이라야 정차 나의 일을 이어 빛내게 되리니 잘 기르라.”고 성모님을 타이르시고 삼칠일 후에 다시 오겠다고 하시며 동곡으로 떠나시었다.
그 후, 삼칠일 하루 전에 집에 오시어 안칠용으로 하여금 백미(白米) 서말(三斗)과 백지 세권을 준비시키시고, 그날 밤에 마당에 멍석을 펴고 청수 한 동이를 떠 놓으시고는 집안 사람들에게는 밖을 내다보지 못하게 하신 다음, 백미 서말을 사방에 쥐어 던지시며 주송을 하셨는데, 이튿날 아침에 식구들이 밖에 나와 살펴보니 사방에 쌀 한톨이 없는 것이었다.
삼칠일날, 무당을 불러 굿을 시작하시는데 갓난아이를 무당 앞에 뉘여 놓고 백지와 부적과 글쓴 종이를 갓난이 사타구니에 붙이시고 담뱃대로 고저장단을 짚듯이 하시며, “자지가 나온다. 자지가 나온다.”고 소리를 하시니, 무당이 굿을 하다가 성부의 하시는 거동을 보고 내심, 광인이 아니고는 여자아이에게 저러한 말을 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고 속으로 욕을 하면서 굿을 건성으로 하는지라, 성부께서 무당의 속마음을 아시고 ‘죽일년이라 어이 가식으로 굿을 하는고’하며 책망하시니 무당이 웃는지라, 재차 꾸짖어 가로되, “벼락을 맞아 죽어 쌀 년이라.”하시니 별안간 뇌성이 대발하는지라, 무당이 그 자리에서 졸도를 하였다. 다시 호통하시니, 무당의 정신이 돌아와 일어나서 절하고 “알지 못하여 죽을 죄를 지었나이다. 이제부터 진심으로 하겠사오니 살려주시옵소서.”하고 용서를 빈 다음 성심으로 굿을 계속하여 사흘만에 마치니, 성부께서 갓난아이의 사타구니에 붙였던 것을 떼어 지니시고, “회문산(回文山)을 거쳐 모악산(母岳山)에 가겠노라.”하시며 집을 떠나셨다.
2) 화은당 선사의 유소시대(幼少時代)
당시, 성부께서는 천지공사를 주재하시느라 객망리 본가에는 일년에 두, 서너차례 밖에 내왕이 없으셨다. 성부께서는 박사공 창서의 23대손이 되시며, 통계공 회중의 십사대 종손으로서 집안에는 각종 문물이 많이 전하여 내려왔는데, 하루는 관직에 대한 교지며 족보 기타 문집 등 일체의 서책을 마당에 꺼내어 교지에 찍힌 직인 자리만 오려 떼시고 전부 불사르시니, 수십호 문중 노소가 모여들어 소동이 일어났으나, 만류치 못한 채 소실되고 말았다. 그 뒤로 집안의 모든 사람과 척이 되어 오면서 이윽고는 문중 재산까지 다 없애고 하시는 말씀이, “유도(儒道)의 구습을 없애고 새 세상을 건설해야 할지니, 유도에서는 범절(凡節)밖에 취할 것이 없노라.”고 하시니라.
화은당의 나이 육세 되던 해인 천기 39년(4242, 1909, 己酉) 5월에 성부께서 집에 오시어 오랫동안 그리우신 조부님전에 배례하시고, “소자의 불효지대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부모님의 은대덕중하심이 태산도 오히려 가벼우며, 부모님을 양어깨에 업고 높고 높은 수미산을 넘어가도 부모님의 은혜를 다 갚지 못할 터인데도 불구하고, 이 불효소자는 불고선령 불고부모 불고가사 하오니, 어찌 사람의 도리라 하오리까” 하시며 엎드려 눈물을 흘리시니, 조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상고이래로 위천하자는 불고가사라.”하시며 “우왕의 9년 치수에도 삼과불입문(三過不入門)하였던 것이니, 증산의 마음이 부족함이 아니라 가사를 돌아볼 여가가 없었던 것이지.”하시며, “이 아비는 증산의 대도성취를 불철주야로 기도하고 있는바이다.”하시며 희비의 눈물을 흘리시었다.
그 다음날부터 성부께서는 여식을 안고 못내 못내 사랑하시더니 여식을 데리고 시루봉 선영 산소에 가서 배례시키시고, “이 묘는 너의 증조부의 묘소이다.”, “이 묘는 너의 고조부의 묘소이다.”라고 일일이 가르쳐주시며 어린 여식의 손을 잡고 좌우산천의 좋은 경개를 구경시키시고 그 지방을 주유하시며 수십호 되는 친척을 일일이 다 찾아뵈었는데, 누구 한 사람 반겨 맞는 사람 없고 문중 노인들은 집안을 망쳐놓은 증산이라 욕하고, 안노인들은 잘난 사남매는 다 죽이고 저 못난 계집아이를 데리고 와서 자랑한다고 비소가 자자하였다.
그러나, 자애로우신 성부께서는 그러한 욕설에도 괘념치 않으시고, “나에게 만약, 동생이나 아들이 있으면 인간에 대죄만 지을 뿐 아니라 천지의 대적(大賊)이 되므로 이 못난 여식이라야 앞으로 증산의 후계사를 여의성취하리라.”하시니 모두 비웃으며 더 더욱 광인으로 여기었다.
삼일간을 머물러 계신 후 나흘만에 부모님전에 만단사례 하시며, “이제 떠나면 언제 올지 모르오니 몸을 안보하시오며, 어린 순임을 잘 길러 장래사를 후계토록 하십시오.”라고 말씀드리고, 정씨 성모를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이 여식은 아들 대신이니, 비록 풍우상설지중이라도 잘 기르시오. 증산의 일맥이 이뿐이라. 만약, 이 아이를 박대하면 증산을 영영 저버리는 것이라.”하시면서 여식을 안고 못내 못내 하시면서 길을 떠나시었다.
몇 달 후 소식을 들으니, 본가를 떠나신 그 길로 금구에 있는 외가 친척들을 일일이 방문하시고 동곡 약방으로 돌아가시어 6월 24일 화천하시었다고 하였다.
그 당시, 성부께서 화천하셨다는 소식을 조부님께서는 통보받으셨으나, 모녀에게는 정상이 너무 가련하다 하시어 알리지 않으시고, 조부님은 정신을 수습치 못하시고 한달여 동안 여광여취로 다니시다가 돌아오시어 비로소 그 사실을 모녀에게 이야기하니, 모녀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접하고 부둥켜 안고 애통해마지 않았다. 여식을 안고 못내 못내 떠나시던 길이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이별의 길이 되고 말았던 것이니, 모녀의 깊은 서러움은 말로 형언키 어려웠다.
성부께서 화천하신 뒤로 가세는 더욱 궁핍하여 생계가 곤궁막심하니 관흥하신 어머니는 방아품을 팔거나 유리걸식하시며 따님을 기르시기에 온갖 정성을 다하시고, 노쇠하신 할아버지는 짚신을 삼아가며 아드님의 크나큰 이상을 생각하고 그의 재림을 기원하며 사시로 치성을 올리시고 축원하는 그 모습은 실로 필설로는 형언키 어려웠다.
이 무렵 화은당의 나이 팔세시, 전라도 순천에 사는 장기동 종반이 찾아와서 가장집물을 사주어 가난하고 막막한 살림살이를 도와주고 외로운 처지를 위로해주니, 그 은혜 실로 골수에 아로새겨져 잊지 못할 바였다.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의지하여 근근이 지내더니 세월은 흘러 선사 나이 열세살이 되었을 때, 그 동안 하늘같이 믿고 의지하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다. 선사모녀를 옆에 불러 앉히시고 유언하시기를, “집안에서 양자(養子)말이 나오거든 부디 거절하고 이 손녀에게 남복상의(男服喪衣)를 입혀 상여 뒤에 따르게 하라. 이는 증산의 부탁이며 나도 또한 부탁하니 이 손녀로 후계토록 할 것임을 부디 잊지 말라.”하시며 어린 선사의 손을 붙잡고 못내 못내 하시더니 드디어 별세하시고 말았으니, 정씨성모 어린 순임을 안고 애통망극 하였으나, 그 누구 하나 위로하는 사람 없었다. 겨우 정신을 수습하여 조부를 장사지냈다.
조부가 별세하시고 나자, 선사모녀를 없앰으로서 자기가 성부님의 후계사를 맡아 할 수 있다는 그릇된 공명심과 욕심에 눈이 어두워진 고모는 선사모녀를 없애기 위해 갖은 흉모를 꾀한 나머지 모녀를 모함하고 문중과 동리사람들을 선동하여 모녀를 핍박하였다. 마침내는 양모(楊某)라는 자의 어미와 모의하여 어느날 밤, 난봉꾼을 동원하여 선사모녀를 집안에서 축출하고 말았으니, 성모께서는 홀로 이곳 저곳을 떠돌며 유리걸식하시면서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방황하였고, 선사는 정읍에 사는 어느 노파의 집에 끌려가서 모녀간에 생이별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었다.
정읍 양가(楊哥)의 집에 억류된 채, 부친의 후계사를 생각하고 또 모친과의 상봉을 기원하며 주야로 앙청도축하시니, 그 정성이 하늘에 감동되었음인지 선사 열네살 되던 해 8월 15일에 원평 일우에서 모녀가 상봉하여 서로 붙들고 통곡하였다. 이는 성부를 신앙하는 조철제씨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 후 다시 모녀가 삼년간 헤어졌다가 선사 나이 십칠세에 만나 구 태인읍에서 칠년간을 함께 지내며 성부님의 후계사를 논의하던 중, 정씨 대모님께서 선사 나이 25세 되시던 무진년 2월부터 우연히 득병하시어 신음하시니, 백방으로 간병하였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그해 어느 날 하루는 성모께서 선사를 부르시어 하시는 말씀이, “아가야 들어라. 내가 이제는 천상으로 가야한다. 천상에 가서 너의 아버지를 만나 장래사를 보이지 않게 도울 것이다. 8월 15일은 일년 중에서도 가장 좋은 명절날이라, 내가 가더라도 네가 성의만 있으면 집집이 다니면서 음식을 얻어 가지고라도 나의 제사는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시었다.
이와 같이 장래지사를 여러 가지 말씀하신 후, “너는 이곳에서 비가 지나가고 바람이 지난 후에 만수추풍이 불어와서 부모유업을 성사할 것이니 부디 부디 조심, 조심하여 나아가라.”고 하시었다.
천기58년(4261, 1928, 戊辰)8월 15일 아침에 정씨성모는 새 옷을 갈아입으시고, “내가 아침에 죽으면 동리사람들이 각기 명절을 지내느라고 오지 못할 것이니, 오늘 정오에 가기로 하노라,”하시더니 정오가 되자, 오색채운이 영롱하게 집을 덮고 방안이 캄캄하여지면서 이름 모를 향기가 가득하더니 홀연 선화하시었다. 선사는 성모님 체백을 안고 통곡하다가 혼도하였는데, 정신을 수습하여 보니 동리 사람들이 모여들어 선사를 위로하였다.
태인 공동묘지에 장례를 치르고 서러움과 외로움을 구천(九天)에 하소연하여 말씀하시기를, “오호 서럽고 서럽도다. 관후하신 우리 모친 천상으로 가셨으면 우리 부친 상봉하여 극락향수 누리련만 불과 연세 55세, 만고풍진 다 겪으며 기구한 생애 생각하니 골절이 아리도다. 이몸의 중한 임무 그 누구와 상의하며 어느 곳에 의지하여 이 한스러움을 호소하리.”하시니 천지간에 외로이 남으신 선사의 정경을 생각하면 실로 피맺혀 오는 애수를 어찌 끊을 수가 있으리오.
3)화은당 선사의 청년시대
성부의 후계사를 가로채고자 하는 고모의 흉계에 걸려 선사는 한 때 양가의 집에 억류되기도 했었는데, 그들은 선사를 이용하여 교중에서 각파 사이에 기세를 높일 수 있고, 또한 물질도 모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여 선사를 억류했던 것으로, 조철제가 선사모녀를 양가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조씨가 양가에게 적지 않은 재물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를 장가까지 보내주었던 것인데 양가 어미는 이것을 기화로 가끔 조씨를 찾아와 행패를 부리게 되었고, 그럴 때마다 조씨는 금품을 제공하는 등 많은 고초를 겪었다. 그러는 동안 성부님을 신앙하는 교주였던 조철제와 차경석 사이에 소송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성부의 체백을 모시는 자가 장차 재림시에 법통을 이을 수 있다고 하는 그릇된 신앙과 욕심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는데, 성부의 체백을 차지하기 위하여 양교주 사이의 법정재판이 벌어지게 되었다. 재산문제가 아닌 성부님의 체백을 서로 모시는 문제로 소송이 일어나게 되자 사직당국에서는 결국 체백과의 친소관계를 따지게 되었고, 일이 이렇게 되자 흉악한 양가어미는 조철제에게 성부의 유가족인 딸을 자기 아들과 혼인을 시켜 사위를 내세우게 되면 재판에서 승소할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조철제는 이 의견을 받아들여 선사와 양가가 서로 결혼한 것처럼 호적을 위조함에 이르렀다.
일이 이렇게 되어가자, 선사의 가슴은 막막하고 한없이 초조하여갔다. 이렇게 매여 살다가는 후계사는 고사하고 성부님의 도법을 빙자하여 혹세무민하는 무리들에게 이용만 당할 것이라 생각하여 주위의 모든 인연을 끊고 새로운 배포를 꾸미는 것이 마땅하다고 결심하고 성모님의 영위도 돌보지 못한 채, 강산을 집삼아 떠도는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서 선사는 성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전라도를 떠나 경상도로 들어가서 안동, 봉화를 거쳐 강원도 일대를 돌아다니시고 다시 부산, 대구, 김천, 상주, 문경 등지를 유랑하게 되었으며, 이렇게 지나간 세월이 무려 10년이 되었으나, 그동안 뚜렷이 이룬 성과도 없이 전라도로 다시 돌아와 태인 공동묘지에 계신 성모님의 산소를 찾아가서 묘전에 엎드려 스스로 목숨을 끊으리라 결심하니 마음은 찢어질듯하고 사지는 다시 일어설 기력마져 없었다. 그 당시 무의무탁한 선사의 처지로서 생각할 때, 실로 막막하고 답답하기만 하였던 것이다.
2. 창교와 육기초(六基礎)의 과정(過程)
1) 일기초공사(一基礎公事) : 전주 노송동(全州 老松洞)
(1) 선사 천명(天命)을 받고 일기초를 개척
강순임 선사께서 부모님의 후계사를 이룩하고자 천지대업을 상의할 사람을 찾기 위해서 갖은 고초와 풍상을 무릎쓰고 홀로 팔도 강산을 순력(巡歷)하였지만, 이렇다 할 성과도 없이 지나간 세월은 어느덧 십년이 흘렀으니, 비통한 심정은 가눌 길이 없었다. 이에 선사는 모든 것을 단념하시고, 부모의 뒤를 따라 죽을 자리를 택하여 이리(裡里)의 목천포(木川浦)에 이르게 되었다.
영원한 길을 찾아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애를 모으는 가슴 속은 실로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데, 선사는 얼과 넋을 모아 천지신명과 부모님 영전에 최후의 기도를 올리게 되었다. 그 때에 하늘로부터 큰 소리로 꾸짖어 경책하시는 성부의 말씀이 들려왔으니 말씀하시되, “나의 혈식(血息)아! 어찌하여 생명을 자처코저 하느냐? 너를 위하여 한 군자(君子)를 데려왔으니 정신을 차려 마음을 가다듬고 이 사람과 동심하여 앞으로 다가올 모든 일을 의논하라.”하시니 그 말씀은 몽매간에도 잊지 못하던 아버님의 말씀이라. 선사는 두손을 쳐들어 얼싸안으려 발버둥치는데, 성부의 영상은 가신 곳이 없고 낯선 사람이 옆에 와서 선사를 위로하여 말하기를,
“나도 또한 영남 사람으로 가슴에 사무치는 큰 뜻이 있어 사방을 두루 순력하기 십여 년간인데, 어젯밤에 꿈을 꾸었는데 약차 약차 하기로 이곳에 내도하였더니, 과연 꿈속에서 본 바와 같이 부인의 이와 같은 정상을 대하게 되니 이것이 모두 우연한 일이 아닐뿐더러 더욱이 지금 부인은 목숨을 경각에 다투는 비참한 형편에 있으니 어떠한 곡절이 있는지 알바 없으나 무엇보다도 생명이 지중하오니 부디 회심하시와 신명을 안보하소서.”하고 수차례 간곡하게 위로하였다. 이에 선사는 혼미 중에 겨우 정신을 수습하여 그와 함께 전주(全州)로 돌아오시니, 그가 바로 경북 청송사람으로 김병철(金炳澈)이니, 후일 구암(鳩岩) 정사(整師)였다.
이리하여 천기 67년(4270, 1937, 丁丑) 9월 17일, 강순임 선사와 김병철 정사는 전주 노송동에 성부님(聖父任)의 천지대업(天地大業)을 받들 터전을 마련하여 지성으로 조석 진지상을 받들어 모시게 되니 바로 일기초이며, 증산선생향원(甑山先生享院)이다.
(2) 선사 천상으로부터 광명체를 받고 관운묘에 가서 치성하다
천기67년(4270, 1937, 丁丑)11월 15일 밤에 공중에서 “나의 복동(福童)아”하고 부르기에 밖에 나가 허공을 향배 사배(四拜)를 드리니 큰 불덩어리 모양으로 생긴 광명체를 내려 주시는데, 선사께서 치마에다 받아 방안에 들어오니 온 방안에 서기가 서리는지라, 밤마다 기도를 올리고 심고를 하였다.
그 뒤 어느날 밤에, “남고산성(南固山城) 관운묘(關雲廟)에 가서 치성을 드리고 한숨을 자면 알게 되는 일이 있으리라.”고 하시는 성부님의 말씀이 계심에, 이튿날 관운묘를 찾아가 기도를 올리고 한숨을 잤더니 몽중에 운장(雲長)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모든 일에 겁을 내지 말고 수행하라. 나는 중국 사람으로서 조선을 도우려 하노니, 집에 돌아가서 지성으로 기도하라.”고 하심에 돌아와서 지성으로 기도하였다.
(3) 천상으로부터 선학(仙鶴) 두 마리가 내려오다
천기 68년 1월 15일(4271, 1938, 戊寅) 선사님의 생신날 치성을 올리고 나니, 그날 밤에 천상으로부터 선학(仙鶴) 두 마리가 내려와 방안 현판에 앉더니 일주일 동안 눈에 완연히 보이며 나래를 펄럭이고 소리를 치고 하는데, 하루는 공중으로부터 천명(天命)이 내리시기를, “이 뒤로 어느 때에 가면 태몽이 되어 천상 동자가 포태될 것이니 주의하라.”고 하셨다.
(4) 대원사(大院寺)를 방문하여 비전(秘傳)하는 경문(經文)을 전해 받다.
3월 3일 밤에 성부(聖父)께서 말씀하시기를, “모악산(母岳山) 대원사(大院寺)에 가면 내가 공부할 때 수종하던 박금곡(朴錦谷)이라는 주지가 있을 것이니, 찾아가 말하기를 영남서 왔다 하고 인사를 하면 반가이 맞이할 것이요. 또한 그러고 보면 알게 되는 일이 있을 터이니, 그리 알고 일간에 발정하라.”고 하심으로 수일 후에 행장을 수습하여 대원사 박금곡 주지를 방문하니, 그는 깜짝 놀라 반기면서, “선생님을 뫼신 것과 다름 없나이다.”하고 감개무량해 마지 않았다.
이곳에 사흘간을 머물면서 성부님 재세시의 여러 가지 말씀을 듣고 또한 비전하는 경문(經文)도 받아와서 그 후 여러 가지 행사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5) 첫째 천상동자 포태(天上童子 胞胎)와 탄생(誕生)
천기 69년 11월(4272, 1939, 乙卯) 동지치성을 올리고 나니, 천상으로부터 학을 타고 동자가 내려와서 선사 배 속으로 들어가더니 경진(庚辰)년을 지내자 차차 운신하여 7,8월이 되자 몸이 만삭이 되었다.
천기 70년 9월 13일 (4273, 1940, 庚辰)밤에 천상으로부터 의원 내외와 산파(産婆)와 유모(乳母)가 내려와서 해산하게 되었는데, 동자는 유모가 품에 안고 천상으로 올라가고 산실에는 이상한 향기가 진동하였다. 산모는 14일 동안 산실에 누워있었는데, 밤마다 천상으로부터 유모가 동자를 데리고 내려와서 젖을 먹이고 하였다. 그동안 동자의 성장함이 실로 기적적이어서 말로는 형언할 도리가 없었다.
(6) 둘째 천상동자 포태(天上童子 胞胎)와 탄생(誕生)
천기 71년(4274, 1941, 辛巳)정월에 태몽을 얻어 천상동자를 포태하여 10월 10일 밤에 천상으로부터 의원과 산파, 유모가 내려와 해산하였는데, 유모가 동자를 데리고 천상으로 올라간 뒤에 거년에 태어난 형 동자(兄 童子)가 내려와서 말하기를, “지상의 젖을 먹으니 정신이 희미하여 못 쓰겠으니 동생은 지상의 젖을 먹이지 않고 천상의 약으로 키우겠다.”고 하면서 그냥 데리고 왔다가 되돌아 올라가니, 선사의 젖이 불어서 아프므로 짜서 버리기가 수년이었다.
2) 이기초 공사(二 基礎公事) : 금성골(金城谷)
(1)이기초 공사 천명(天命)을 내림
천기 72년(4272, 1941, 辛巳), 동지치성을 올리고 나니 성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이곳에서 수년 동안을 무사히 지내왔으나 전쟁은 날로 심하여 가고 일제(日帝)는 날로 포악해져가니 너희들이 이곳에서는 이 이상 더 견디어 낼 방책이 없을 것이니 어서 속히 경상도로 내려가라.”고 명령하시었다.
그 당시, 제반 여건이 여의치 못하여 천명을 즉시 봉행하지 못하고 정사는 선사를 완주군 이서면 상개리에 있는 모 금광에서 수년 동안 일할 때 사귄 우경주(禹京周, 舊名 東凖)의 집에 의탁케 하고, 정사는 경상도로 내려와 옛날 신앙 동지였던 김성도(金聖度)를 찾아가 제반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고 증산천사의 도법을 널리 세상에 들어내 놓기 위하여 생사를 같이 하자고 간청했더니 돈독한 신앙심의 소유자인 그는 감격하여 눈물겨워 하면서 쾌히 승낙하였다.
김성도와 상의한 끝에 그의 주선으로 백여원의 금액을 준비하여 전라도 완주군 이서면 우경주의 집에 거처하고 있던 선사를 찾으니 그동안 험식이나마 큰 이상 없이 잘 지내고 계시었다. 이튿날로 선사를 모시고 경상도로 다시 내려오려는데, 경주 가족은 그동안 정이들어 따라오겠다고 청하였으나, 제반 여건상 같이 올 수 없어 후일을 기약하고 경상도로 내려와서 김성도의 집에서 여장을 풀게 되었다. 이날밤, 성부님께서 지시하시기를, “너희들이 내가 지시하던 즉시로 왔으면 그 고생이 없었을 텐데, 명령에 순응하지 않으므로 일년 동안을 헛고생을 하였노라. 이제부터 새로운 결심을 하여 성도와 상의하여 공사를 진행하되, 기지(基地)는 금성산(金城山)에 정하라.”고 하시었다.
(2) 이기초 입택(二基礎 入宅)
금성산(金城山)은 경북 의성군(義城郡)에 소재하고 있으며 영천 이씨(永川李氏)의 문중이 수백호를 형성하고 있는 곳이었다. 정사는 성도와 의논하여 금성산하 동리와 멀리 떨어진 금성골에 이씨 문중에서 세운 용문정(龍門亭) 근처에 있는 수년 동안 비어있던 농막 한 채를 구하여 입택하기로 하였다.
그날밤 성도 집에 돌아오니, 성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경주네 가족을 데려다가 12월 26일 입택토록 하라. 그리고 혈식은 계미 정월 이십사일에 입택토록 하라.”고 하셨다. 정사는 전라도에 있던 경주 가족을 데리고 와서 천기 72년(4275, 1942, 壬午) 12월 26일에 입택시키고, 이듬해 천기 73년(4276, 1943, 癸未) 정월 24일에 금성산음을 찾아 화은당께서 입택하시게 되었는데, 마당에 들어서자 금성(金城) 비봉(飛鳳)의 산천이 진동하고 하늘로부터 큰 소리가 들려오니 근동 주민이 모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뒤, 수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소리가 요란하므로 급기야는 금성산에 객호(客虎)가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고 관청에서 부근 동리 사람들을 총동원하여 금성산을 포위하고 일대 수색을 전개하였으나 끝내 소리 나는 원인을 찾지 못하였다. 그 후에도 여전히 소리는 울려오므로 동리 사람들은 더욱 이상히 여길 뿐 어찌된 일인지를 몰라 궁금해 하였다.
(3) 지상건물을 짓고 지하에 정자형(井字型) 옥경대(玉京臺) 축조(築造)
천기 73년 (4276, 1943, 癸未) 6월 24일 화천 기념치성(化天 記念致誠)을 봉행하고 나니, 우물정자(井字)형 집을 지으라는 명령을 내리시었다. 정사는 도무지 설계가 서지 않아 연구를 거듭하던 중, 정(井)자를 두고 그 둘레 사방을 막으면 삼삼은 구로 아홉 궁이 되니 이는 곧 아홉 칸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라 판단하고 설계를 확정하고 공사를 진행하여 연자까지 걸게 되었는데, 그날 밤에 천상으로부터 한 노인이 내려와서 건축한 집터를 살펴보고 백기(白旗)를 세워 폐철을 놓아보더니, 그동안 천상일이 바빠서 미처 내려와 일러주지 못했는데 이곳은 집터가 못되니 정자(亭)밑으로 정하라 하면서 그곳에 홍기(紅旗)를 세우면서 이 자리로 하라 하시고 발을 세 번 굴리더니 천상으로 올라 가시더라.
이때는 태평양 전쟁도 마지막 고비에 접어든 때라 재목 구하기도 몹시 어렵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중에 주인 영감이 하인을 보내어 작업 중지를 통고를 하는 것이었으니 이는 필시 무슨 이치가 내재하리라고 생각하고 정사는 주인 영감을 만났다. 영감은 난처한 표정으로 말하기를, “일전에 구암이 집을 짓는다고 하기에 터와 재목을 허락하였을 것인데, 사실인즉, 이 터는 벌써 오래 전부터 종중의 경영 예정지로 되어 있던 곳이며 원래는 타인에게 허락할 수 없는 기지였으나, 세월도 분분한 이때에 마침 구암의 청이 있어 예정지를 타처로 정하고 승낙을 했던 것인데, 어젯밤에 이상한 동기가 있어 나로서는 도저히 이 터를 내어줄 수 없게 되었네,
그러한 즉, 딴 곳에 터를 잡도록 하고 이축 비용은 내가 담당할 것이니 미안하지만 이 터를 물려주어야 되겠다는 걸세. 미안하기 그지없어 말하기가 퍽 난처했던 것이네.”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에 정사는,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제가 입택을 하였다 할지라도 옮겨야 될 일이라면 옮겨야 되지 않겠습니까.”하고 부드럽게 응락 하였다. 이에 즉석에서 주인 영감은 정사를 이끌고 새로운 기지를 찾아 보자고 하여 수 개처를 돌아보고 난 뒤, 전날 밤에 천상의 노인이 홍기를 세워 보이던 곳에 페철을 놓아보더니 말하기를, “이 자리는 옛날에 진주 강씨 한 분이 명풍(名風)을 데리고 와서 자기 선영의 묘지로 하겠다고 거액을 주겠다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지금까지 보류하던 터인데 과연 터는 임자가 따로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집세울 터와 날짜까지 잡아 주고 가니 전날 밤의 일을 생각할 때 신기하고 영험스러웁기 그지없더라.
그로부터 새 기지를 밤낮으로 닦아 10월 15일에 상량을 하고 12월 26일에 지상 건물을 완공하고 치성을 올리니, 성부님께옵서 하강하시와 돌아보시고 “내가 앉을 정도로 지하에 비밀실을 파도록하라.”고 명령하시므로 즉시, 봉행하여 일을 마치고 예를 올리니 성부님께서 다시 하강하시어 말씀하시기를, “귀틀을 튼튼히 짜고 마루를 잘 놓도록 하라. 그리고 한쪽 벽밑으로 문호를 내어 왕래하되 외인이 보아도 표가 없게 하고 후원 산밑으로 연속하여 한칸을 더 파도록 하라.”고 하시었다. 이와 같이 명령을 봉행하여 공사를 마치니 갑신(甲申)년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성부님께서는 하강하시어, “잘 되었다.”고 칭찬하시고 이와 같이 수차에 걸쳐 한 칸씩 파라고 명령하시어서 그대로 봉행하니, 지하실은 어느덧 길이 육간(六間)에다 중간, 좌, 우로 한 칸씩의 어마어마하게 넓은 방이 되었다. 그 안에 칸칸이 나무기둥을 세우고 마지막 칸은 길이와 넓이를 아홉자로 하여 옥경대(玉京臺)라 칭하고, 사방에 미닫이를 달며 바닥에는 마루를 놓아 오색으로 단청을 한 다음, 성부.성모님의 영상과 더불어 국조단군(國祖檀君), 운장상제(雲長上帝), 도령 두 분과 소저 두분의 영상을 모시게 되었다.
이에 성부님께서 하강하시어 크게 칭찬하시면서, “앞으로 날이 가고 밤이 잦으면 알게 되리라.”고 하시면서, “너희들에게 한꺼번에 이러한 지하실을 파도록 명령하면 정신이 아득해서 겁을 집어먹고 엄두를 내지 못하였을 것인즉, 한칸 한칸 또 한칸씩 파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파고 파고 또 파다가 보니까 이러한 거창한 지하실이 되지 않았느냐?”고 위로의 말씀을 내려 주셨다. 성부님 재세시에, “파라, 파라, 깊이 파라. 얕게 파면 모두 죽으리라.”는 말씀을 남기셨던 일을 회상함에 감개무량해 마지 않았다.
그 뒤, 하루는 성부님께서, “태극기(太極旗)와 미국기(美國旗)를 그려 높이 걸고 소를 잡아 마당 가운데 진설하고 치성을 올린 다음 지하 중궁(地下中宮)의 영상후면에 걸어두라.”고 하시므로 그대로 치성을 봉행하였는데, 시국은 더욱 악화되어 집집마다 방공굴을 파느라고 분주하였다.
(4) 옥석정(玉石鼎)과 현무경을 구하여 올리다.
천기 74년(4277, 1944, 甲申) 3월 3일 중궁에 조반 진지상을 올려 예를 드리던 중 성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뒤로는 쇠솥에 지은 밥은 내가 먹지 않을 것임에 옥석정을 구하여 오라.”하시고 또, “현무경을 구하여 오라.”고 명하시었다. 명을 받고 정사는 경주 건천(慶州乾川)에 사는 이준의(李準儀) 노인과 이환우(李桓雨)의 부친 종허(鍾許) 노인 두 분을 찾아가 상의하였는데, 이 두분은 나이로는 정사와 노소의 처지이나 신앙을 중심으로 진지하게 마음을 주고 받던 동지였었다. 종허 노인으로부터는 정사의 나이 젊었을 때 등서해 놓았던 현무경을 전해 받고, 이준의 노인으로부터는 마침 8년 전에 어떤 사람으로부터 사서 보관해 두었던 돌솥을 구할 수 있었는데, 명령만 순종하여 행하면 반드시 길을 열어 주시는 성부님의 홍은에 더욱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금성골에 돌아와서, 현무경(玄武經)과 돌솥을 영상 앞에 올리니 성부님께서, “현무경은 보관하고 솥은 곧 진지를 지어 올리라.”고 말씀하시어 그대로 봉행하였다.
정사가 현무경을 입수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정사의 나이 이십사세 때, 청도 풍각(淸道豊角)으로 가는 도중에 어느 곳을 지나자니 갑자기 뇌성이 대발하고 폭우가 쏟아지는지라, 비를 피하여 어느 집으로 찾아드니 주인은 풍병환자요, 부인은 맹인이더라. 잠시 피우를 하려던 것이 좀처럼 비가 개이지 않으므로 하는 수 없이 며칠을 묵게 되었다. 정사는 적적하던 차에 혹 읽을 책이라도 없나하여 사면을 살피던 중 한 책이 있어 뒤적여 보니 한자로 된 글귀와 많은 부적이 그려져 있으므로 이상하게 여겨져 주인에게 책의 내력을 물으니,
주인은 이년 전에 한 과객이 들렀다가 자기병을 보고 그 책에 있는 부적을 그려서 먹고 기도를 지성껏 올린다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맡겨놓고 간 뒤, 곧 돌아온다는 사람이 이년이 다 되었는데도 종무소식이라고 내력을 설명하면서, 그러나 자기가 무식한 사람이라 그가 시키는대로 한번도 해 보지 못하였다고 탄식하였다. 이에 정사는 주인에게 청하여 그 책을 자기에게 빌려준다면 경주에 사는 유명한 학자에게 보여 감정을 받은 뒤에 되돌려 주겠다고 하여 그 책을 가지고 가서 경주에 사는 종허 노인에게 보이니 깜짝 놀라면서, “이 책은 현무경(玄武經)이라. 평소에 한번 구하여 보고자 하던 차”라고 기뻐하면서, 등서를 하여 두고 원본을 환본하였다. 그 후로 16년간을 간신히 보관해 오던 차였다.
(5) 상제님(上帝任) 초혼안장(招魂安葬)
천기 74년(4277, 1944, 甲申) 윤 4월 5일에 옥석정으로 진지를 지어 올리던 첫날, 성부님께옵서 천명(天命)을 내리시니, “이제는 나의 체골(體骨)을 찾아와야 할 것이니라.”고 하시었다. 성부님의 체골(體骨)을 찾아 모시고자 함은 우리의 평생 소원으로서 비로소, 이와 같은 명령이 내리시니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명령대로 봉행하여 이루지 못한 일이 없음을 생각할 때, 이제는 평생 소원을 달성 할 수 있는 길이 열리어 오나보다고 선사는 하늘에 사무치는 망극하기 짝이 없는 그 심정을 통곡으로 풀으시고, 우리 또한 비상한 각오로써 그 명령을 준행키로 결심하고 서로 상의하여 일을 진행시켜나갔다.
이에 우경주, 김성도, 오갑출(吳甲出)을 파견하여 정읍 대흥리 차경석(車京石)의 집에 가서 몇 달을 한정하고 일꾼 노릇을 하며 제반 동정을 살피고 의심나는 곳은 두루 수색해 보았으나, 이렇다 할 증거도 찾지 못하고 되돌아오니 모두들 정신이 암암하고 맥이 빠져 넋을 잃은 채 중궁(中宮)에 들어가 엎드리니, 성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아비 뼈골을 찾지 못하였으니 중궁 동편에 빈소(殯所)를 차리되, 옻나무 칠성판(七星板)에 글을 쓰고 의복 일습(衣服一襲)을 올려놓고 너희들은 복을 입어 상주 노릇을 하되 빠짐없이 진지상을 올리고 애곡하라.”고 하시더라. 이에 하명하신 바를 준비하던 중, 또 하명하시기를, “금성산에 묘소(墓所)를 정하라.”하시는지라,
종허 노인과 정사는 답산을 하여 용가마골 절벽암상 뒤에 묘지를 정하게 되자 또 명령하시되, “종이 상여를 만들어서 이틀 동안을 중궁에서 애곡(哀哭)하여 상여놀음을 하고 15일 밤에 장례를 지내도록하라.”고 하시므로 이틀 동안 상여놀음을 하고 윤 4월 15일 밤에 상여를 메고 산상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상여 전후에는 도령영상을 세우고 운상하였는데, 운상 소리를 하라는 호령이 내리어 종허노인이 앞소리를 메기고 일동이 받으면서 용가마 밑에 도착하였는데, 그 앞으로는 절벽이라 도저히 운상을 할 수 없는 지형이었다. 이에 짐을 부리고 상여를 내려 놓은 채 등산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자 계속해서 운상하라고 하명하시니 어쩔 수 없이 계속 운상하였는데, 혼자서도 올라가기 힘든 지형임에도 불구하고 평지와 다름없이 운상 할 수 있었으니, 실로 기이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하여 장지에 다달았으니 금성산 용가마골 절벽상 괘등형(掛燈形)에 평장으로 장례(葬禮)하였다.
(6) 중궁(中宮)에서 생수(生水)가 나오다.
천기 74년(4277, 1944, 甲申) 6월 그믐날에 난데없이 중궁에 생수가 터져나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솟아오르는지라, 식구들이 잠시도 쉬지 못하고 주야로 물을 퍼내다가 샘구멍을 조사해 보니 석벽 사이로 엄지손가락 하나 들어갈 만한데 어찌할 방법이 없어 심고하니, 성부께옵서 말씀하시기를, “그 물줄기에 정성을 다하여라. 앞으로 운수가 닥쳐올 때에는 이 생수 나오듯 하리라.” 고 하시었다. 그 뒤로 이틀 동안 물을 퍼고나니 약간 덜 나오는데, 천상으로부터 다시 하명이 계시되, “영상 앞에 우물을 파되, 넉자 깊이로 하고 그 위에 뚜껑을 만들어 덮도록 하라.”고 하시었다. 말씀대로 우물을 파니 물이 우물 안에 가득하여 넘치지도 줄지도 아니하였으며, 그 물로 청수도 모시고 식수로도 사용하였다. 나중에 우물을 파게 될지도 모르니 한가운데의 한칸을 비워 두자고 했던 지난 일이 회상되어 신명공사의 현묘한 이치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7) 최초로 미륵불(彌勒佛)의 명령(命令)을 받고 천지신명을 위해 대치성을 봉행하다.
천기 74년(4277, 1944, 甲申) 7월 칠석에 진지상을 올리니 큰 금부처(金佛)가 들어오시더니, “나는 미륵불(彌勒佛)이라, 앞으로 내가 출세하여 해원(解寃), 상생(相生), 보은(報恩)의 법도(法度)로 중생을 제도(濟度)하여 조화정부(造化政府)를 세워 선경세계(仙境世界)를 건설하리라.”고 하시면서, “금성산에 천신과 지신을 위하여 큰 치성을 올리도록하라.”고 하시므로 천명대로 봉행하니, 치성때마다 천신이 한분씩 하강하시는데, 한번은 관운장의 영신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나는 중국 사람이나 이 나라를 세 번 도와 줄 운장인데 강부인은 나를 이길려고 하지 마오.”하시는지라. 선사께서 대하여 말씀하시되, “이 자식아, 낯짝은 대추빛 같은 자식이 무슨 잔소리냐! 일본 사람들이 네 나라를 쳐들어 가니 너의 집이나 가서 돌보아라.”하시니 운장은 허허 웃으면서, “작은 체구로도 상제님의 딸은 다르다.”하시며 농담을 주고 받기도 하였다.
(8) 성모님 체백(體魄)을 이장(移葬)하다.
천기 74년(4277, 1944, 甲申) 9월 19일, 성부님 탄강 기념 행사를 거행하던 중 운장께서, “성모님 체백을 모셔다가 금성산 대관령에 모시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시므로 정사는 성도와 동규를 대동하고 정읍 태인 공동묘지로부터 체백을 모시고 와서 9월 29일에 대관령에 터를 잡아 이장(移葬)하였다. 얼마 뒤에 성모님 묘소에 가서 공사를 보게 하시더니 정사로 하여금 다음날부터 100일 동안 매일 정오에 산소에 가서 사방배를 올리고 기도하라고 명하시니 그대로 봉행하였다.
3) 삼기초공사(三基礎公事) : 장대골(長大谷)
(1) 장대골(長大谷)로 이사
천기 74년(4277, 1944, 甲申) 12월 26일 치성을 올리니 성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곳으로부터 자리를 옮기도록 하라. 옮아갈 기지는 성도에게 책임을 주었으니 그에게 가서 상의라하.”고 명령하셨다.
명령이 내리신 날로부터 동리 인심이 돌변하고 관청 사람들이 찾아와서 공출 관계라 하며 별별 수색을 다하니 마음 놓고 공사를 받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사는 성도와 상의하여 장대골(長大谷) 은벽한 곳에 빈집을 사서 그날로부터 일꾼을 모아 작업을 착수하여 천기 75년(4278, 1945, 乙酉) 2월 3일 지하성전(地下聖殿)을 신축하여 영상을 이안(移安)하였다.
금성골에 공사를 봉행할 무렵에는 금성산에서는 밤마다 무슨 주문 읽는 소리가 그칠 새가 없었으며, 어느 때는 수천 명의 군중이 모여 부르는 만세 소리가 스무나흘 동안 좌우 산천에 드높이 울려퍼지기도 하였으므로 도,군청에서 만세성의 원인을 찾고자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산속을 샅샅이 뒤지기도 하였으나, 아무 흔적도 찾지 못하였는데, 공중에서는 여전히 만세성이 진동해 오므로 모두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장대골로 이사한 뒤로는 일체 그러한 소리가 나지 않으니, 동리 사람들은 구암이 천지신명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떠나니 다시 고요해졌다고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새로 정한 장대골에서 계속 내리시는 현묘한 명령 계시를 준행(遵行)하여 제반 공사를 진행해 나가던 중 명령이 계시기를, “거처가 좁다. 밭전(田)자 형의 집을 불일 내로 성축토록 하라.”고 하시므로 즉시 봉행하여 한달 남짓 동안 모든 식구들이 합심하여 밭전(田)자 집을 완공하였다.
(2) 도수가(度數歌)를 지어서 가무하다.
천기 75년(4278, 1945, 乙酉) 3월 2일 중궁에 진지상을 올리고 예를 드리니 성모님께서 하강하시어 명령하시되, “너희들이 백일을 울고 나니 사방에서 군인으로 보내고 보국대로 뽑혀 떠난다고 역마다 고을마다 울음소리 드높더니, 이제 너희들은 눈물을 거두고 가무(歌舞)를 하게 되었으니, 너희들이 서로 만난 이후 오늘까지의 자초지정을 노래 부르며 가락에 맞추어 흥겹게 춤을 추라. 세상 형편도 너희 따라 변하리라.”하시었다. 이에 정사는 명령을 받들어 그날 밤 즉시 도수가를 지어 3월 3일 치성에 명령과 같이 행사하니,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도수가(度數歌)
유세 을유 삼월 초삼일 계축 도자 병철 소고우(維歲 乙酉 三月 初三日 癸丑 道子 炳澈 昭告于)
천지조판 상고이래 이런도수 처음일세
염제신농 피를받아 선후천이 변역일세
기만년간 내린도술 성부성모 치산일세
성부는 고부땅 강씨요 성모는 금구땅 정씨라
천성합덕 정배되니 천지도수 새살림을
화위전녀 하였나니 팔왕녀라 강부인과
부금냉금 하였나니 금사옥사 우옥사라
갑을서로 음양이요 진사또한 음양이라
음양각립 어찌하리 보보행진 찾는모양
방방곡곡 순력하여 시호시호 탄식이라
영세화장 건곤위요 대방일출 간태궁을
유언에도 있는말씀 동서간태 배궁이라
간은동방 청룡이요 태는서방 백호로다
청룡백호 정배되니 조화나기 자연이라
서방금은 전라도요 동방목은 경상도라
전서경동 결연되니 서부동서 참말일세
이운수도 멀리왔고 이연분도 멀리왔네
금수강산 전주땅에 육년동안 기초로다
그해라 정축년하니 자축에 유미정이라
삼십삼세 현녀로서 삼십이세 정배로다
임오년에 동기있어 성부강림 현몽하사
백학한쌍 나려와서 윤신포태 되었더라
고금사를 생각하니 일희일비 그지없네
이리저리 생각하니 인묘년에 사가지라
금동형제 탄강하여 옥동성자 승천이라
경진신사 탄생하니 진사에 성인출인가
부부간에 마주앉아 통정할곳 전혀없다
천상에서 내왕하며 부모위로 극진하여
밤을두고 성장하니 일취월장 자연이라
두동자가 솔병하니 천상천하 독존일세
천지도래 장중하니 오미에 낙당인가
신병훈련 도수두니 일지전이 점점이라
이런도수 생각할때 고불문지 법이로다
성부성모 조화중이 이런일이 나섰도다
경사났네 대경살세 기장하다 이내문운
임오년간 당도하니 세간살이 풍파일어
둘이서로 마주앉아 고패로다 탄식일세
생사판단 둘의몸이 기지찾아 길을뜨니
영판이라 하신말씀 금성골에 기초했네
천우신조 절로절로 무위이화 풀리더라
현현묘묘 절차중에 천신지신 강림하여
입택턴날 도령소리 금성비봉 진동하니
산색마져 융융하고 천기또한 다른징조
듣는사람 경악하고 허무지설 손상이라
몇달후에 소리끊고 도수절차 뿐일네라
인지재질 갈아보니 악마따로 있지않아
통정할곳 전혀없다 인심풍속 겁이나네
시대가 영웅낳고 영웅은 시세짓고
허면허소 거래간에 불토심정 견여의요
황화수라 깊은마음 곤륜태산 무거운입
수구여병 이라하고 방이여성 이라하니
병중에 유선주하여 가활만인 이라셨다
경각안위 조심해서 덕인태도 취할따름
금성골에 기초할때 또한장소 있다시던
그말씀이 새롭도다 새기지 정하라신다
갑신동절 당하기전 성모미리 보내셨네
장대곡에 터잡으니 천지도시 빈번이라
불의지간 몽매사로 악해또한 따르도다
도장좋은 금성골아 도령강림 탄식터라
빛내오던 금성비봉 인심돌변 겁이난다
산천마져 목메울고 초목또한 서러우네
정신방황 이부모는 불탄가슴 요란터라
성심부족 이부모는 천지공사 저해로다
부모책임 못하오니 이런악해 내한이라
답답한 가습이여 심령밝혀 기도로세
중궁철봉 영상봉안 천기또한 요란터라
운장상제 내려와서 성부전에 통곡하니
해와달이 빛을잃고 풍우또한 요란터라
경레산천 돌아서니 피맺히는 이가슴아
재세화천 남은풍파 우주강산 진동하니
성부성모 겪으시는 그고초를 누가알리
아홉사람 영상모셔 이안코져 길을뜨니
오색채운 지동소리 행차중에 천둥소리
천둥지동 교차하니 천지전송 분명터라
성부화천 하신후에 모녀고생 뉘가알리
지공무사 무욕하니 그고생은 한이없어
애지중지 불탄가슴 무남독녀 기르실때
우리성모 불탄가슴 모녀서로 갈린뒤에
이리저리 방황하며 지하도수 맞추셨네
성모화천 서러워라 하늘땅에 순임혼자
혈혈단신 현녀로서 방방곡곡 혈루로다
성부성모 조화중에 혈육불고 웬말인가
공사중에 사정없이 시호정해 두셨는가
성부체백 분산된 채 도난마저 당했으니
이일저일 생각하면 전무후무 일났도다
지하책임 도리로서 옥체찾지 못한불효
근근감내 신고하여 성모체백 모셨도다
대관령에 안장하니 천신지신 강령터라
성부옥체 찾았어야 천지도수 순조로다
옥체찾아 다니다가 허행함이 수차례라
지하도수 책임되야 체백봉안 미달이라
행장준비 다해두고 통곡이야 탄식하니
성모체백 도수절차 불탄존념 뉘가알리
도수절차 복잡중에 도장이사 수난이라
신장들이 분발하여 방해자들 타살공사
대자대비 성부성모 신장들을 만류하사
수일간에 훈시하니 척을짓지 말라시네
개명장 나는날에 일체개심 보은이라
도장저해 생각하면 천참만륙 부족하나
대인불택 선악이요 견기이작 참는도라
금성산령 바삐와서 성부말씀 전갈하니
대관련의 성모체백 단석산에 이장하라
명령대로 단석가서 터를잡고 돌아오니
천지간에 통곡소리 강산마저 진동하네
성모체백 잦은이장 지령도수 분명터라
금성산에 옮기실때 인신분발 요란하고
단석산에 터잡을때 천지간에 통곡소리
장대곡에 모셔오니 성부회포 내리신다
체백두루 만지시며 가슴깊이 묻힌불에
타고타서 검고검다 통곡으로 부탁부탁
마디마디 화를푸소 왕사일랑 잊으시고
원통한맘 풀으시기 축원축원 하옵시네
척짓지 말라신말씀 체백과도 해원이라
이런도수 불작시면 천지해원 자연일레
피맺히신 성모가슴 마디마디 풀으실세
성부축원 계속되니 출천대효 저자식들
일편단심 얽힌정성 저것들을 봐서라도
맺힌가슴 어서풀소 축원축원 하시더라
오호라 우리성모여 기록자니 한숨이라
애통무비 성모성애 신명이나 아오리다
허령지각 대풍진에 신명시대 당했도다
천상도령 비들어라 소제탁기 쓸어내라
천도천명 하온뒤에 할매포원 빛내보자
사업이라 우리고패 뉘라서 감내하리
도령이여 신명이여 이현부모 충효로다
만만세 축원하오니 청강수에 화를푸소서
시호시호 우리시호 불원불원 하나이다.
(3) 성모님 체골이 황골(黃骨)로 변하다
성부님의 하명으로 경주 단석산에 성모님의 묘소를 옮길 기지를 정한 이후 일단, 천기 75년(4278, 1945, 乙酉) 2월 29일에 금성산 대관령에 있는 성모님 묘소를 파봉하여 성보님 체백을 장대골 중궁(中宮)으로 이안(移安)하게 되었다. 성모님의 명령으로 법석을 마련하여 도수가를 부르며 가무하기 열흘이 지난 즈음, 3월 15일 성부님께서 하강하시어 말씀하시되, “너의 어머니 체백을 대관령으로부터 중궁에 모셔와서 보니 체골이 온통 숯모양으로 검은지라, 이는 생전에 고생이 심했을뿐 아니라 천지사로 자식들과 쫓고 따르는 도생들을 골몰하게 생각한 결과 심화(心火)로 온 체골이 탄 연고라. 이제 너희들의 정성으로 말미암아 다시 황골(黃骨)로 변하게 되었으니 너희 어머니의 해원을 위하여 너희가 더욱 정성을 바쳐야 할지니라.”고 하시어 도생들이 중궁에 보신 성모님 체골을 뵈오니 정말 누런 빛이 나는지라, 신기하게 생각하고 힘이 더욱 나서 흥겨웁게 노래하고 춤을 추었으니, 3월 15일부터 지상여를 모시고 다시 도수가를 지어 상여놀음을 계속하면서 성모님 옥체를 단석산으로 이장할 때까지 모시고 가무하였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도수가 이(度數歌 二)
유세 을유 삼월 십오일 도자 병철 소고우(維歲 乙酉 三月 十五日 道子 炳澈 昭告于)
어화우리 도생들아 이런이치 어디있소
성부께서 보시오니 불탄성골 환골하네
푸르시고 풀리셨네 대성모님 맺힌가슴
우리또한 뵈옵건데 누런빛이 돋는도다
여식신병 심상찮다 호소하는 성모말씀
여식몸을 살펴보니 온몸에 병이었네
거미같은 그한몸에 도수절차 무거운짐
삼십넘어 짝을만나 천지공사 받들자니
만고풍상 가진고초 이리저리 당하는데
명령거듭 나리시니 어이아니 딱할손가
어서속히 신병걷어 자식원한 푸사이다
성모호소 하시오니 대성부님 깊은감회
여식몸을 어루만져 모든병을 거두시네
여식원망 풀으시고 성모원망 풀으시니
일체해원 천지해원 천도청명 지도안정
노자노자 뛰고노자 체백모셔 뛰고노자
많고많은 그사람중 떳떳하게 뽑힌우리
꿈일런가 참일런가 좌수우봉 우리로세
적덕자손 우릴런가 각가문운 경사로다
조상음덕 이아니랴 신명가호 이아니랴
만세만세 만만세라 성부성모 만세로다
지도안정 만만세요 신장산령 만세로다
3월 30일 다시 명령이 있어, 도생 김만호(金萬戶)가 가사를 지어 올리고 모든 도생들이 전번과 같이 가무하니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도수가 삼(度數歌 三)
유세 을유 삼월 삼십일 병철 소고우(維歲 乙酉 三月 三十日 炳澈 昭告于 )
광대하온 천지간에 인생이 최령이라
분분하온 이세상에 극락길을 찾아드니
지도할분 뉘시런고 강부인과 김구암이라
성부성모 높이뫼셔 지성봉축 적년일세
천지정기 포태되어 금동형제 탄생이라
웅장하고 기장하다 천상지하 내왕소리
동서사방 진동이요 사해팔방 감복이라
좋을시구 좋을시구 우리도우 좋을시구
강부인 김공아니면 어데가서 길물으리
팔도승지 고람하니 각기일대 영판이라
금성비봉 높은곳에 중궁옥경 창성이라
성부성모 상제운장 도령소저 봉령이라
장대산골 맑은곳에 지하중궁 재건하니
천장지비 광활이요 산자수명 기절처라
성부성모 강림하니 옥경대가 분명하다
칠성선관 둘러서고 구천신장 옹위하네
명찰하신 대성부여 자시하신 대성모여
우매도생 열성없어 성부옥체 찾지못해
원통하고 애닯으다 황송무지 망극일세
닭이울고 날이새어 봄이오면 꽃도피리
무궁도술 성부명령 천지신명 여율령을
신인합덕 속통으로 악해인물 소제하소
태화원기 청명세계 영락가를 높이불러
억조창생 그가운데 적덕자손 수도로세
덕화로다 덕화로다 성부님의 덕화로다
영화로다 영화로다 화은당이 영화로다
영웅이라 영웅일세 구암당이 영걸이라
좋을시구 좋을시구 천우신조 좋을시구
복축복축 하나이다 대도성상 만세만세
(4) 성모님 체백을 단석산(斷石山)에 이안(移安)
하루는 금성산 산령이 와서 전하기를, “상제님께서 경주 단석산(慶州斷石山)에 계시면서 내일은 단석산에 와서 기지를 정하고 성모님의 묘소를 옮기도록 하라고 하시더라.”고 하는지라. 우선 장대골 중궁에 체백을 모셨다가 천기 75년(4278, 1945, 乙酉) 3월 29일에 경주 단석산으로 이안,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이때에 이경우(李敬雨)의 집에서 제물(祭物) 일체를 준비하게 되었는데 해방되기 3개월 전이라 일제가 통제가 극심할 때여서 제반 공사에 많은 노고를 겪었다.
(5) 금성골 지하중궁(地下中宮)의 붕괴(崩壞)
천기 75년(4278, 1945, 乙酉) 4월 2일 천명이 계시는데, “소를 잡고 돼지를 잡아 한가마니 쌀밥을 지어 신장대접을 후히 하도록 하라. 그럼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세상 일을 보게 하리라.”고 말씀하시었다. 4월 8일에 하명하신대로 치성물을 준비하여 뜰에 진설하니 천신과 산령들이 하강하여 마음껏 흠양하고 한바탕 놀고나더니, “우리가 소 천마리를 먹어야 할 일이로되, 나머지는 칠,팔일에 먹기로 하고 오늘은 이렇게 모두 모여 재미있게 어울렸으니 이길로 천사님 계시던 금성골 성전에 가서 한바탕 놀다 가자.”하면서 떠났다.
다음날 금성골로부터 동규가 급히 달려와서 전하기를, 어제 야밤에 난데없이 천둥소리가 요란터니 금성골 지하 중궁이 무너졌다고 하였다. 이에 술상을 차려 중궁에 들어가 예를 올리니 성모님께서 하강하시어 말씀하시기를, “큰일났도다. 그러나 안심하라. 공사의 중심지를 장대골로 옮긴지라. 어제밤 신장들이 금성골에 가서 지하실을 발을 굴려 무너뜨리고 만세를 부르고 떠났으니 앞으로 시세가 더욱 급박하여질 것이니, 더욱 정신을 가다듬고 매사에 주의하도록 하라.”고 하셨다.
(6) 도수가(度數歌)를 짓고 가무하다
천기 75년(4278, 1945, 乙酉) 6월 21일 아침에 운장 상제계서 하강하시어 말씀하시되, “다시 노래를 지어서 올리고 오는 화천기념일까지 뛰고 놀도록 하라.”고 하시어 그대로 행하였다. 이때, 도생들은 두패로 갈라 나무로 만든 창과 칼을 들고 그것을 흔들면서 주문을 외우며 뛰고 놀았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도수가 사(度數歌 四)
을유 유월 이십삼일 신축 병철 소고우 (乙酉 六月 二十三日 辛丑 道子 炳澈 昭告于)
어화우리 교우들아 시대곡조 불러보세
기원구년 유월이요 삼십칠년 화천기념
삼칠로 예언하신 신급인망 금년일세
누만년을 나린도술 성부성모 공판일세
허령지각 지나가고 작년부터 신명도수
상제운장 시봉하에 천존신장 주장이라
신명나네 신명나네 사해팔방 신명나네
신장강위 하고보니 감갈비성 우리로다
신장대접 못받으니 우리인도 가소롭다
답답하온 이가슴에 애닯으고 원통하다
복원복원 제대신장 우리비성 갈지말소
천도청명 하온후에 인도해원 놀아보세
불이나네 불이나네 누구라서 감내할까
피할자가 어디있소 지성자는 피하리라
성부성모 조화길로 빨리가세 따라가세
시시때때 잊지말고 진충갈력 하여보세
고비로세 고비로세 지금이때 고비로다
이번기념 지내보소 별별동기 자연이라
오늘기념 모든신명 대회열고 뛰고노네
우리오늘 뛰고날면 정리후에 편한기념
뛰고보자 놀고보자 생각사록 흥이나네
천도지도 우리로서 인신상합 일꾼일세
개명장이 나는날에 선동자가 우리로다
서리치는 우리몸을 감내감내 닦아내세
뉘가알리 뉘가알리 세상인생 가소롭다
이일저일 생각하면 어깨춤이 절로난다
성부성모 성덕하에 복축복축 하나이다
욕속부달 우리부족 용서하여 주옵소서
(7) 조국해방(祖國解放)을 위한 단석산치성(斷石山致誠)
천기 75년(4278, 1945, 乙酉) 6월 24일 성부님 화천기념 치성을 거행하니 성부님께서 하강하시어 명령하시되, “칠월 오일에 경주 단석산에 가서 너의 묘친 묘에 위로 습기가 들었은즉, 묘를 파서 다시 성분(成墳)하도록 하고 그날은 천신들이 회집하여 큰 공사가 있을 것이니 치성 준비를 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7월 5일에 경주 단석산에 가서 성모님 묘소를 파서 습기를 제거하고 이환우의 집에서 소와 돼지를 잡아 산상에 올라 진설을 하고 치성을 올리니 성부님께서 수많은 신장들을 거느리고 하강하시어 말씀하시되, “이러다가는 이나라 민족을 다 죽일 것이니 일본으로 하여금 항복하게 하리라.” 하시며, “소화야 속히 항복하라.”고 꾸짖으시니, 별안간 뇌성이 크게 일고 비가 내리었다.
단석산 공사를 마치고 장대골에 돌아와서 칠월 칠석절 기도를 봉행하니 그 다음날에, “해방이야!”하고 외치는 소리가 동리마다 곳곳에 일어나고 태극기를 거는 등 모든 사람들이 해방을 경축하였다. 선사님을 비롯한 모든 도중 형제들은 푼각을 어기지 않는 천지공사의 현묘함에 재삼 감명하면서 중궁이며 지하의 비밀실도 개방할 수 있게 되었고, 십생구사의 곤란을 겪으면서도 공사를 봉행하고자 숨어 고생하던 초조한 나날들을 일소하게 되어 다시금 성부, 성모님 그리고 천지 제신명에게 감사하면서 중궁문을 활짝 열어놓고 춤추고 노래부르면서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였다.
모두들 해방된 기쁨에 들떠 있던 어느날, 성부님께서 하강하시어 말씀하시기를, “단석산 공사를 전후하여 신령으로 하여금 천지 신명을 거느려 세계 각국을 순회하게 하고 일주일 내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 임시해방(臨時解放)을 가져 오도록 내가 명령하였노라. 만일 그러지 아니하면, 세계 인류를 다 죽이게 될뿐 아니라 나의 일도 망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이윽고는 천지도 없어지고 우주는 파괴되고 말지라. 또한 적게는 십여성상을 두고 나의 후계사를 이룩하겠다고 죽을 고생을 한 너희들에게도 헛된 고생만 시킨 결과로 떨어지고 말 것이기에 보다 못해 도수를 돌려서 불시각으로 임시해방을 가져오게 하였나니, 이 뒤에 참해방(眞解放)이 되어야 비로소 세계가 한 집안이 될것이요, 화순세계(和順世界)며 청명세계(淸明世界)며 용화세계(龍華世界)가 찾아올 것이니라. 그러나 사람이야 누가 이 깊은 속을 깨달을 수 있으리?
그러한즉, 너희들이나 알고 앞으로도 용심처사에 더욱 주의하여 계속 공사를 받어어야 할지니라. 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이라 하였나니, 너희들은 날을 받아 객망리(客望里) 고향을 찾아가 시루봉에 치성을 올리고 선영 산소에 일일이 성묘하여 문중에도 낱낱이 방문할 것이요, 돌아오는 길에 금산사(金山寺)에 다녀오도록 하라.”고 하시니라.
뜻밖에 내린 경책(警責)의 말씀으로 비로소 8.15해방의 의미를 깨닫게 된 우리는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어 성부님의 무량하신 섭리에 감복해 마지 않았다.
그 뒤, 준비를 갖추어 객망리에 가니 문중의 모든 남녀노소는 선사님께서 돌아가신 줄 알고 있다가 뜻밖에 상면하게 되니 모두 반갑고 기쁜 마음에 눈물로 맞이하여 주었다. 시루봉에 치성을 올린 다음 선산을 찾아 일일이 성묘를 드리면서 과거지사를 뇌아리며 선사께서 통곡하여 마지않으니, 좌우 산천도 눈물을 머금은 듯 동리의 보는 사람마다 비감해하며 만류하더라. 회정하는 길에 금산사에 들러 미륵존불(彌勒尊佛)전에 참배하고 돌아왔다.
(8) 도수가를 지어 노래하다.
천기 75년(4278, 1945, 乙酉) 7월 14일 밤, 진지상을 받들고 예를 올리니 오악산왕(五嶽山王)이 하강하여 지시하시되, “명일 15일에는 새로운 가사를 지어 올리고 노래부르도록 하라.”고 하시어 그대로 봉행하니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도수가 오(度數歌 五)
을유 칠월 십오일 구암 소고우(乙酉 七月 十五日 鳩岩 昭告于)
어화세상 사람들아 이내말씀 들어보소
기원구년 칠월이요 영남기지 사년일세
성부성모 현현도술 세상번복 되어간다
칠월오일 옥체도수 역력하게 내린봉명
성부명령 외는말씀 불일간에 명확하다
우리동포 불일사경 경각생문 돌리셨다
도수절차 생각하니 차례따라 돌아왔네
거년삼월 애통도수 세상사람 통곡터라
병대공부 놀아대니 병대조직 자연해소
수개월간 노래하니 동리동리 뛰고노네
내병정아 외치시니 불일간에 종전이라
칠일간만 늦었어도 우리동포 어이사리
성모께서 일본행차 이놈들아 항복하라
대성질책 호령하니 앙천통곡 항복이라
도수돌려 살렸건만 아는사람 어디있소
용화풍이 불건마는 못깨닫는 저사람들
우리동포 거동보소 꿈일런가 생시런가
우리자식 살았구나 범벅춤만 놀아난다
나서보니 가소롭다 얼사절사 우리도우
오늘기념 생각사록 참된춤이 절로난다
숨어일한 우리형제 마음놓소 안심하소
현현도수 돌아오니 지성봉축 닦아가세
암실기심 하지말라 신목여전 하리로다
천지신명 보였으니 신인합덕 조심하세
신부지라 하셨거늘 세상사람 어찌알리
무위이화 도수오니 닦아가는 그사람들
우리기회 여는날에 세상놀음 참춤일레
삼십삼천 상제께서 우리위해 하명일세
금동도령 명령도수 십일내에 마쳤으니
천존신장 망량신장 인반정리 임의용사
나서보자 나서보자 용화준비 하여보자
용화회를 여는날에 세계화순 자연이라
이평란은 우리위해 잠시돌린 도수로다
일꾼들아 들어오라 일할때가 이때로다
길찾기가 복잡커든 칠성님께 물어보소
형제들아 들어보소 기국준비 바빠간다
상중하재 기국대로 기국따라 되리로다
노자노자 뛰고노자 이번기념 흥이절로
만세일지 장부로서 할일이란 무엇인고
남아용맹 발휘하여 뛰는듯이 하여가세
값진때가 돌았으니 얼싸좋네 닦아보자
용화풍이 부는대로 화기융융 하옵기를
복축복축 하옵나니 소원성취 하옵소서
만세춘풍 만만세라 용화화풍 만세만세
(9) 천명(天命)으로 시대의 변화와 국내외의 정세를 살펴보다
천기 75년(4278, 1945, 乙酉) 7월 15일 중궁에 예를 올리니 성부님께서 하명하시되, “구암은 돈 이천원을 준비하여 가지고 서울에 올라가서 현사회의 진보된 양상과 국내외 정세의 추이를 살피고 돌아오라.”고 하시므로 그대로 행하여 귀성보고를 올리니 성부님께서 하강하시어, “세상 풍경이 어떠하더냐?”고 물으시는지라, “모두가 성부, 성모님 양대위의 공사로부터 나온 도수에 따라 세상도 그대로 진보하였음을 감탄하였나이다.”고 상고하니 성부님께서 말씀하시되, “너희들이 공사를 받드는 것은 개인사가 아니고 전 우주를 망라하는 일이라.
나의 일은 옛적 성인의 일과는 전연 달라서 이 우주 전체(宇宙全體)를 뜯어 고쳐 공사를 행하여 짜여진 도수에 따라 점차 선경을 건설할 것인즉, 너희들은 선경 건설사업의 대들보라. 또 이나라는 선천의 모든 그릇된 문명을 취사 선택하여 그것을 종합함으로써 새문명(新文明)이 개화하는 중심지가 될 것이며 그럼으로써 만국 백성은 이 나라를 저희들의 조종국(祖宗國)으로 받들 것이며, 그때에 너희는 스스로 일등 사람이 될 것이니 앞으로 할 일이 크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하라.”고 하시었다.
(10) 성부님 영상조성(靈像造成) 봉안(奉安)
천기 75년(4278, 1945, 乙酉) 6월 24일, 화천기념치성을 거행하니 성부님께서 하명하시기를, “밤나무로 열석자 높이의 영상(靈像)을 조성하도록 하라.”고 하셨다. 이튿날부터 밤나무를 구하기 위해 각 방면으로 알아보았으나, 영상을 조성할 수 있을 만큼 굵은 밤나무가 없을뿐 아니라 설사 쓸만한 크기가 되는 것이 눈에 띄인다 해도 고목이 되고 좀이 먹어 쓸만한 것이 없더니, 군위군(軍威郡)을 돌아오는 도중 고로면(古老面) 연밭골에 밤나무 밭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 찾아가니 과연 수십그루의 밤나무가 울창하게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하늘 높이 우뚝 솟아 있는 밤나무가 눈에 띄여 가까이 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꼿꼿하게 자란 것이 아주 굵었는데 벌레 먹은 자국도 없이 깨끗하여 마음에 흡족하였다.
밤나무밭 주인을 찾아가서 상의하니 그는 이 나무는 반드시 귀중한데 사용될 줄로 생각하고 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허다한 밤나무가 모두 벌레가 먹고 추잡스러운데 이 나무만은 오래전부터 나뭇잎에도 벌레 한 마리 날아들지 못하는 것을 수년을 두고 보아왔노라고 하면서 이 나무 한그루에서 해마다 열말이 넘는 알밤을 딸 수 있었는데, 웬일인지 삼년전부터 한송이도 열지 않는지라 이상하게 여겨오고 있었다면서, 밤나무의 수령은 그해에 꼭 오십년이 되었는데 보아하니 그대들이 이 나무의 임자 같으니 값이나 얼마간 생각해주고 가져가라고 하였다. 이에 값을 치르고 우차로 운반하여 와서 절동한 단면을 보니 배속 같이 고우며 나무의 크기는 직경이 한자반이고 길이가 열다섯자가 되었다.
나무를 두고 치성을 올리는데, 운장상제와 천존신장을 비롯한 대신명 제위께서 하강하여 감정을 하더니 기뻐하시면서, “나무야, 이 나무야! 오십년을 고생하다 말고 너 이제 때를 만났구나.”하시었다. 그 당시 기술자를 구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기 때문에, 정사와 우경주가 서투른 솜씨지만 정성을 다하여 영상을 조성하여, 9월 19일 해방후 처음으로 맞는 성부님 탄강기념 치성을 성대히 거행하고 영상을 봉안(奉安)하였다.
이날, 가사를 지어 올리고 가무하였으니,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도수가 육(度數歌 六)
을유 구월 십구일 병인 구암 소고우(乙酉 九月 十九日 丙寅 鳩岩 昭告于)
을사우리 동포들아 이내말씀 들어보소
오늘이라 어느날고 성부탄신 성탄잔치
중궁문을 열어놓고 우리형제 모였도다
어이아니 기쁠손가 춤을추고 노래하야
천지도수 번잡이라 영판도수 지정하사
지하중국 건설하여 단군성상 모셔놓고
태극기와 미국기를 걸어놓게 하시더니
일본항복 해방이라 애국투사 돌아오고
미국인도 들어왔네 신기하고 상서롭다
대성부님 후천도수 이런데도 못믿을까
구년잠복 나서보니 서양문명 놀랍도다
천상천국 모형이라 지상천국 목전일세
당래용화 터닦고져 작은머슴 보내놓고
큰머슴을 부르신다 시호시호 좋을시호
용화일꾼 들어오네 서양일꾼 군함몰고
저렇게도 몰려오는데 이땅사람 잠을깨소
어서어서 들어와서 선경기초 완성하세
사람따라 신명오고 신명따라 사람가니
인신합덕 분발하여 용화기초 확립하세
얼싸좋다 좋고좋아 성탄맞이 기념이라
일편단심 더욱뭉쳐 공사봉행 하여보세
이날 밤에, 대신장들이 하강하여 명령하시되, “백미 두 가마니로 밥을 짓고 소와 돼지를 잡아서 올리라.”고 하시기에 극력으로 준비하다가 백미가 부족하여 보리쌀 서말을 섞어 밥을 올렸더니 망량신장이 말하기를, “용화세계 건설을 위하여 많은 신명들이 대공사를 하는데 준비가 적다.”하시고 또, “여러 가지 공사를 마친 뒤 10월 10일 도령의 생신기념에 먹으러 오리라.”하고 떠나니 풍진이 일고 천둥소리가 요란하였다.
4) 사기초 공사(四基礎 公事) : 구미란(龜尾卵)
(1) 기지 이사(基地 移徙)를 지시
천기 75년(4278, 1945, 乙酉) 10월 10일에 도령 탄신기념 치성을 거행하는데 도령 형제가 하강하여 명하기를, “또 이사를 하되 전주동곡(全州東谷)으로 갈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날을 기념하는 노래를 지어서 올리고 노랫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니 도령 형제께서 많은 신장들을 거느리고 같이 즐기셨다. 이날 가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수가 칠(度數歌 七)
기유 구년 을유 시월 십일 구암 소고우(己酉 九年 乙酉 十月 十日 鳩岩 昭告于)
어화우리 형제들아 이내말씀 들어보소
오늘이날 어떠한날 우리도령 성탄기념
천사대모 조화일맥 조화났네 조화났어
용화대운 대경살세 경축하고 경축하세
천상도령 우리도령 이런일이 어디있나
경진신사 잇달아서 화은당의 몸을빌려
천상도령 태어나니 이런일이 또있을까
얼싸좋다 노래하세 얼씨구나 춤을추세
이런조화 보고서도 우리힘이 미급하여
천상도수 못맞추니 성부성모 걱정하사
호령하고 꾸짖으니 관운장도 떠는것을
잠만자는 저사람들 어서바삐 일어나소
신급인망 바쁜시호 용화건설 늦어지네
지금때에 못믿어서 망설이고 빈정대면
용화회상 못들어가 땅을치고 한탄하리
어화세상 사람들아 이런경사 또없는데
어이그리 잠만자노 어서와서 일을하세
천상도령 우리도령 할매어매 원을풀고
할아버지 뜻을이뤄 세계일가 만들게나
경사로다 경사로다 도령탄신 경사로다
12월 3일, 기념예식을 거행하니 성모님께서 명령하시되, “이사할 준비를 속히 하라. 기지(基地)는 도령들이 지정해 주었으니 그곳으로 가야 되니라.”고 말씀하셨다. 선사 상고하기를, “경제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한 이태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준비를 갖춘 다음에 이사할까 하나이다.”라고 사뢰니 크게 걱정하시면서, “너희들이 금전을 가지고 사업할 생각은 말라. 비록 초근목피(草根木皮)를 먹으면서라도 사업을 완수해야 천상의 도수를 맞출 수 있고 또, 그러한 혈심으로 일을 이룩해야 뒷날 기념도 될 것이 아니냐 원래 큰 일이란 금전 가지고 못하는 법이며, 일을 위하여 금전이 꼭 필요할 때에는 천지에서 지시하여 전주(錢主)가 나서리라. 금전고(金錢庫)의 열쇠는 관운장이 가지고 있으니 금고를 열면 돈에 몸서리칠 때가 있을 것이요, 또 세계 각국의 초대를 받아 주류할 때도 있으리라. 새 문명 새동학이 나오면 정부에서 세계에 널리 선포할 것이다. 그때까지 혈심 정력으로 명령대로만 실행하라.”고 하시므로 모두 합심하여 이사 준비를 서두르니라. 이날 공사에 노래를 지어 올리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수가 팔(度數歌 八)
유세 을유 십이월 초삼일 구암 소고우(維歲 乙酉 十二月 初三日 鳩岩 昭告于)
어화우리 형제들아 이내말씀 들어보소
오늘이라 어느날고 기원구년 납월삼일
천사대모 겪어오신 만고풍상 뉘가알꼬
여류세월 지금와서 공부문을 열어시고
지성자만 빼돌리네 진충갈력 닦고닦아
용화대학 입학하세 시험문제 풀어주니
영세불망 하여가자 말을듣고 못행하면
바위위에 물주기라 우리형제 명심하세
천용우로 후박하면 만방간에 원망이요
지용수토 후박이면 만물간에 원명이며
인용덕화 후박인데 만사간에 원망이라
천지인이 덕화주장 귀신출입 문호로다
대학지도 명명덕을 밝은길이 대어천지
신명인명 명명이라 명덕지법 시하출고
대인대의 주창하면 감통신명 명덕이요
사유결단 하고보면 연후에사 변화지술
연월일신 푼각윤회 일용행사 봉명하여
원형이정 돌아오니 천사대모 법도로다
길화피어 좋은열매 흉화피어 흉한열매
천지조화 호풍환우 무한공력 결과인데
공부없이 될까부냐 공부하세 공부하세
정북창의 재주로도 산에들어 사흘만에
천하사를 처음알고 강태공의 조화역시
공부없이 못하는걸 알았는가 몰랐는가
진실로서 지은일은 천지또한 못부수고
근거없이 꾸미면은 부서질때 여지없다
성부성모 대법도는 남녀노소 구별않네
야출동문 진평이도 여인삼천 세웠더라
신명불러 복중출입 이몸저몸 고쳐쓰리
입도해서 닦잖으면 화가올까 복이올까
모든일에 불성공은 혈심자가 없는연고
혈심결심 닦아내면 안되는일 없으리라
사업성공 하자면은 위천하자 불고가사
제갈량의 불성공은 유상팔백 연유로다
무엇보다 두려운일 박람박식 겁이난다
부귀자는 불락빈천 강강자는 유약불친
유약빈천 해원시대 판안의법 꾸미려면
들쳐나서 못쓰리니 남모르는 판밖법을
꾸며내어 일을하세 무위이화 용화건설
불언지교 화만정세 거세사를 물론하고
신도라야 이화로다 산하대운 통일하여
인류화평 원동기를 현묘불칙 공이되면
이것저것 무위화라 신도또한 조화하여
무궁선경 꾸며낸다 제도수에 돌아다면
새기운이 전개되리 목석또한 기운붙여
쓰게되는 대법이라 오직병겁 남겨두어
의통으로 전수하니 약으로는 못나수는
천하대병 무인무도 의통이란 무엇이랴
의통만을 알아두라 참된마음 일심으로
그한마음 간직하여 의통만을 알아두세
세상사람 살고싶어 물밀듯이 찾아오리
성부성모 우리보약 병걸린자 끌으시고
죄걸린자 끌으시고 하신말씀 그말씀이
약인줄을 누가알꼬 충언일새 귀에걸려
역증나고 불고하니 그행동이 고쳐질까
성부성모 잘믿으라 봉곡참해 입은진묵
원을품고 서양으로 도통신을 인솔하여
문명개발 종역하니 성부님의 해원도수
그를불러 문화개발 종역토록 하셨다네
경주용담 보은신명 지기금지 원위대강
전주동곡 해원신명 지기금지 사월래라
용화도령 정한터는 좌우산천 기절처라
모악회문 기운돌려 부산모산 대를하고
기어드는 계룡봉과 구성봉황 둘러싸고
수양산은 숙여들어 낙양계명 웃는모양
봉래방장 영주봉에 만만세를 불러보고
구성수양 그늘속에 비비재재 제비봉아
용화청도 안에두니 용반호거 수구로다
도령정한 농사도수 치산정리 물안새리
봉올봉올 봉올마다 두도령이 정한도수
남조선은 만국활계 청풍명월 금산일세
삼천국이 문명개화 도술운통 구만리라
세계유의 이산인가 기운금천 장물화라
천하지대 모악산하 용화도장 넓은기지
장엄법령 존설하면 모롱마다 선약이라
남조선배 돛을달아 혈식군자 배질로서
고해상에 띄우시니 풍파없이 건너가네
근로대중 일심자만 실어다가 건너놓고
인문공정 열으시니 조화선경 여기로다
화민정세 명령받아 신명시켜 공작감시
불일성지 서들더라 천지록사 모여들어
만복길상 들어낼적 양춘삼월 호시절에
봉우리가 꽃송이라 이번기념 놀고보면
여가없이 못노니라 얼싸좋다 놀고노세
어서바삐 일을하여 용화도장 세워놓고
호천금궐 넓은터에 태극깃발 날리리라
꽃밭두리 인성속에 건들건들 뛰고놀리
(2) 사기초 입택(四基礎 入宅)
천기 76년(4279, 1946, 丙戌) 정월 15일, 기념행사를 하니 도령들이 내려와서 말하기를, “아버지께서는 동곡으로 가셔서 돌아보시고 할아버님 선화지에 터를 잡아 기념각을 짓도록 하시오.”하셨다. 정사는 정월 17일에 동곡으로 길을 떠나 그곳에 가서 살펴보니, 쓸만한 기지도 없을뿐 아니라, 아는 사람도 없어 문의조차 해 볼 수 없이 이곳 저곳을 살피던 중, 오래(吾來)터(오리알터의 옛이름)에 사는 옛도우 배달석(裵達錫)을 만나 그동안 정의를 통정한 후, 이곳에 오게된 연유를 말하니 그도 적극 협력할 것을 약속하였다.
며칠동안 돌아보면서 정사는 새로운 기지로 수류봉(水流峰) 밑에 있는 장씨(長氏)의 논을 사기로 하던 중이었다. 이튿날 배달석이가 찾아와 하는 말이 동곡 김씨네 정문(旌門)이 있던 자리에 사금(沙金) 매입터 만여평이 있다고 하여 같이 가보니 기지로는 적당한 듯하나 살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배달석은 지난밤 꿈에 천상에서 한 노인이 말을 타고 사금 버력 위에 내리더니 <정재문(定再問)>이라 써서 붙이고 승천하자, 꿈에서 깨었는데, 예사꿈이 아니라 생각해보고 해몽해보니, 어제 장씨의 논을 사기로 말했다가 오늘 다시 논의하기로 했으니 우리가 찾는 터는 그곳이 아니라, 바로 버력터라고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성부님이 보내신 것같이 느껴지더라고 말했다.
그날로 다시 답사하여 보니 온몸이 으쓱하면서 큰 터로 보이는지라, 두사람은 이곳에 기지를 정하기로 하고 돌아왔는데, 다음날 아침 식전에 달석이 찾아와서 희색이 만연하여 하는 말이 간밤에 꿈을 꾸니 또다시 그 노인이 오시더니 <성사문(成事文)>이라 불러주시고 가셨는데, 이제는 문서로 매매계약을 하게 되리라는 뜻인것 같으니 안심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그 터를 잡게 되었으니, 그 곳은 오기초지(五基礎地)인 동곡 버력터로서 성부님께서 재세시에 화룡천년(畵龍千年)에 진룡(眞龍)이 내지(來地)할 대지라고 하신 말씀이 계신 곳이다. 이어서 원평 윗마을 구미란에 농막 한 채를 사고 정읍 용호리(龍虎里)에 큰 농막을 산 다음 기지는 달석에게 일임하고 장대골로 돌아왔다.
2월 8일날 발정(發程)치성을 올리니 도령이 하강하여 말씀하기를, “구미란은 사기초지인즉, 그 곳에서 공사를 보면서 동곡의 일을 진행하라.”고 하셨다. 그 뒤 공중에서 윤선이 뜨는 소리와 남조선 뱃길이라고 외치는 소리, 또 만세소리가 사흘동안 계속되었다. 2월 20일, 정사만 미리 올라가 용호리의 집과 구미란의 집을 수리하여 입택하고, 구미란에 영상(靈像)을 모실 수 있도록 다섯 칸의 집을 짓게 하고 돌아와서 2월 그믐날, 얼마전에 구입했던 화물 자동차에 모든 영상을 모시고 우선 정사만 장대골을 떠나 구미란에 왔다. 구미란은 집이 협소하여 모시고 온 제위 영상을 다 모실 수 없어서 성부, 성모님 양위분의 영상만 모시고 조석 진지상을 받들었다. 이후 영남으로부터 많은 교우 형제들이 따라 올라와서 우선 용호리와 구미란 두집에서 공동생활을 하게 되었다.
(3) 오기초지(五基礎地) 개기치성(開基致誠)과 경고문(敬告文) 작성(作成)
천기 76년(4279, 1946, 丙戌) 4월 15일에 동곡기지에서 개기치성을 올리게 되었는데, 전날에 천명(天命)이 계시기, “경고문(敬告文)을 작성하여 올리되 그 내용을 음,양 두장으로 나누고 지금까지의 역사를 기록하되, 말미에는 지금까지 같이 일을 받들어온 교우 형제들의 성명을 연기(連記)할 것이며 몸으로써 전방 역사에 종사한 자와 돈을 책모로써 후방에서 일을 주선한 자로 나누어 좌,우 음,양을 분명히 구분하고 또, 금성 장대 양기초지에 있어서의 지하 중궁 도면을 같이 붙이도록 하라.” 고 하시어 그대로 행하니 치성 후에 다시 명령하시기를, “그 글과 도면은 영구히 기념할 초대 기초역사의 증거가 될 것이니, 고운 비단에 올려 성부 영상에 올려 성부 영상의 좌,우견(左右肩)에 걸어 놓도록 하라.”고 하셨다. 그때에 지어서 올린 경고문과 도면은 다음과 같다.
경고문(敬告文)
「왼편 어깨에 걸어라 하신 글」
천사께서 음양 이기를 나눠서 대화지리(大和之理)에 보합(普合)하기로 건도(乾道)는 대표인 김병철(金炳澈)에게 온전히 쓰시니 이에 강건하고 중정하고 순전하고 순일한 이치는 독양(獨陽)이니 불성하는 고로 갑을(甲乙)이 동궁되고 진사(辰巳)는 조화를 낳게하니, 위대하도다. 건의원리로 만물이 자뢰(藉賴)하여 비롯하는 고로 천지사로서 간사함을 물리치고 성심을 보존하기로 담당하여 이에 영궁(靈宮)을 경영하여 천지 구궁의 이치로서 밖에 아홉칸을 작성하고 일육 수운으로서 안에 여섯칸을 작성하여 부합된 즉, 십오도수가 되고 밖의 아홉칸은 외인 소시가 무방하나, 안의 여섯칸은 외인 소시를 염의하는 고로, 밤중에 남모르게 흙을 파며 돌을 깨는 것은 십만근의 일을 하여도 등촉을 들고 산태미를 메고 사다리에 오르내리며 그렇게 하여 역사를 마치니 만약, 성심으로 갈력함이 아니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이 하랴.
성부께서 하명하시와 <이 글을 나의 왼어깨(左肩)에 걸어라>하시니 당시에 열여덟 사람이 당참한 바, 당참자의 성명은 다음과 같도다.
정치건, 백규태, 임용순, 김병주, 우경주, 우동규, 조정규, 오갑출, 오윤환, 김용주, 김용상, 김용하, 김병련, 양춘기, 손량학, 전재경, 오영환, 전영호로써 금성 장대 양기초공사시, 밤중을 이용하여 지하영궁 축조를 위한 근로에 몸으로써 당참케 되었으므로 여기에 그의 공로를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기명하는도다.
「바른편 어깨에 걸어라 하신 글」
대법 성부께서 음양 이기를 나누어서 혈맥관통(血脈貫通)의 이치로서 곤도(坤道)를 혈식 강순임(姜舜任)에게 온전히 체로 삼으시니, 이에 황상원길(黃裳元吉)의 이치는 독음(獨陰)이니 불성하는 고로 군자의 행하는 바이니 정축년으로 위시하여 기원이 되는지라, 지극하도다 곤(坤)의 원리여. 곤이 후하여 만물을 싣고 있음은 덕이 합하여 가이 없고 넓고도 광대함은 만물이 다 형통되는 고로 천지의 도수를 영남에 기초하여 영궁을 경영하되 금성산 아래에 터를 잡으니 기원 칠년 계미 가을 구월이라. 그때에 도구(島寇) 왜인이 정치를 하여 동서양이 전쟁에 골몰하매 금철 소속과 도량 맥직이 모두 한손의 낭대가 되니 오랑캐를 보되 두렵기 범과 같아 음밀한 책모가 새어나가 퍼지게 되면 패하는 고로 자기 물품이라도 남의 것을 도적하는 그와 같이 하고 일동 일정을 밤을 낮삼아 행하여 모자람을 채워 운용하였은즉, 가히 한쪽 어깨에 해당할지라.
성부께서 하명하시와 <이 글을 나의 바른 어깨(右肩)에 걸어라>하시니 당시에 열여섯 사람이 당참한 바, 당참자의 성명은 다음과 같도다.
김춘식, 이준봉, 이준민, 조성관, 김성도, 이환우, 신현철, 김종한, 신대안, 임무순, 서종태, 김만호, 정성호, 김양호, 김선진, 신현구로서 금성 장대 양기초 공사시 제반 치성비와 기초공사 비용을 추심주선 헌납케 되었으므로 여기에 그의 공로를 기념하기 위하여 기명하는도다.
(4) 동곡 기지건설의 고난과 성모님 체백 이안
제목을 구하여 동곡에 성전을 짓는 동안 세상은 호열자로 교통이 두절되고 영남으로부터 이주해 와서 날마다 종역하는 식구는 오,육십명이 되었는데 양식은 떨어져 모두들 초근목피로 끼니를 이어가며 역사를 계속하였다. 그 당시 금산(金山)일대는 해방으로 인하여 그동안 지하에 숨어 있던 군,소 교단이 할거하여 서로 다른 교판을 꾸미니, 해원과 상생, 보은을 위주로 하는 성부님의 대이념은 간곳이 없고, 난립한 교단끼리 서로 찢고 부수는 모략과 중상의 도가니로 화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들 중에는 각 교중의 비밀을 내탐하여 모략하고 중상함으로써 금품을 탈취하는 등 모랙배도 있었던 것인데, 이러한 모략배들의 무고로 인하여 선사는 좌익 사상가로 지목되어 경찰서에 투옥되어 닷새동안 모진 고문으로 절명 직전까지 이르기도 하였으며, 정사는 경제난을 극복하고자 간난신고를 무릎쓰고 영남을 두차례나 다녀왔으나 자금을 마련하지 못하였으니, 선사와 정사는 고생하는 식구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사이 수개월을 먹을 것에 주린 식구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 척수까지 맞추어서 다듬어 놓은 성전에 쓸 재목을 울면서 토막토막 끊어서 밥그릇, 세수통, 복기접시 등을 만들어 호밀과 바꾸어다 죽을 쑤어 간신히 연명하고 있었다.
이에 선사와 정사는 비통한 마음으로 영상을 한데 모아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지르고 같이 뛰어들어 죽음으로써 천지와 도중 형제들 앞에 사심으로 일한 것이 아님을 보여 줄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식구들을 전부 구미란에 가게하고 천기 76년(4279, 1946, 丙戌) 8월 26일 아침 마지막 진지상을 올리고 예를 드리니, 성모님께서 하강하시와 꾸짖어 명령하시되, “이 몹쓸 것들아 너희들이 또 죽을 생각으로 휘발유를 준비하였으니 그래가지고 어찌 끝까지 천지사를 받들 수 있으랴! 너희들은 이 길로 경주로 내려가거라. 그 곳에 있는 팔,구인이 모두 일을 맡아 처리할 것이니 죽더라도 그 사람들한테 가서 통정하고 죽도록 하라.”고 호령하시며, 또 성부님께서 하명하시되, “경주로 갈때에 성모님의 체백을 다시 모시고 떠나도록 하라 만일 그렇지 않으면 또 잃어버릴 염려가 있느니라.”고 추상같이 호령하시었다. 장대골에서 이사올 때 성모님의 체백을 모시고 동곡으로 가라는 명령이 있어 단석산으로부터 용호리 범어골에 체백을 이안하였다가 경주로 내려갈 때 지시대로 성모님 체백을 모시고 가서 신현철의 집에 모셔놓고 조석예식과 제반치성을 받들었다.
정사는 경주 도생 형제들을 모아놓고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모두 눈물을 머금고 걱정하였다. 이듬해인 천기 77년(4280, 1947, 丁亥) 2월, 경주 교인들이 모아준 성금 삼만오천원을 가지고 와서 다시 성전 축조공사를 진행하였고 열악한 환경속에서 식구들은 초근목피로 끼니를 때우면서 역사를 수행해 나갔다. 안노인들은 이고을 저고을 동냥 길을 드나드는데 동냥 나간 경주의 아내가 십여일을 두고 돌아오지 않는지라, 모든 식구가 염려하던 중 하루는 마차에 보리, 호밀, 감자 등 다서가마니를 싣고 돌아와서 김제, 만경 등지를 돌며 동냥으로 모은 것이라하니, 이 말을 들은 온 식구들은 비장한 마음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지난날 금성골에 있을 때 성부님의 옥체를 찾겠다는 정성으로 추운 겨울날에 홋옷을 걸친 채 집을 나섰던 일을 비롯하여 언제나 변할 줄 모르는 경주 아내의 일편단심에 감탄하면서 가마니를 붙들고 흐느껴 울었다.
그날 저녁, 경주 아내가 돌아오면서 준비한 주과포와 백미 한되를 진지를 지어 올렸는데, 도령형제와 신장들이 하강하시더니 한 신장이 말하기를, “내일 밤에 경주 아내가 구걸해 온 보리, 호밀, 감자 등 한알도 남기지 말고 밥을 짓고 감자를 삶아서 올리라. 만일 그렇지 않으면 죽으리라.”고 하여 이튿날 밤에 지시대로 혀여 올리니 어제 하강했던 신명들이 내려와서, “요즈음 배가 고프더니 오늘은 배가 부르도다. 성전 짓는데 부역이나 하자.”하시며 떠났다.
5) 오기초공사(오基礎公事) : 동곡(東谷)
(1) 성부님(聖父任)의 유서(遺書)와 오기초 입택(五基礎 入宅)
천기 77년(4280, 1947, 丁亥) 3월 3일, 기념치성을 봉행하니, 성부, 성모님께서 하명하시어 말씀하시되, “사월 초팔일에는 성전에 영상을 모시고 식을 거행토록 하라. 만일 그렇지 못하면은 너희들은 죽으리라.”고 하시었다. 이때부터 식구들은 주야를 계속하여 성전공사를 진행하여 4월 8일 오전 9시에 문을 미처 달지 못한 채 포장을 치고 화천하신 기념지에 명령대로 열석자의 성부님영상을 비롯한 제위 영상들의 봉안식(奉安式)을 거행하니, 식구들은 통곡소리 그칠 줄 몰랐으며, 선사님은 지금까지 겪은 도중 형제들의 너무나 심한 고초를 회상하며 단장의 애통을 금할 길 없어 엎드려 심고하기를, “아버님 신앙하는 사람들에게 소원성취 주옵소서.”하고 흐느껴 호소하였다.
이날 성부님의 생존 제자이신 김자현(金自賢)의 자제 김태진(金泰振), 김태준(金泰俊) 형제가 찾아와서 성상(聖像) 앞에 성부님의 유서(遺書)를 내놓고 잔을 올리고 통곡하였다. 유서의 내력을 물으니 김형렬(金亨烈)씨가 종제인 자현(自賢)에게 맡기면서 후일 부합되는 곳에 전하라 하였는데, 그 후 형렬님이 타개하시고 자현씨 또한 못 전하고 임종시에 태준, 태진 형제분에게 맡기시며, 후일 동곡에 불상을 모시는 곳이 있으면 그 곳에 전하라. 하시어 지금까지 부합되는 곳이 없어 간직하고 행여 전할 곳이 없을까 하여 부모님의 유교를 실행치 못하여 죄송한 마음 금할 수 없던 차, 이곳에 기지를 정하는 날부터 유심히 바라보고 오늘에야 전하니 마음이 가볍다며 또 슬픈 눈물을 흘리었다. 너무도 뜻밖의 일이라, 혹 자기 조작이 아닌가하여 여러 가지를 살펴본 즉, 그들이 하는 말이, “이 글은 조금도 우리의 조작이 아님을 원문에서 상고하시오. 추호라도 부합처가 아니면 내놓지 말라고 하셨노라.”고 하였다.
유서(遺書) 해설 (참고)
西天階塔行東洋 彌勒金佛同留連 湖南西神司命旗 指揮客望氏門 出世庚子奉天文 辛
丑二七人道通 壬寅相逢金上人 布德於世盟誓約 忠孝烈倫世間無 四物藥材厥病癒
(서천계탑행동양 미륵금불동유련 호남서신사명기 지휘객망강씨문 출세경자봉천문
신축이칠인도통 임인상봉김상인 포덕어세맹서약 충효열륜세간무 사물약재궐병유)
서역 천계탑에서 동방으로 향하여 유력하다가, 금산사 미륵불에 응하여 머물다가, 호남에 서신사명의기치를 세우고, 객망리 강씨 문중으로 옮겨 태어났다. 세상에 나서 경자년에 천문의 이치를 깨닫고, 신축년 7월 7일에 인도를 통했다(중통인의). 임인년에 수제자인 김형렬을 만나 큰 덕을 세상에 펼 것을 맹세하였다. 충성과 효도와 스승에 대한 절개라는 윤리가 세상에 없으나 그러한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사물약재이다.
銅谷仙化現佛像 遊魂更覓故園路 佛日出世禍福降 世間眼目今始開 有緣者皆聞知來
輔相顯明天地功 丹朱受命靑天雁 畵閣人其像籠鴻
(동곡선화현불상 유혼경각고원로 불일출세화복강 세간안목금시개 유연자개문지래
보상현명천지공 단주수명청천안 화각인기상롱홍)
전주 동곡에서 내가 죽으면 새로이 불상이 드러나리니, 떠돌던 유혼이 혼이 떠났던 옛 고향길을 되돌아온다. 부처의 기운이 세상에 드러날 때, 세상사람들의 안목이 비로소 열리게 된다. 인연 있는 자는 모두 듣고 스스로 알아서 찾아오니 서로 도와 천지의 공덕을 밝게 드러낸다. 단주가 명을 받으니 푸른 하늘에 기러기가 나는 듯 하고, 누각에 있는 사람의 큰 기러기의 상을 그린 것과 같다.(성인의 형체이다)
色擧用色 胡亥虛亡 夫政也者 柔蒲蘆也. 漢水濱含蘆飛行 飛鴻得意天空闊 燕自江南
尋舊主 終是日新聖人德
(색거용색 호해허망 부 정야자 유포로야. 한수빈함노비행 비홍득의천공활 연자강
남심구주 종시일신성인덕)
꾸며 화려한 것을 들어 썼던 호해(진나라 2세 군주)는 허망하다. 무릇 정치라는 것은 물가의 부드러운 갈대와 같은 것이다. 漢水 물가에는 갈대꽃이 흩날리고 기러기 날아 뜻을 얻으니 하늘이 공활하다. 강남에서 돌아온 제비는 옛 주인을 찾으니, 결국 이 모든 것은 날로 새로이 하려는 성인의 덕이다.
辛未生 辛丑年道通 壬戌生 壬寅年相逢. 古四月八日 釋迦佛誕生. 今四月八日 彌勒佛誕生. 己酉六月二十四日 抱含二十四節. 今四月八日應八卦. 是故 先天而天不違 後天而奉天時 時來天地皆同力. 佛之形體 仙之造化 儒之凡節. 都是 敎民化民. 好道遷佛 佛成人事
(신미생 신축년도통 임술생 임인년상봉. 고사월팔일 석가불탄생. 금사월팔일 미륵불탄생. 기유육월이십사일 포함이십사절. 금사월팔일응팔괘. 시고 선천이천불위 후천이봉천시 시래천지개동력. 불지형체 선지조화 유지범절. 도시 교민화민. 호도천불 불성인사).
신미생인 나는 신축년에 도통하고, 임술생인 김형렬을 임인년에 만났다. 옛 사월 팔일은 석가불의 탄생일이고, 지금 사월 팔일은 미륵불이 탄생하는 날이다. 기유년 6월 24일에 24절기가 모두 24수에 응하여 새롭게 태어나고, 4월 8일에 정역 팔괘 기운이 팔수에 응한다. 이런 까닭으로 선천에는 하늘이 그 도리를 차마 크게 어길 수가 없고, 후천의 때에는 천시를 받들게 되니 그 때가 오면 하늘과 땅이 모두 함께 힘을 다하게 된다. 불이 형체를 이루고 선이 조화를 나투고 유가 예의범절을 내세우는, 이 모든 것이 백성을 가르쳐 교화하기 위한 것이되 특히 좋은 도는 佛에 옮기니 佛이 인사를 성취케 할 것이다.
天以示乎人 人驗于天. 天道人道 一理通達. 日月火水木金土. 東西日月之道路故 東西分爲二京. 南火北水 南方三離火. 火云佛故 南則午 丙則南 丙午現佛像. 暗處明 莫如火. 佛道旺盛則 西金沈潛. 南無阿彌陀佛
(천이시호인 인험우천. 천도인도 일리통달. 일월화수목금토. 동서일월지도로고 동서분위이경. 남화북수 남방삼리화. 화운불고 남즉오 병즉남 병오현불상. 암처명 막여화. 불도왕성즉 서금침잠. 나무아미타불).
하늘이 이러한 것을 사람에게 보일 것이니 사람은 하늘에서 증험하게 된다. 하늘의 도와 사람의 도는 하나의 이치로 꿰뚫리는 것이니 일월과 수화금목토가 그 요체다. 동과 서는 일월이 다니는 큰길이므로 동과 서가 나뉘어서 각각 중심이 된다.남은 불이고 북은 물이니 남방에 (복희역의) 삼리화(대성인)이다.불기운이 들어 황극을 이루어야 한다. 불(火)이란 불(佛)을 의미하므로 남쪽은 十二支중에는 午방위요, 十干중에 丙이 남방위가 되니 丙午(태양 같은 사람,곧 부처를 말한다,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에서 불상이 드러난다. 어두운 곳에서 밝게 드러나는 것으로 불만한 것이 없으므로 佛道가 왕성하게되면 서쪽의 금기운은 침잠하게 된다. 나무아미타불이로다.
大學之道 在於明明德 在新民 在至於至善. 繼之者善 成之者性. 本末兼存 內外交養. 然後方可謂之大道也
(대학지도 재어명명덕 재신민 재지어지선. 계지자선 성지자성. 본말겸존 내외교양. 연후방가위지대도야)
대학의 큰 가르침은 밝은 덕을 밝히는 데에 있고, 백성들을 새롭게 하는데 있고, 지극한 선에 머무르는 데에 있다. 그러한 뜻을 있고자 하는 것이 선이요, 그러한 뜻을 성취하는 것은 하늘이 부여한 性이다. 처음과 말단을 겸하여 잘 보존하고, 안과 밖을 두루 기르고 난 연후에라야 가히 그러한 것을 일러 대도라 이를 것이다.
一年三百六十日 須待漸次進去. 便成一年 一千四百四十分以爲一日. 其一日 便成家家長世. 天地有無窮之福 天地有無窮之才. 天不失時故 以親切之神爲節目明知 主人矣
(일년삼백육십일 수대점차진거. 편성일년 일천사백사십분이위일일. 기일일 편성가가장세. 천지유무궁지복 천지유무궁지재. 천불실시고 이친절지신위절목명지 주인의)
일년이 360일이 되는 정역도수가 모름지기 때를 기다려 점차로 나아가 마침내 일년의 도수를 이룰 것이요, 1440분으로 하루를 삼게 될 것이다. (또한) 그 바른 하루가 곧 온 백성의 무궁한 세월을 이루게 된다. 천지에는 무궁한 복이 있고, 그에 합당하여 무궁한 재주를 지닌 사람이 있다. 하늘은 그 때를 놓치지 않으므로 그 주인으로 하여금 친절지신(신명)으로써 조목 조목 밝게 가르쳐줄 것이다.
小滿符 (소만부)
天屛 (천병)
巳 (사)
정해(丁亥)년 4월초8일 병오(丙午)일에 동곡에서 순임에게 전하노라
(2) 무신(무신) 천지(천지) 대굿
천기 77년(4280, 1947, 丁亥) 9월 19일, 성부님 탄강 기념치성을 거행하니 성부님께옵서 하명하시기를, “너희들이 무당(巫堂)을 청하여 천지대굿을 하라. 우리나라는 단군시대로부터 무도가 시작되어 지금까지 유전하여 왔는데, 무도가 성할 때에는 인신(人神)이 합의롤 보아오다가 이조에 와서 유교정신이 나라 안에 팽배해짐에 따라 무당은 천인(賤人)으로 취급되어 그 뒤로 그 풍습이 답습되어 왔나니, 지금은 원시(原始)로 반본(反本)하는 때라,
남이야 욕을 하건 말건 도수를 돌려야 되나니. 그리 알고 오는 이십오일부터 굿을 하되, 무당과 기생을 열두명을 청하여 일주일간 계속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 때에 전번 개기치성(開基致誠)시에 써 올린 <敬告文>을 금자로 비단에 올려 무당과 기생으로 짝을 하여 춤을 추고 노래하게 한 다음 명령한대로 나의 왼어깨와 바른어깨에 걸도록 하라.”고 하시더라.
지시하신대로 근근히 제반 준비를 갖추어 정하신 날에 성전 앞에서 굿을 하게 되니, 천기(天機)도 기이하였다. 일주일간 무사히 행사를 진행하여 그 도수를 마쳤다.
(3) 동곡에 성부님 옥체 봉안(玉體奉安)
천기 77년(4280, 1947, 丁亥) 9월 19일, 성부님 탄강 기념치성에 성모님께서 하명하시되, “무자(戊子)년 2월 10일에 정읍 차교주(車敎主)의 집에 가 사실을 물어서 너의 아버님 체백(體魄)을 찾아서 모셔 오기에 힘써라.”고 하시었다. 선사, 정사를 비롯해 6명이 김제 경찰서에 가서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 정읍에 도착하였는데, 선사님과 본부 시봉 송선자(宋善子)는 차교주의 집으로 가서 하룻밤을 경과하면서 모든 동정을 살피기로 하고 정사는 박창욱(朴昌旭) 강수원(姜秀元) 오갑출(吳甲出)을 데리고 여관에 머물면서 그날 밤에 일제시대 보천교(普天敎)내에 파견되어 차씨 교중사를 전담하여 살핀 바 있던 전 고등계 형사 강부장을 찾아가 찾아온 연고를 말하고 협조를 구하니, 그는 실정을 토로하면서 옥체를 찾는 일은 중지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 실정인즉, 차월곡(車月谷)이 중도에 자기의 부친으로 신앙대상을 바꾸게 되면서 어느날 밤에 그의 동생인 차윤경(車潤京)과 그 밖에 두어사람을 불러 그때까지 비장해 두었던 성부의 옥체를 내어 놓으면서 너희들만 알고 산에 갖다 묻도록 하라고 하여 갖다 묻은 뒤, 일제에 의하여 교가 해산되어 십여성상이 지난 뒤에야 월곡의 셋째 아우가 옥체를 찾을 목적으로 그 자리에 과목을 심으면서 땅을 일일이 뒤지다시피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으며, 강부장 자신도 씨족관계도 있고 또한 옥체를 찾아 모신다면 각 교파간의 대우를 받을 것 같아서 청수(淸水)를 떠놓고 빌어가면서 3,4년 동안이나 두루 살펴보았으나 찾지 못하였은즉, 아무래도 그들이 평장한채 돌보지 않은 동안에 산사태가 나서 흩어져 버린 모양같으니 단념하고 돌아가는 것이 좋으리라는 것이었다. 정사는 다시 여관으로 돌아왔으나 잠은 오지 않고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앉았자니 비몽사몽간에 환상이 나타나는데, 지서 앞에 차월곡의 동생들이 있기에 쫓아가 뺨을 쳐올리고 서로 맞붙어 씨름을 하다보니, 월곡의 맏자부가 만류하면서 자기집으로 가자고 하기에 따라가 툇마루에 올라서서 발을 구르면서 호통을 하는데, 뒷산 산비탈에 두건을 쓴 젊은이가 나타나더니 뒷짐을 진채 삽을 끌고 내려와 정사 앞에 절을 하고, “너무 화를 내지 마세요. 체백만 모셔가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하더라.
이에 정사 소리를 질러, “이놈들아 어서 속히 모셔오라.”고 호령하니 그는 정사가 데리고 간 일꾼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어느 지점에 머물러 한참동안 삽질을 하니 김이 뭉개뭉개 나더라. 이윽고, 이윽고 삽위에다 마주들고 와서 푸른 보자기에 쌓인 둥그런 덩어리를 앞에 놓더라. 정사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분이 복받쳐, “이 죽일놈들 갖다가 버린다 하더래도 이 모양으로까지 할 수가 있느냐!”고 호령하니 두건을 쓴 젊은이는, “여보시오, 내가 할 책임은 다 하였으니 나중에 잊지말고 나를 찾아나 주시오.”하면서 슬프게 흥얼거리며 건들건들 뒷산으로 올라가더라. 깜짝 놀라 눈을 뜨니 꿈이라, 뜰에 나가 대흥리 앞산을 살펴보니 그 자리가 눈앞에 선하게 보이는 듯 하였다.
날이 새어 아침에 차씨집 근처로 나가니 선사님은 송선자와 같이 나오시는데 상황을 물은즉, 차씨 부인은 “우리는 전혀 모르는 일이다.”고 하며 그 말만 되풀이하므로, 밤을 그대로 새우고 왔노라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이에 월곡의 동생인 윤경노인의 집을 방문하여 찾아온 사유를 말하고 만일 순순히 말을 듣지 않는다면 법적인 수속을 할 수 밖에 없노라고 하였더니, 그는 잔뜩 겁을 내어 놀라면서, “진정하시오. 혈식께서 오셔서 아버님을 부르고 애통해할 때 상제님께서 대답이 없으실 이치가 있을 수 없은 즉, 한 십여일간만 기한을 준다면 그동안 산천에 기도는 늘 해왔지만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축원한다면 밤에 현몽이라도 계실 듯 하니 그렇게 해주시오.”하며 애걸하기로, 한달을 한하고 찾아보도록 당부하고 칠백환을 주고 비용에 보태어 쓰도록 한 다음 동곡으로 돌아왔다. 성전에 진지상을 올린 선사, 정사는 다음과 같이 상고하였다.
「바람을 스치고 비를 스치는 물결과 같이 세월의 흐름속에 우리 두 사람의 천신만고는 실로 붓으로 쓰기에는 힘드옵나이다. 그러나 세상 모양은 가소롭고 가탄하기만 하오니 성부님 옥체는 어느 곳에 계시온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골절이 쑤셔오는데 성부님을 신앙한다는 몰지각자가 많아, 혹은 도취구복(盜取求福)을 일삼고 혹은 증산의 재생이라 자칭하며 감언이설로 혹세무민을 일삼아 그 행악(行惡)은 이루 헤아릴 수 없으니, 생각컨대 천인공노에 절치부심(切齒腐心)이로소이다. 연이나 성부님을 숭상하여 장래 복을 구하는자 혹은 성부님의 재림을 고대하는자 수백만을 헤아리건마는 핏줄을 받은 몸으로서 아직도 성부님 옥체를 찾아모시지 못한 채 어디엔지 알길도 없는 풀 덤불속에 버려둔 채로 있사오니, 어찌 차마 하룻밤인들 발을 뻗고 잠들 수 있사오리까?
언제나 옥체를 찾아 모시어 명산대천에 터를 잡아 안장(安葬)하여 일편단심(一片丹心) 사무쳐 지새운 그동안의 사적을 성부님의 홍대무량(弘大無量)하신 성업을 기념하기 위해 세울 삼청루각(三淸樓閣) 한 곳에 기록하고 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사온즉, 성부님께옵서 명백히 계시하시와 저희의 원을 풀게 하시옵고 또한 성부님을 지극히 믿사옵기에 저희와 더불어 고초를 겪은 형제들의 원을 풀으사 그들의 괴로움을 풀어주시기를 빌고 비옵나이다. 저희로서 취할바 명백한 명령를 내리시옵소서.」
이월이십사일에, 정읍으로부터 윤경노인의 부인 주판례가 찾아와서, 진심으로 발원하여 거듭 기도를 올린 결과 그 당시의 평장터를 찾을 수 있었으니 안심하라고 하면서 이십칠일에 가만히 모시고 올 터이니 마중을 나와달라고 부탁하고 나서, 만일 대흥리 교중이나 차씨 일문에서 알게되면 큰 분쟁이 일어나게 될 것이므로 아무도 모르게 모셔와야 될 것이며, 자기네 내외는 그곳에서 살 수 없으니, 이사할 거처나 주선해 달라고 부탁하고 돌아갔다. 2월 27일, 정읍으로 마중을 나가 성부님의 옥체를 모시고 오는데 풍우(風雨)가 대작하였다.
동곡 성전에 옥체를 모시니 성부님께서 명령하시되, “무자(戊子)년 3월 3일에
봉안식(奉安式)을 행하라.”고 하시기에 성전 후편에 묘각을 짓고 또 도적이 들
지도 모를 일이어서 네명씩 번을 짜서 지키었다. 천기 78년(4281, 1948, 戊子) 3
월 3일, 성부님께서 옥체 봉안식을 거행하니, 그동안 선사는 혈식으로서 옥체를
찾아 모시고자 했던 일편단심에 오늘을 맞게 되니 서럽고도 기쁜마음에 복받치
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4) 사례주연(謝禮酒宴)
천기 78년(4281, 1948, 戊子) 3월 3일, 성부님께서 옥체 봉안 치성시에 하강하시
어 말씀하시되, “너희들이 금성산에서 사년동안 일을 봄으로써 천지신명들이 강
림하도록 하였으므로 모든 일이 무위이화로 되어온 것이니라. 겉으로는 너희가
하되, 안으로는 천지신명이 꾸미는 일이다. 5월 5일에 금성산에 가서 정자집 주
인은 물론 이씨네 문중의 노소를 초정하여 주연을 베풀고 그 곳에 있게 되었던
사유를 낱낱이 말하고 증거를 드러내 놓도록 하라.”고 하심으로 그곳에 사는
임무순(任武順)의 집에서 많은 사람을 초청하여 주연을 베풀고 그곳에서 있었던
사실들을 공표하니 모두들 감탄하였다.
(5) 사해용왕(四海龍王) 치성(致誠)
천기 78년(4281, 1948, 戊子) 6월 24일 화천기념 치성에 성부님께서 하명하시되, “칠월 칠석에 부산(釜山)에 가서 사해용왕 치성을 올리되, 무당 한사람을 데리고가서 공사를 보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경주 도생 수십명을 동참토록하여 토성동에거주하던 진채봉(陣菜奉)의 집에 장소를 택하여 공사를 보니, 풍우대작하며 해중에서 기적소리가 몇 번이고 울리어 왔다.
(6) 금강산(金剛山) 치성
하루는 천명이 내리되, “무자(戊子)년 9월 19일 치성은 금강산(金剛山)에 가서 보도록 하라.”고 하시어 삼팔선이 가로 막혀 불가능함을 상고하니, “금강산이 건너다 보이는 태백산(太白山) 만경대(萬景臺)에 가서 보라.”고 하셨다.
명을 받들어 봉화지방대표 최상헌(崔相憲)에게 치성 준비를 지시하니 그 곳 도생들과 합심하여 제반 준비를 진행하였다. 본부에서 치성 수일전에 태백산을 향해 출발하는데, 성부님께서 천상의 모든 신명들을 대동하시고 친히 동행하시니, 지나는 곳곳마다 우리 도생 형제들이 있고 없나를 물어보시고 형제들이 사는 곳에는 일일이 길을 안내받아 심방하시고 형제들의 시위를 받으시었다. 천기 78년(4281, 1948, 戊子) 9월 19일, 태백산 산상의 신선바위(神仙岩)에서 닷새동안 계속 공사를 봉행하였다. 그때에, 아래 조그마한 산막촌에 사는 한 노인이 올라와서 하는 말이, 삼년 전에 동제(洞祭)를 올린 일이 있는데 그때에 태백산령(太白山靈)이 나타나서 나는 지금 딴곳으로 가고 이곳에는 금강산령(金剛山靈)이 올것이니 축원문을 고치도록 하라고 하여 그대로 행한 바 있다고 말하니, 일동은 진정 이상한 노릇이라고 감탄하고 이곳까지 친히 동행하신 성부와 천지신명들에게 감사하여 마지 않았다.
(7) 오리알터(鳧卵基)기지 구입
천기 78년(4281, 1948, 戊子) 8월 15일, 성모님 화천기념식을 거행하니 성모님께서 하명하시되, “도장의 터가 좁으니 터를 넓히도록 하라.”고 하시어, 10월 10일부터 터를 고르기 시작하는데 그날밤에 또 하명하시되, “비록 터를 넓히는 역사라 할지라도 개기제(開基祭)를 지내야 하니 내일은 개기치성을 하라.”고 하셨다. 다음날 개기치성을 올리고 나니, 성부님께서 하강하시어 “이 자리는 머지않아 패운이 들어오게 될 것이니, 오리알터 밤나무를 사서 새기지를 닦도록 하고, 이곳에 있는 기왕의 건물도 뒤이어 이축토록 하라.”고 명령하시었다.
그리하여 정사는 명령을 받들기 위해 그 터를 두고 수소문해보니 수백그루의 밤나무가 서있는 그 자리는 정읍에 사는 이판옥(李判玉)의 소유 임야로써 예로부터 그 곳에 가활백만지지(可活百萬之地)가 있다하여 수 많은 지사(地師)들이 답산하여 그 좌,우에는 명당을 찾아 쓴 분묘들이 많았고, 다른 사업상으로도 쓰기 위해 원매자가 적지 않았으나, 산주의 형편이 넉넉하여 도무지 팔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모두 허행만 거듭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사는 이와 같은 형편에 당장 가망이 없을 것 같아서 고심하고 있던 중 어느 날 산주가 방문한지라, 반갑게 서로 인사하고 점심을 같이 마친 뒤, 그는 앞문을 열고 건너편에 내다보이는 율목림(栗木林)을 가르키면서, “저것이 나의 소유 임야로써 평수는 약 칠정보나 되는데 수년전부터 몇 사람이 드나들며 매도하라고 조르는 것을 팔 마음이 없어 거절해 나오던 중인데, 이들이 번갈아 찾아와서 성화를 대는지라 번잡하기 짝이 없어 팔아버릴 마음을 정하고 있으니 치성때에 실과도 필요할 것이며 또한 관리하기에도 용의할 것이라는 마음이 들어 다른 곳에 팔기 전에 찾아 뵙고 말씀이라도 해드려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찾아왔노라.”고 하였다.
성부님게서 친히 인도하시고 운영하시는 일이 이처럼 척척 사우(四遇)가 맞아 들어가는 것이 이미 상식화된 사실이거니와, 음식까지 전폐하고 염려하던 중, 반갑고 신기한 마음 한이 없어 산주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사기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종역하는 도중 식구들은 죽과 나무뿌리를 면치 못하고 있는 처지라, 새기지를 매입할 자금을 만들려고 생각하니 아득하기만 하였으나, 천의에 따라 봉명하면 모든 일이 무위이화로 풀려나감을 생가하며 백방으로 주선한 끝에 겨우 친분이 있는 농우 한 마리를 빌려 원평 장날에 파니 꼭 육만환이었다. 정사는 그 길로 정읍으로 가서 산주를 찾으니 그는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지체할 것 없이 매매에 대한 계약서를 들고 대금을 물으니, 다른 원매자들이 팔,구만환을 이야기하니 알아서 달라고 하기에 가진 돈이 육만환이라고 하자, 그는 계약서에 오만오천환이라고 기입하였다. 뜻밖의 일이나 남은 오천환은 마침 나와 인사하는 그집 아들 오형제에게 나누어 주었으니, 성부님께서 시키시는 일의 결과는 사람으로서는 미리 깨달을 수 없는 것임을 또 한번 명심하면서 오리알터를 도득할 수 있게 되니 마음이 나를 듯 가벼워지고 언제나 앞길을 열어주시는 하늘에 감사해 마지 않았다.
6) 육기초 공사(六基礎公事) : 오리알터(鳧卵基)
(1) 육기초공사 착공
천기 79년(4282, 1949, 己丑) 정월, 새해치성을 올리니 성부님께서 하명하시되, “정월 20일에 오리알터에 개기(開基)토록 하라. 이제 해가 바뀌었으니 삼,사월에는 큰일이 있을 터이니, 너희들은 속히 일을 착수하도록 하라.”하시고 다시, “너희들은 정월 14일 저녁나절에 이곳으로부터 오리알터로 건너가는 냇물에 섬다리 열두개를 놓되, 그 속에 엽전 한,두푼씩 넣을 것이며 내(川) 양편에 오색등 하나씩을 달도록 하라. 너희들은 머지않아 이곳에 발로는 다니지 못하게 될 것이니라.”고 하시었다. 14일 저녁무렵에 하명하신대로 실행하고 2월 20일, 오리알터에서 개기제(開基祭)를 올린 다음, 정사는 성도와 경주를 데리고 밤나무 숲 곳곳에 측량 푯말을 세우고 이튿날부터 터를 닦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2) 성부님 유품(遺品) 및 중화경(中和經) 입수
천기 79년(4282, 1949, 己丑) 3월 3일, 각 기관장들을 초청하여 기념치성을 올린 다음 주연을 베풀고 있었는데, 밖에 사람이 찾아 왔다고 하여 나가 보니 곽봉훈(郭鳳勳) 노장스님이었다. 그는 당시 유명한 불교 학승으로서 80이 넘는 노구로 수년전 금산사 강원에서 불자들을 기른 일이 있는 사람이라 약간의 지면이 있었는데, 책보에 싼 것을 내놓으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내가 금산사에서 강(講)을 할때에, 김응종(金應鐘)이라는 사람이 증산선생의 유적(遺蹟)이라고 하면서 맡기고 간 뒤 다시 찾아오지 않으므로 지금까지 두루 찾아보아도 만날 수 없었고 오늘 전하지 않으면 안될 사정이 있어 하는 수 없이 이곳에 전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정사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곽봉훈 스님의 말을 공개하고 여러 사람의 입회하에 보자기를 열어보니 두 권의 책과 한 개의 인장갑이 들어 있었는데, 책은 중화집(中和集)이라 쓰여진 것과 또 전자체(篆字體)로 된 친필집(親筆集) 한 권이었으며, 인장갑 안에는 성부님 제세시 사용하시던 친인(親印)과 함께, <陰年土 陽月土 干支看 三吉日 重陽金日 舜任 信傳 東谷>이라 쓰인 글이 들어 있었다. (이 날은 己丑年 戊辰月 庚申日 陰三月三日 이었다.)
너무나도 신기하게 간지와 일진이 부합되어 모두들 어안이 벙벙하여 어쩔 줄을 모르면서도 감탄하여 마지않았다. 봉훈장은 그 자리에서 증언하기를, “팔년 전에 김응종이라는 노인이 유저(遺著)와 인장(印章)을 가지고 와서 잘 읽어 새겨보라 하고 간 뒤 다시 찾아오지 않으므로 인장갑 속의 글을 보니 기축 삼월 삼일에는 어디에고 전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생각하여 다만 구암에 관한 이야기만 듣고 찾아왔는데, 의외에도 증산선생의 따님이 계시고 그의 이름이 <순임(舜任)>이라 하니 정법(正法)이 아니고는 이럴 수가 없으리라.”고 하며 감탄해 마지 않았다.
*증산법종교 간행서 「중화경」참고 - 상제님 친인, 중화집, 전자체 수록
(3) 성부님과 성모님의 장례식(葬禮式) 봉행
천기 79년(4282, 1949, 己丑) 2월 15일, 성부님께서 하강하시어 명령하시되, “오는 3월 15일에 장례식을 거행하도록 하라. 오리알터는 나와 너의 어머니의 영원한 안장지니라. 이 날에는 장례(葬禮)라고 하지말고 장사(葬事)라 하여라. 이날 장사는 천하장사(天下葬事), 지하장사(地下葬事), 인간장사(人間葬事), 천지대장사(天地大葬事)니라.”고 하시었다.
화은당 선사께서 명령을 받고 보니, 성인의 피를 홀로 받아 넓고 넓은 대해 중에 외로운 일엽편주처럼 떠돌아 다니다가 애통한 가슴을 부여안고 숨어서 지성으로 기도에 이은 기도의 생활과 잇달아 내리는 명령의 봉행에 세상 사람과 정반대의 길을 생사를 걸고 지나온 피맺히는 과거의 역정을 생갈할 때, 오늘 이 한 명령을 얻어 모시기 위하여 바쳐나온 반생의 소원이 이루어지는가 하여 한편 기쁘고 한편 서러워 목놓아 통곡하였다.
그러나 현실을 두고 생각하면 넉넉지 못한 경제도 걱정이려니와 그동안의 준비가 여간 바쁘지 않겠으므로 눈물을 거두고 성전을 물러나와 형제들로 하여금 업무를 분담하여 건축을 서두르고 성묘 기지를 닦으며 꽃상여를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나갔다. 그 뒤 당일 행사 절차에 관한 성부님의 지시가 계시니 그것은 유공한 도생들로 하여금 운상하되, 그들에게는 모두 삼베 양복을 만들어 입히고, 상여마다 좌,우 삼십명씩 모두 백이십명으로써 운상토록 하라는 명령이셨다.
명령대로 다시 준비를 보충하여 천기 79년(4282, 1949, 己丑) 3월 15일 장사식을 거행하였다. 삼베 양복을 입은 운상꾼 육십명이 앞에서 흰상여로 성부님의 옥체를 모시고 또, 그 뒤에 삼베 양복을 입은 육십명이 오색 꽃상여로 성모님의 옥체를 모시고 뒤따르고, 그 뒤에 상주(喪主)와 수백명의 복입은 신도가 줄을 지어 따르는데, 앞에 가는 백상여 운상채 위에 올라선 인보자가 태극기를 좌,우로 흔들며 천천히 메기는 우주영가(宇宙詠歌)의 구절을 운상꾼들은 구슬프게 받으면서 한발 한발 나아가고, 그 뒤에는 수백명의 복인들이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며 정연하게 열지어 뒤따르니, 수백장의 만기(輓旗)들이 봄바람에 너울거리는 가운데 하얗고 울긋불긋한 두채의 상여는 봉황인듯 공작인듯 아름답고 숭고한데 장사행렬은 실로 장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우주영가(宇宙詠歌)
가소로다 가소로다 세상사가 가소로다
이내몸이 생겨나서 사십구년 낭도타가
초당에 깊이든잡 일몽으로 화하여서
한곳으로 돌아드니 십주연화 분명하다
무기궁에 깊이앉아 사면을 바라보니
철통같이 굳은속에 일로를 난통이라
태화기운 부여잡고 영심만을 굳게지켜
오는때를 기다리니 홀연뇌풍 상박소리
건곤이 진동하고 무기궁이 요란터니
홀연일로 통개하야 음양이기 내닫거늘
나도따라 나서보니 삼리화 벌려있고
삼청일월 밝았는데 벽목삼궁 여기로다
음양을 따라나서 청림새 좁은길로
차츰차츰 내려가니 상중하 섰는청림
정이삼월 경이로다 이수를 요량하니
한달에 삼천육백리 씩이로다
삼월이수 마련하니 만팔백리 뿐이로다
천황씨 목덕운은 만팔천세 하였는데
이내운로 어이하여 만팔백리 뿐일런고
생각하고 생각하니 그러하고 그러하다
칠천이백 연기빼여 칠십이둔 며련하던
강태공위 조화수단 이금에 안재재요
삼천법계 넓은도장 팔백연화 나열하고
석가여래 무궁도술 자고로 유명하다
미륵전 높은대에 뚜렷이선 저금불은
나를보고 반기는듯 감중련한 이이치에
이허중이 따라났다 구성산 높은봉에
울고가는 저봉황은 성인이 나계시니
황화수 일천년에 다시한번 맑았도다
동구에 배례하니 적송자 나왔구나
장자방은 어디가고 요지연만 진동한가
서왕모의 상존이라 안기생을 보았는가
청춘작반 호환향은 두자미의 지은글귀
나늘두고 일렀던가 양안도화 협거진은
어주자가 지시하니 무릉원이 여기로다
해상에 삼신산은 구름밖에 둘려있고
눈앞에 모악산은 반공에 솟았는데
딸고따른 제생들은 나의부탁 아니잊고
일일상면 가애로다 백발이 소소하야
선풍에 흩날리고 금풍에 저저귀로
옥경대에 올랐구나 책자에 치부법문
그다지도 못깨닫고 지동지서 혼침한가
개명장 나는날에 일체개심 하였어라
동자야 비를들어 만정락화 쓸어내라
동방일월 대명시에 만세동락 하여보세
장사행렬은 구릿골로부터 출발하여 구로(舊路)로 나서 수양산(首陽山) 서편 마루밑을 돌아 신작로로 올라서서 오리알터 장지에 이르게 되었는데, 두 도령과 천지신명들이 둘러싸고 옹위하며 따르고 앞뒤로 메기고 받는 운상소리와 염불소리는 좌,우 산천에 메아리 치니, 고애로운 화은당 선사님의 그 생애는 출천지대효로서, 오늘이 있음으로서 빛나게 된 것이었으니, 미어질 듯 벅차오르는 가슴은 가눌 길이 없었다.
우리의 장사행렬을 구경하려고 원근으로부터 몰려온 사람들로 산과 들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장지인 수양산 일대는 종일토록 사람들로 마치 눈에 덮인 듯 하얗게 되었다.
이튿날에 풍진이 일고 일기가 몹시 요란하더니 구성산(九城山)으로부터 봉황 한쌍이 날아와서 성부, 성모님의 묘소가 있는 수양산 영봉둘레를 빙빙 돌며 소리를 지르더니 다시 구성산으로 날아가더라. 그날 교인들은 풍악을 울리고 구릿골을 다녀서 오기초지인 지금의 금평호수 자리에서 노래와 춤으로 즐겨 놀았다.
그 날, 성부님께서 하명하시되, “장지에 습기가 많으니 내 체백을 식당 윗방으로 옮겼다가 4월 9일 묘소에 봉안하라.”고 하심으로 그대로 봉안하였다. 4월 8일 기념식에 서울에서 류동열(柳東說)장군 일행이 내려오고 그 이튿날인 4월 9일에는 전북 도청과 부근의 각 기관으로부터 내림한 귀빈들의 참석하에 전일과 같이 상여를 운반하여 예식을 거행할 때에, 과거 십여성상을 두고 성부님의 옥체를 찾아 모시고자 하던 일편단심으로 많은 고생과 파란곡절을 겪어 온 것을 생각하고 오늘날 귀빈의 참석하에 성부님의 옥체를 영영 안장하게 되니, 감격의 눈물이 하염없이 솟아나와 하늘을 부르고 통곡하는 선사님의 모습을 대하는 사람마다 눈물을 머금고 당신의 출천지 대효에 감격하였다.
(4) 삼청전(三淸殿)을 준공하고 미륵불상(彌勒佛像)을 봉안
천기 79년(4282, 1949, 己丑) 5월 단오절(端午節)치성을 올리는데 운장상제와 천존신장(天尊神將)이 하강하시어, “성전을 짓고 열석자 금불상을 조상하여 모시되, 6월 24일 화천기념일에 착수토록하라.”고 하시었다.
6월 24일 화천기념치성을 거행하니 천지신장이 강림하여 말하기를, “성부님께서 미륵불상으로 지상에 현현하시게 되니, 천상에서도 대회를 열었노라.”고 하시면서, “성부님께서 천상 마리지일월삼용(嗎哩池日月三龍)에 누워 계시다가 역석자의 금불로 화현하시게 되면, 그 삼용도 서게 되느니라. 12월 26일에 불상 조성을 마치고 예불을 올리도록 하라.”고 하시었다. 또 말씀하시길, “기념치성이 끝나면 바로 불상조성을 시작하되 조상자 마음대로 하지 못할지니, 선사님께서 천상에 오르내리시면서 제반 지시를 받도록 도수를 두었는고로, 조각자는 일일이 선사님의 지도를 받아 조각을 하게 될 것인즉, 그리알고 전상에 대하여 치성을 자주 올리기 바라노라.”고 하시었다.
그 뒤 조상자(造像者) 김일섭(金日燮)은 선사님의 교시하심에 따라 미륵금불상을 조성하였다. 10월 27일 개안식(開眼式)을 올리고 나니 천지가 모두 황금색으로 변하여 사물을 보나 산천을 보나 눈에 보이는 만상이 모두 금빛으로 화하더니 삼일 후에야 다시 원색으로 보이게 되었다.
공사는 계속되어 삼청전(三淸殿)을 12월 23일에 준공하고, 12월 26일을 재생신기념일(再生身記念日)로 정하고 열석자 증산미륵불상 봉안식(甑山彌勒佛傷 奉安式)을 거행하였다.
이와 같이 삼청성전(三淸聖殿)을 짓고 열석자의 미륵금불을 모시게 됨은 성부님의 명령계시에 의하여 이룩된 것이니 그것은 재세시에 ‘나는 미륵불이노라’하신 말씀과 ‘내가 장차 열석자로 오리라’ 또, 남겨놓으신 문장 가운데에 ‘십이월 이십육일 재생신(十二月二十六日再生身)이라 하신 말씀들을 모두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다.
※ 불상 봉안후, 지금까지 네차례의 발한(發汗)이 있었기로 이를 약술한다.
1) 1차 : 천기 90년(4293, 1960, 庚子) 3월 11일
2) 2차 : 천기 91년(4294, 1961, 辛丑) 4월 1일
3) 3차 : 천기 92년(4295, 1962, 壬寅) 9월 16일
4) 4차 : 천기 116년(4319, 1986, 丙寅) 12월 26일
(5) 성부님 체백의 수난
성부님의 체백은 재세시의 종도들에 의하여 동곡 장탯날 기슭에 장사하여 모셔졌는데, 그 후 무극도 교주였던 조철제에 의하여 야밤에 성부님의 옥체가 도굴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으니, 이때부터 일부 사욕에 눈이 어두운 자들에 의하여 성부님 옥체는 수난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성골을 서로 차지하려는 각 교파간의 싸움은 교도들을 동원하여 성골을 탈취해가는 실력행사와 법정소송이 제기되는 등 큰 분쟁으로 비화되었다. 이런 와중에 보천교의 교도 수십명이 무극도를 습격하여 성부님의 체백을 다시 탈취하는 과정에서 왼손 성골이 분실되고 말았다.
천기 79년(4282, 1949, 己丑)에 태극도 신도로 있다가 본교에 납명한 엄병윤, 신도균, 정기택이 분실된 성부님의 왼손 성골은 그 당시에 조철제가 수습하여 보관해 오고 있다고 제보하므로, 이에 선사님께서는 성부님의 분실된 성골을 찾아 모시고자 법적인 절차를 밟으니, 이듬해 정초 태극도 임원들이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분실된 성골의 소재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무지몽매한 자들에 의하여 성골의 한 부분이 영원히 분실되고 말았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6) 서별당(西別堂) 건립
천기 80년(4283, 1950, 庚寅) 정월에 동곡에 있는 옛 성전을 뜯어다가 서별당(西別堂)을 짓고, 응접실 및 삼문(三門)을 4월에 완공하였다.
(7) 6.25 동난으로 인한 선사님의 남하(南下)
천기 80년(4283, 1950, 庚寅) 5월 4일 삼청전에 예불을 드리니 미륵불께서 하명하시되, “성전 정문에 통나무를 가로질러 못을 치고 시각을 지체말고 대구(大邱)로 향하여 떠나도록 하라.”는 추상같은 호령을 하셨다.
이에 선사님은 교중 식구들을 성전 마당에 모이도록 한 다음 목수들을 시켜 통나무로 성전 정문에 못을 박도록 하고 - 부모를 위하는 일을 하다가 경제상 애로가 있어 경상도 방면으로 구걸차 내려가면서 부득이 철봉하고 떠나오니 내빈 여러분께서는 용서하시옵소서 - 라는 글을 써 붙이고, 성부님의 추상같은 명령으로 내일은 길을 떠나게 되었으니 다녀올 동안 어떠한 세상변동이 있을지라도 진심을 지키어 잘 믿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지시하고, 다음날 아침 선사는 정사와 이환우, 이우형, 배달석을 대동하고 길을 떠나셨다. 김제를 거쳐 하룻밤을 세우고 이튿날 대전에 도착하니, 북한 공산군이 남침을 개시하여 벌써 서울까지 밀고 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성부님께서 불시에 명령을 내리신 뜻을 비로소 깨닫고 물밀듯 내려오는 피난민들 틈에 끼어 겨우 기차를 얻어타고 대구에 도착하게 되었다. 대구에 도착한 일행은 교중 형제인 이교태(李敎台)의 장자 종회(鍾會)의 집에 여장을 풀고 명령을 받들게 되었다.
(8) 인민군 남하(人民軍 南下) 저지를 위한 수운치성(水雲致誠)
천기 80년(4283, 1950, 庚寅) 5월 6일, 종회의 집에서 저녁 진지상을 올리고 예를 드리니 성부님께서 하명하시되, “큰일이로다. 대구는 최수운(崔水雲)이 참사를 당한 자리라. 수운은 나라를 개명시키고자 한 혁명 사상가로서 이번 일도 그가 하는 일이라. 내일은 수운을 위하여 치성준비를 갖추어 달성공원(達城公園)에 가서 치성을 드리되, 창호지에다 - 이 난리가 대구로부터 부산까지는 범치 못하리라.- 고 써서 설상 앞에 펴놓고 치성을 올린 다음, 글은 소화하라.”고 하시었다.
다음날 달성공원에 가서 명령대로 치성을 봉행하고 축문과 지도를 불사르니 수운선사께서 하강하시어 우리에게 여러 가지 지시를 내리신 다음, 발을 굴리시면서 명하시기를, “이놈들아 물러가라. 대구로부터 부산까지는 못들어온다. 너희놈들이 대구 이남을 침범하여 끝까지 난동을 멈추지 않는다면 나라가 없어진다.”고 호통을 하시었다.
(9) 밀양 종남산(終南山) 치성
천기 80년(4283, 1950, 庚寅) 5월 8일, 저녁 예를 올리니 성부님께서 명령하시되, “큰일났도다. 그러나, 너희들은 염려를 말고 날이 새면 밀양으로 내려가도록 하되, 우형을 먼저 보내어 거처를 정한 뒤에 내려가도록 하라.”고 하시었다. 이에 우형은 미리 발정하여 밀양 종남산 구배리(九拜里)에 있는 이화학(李和學)의 집에 자리를 정하니, 이에 일행은 구배리로 내려가게 되었다. 밀양에 있는 교인들과 더불어 종남산(終南山)에 올라가 날마다 치성을 올리고 북을 치고 춤을 추는 등, 풍악을 울리며 수십명의 인원이 회집하여 북한군의 남진을 막고자 일체 행사를 보게 되었다.
(10) 부산(釜山)으로 내려가 치성 올리다.
어느날 성부님께서, 밀양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라는 명령이 내리시므로, 선사님과 일행은 부산으로 내려가 해변이며 섬중에서 명령에 의해 수차례에 걸쳐 치성을 올렸으니, 그것은 국토회복을 위한 치성이었다.
(11) 선사님 오리알터로 복귀하다.
천기 80년(4283, 1950, 庚寅) 9월 그믐에, 평리(平里)에 사는 박성근(朴成根)의 집에서 치성을 올리니 성부님께서 하명하시기를, “이제 인민군도 물러가고 차차 평온해가니 곧 본부로 돌아가도록 하라.”고 지시하시었다. 수개월간에 걸친 남하생활에서도 선사님은 본부를 부르며 가슴을 치고 통곡하기를 매일 두,세차례씩이나 하시었는데, 이렇게 명령를 받고 보니 본부는 혈심으로 지은 성전을 비롯한 모든 전각도 없어졌을 것이며, 삼사십명의 교중형제들도 모두 죽었으리라고 생각이 미쳤을때는 염려되는 심정 금할 길이 없었다.
전쟁통이라 교통이 여의치 못하므로 가까스로 본부에 도착하여 보니, 본부의 각 전각이며 남아있던 식구들도 모두 무사히 있는지라. 실로 성부님의 덕화와 힘이 지중함을 새삼 느기지 않을 수 없었다. 선사님은 성전에 들어가 불상앞에 엎드려 다시금 감사의 눈물을 흘리고 저녁에 교중 형제 자매들을 회집하여 동란중에 얼마나 고생을했는가 위로하셨다.
(12) 도인포태도수(道人胞胎度數)로 천가족(天家族)의 의(義)를 맺다
천기 80년(4283, 1950, 庚寅) 2월, 성부님의 하명이 계시어 교중 형제, 자매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성모님의 체백에 안치하여 동짓달 초하룻날(11월 1일)까지 10개월간에 걸쳐 공사를 보니, 이것이 도인포태도수(道人胞胎度數)였다. 이때부터 모든 교중 형제,자매들은 이 날을 생일로 삼고 성부, 성모님을 중심으로하여 선사님으로부터 형제, 자매, 숙질의 의(義)를 맺어 천가족의 일원으로서 도행(道行)을 유지하게 되었으니, 이로부터 세상 사람들도 혈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호부 호형하게되는 풍습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13) 성부님의 묘각(墓閣)인 영대(靈臺)를 건축하다.
천기 82년(4285, 1952, 壬辰) 정월 15일에 기념치성을 올리니, 천존신장(天尊神將)과 구목신장(九目神將)이 하강하시어 명령하시되, “금년에는 상제님의 묘각을 건축하여 천지도수에 부합되도록 10월 10일에 상량토록하라.”고 하셨다.
상제님 묘각 건축을 위해,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가운데서도 도생들은 모악산 산판에 나가 품을 팔아 재목 및 경비를 조달하였는데, 그 광경은 실로 눈물겨웠다. 이 해 8월에 수리조합에서 금평 수리조합공사 예정지를 측량하여 금평호 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때 측량에 의한 설계는 현재의 댐수위(水位)보다 1m정도 위쪽으로 정해져, 금산사까지 이르는 도로의 설계가 본부 경춘대(景春臺) 자리를 통과하도록 되어 있어서 그들은 기지내에 푯말을 박아 놓았었다.
오래(吾來)터로 성전을 옮기도록 명령하실 때, 냇물에 섬다리를 놓게 하시면서 장차 이 곳은 발로 걸어서는 다닐 수가 없게 되리라. 하셨으며 또 동곡에서 오래터(오리알터)로 이사하지 않으면 곧 패운이 들어온다. 하시더니 우리가 기지를 옮긴 뒤에 그 자리가 수몰지구로 편입되고 말았던 사실을 생각하더라도 필경 설계가 변경되도록 저리하실 것이 분명하다고 믿고 있었으나, 막상 기지내에 푯말이 박히고보니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저녁에 성전에 예를 올리고 이러한 사정을 심고(心告)하니 성부님께서 하교하시되, “염려말라. 연전에 공사시에 너희가 원평에 다녀온 일이 있는데 돌아오는 길에서 화은당의 이마를 깨서 피를 흘리게 함으로써 제방자리를 미리 표시한 바 있으니, 천지에서 벌써 정해져 있노라. 동곡의 냇물에 섬다리를 열두개씩 해마다 정월 14일 밤에 놓게한 것 역시 이 저수지 관계라. 내가 세상에 있을 때에 앞거리를 바라보고 남조선 뱃길이라. 하며 냇가 변두리 느티나무에 배가 매게 될 것이라고 하였으며, 또 동곡마을이 없어지게 되어 거기에는 장차 고기를 낚게 될 것이며, 또 뒷날에 도사들의 별장이나 짓고 살 터가 되리라고 했을 때에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나를 광인(狂人)으로 여겼지만 그 당시에 벌써 천지도수에 정하여 놓은 것이니라.
그러나 천지사는 정성을 들이지 않고 되는 법이 없는 것이니 무사히 풀리게 해 주시기를 불전에 충심으로 발원하도록 하라. 그런다면 신명들이 너희 몸에 힘을 주어 무사히 되리라.”고 말씀하시었다. 그 뒤 정성껏 기도를 올렸더니, 설계가 변경되어 제방자리가 오십여미터나 물러나게 되고 자연히 도로도 현 위치로 물러나게 되었다.
10월 10일 도령의 탄생기념일에 교중 식구들의 피눈물나는 성심의 결정으로써 이루어진 성부님의 묘각인 영대(靈臺)를 지어 이날 상량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부에서 금평호(金坪湖) 공사를 시작하여 우리의 육기초 축조공사가 끝나니 금평호 공사도 완료되었는데 기이한 것은 우리가 건축공사를 진행하면 저수지공사 또한 진행되고, 우리가 경제 형편상 공사를 중단하게 되면, 금평호 공사도 중단하게 되어 이렇게 7,8년간을 같이 진행하니, 이것은 우리 영대(靈臺)와 음양 대대로 진행되는 영소(靈沼)공사가 천지의 도수 소관으로 진행되었음을 입증하는 뚜렷한 증거가 되었다.
(14) 세월가(歲月歌)를 작사하여 노래부르다
천기 83년 (4286, 1953, 癸巳) 5월 7일 아침, 불전에 예식을 드리니 성부님께서 하강하시어 말씀하시되, “오늘 저녁까지 세월가(歲月歌)를 지어 진지상을 올릴 때 부르고 소축하도록 하라. 운장이 와서 천상에 접수하게 되리라. 그러므로 지체하지 말고 곧 짓도록 하라.”고 하시었다. 그날 세월가를 지어 올리니 운장께서, “소축하라. 천상 옥경으로 떠난다.”하시며 승천하셨다.
5월 10일, 성전에 아침 진지상을 올리니, 운장과 천존신장, 선관선녀가 하강하여 말하기를, “육기초 공사는 천상만 못하더니 세월가는 천상보다 잘 지었다.”고 하시며, “너희들은 모두 세월가를 경문과 같이 불러야 하리라.”고 하셨다. 그때부터 세월가를 영가(詠歌)하다가, 천기 90년(4293, 1960, 庚子)에 명칭을 시대가(時代歌)로 바꿔서 노래부르니,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歲月) 時代歌
一 時代야 歲月이야 開明하온 時乎로다
東靑龍 三八木에 北玄武一六水라
水生木 東南風에 陰痒和合되는구나
二 時代야 歲月이야 風雨霜雪 너머간다
一樹花發 萬樹春에 春和氣和 절로절로
無窮花 이江山에 三淸日月 밝아온다
三 時代야 물결이야 술렁술렁 들어온다
母岳山下 金生水에 萬化歸一 되는구나
靑龍黃道 大開年에 旺氣浮來 太乙船을
四 時代야 歲月이야 修 山陰 절로절로
天절로 地절로 하니 山河大運이 절로절로
心靈神臺 바로가면 先靈蔭德 鳥乙矢口
五 時代야 歲月이야 時乎時乎 祥瑞로다
童子의 비를드러 掃除濁氣 절로절로
時乎時乎 좋은時乎 不再來之 時乎로다
(15) 우명치성(牛鳴致誠)
천기 83년 (4286, 1953, 癸巳) 9월 19일 탄강기념치성에 큰소를 쓰라는 명령이 계시어 다른 치성물은 모두 준비되었으나, 우육(牛肉)만은 없었는데, 선사님께서 치성에는 산소를 올리라고 하시며, 소를 몰아 성전앞 뜰에 세우게 하시더니 말씀하시기를, “잔을 올릴 때마다 이 소가 삼헌까지 세 번 울어야지 만일에 소가 울지 않으면 너희들이 하는 일이 허사가 되리라.”고 하시었다. 이윽고 치성을 거행하는데 그때까지 가만히 섰던 소가 초헌으로부터 종헌까지 헌작에 맞추어 세 번이나 큰소리로 우는 것이었으니, 인지명은 양명지종야(人之明洋明之終也)오. 신지명은 우명지종야(神之明 牛鳴之終也)라고 했던가. 그 자리에 참석했던 수백명의 신도들은 모두 숨을 죽여 행사를 지켜보고 나서 참으로 현묘(玄妙)한 이치에 감격해 마지 않았다.
(16) 각 전각의 건립과 당우(唐虞)의 명명(命名)
천기 83년 (4286, 1953, 癸巳)에 태평전과 구룡사와 호국사를 건립하여 천기 84년 (4287, 1954, 甲午) 3월 3일에 도내 관,민 유지 수백명을 초청하여 단군 성조의 체상과 수운선생의 체상 및 순국 충의 열사의 위폐를 봉안하는 예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그동안 수년에 걸쳐 여러 채의 건물에 단청을 완료하게 되니, 각 당우의 칭호를 명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단군성상(檀君聖像)을 모신 전각은 단군께서 탄강하신 태백산(太白山)과 도읍터로 정하신 평양(平壤)의 첫글자를 따서 태평전(太平殿)이라 명명하니, 단군성산은 금성골 지하 중궁때부터 모시던 바요. 좌,우에는 단군시대 이후의 창업주 시조왕의 위패를 모시어 반만년에 걸친 민족 역사의 얼과 넋을 찾아 모을 수 있게 하였으며, 묘각은 성부님의 성령이 내왕하시는 곳으로 총묘천지신(塚墓天地神)이라 하시었으니 영대(靈臺)라 하였고 미륵불상을 모신 성전은 천상 삼계를 본떠서 삼청전(三淸殿)이라고 칭하고, 수운신사를 모신 곳은 경주 구미 용담(龜尾龍潭)에서 창도 하셨으므로 구룡사(龜龍祠)라 칭하고, 순국 충의 열사를 모신 곳은 호국사(護國祠)라 칭하여 그 결과를 글로 써서 상고하니 성부님께서, “잘 되었도다. 너의 마음이 곧 내마음이니라.”고 하시었다.
(17) 남별당(南別堂) 건립
천기 84년 (4287, 1954, 甲午) 오월 단오절에, 선사님께서 원삼에 족두리를 쓰고 그네를 타며 치성을 올리니 성부, 성모님께서 하강하시어 명령하시되, “동곡 별당을 뜯어온 재목으로 이 자리에 남별당(南別堂)을 지어라.”고 하시며 또, “오늘 개기제(開基祭)를지내도록 하라.”고 하시었다. 명을 받들어 봉행하고 그 뒤에 터를 닦고보니 구성산(九城山)을 안(案)으로 하는 대지가 되었으며 동곡 별당을 뜯어온 재목으로 남별당을 지었다. 건축공사를 진행하는 동안 밤이면 호랑이가 내려와서 별당터에서 놀다가 각 성전을 돌아서 가는 적이 수차례 있었으니 신기할 뿐이었다.
(18) 경춘대(景春臺)를 건립하다
천기 84년 (4287, 1954, 甲午) 가을에 대구에 사는 박귀동(朴貴東)이 납명(納名)하고 거액의 성금(誠金)을 헌납하므로, 그 자금으로 갑오, 을미 양년에 걸쳐 공사를 진행하여 천기 85 (4288, 1955, 乙未) 8월 15일에 경춘대(景春臺)를 준공하니, 안으로는 영대와 삼청전을 대하고 밖으로는 금평호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오리알터 기지의 정문(正門)이 되었다.
(19) 숭도묘(崇道廟) 건립
천기 85년(4288, 1955, 乙未) 6월 24일, 화천기념치성을 올리니 성부님께서 하명하시되, “각 문중 도선령(道先靈)이 천상공정(天上公庭)에 모여 천지공사에 수종해 왔으나, 지금은 지상에 한자리를 정해야 할 것이라, 각성(各姓), 각가(各哥)의 도선령 사당을 짓고 봉사자(奉詞者)의 명부를 작성하여 각 성별로 위패(位牌)를 봉안하되, 금성골 중궁에 있던 내 영상을 갈라서 선영 위패를 조각하다가 부족하거든 모악산에 가면 한 율목이 있으니 그것을 쓰도록 하라. 그리고 내가 먼저 앉아야 선영들이 좌정된다. 모든 선령이 자리를 정하면 나는 나가게 되느니라. 위패에는 본관성씨직선조 하감지위(本貫姓氏直先祖 下鑑之位)라 써서 봉안토록 하라. 그러므로 각가의 선영신들이 지상의 후손들에게 응기하여 성자(聖子), 성손(聖孫)으로 교양하여 다음에 올 용화회상(龍華會上)에 동참할 수 있게 되리라.”고 하시며 또, “당우를 짓되, 그 자금을 각가 각성의 자손들에게 성의를 표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시었다.
교중의 여러 형제들은 명령을 받들어 성심으로 기금을 마련하여 천기 86년(4289, 1956, 丙申) 12월 26일에 숭도묘(崇道廟)를 건립하고 위패 봉안식을 거행하였다. 선령위패를 조각할 때에 성부님과 운장상제 그리고 선사님, 사대선영(四代先靈) 영상을 일일이 거두로 할분하여 위패를 조성하였는데, 영상을 거두로 쪼개는 목수들의 등골에는 식은땀이 흘렀으며, 위패에 글을 써서 꽃가마에 2위(二位)씩 싣고 영당에서 숭도묘로 봉안하니, 봉안한 위패는 240여위에 이르렀다.
천기 87년(4290, 1957, 丁酉) 정월 15일, 숭도묘에 첫 제사를 올리게 되었는데, 각 위마다 술한잔, 건포 한 마리, 떡국 한그릇, 과일 한 접시씩 진설하여 제사를 지내는 도중, 운장상제와 오악산왕(五嶽山王), 사해용왕(四海龍王), 이 강림하시어 제사지내는 광경을 보시고 춤을 추며 풍류를 하시면서, “잘 되었다.”하시었다.
(20) 배도수
천기 86년(4289, 1956, 丙申) 가을에 선사님께서 배도수를 봐야하니 배를 만들어 준비하라고 하심에 명령대로 행하여 천기 87년(4290, 1957, 丁酉)6월 24일 화천기념치성을 마치고 금평호수에 나가 공사를 보시었다. 이때 제일 앞에 제비선(帝妃船)을 선두로 태을선(太乙船), 용화선(龍華船)이 나란히 뒤따르며 금평호수 중앙터인 오기초지 위에 배를 멈추고 풍물과 가무를 하면서 치성을 올리고 금평호를 일주하는 도중, 갑자기 뇌성벽력과 풍우가 대작하니, 잔잔한 호수가 일변하여 파고가 이척이요 사방에는 운무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더니 다시 날씨가 쾌청하여지므로 정신을 차려 살펴보니 배가 하선장에 도착하는 시점이었다. 금평호에서 배를 타고 공사보기를 그 후에도 여러차례 계속하였다.
(21) 대령전(大靈殿) 건립
천기 87년(4290, 1957, 丁酉) 정월 17일 아침 진지상을 올리니 성부님께서 하명하시기를, “천상의 대신명(大神明), 신장(神將)들도 지상에 앉을 자리가 있어야 하나니, 신명사(神明祠)를 금년안에 짓도록 하라.”고 하시었다.
이튿날, 각 지부 대표들과 상의하여 각 지부별로 성금을 각출하도록 결의를 보았는데, 대구에 사는 이구락(李龜洛)이 자기는 도문에 납명한지도 얼마되지 않아 용화도장 건설에 아무런 공적이 없으므로, 이번 신명사는 자기가 단독으로 부담하여 건축하겠다고 간청하므로 그 정성을 받아들여 신명사를 준공하고 각 지부에서 모은 성금은 각 전각의 수리 및 단청 공사비에 충당하였다.
9월 19일 탄강기념치성을 올리고 완공된 신명사를 대령전(大靈殿)이라 명명(命名)하고 태상상제(太上上帝), 옥황상제(玉皇上帝), 관성제군(關聖帝君), 명부대왕(冥府大王), 오악산왕(五嶽山王), 사해용왕(四海龍王), 십이신장(十二神將), 칠성선녀(七星仙女)의 화상(畵像을 봉안하였다. [그 후, 사시토왕(四時土王)과 두분 도령님도 봉안하였다.]
10월에 대령전 수련에 입공(入工)한 이구락은 10일이 지나도 아무런 신기한 체험을 할 수 없었다 하여 딴곳으로 신앙처를 바꾸게 되었으며, 자기가 헌납한 대령전 건축성금 일체의 반환을 요구하므로 법적으로나 도의적으로 그 돈을 돌려주지 않아도 하자가 없는 일이었으나, 용화선경세계의 기초를 열어 나가는 공사 절차에 있어 한사람에게라도 척을 지으면 아니될 것이라, 그의 척원을 풀기 위해 교중 대표들과 상의하여 교중 전답을 팔아 돈을 반환해 주었다.
(22) 세계평정(世界平定)을 위한 도령형제의 원정(遠征)
천기 88년(4291, 1958, 戊戌) 9월 19일, 화천기념치성을 맞아 선사님의 하명으로 소 한 마리, 돼지,개 각 2마리씩 잡아 대령전에 진설하여 치성을 올리는 중에 도령 형제분이 하강하시어 말씀하시되, “큰 도령은 소련으로 가고 작은 도령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세계를 평정하여 평화를 이루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일을 끝마치면 접시 비행기를 타고 경춘대 마당에 내려 올 것이니, 여러 형제숙질께서는 우리 어머니를 잘 모시기를 부탁합니다.”라고 하시며 먼 길을 떠나셨다.
(23) 천하전(天廈殿)을 건립하고 영상(靈像)을 봉안하다.
천기 88년(4291, 1958, 戊戌) 정월 1일, 신년을 맞아 새해치성을 올리니 성부님께서 명령하시되, “또 집을 짓도록 하라. 이번에는 높은 자리에 터를 잡아야 되겠은 즉, 처음 기초시에 산중턱에 터를 본 자리가 있느냐?”고 하문하시므로, “있습니다.”라고 상고하니, 또 하명하시되, “술상을 차려서 가자.”고 하시므로 술상을 차려 산중턱으로 올라갔더니 성부님께서 보시고, “터가 썩 좋구나. 이 자리는 대학공부(大學工夫)하는 자리라,
너희들의 겁기를 벗을 집이 될 것이니, 성의껏 지어 공부하도록 하라.”고 하시고 또, “금성골(金城谷)로부터 전라도까지 집은 열세채를 지으면 될 것이라고 한 일이 있나니, 이 집으로 집 짓는 일은 끝이나리라. 그러한즉, 더욱 정성을 들이도록 하라, 집모양은 구궁(九宮)으로 하여 우물정(井)자 형으로 하되 통로를 두도록 하라. 그 집에서 한 차례에 남,녀 삼십명씩 공부하게 되리라.”고 하시니라. 그로부터 혈심전력을 다하여 집을 짓고 단청을 완료하니, 이 건물을 천하전(天廈殿)이라 명명하였다.
10월 10일 대령전에 모셨던 성부님의 열석자 영상을 천하전으로 옮겨 영상 봉안식을 거행하였다. 행사 도중 선사님께서 말씀하시길, “아버지가 남쪽으로 섰으니 북을 쳐라.”고 하시는 지라. 이에 북을 가지고와서 지니 소리가 나지 않는지라.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또 선사님께서, “밖에 나가서 하늘을 보라.”고 말씀하시므로, 밖으로 나가서 천기를 살펴보니 천하전 위 하늘에 오색채운을 두른 천등(天燈) 다섯 개가 떠서 한동안 비추다가 남쪽으로 사라져가니, 이를 본 수백명의 도생들은 신기하게 생각하였다. 천하전은 수련도장으로써 무술년 10월 10일 첫 공부를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3. 화은당 선사(華恩堂 선사)의 선화(仙化)
천기 88년(4291, 1958, 戊戌) 시월, 천하전 영상 봉안식 직후에 선사님께서 득병하시어 자리에 누우셨는데, 그러한 가운데서도 교중의 제반 공사를 주제하시었다. 해를 바꾸어 기해년에 들어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갔다.
3월 6일, 선사님께서 갑자기 치성준비를 지시하시니, 교중형제들은 개 두 마리와 술 다섯말, 밥 두가마니를 위시하여 대소 제물을 장만하였는데, 그날 밤 천하전에서 준비된 제물을 진설하고 천지부모(天地父母)와 제대신장(諸大神將)을 대접하기 위한 대치성을 봉행하였다. 치성후 선사님께서 말씀하시길, “많은 신장들이 내려와서 나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빙빙돌며 빙글빙글 웃기만하는 것을 보니, 천상에 이미 내 앉을 자리가 마련된 것 같다.”고 하시었다.
3월 3일, 선사님께서, “나를 요에다 뉘인채 떠밀고 밖으로 나가자.”하심에 그대로 행하니 말씀하시길, “높기도 높구나. 나는 태전(太田)으로 간다.”고 하시더니, 다시 또, “멀기도 멀다.”고 하시며 근 한시간이나 메고 돌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오니라. 그때 천하전에서 내려온 정성태(鄭成泰)가 ‘밖에 나가 하늘의 구름을 보라’고 하여 나가보니 동쪽으로부터 서쪽하늘로 오색구름이 무지개처럼 뻗치었더라.
이튿날 4월 1일, 선사님이 아주 위독한 지경에 이른것 같다고 모두들 탄식하는데 천하전에서 수공하고 있던 도생이 들어와 하는 말이, “간밤에 천상에 올라가 보니, 선사님께서 천상 대법관(大法官)으로 임명을 받아 우리 인간의 산악과 천지공사에 대한 공로의 유무를 심판 결재하시는 책임을 맡으셨으니, 법석을 마련하여 모든 법관들이 시위하고 기다리고 계시더이다.”라고 하는지라. 모든 식구들은 운명하실 시간이 가까워지는가 싶어 더욱 서러워하였다. 오후 2시에 선사님께서 정사와 본부 도생들을 불러서 두루 살피시고 말씀하시길,
“본부 식구들은 물론 일반 형제들도 동요하지 말고 수도나 잘하면서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라. 나는 태전으로 간다.”하시고 또, “내가 할 일은 내가 다했으니, 너희들이 할 일은 너희들이 하라.”고 하시고 곧 눈을 바로 뜨시더니 전광을 둘린 듯 빛나는 눈동자를 감지 않으신 채 그대로 선화(仙化)하시었다.
이환우를 위원장으로, 각 지부장을 위원으로 하여 장례위원회를 구성하여 장례식을 9일장으로 정하고 장지는 남별당뒤 수양산 산록에 정하였다.
천기 89년(4292, 1959, 己亥) 4월 8일, 장례식을 거행함에 도중형제들은 물론이요, 각 파의 원로를 비롯한 많은 신도가 모인 가운데, 선사님의 체백이 본교를 떠나는 영결식에는 수백의 만장과 조기는 일산을 이루었고 수양산 일대는 신도들의 통곡소리 하늘을 진동하였다.
선사는 34세 되는 정축(丁丑)년에 현 전주 노송동에서 증산법종교를 창고하시었고, 그 뒤 의성 금성골, 장대골, 김제 구미안, 동곡 등지를 다섯차례나 옮겨가면서 상제님의 천지공사의 도수를 확정하기 위한 제반행사에 헌신하시고, 기축(己丑)년에 여섯 번째인 현재의 오리알터에 기지(基地)를 정하시고, 10년간에 거쳐서 제반 전각과 신위(神位) 등을 확정하시고, 도생의 수련을 위한 지침(指針)을 제정하신 후, 기해(己亥) 4월 초하루에 56세를 일기로 선화(仙化)하시었다.
선사는 교조이신 상제님의 천지공사 종결을 위하여 상제님의 외동딸로서 화현(化現)한 천상 선녀이다.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28년 만인 정축(丁丑)년 9월 17일 본교를 창교하시고, 인신(人身)으로는 부친이요 본체는 미륵존불이신 증산 상제님의 천명계시를 받았으며, 그 후로 천지대신명(天地大神明)과 더불어 일기초로부터 시작하여 육기초인 현 김제시 금산면 용화동에 있는 오리알터 기지에 본교의 터전을 마무리하고 선화하신 것이다.
정축년부터 기해년까지의 포덕 및 도수행사에서 보인 여러 가지의 기적과 치적은 혈심어린 천지의 성경신이 아니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화은당 선사는 상제님께서 규정하신 천지공사의 큰 강령의 세부적인 도수를 확정하시는 임무를 수명(受命)하고 태어나신 분이다. 따라서 본교 창교의 과정은 사람의 뜻이 아닌 천의(天意)에 의한 것이며, 이 과업의 성공 또한 신인의 합력(合力)의 결정인 것이다.
제 3장 교단의 발전기
1. 교단의 변천과 주요일지
1) 포항 용왕치성
선사님이 선화하시자, 그 뒤를 이어 김병철 정사님이 초대회장에 취임하시어 교단을 통솔하시게 되었다. 천기 89년(4292, 1959, 己亥) 7월 11일 정사님이 포항에서 용왕치성 준비를 지시하시어 포항지부장 김선진과 도생들은 제물일체를 준비하였는데, 정사님이 포항도생 50명과 함께 죽도 해수욕장에 도착하니, 그동안 계속되던 장마가 그치고 햇빛이 작열하였다. 치성을 올리기 앞서 정사님은 김선진에게 지시하여 주위에 빈집을 찾아두라고 말씀하시고 용왕치성(龍王致誠)을 거행하였다. 치성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일기가 돌변하여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니, 도생들은 미리 찾아두었던 빈집으로 피우하여 치성을 무사히 마치게 되었다.
2) 정족치성(鼎足致誠)
천기 91년(4294, 1961, 辛丑) 3월에 정사님이 솥을 떠 받치는 다리가 세 개 있으니 곧 강화도, 울릉도, 제주도라 하시고 정족치성을 올리셨으니, 3월 7일 강화도에서 치성을 올리고, 3월 15일에는 울릉도에서 치성을 올렸는데, 이때에 본부 및 지부에서 다수의 도생이 참가하였으나, 치성시에는 정사님, 이환우, 정상탁 3인만으로 행사를 거행하였다. 치성을 마치고나니 폭우가 쏟아지고 천둥벼락이 일어나는 등 천기변화가 있었다.
다음해 천기 92년(4295, 1962, 壬寅) 3월 15일, 제주도에서 전해와 같이 제반 준비를 갖추어 치성을 올렸으니, 정족치성을 완료하게 되었다.
3) 약장제작(藥藏制作)
천기 91년(4294, 1961, 辛丑) 3월 15일, 울릉도에서 정족치성을 올리고 돌아올 때, 향나무를 사가지고 본부로 돌아왔는데 정사님이 그 나무로 약장을 제작하게 하시니 4월 8일, 약장이 완성되는 날 비가 쏟아졌다.
4) 세계평화(世界平和)를 위한 산신치성(山神致誠)
천기 92년(4295, 1962, 壬寅)6월 14일, 정사님께서 세계정세가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시고 지부장 회의를 소집하여 세계평화를 위한 산신치성을 올릴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전국 각 지부에서는 지부 주위에 명산을 정하여 각 지부 도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6월 19일 입공식을 올리고 100일 동안 자정에 산신치성(山神致誠)을 봉행하였다.
9월 29일 자정에 졸공식을 하고 산신치성을 모두 마쳤는데 다음날, 전세계를 핵전쟁 일보직전의 상황으로 몰고가던 소위 「쿠바사태」가 해결되어 세계대전의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5) 월남(越南) 파병(派兵)을 위한 용왕치성(龍王致誠)
천기 95년(4298, 1965, 乙巳), 정사님이 대구 지부장이던 김대수에게 명하여 부산에 가서 이창훈과 협의하여 용왕치성을 준비하라고 지시하시므로 봉명하여 제반행사를 준비하였다.
정사님과 각 지부대표 및 부산도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동삼동 앞 바다에 자리를 잡고 제물(祭物)을 진설하였는데 제상의 동쪽에는 청룡(靑龍), 서쪽에는 백호(白虎)의 화상을 그려 세우고 중앙에는 현무경(玄武經)을 장대에 매어놓고 치성을 거행하였다.
치성이 끝나자마자 큰 파도가 몰아치니 제상에 세워 놓았던 청룡, 백호의 화상과 현무경이 바다로 휩쓸려 들어가는 것이었다. 부산에서 용왕치성이 거행된 후에 맹호, 청룡 부대가 월남에 파병되어 갔다.
6) 성답(誠畓)을 마련하다.
천기 96년(4299, 1966, 丙午) 정례회의에서 연례치성(年例致誠)의 기금조(基金條)로 논(畓)을 매입하여 매년 경작에서 수확한 벼로써 치성경비도 충당하고 본부 임원들의 식량으로도 사용하기로 결의하고, 이후 3년간에 걸쳐서 도생 매호당 3,000원 기준으로 성금을 모아 천기 98년(4301, 1968, 戊申)에 답 26두락(斗落)을 매입하였다.
7) 구암정사(鳩岩整師) 선화(仙化)
천기 99년(4302, 1969, 己酉) 10월 7일, 정사님께서 아침 진지를 잡수시고, 각 전마다 참배를 드리고 숙소에 드시어 본부 가족을 보두 불러놓고 뒷일을 당부하시고, 오전 10시에 잠자듯이 조용히 선화(仙化)하시었으니 향년 65세였다.
이환우 부회장을 장례준비위원장으로 각 지부 대표가 준비위원으로 선출되어 장례절차를 준비하여 10월 12일 각 교단 원로와 각 지부에서 많은 도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묘지는 화은당 선사 묘역에 쌍분(雙墳)으로 안장(安葬)하였다. 33세에 선사님을 만난 이후 그를 도와 1기초에서부터 6기초까지 제반공사를 받들어 교단의 초석을 다졌으니, 일심 가진 도덕군자의 표상이라. 이제 정사님마저 선화하시니 도생들의 마음은 슬프기 한량없었다.
8) 교단 부동산 소유권의 공유화(共有化)
천기 98년(4301, 1968, 戊申), 창교 이후 본교가 취득한 임야(林野), 대지(垈地), 건조물(建造物), 기타 교단자산이 등기상 김병철님 개인소유로 되어있었는데, 제 2대 회장으로 이환우님이 취임하시고, 천기 99년(4302, 1969, 己酉) 12월 25일, 각 지부 대표회의에서 논의한 바, 교단의 자산은 전신도의 혈성으로 이룩된 만큼 사유화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나, 그동안의 여건상 어쩔 수 없어 정사님 명의로 등록하여 왔으나, 교단의 장래를 생각할 때 굥유화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모으고 교단 자산을 교단명의(敎團名義)로 이전조치하였다.
9) 사선조해원치성(四先祖 解寃致誠)
천기 101년 (4304, 1971, 辛亥) 6월 24일, 화천기념치성을 봉행하고나서 이환우 회장님이 지시하시기를 각 신도 가정마다 100일동안 기도를 봉행하라고 하시므로, 모든 도생들이 100일 기도를 봉행하였다. 이어 본부에 각 지방대표들을 소집하여 사선조해원치성을 올려야 한다는 회장님의 제의를 참석한 지방대표 전원의 만장일치로 가결하여 사선조해원의 길을 열어놓았다.
10) 본부에 전기가설
천기 102년 (4305, 1972, 壬子) 4월, 각 지부도생들이 본부의 전기가설비로 25만원의 성금을 모아주니, 이로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본부경내 및 각 전각에 전기시설을 갖추고 6월 10일에 최초로 점화하였다.
11) 성신사 설치(誠信祠 設置)
교단 설립이래 수종헌성(隨從獻誠)하던 도생들의 별세가 늘어나게 되자, 도생 사후의 영혼문제를 논의한 결과 사후의 계속적 수도와 신행을 위하여 성신사(誠信祠)를 만들기로 합의하고 공사를 진행하여 천기 104년(4307, 1974, 甲寅) 9월 19일, 성신사를 완공하여 당시까지 본교를 신행하다가 별세한 160여위의 위패(位牌)를 봉안하였다.
이후로 매년 9월 19일 상제님 탄강기념일에 당해연도에 사망한 도생의 위패를 일괄 봉안하여 향사를 거행하여 오고 있으며, 천기 127년(4330, 1997, 丁丑) 현재까지도 위패는 700여위에 이르고 있다.
12) 성답(誠畓)의 공유화(共有化)
교단의 연례치성의 기금조로 천기 98년(4301, 1968, 戊申)부터 각 신도의 성금을 모아 현재까지 성답 34두락을 마련하였는데, 성답의 소유권이 종교단체의 명의로 등록할 수 없어 교단 대표자인 이환우 회장님의 명의로 등록되어 있었는데, 회장님이 선화하시고 천기 108년 (4311, 1978, 戊午) 10월, 김대수 회장님이 새로 취임하자, 이것을 중부지부 도생 김춘도, 박화진, 이영흥, 김정길 등 4인의 명의로 이전하여 증산법종교 명의로 명세증명하였다.
13) 사해용왕 기우제(四海龍王 祈雨祭)
천기 112년(4315, 1982, 壬戌) 4월경부터 윤5월까지 전국에 걸쳐 심한 가뭄 때문에 농작물이 고사지경에 도달하고 민심도 흉흉하였다. 이에 본부에서는 사해용왕 기우제를 지내기로 결정하고 전국 각 지부에 공문을 발송하여 윤 5월 5일 정오에 동서남북 사해에서 일제히 용왕치성을 올리도록 지시하였다. 동해치성은 포항에서 봉행하니 포항, 안동,의성지부가 참가하였으며, 서해치성은 강화도에서 봉행하니 서울, 여주지부가 참가하였으며, 남해치성은 부산에서 봉행하니 대구, 밀양, 창녕, 부산지구가 참가하였으며, 북해치성은 속초에서 봉행하니 태백, 봉화, 사북지부가 참가하였다. 윤 5월 5일 정오, 사해에서 일제히 치성을 봉행하고나니 오후 1시경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전국의 가뭄이 모두 해결되었다.
14) 만고종(萬古鐘) 주조(鑄造) 및 종각건립(鐘閣建立)
천기 110년(4313, 1980, 庚申) 12월 25일, 김대수 법종사님의 제의로 종각을 짓고 종을 주조하기로 각 지방대표회의에서 결의되어 각 지부에서는 고철을 수집하였고 모든 도생들의 성금을 모아 종을 주조하게 되었으니, 주조자는 김제에 사는 임삼수였다. 전체 설계는 김대수님이, 문자 휘호는 이태우, 문자 조각은 최종호가 맡았고 박호주, 김외한의 헌성으로 건립된 종각은 도생 최종호가 설계하여 완공하였다.
종원 제원은 무게가 3천 300근(3千 300斤)이며, 높이 5척4촌(5尺4寸), 넓이 3척5촌(3尺5寸)으로 만고종(萬古鐘)이라 명명(命名)하였다. 이 종명은 성부님 제세시에 「남아숙인선삼재, 하산불양만고종(男兒孰人善三才 河山不讓萬古鍾)」이라는 문명에서 유래하고 있다.
2년간에 걸쳐 전신도의 정성이 모여 만고종이 완성되니, 천기 112년 (4315, 1982, 壬戌) 4월 12일, 내외귀빈과 전국에서 올라온 도생들의 참석하에 타종식을 봉행하니, 이는 후천선경의 초종성이며, 국운융창의 신종성이며, 선남선녀의 메아리로서 하루 3번씩 타종하고 있다.
15) 해왕산군치성(海王山君致誠)
천기 112년 (4315, 1982, 壬戌) 9월 21일, 본부와 각 지방대표 24명이 모여 치성물을 갖추어 회문산(回文山) 24혈에 산군(山君)치성을 봉행하고, 이어 변산(邊山) 24혈에 가서 해왕(海王)치성을 올리고, 돌아오면서 동곡약방에서 치성을 올리고 고축하여 치성을 무사히 봉행하였다.
16) 천화루(天和樓) 화재(火災)
천기 113년(4316, 1983, 癸亥) 5월 9일 밤, 성전문루인 천화루에 화재가 발생하여 보관되어 있던 모든 문서가 소실되었는데, 바로 인접해 있던 삼청전과 화은당에 불이 옮겨 붙지 못하였으니 신기할 따름이며, 경찰의 화재원인 조사결과 전기누전으로 인해 불이났음이 밝혀졌다. 천화루가 화재로 인하여 없어지자 영대 앞이 확 터여서 동곡약방과 구성산이 바로 보이게 되었다.
17) 국태민안치성(國泰民安致誠)
천기 113년(4316, 1983, 癸亥) 10월에 국가의 발전과 국민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의 정족격(鼎足格)인 삼개도서(三個島嶼)에서 국태민안치성을 봉해하였으니 개략하면 다음과 같다.
강화도 치성은 10월 3일 서울과 여주지부 헌성으로 본부 및 각 지부 도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치성을 봉행하였다. 당시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던 태풍이 진로를 바꾸어 강화도 북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올라갔다.
울릉도 치성은 안동, 태백, 봉화, 단양, 의성, 포항지부 헌성으로 본부 및 각 지부 도생들이 참가하여 봉행하였다. 10월 11일, 울릉도에 도착하여 치성장소를 숙소인 대동여관 옥상에 정하였는데, 치성시에는 천둥 및 지동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였으나, 치성장소인 대동여관 옥상에는 빗물 한방울 떨어지지 않았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제주도 치성은 대구, 밀양, 창녕, 부산, 중부, 서산지부 헌성으로 본부 및 지부대표 33명이 10월 27일 제주도에 도착하였고, 숙소는 제주시 대동여관이었다. 10월 28일, 치성장소를 비사봉으로 정하여 그곳으로 향하여 올라가던 중, 수 많은 관광객들로 인하여 치성을 봉행할 수 없을 지경이라 내심으로 많이 염려하였는데, 치성장소에 당도할 즈음 불현듯 화창하던 천기가 돌변하여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니, 내왕하던 관광객들이 피우하기 위하여 모두 산밑으로 쫓기듯 하산하고 우리도생 일동은 이내 치성장소에 도착하여 가져온 치성물을 진설하여 조용한 가운데에서 치성을 잘 마칠 수 있었으니, 이것은 바로 천우신조라 아니할 수 없는 일이었다.
18) 지운통일치성(地運統一致誠)
천기 114년(4317, 1984, 甲子) 4월 10일, 지운통일을 위하여 본부와 전국의 지부대표 및 도생들이 참가하여 지리산 뱀사골에서 대치성을 봉행하였다. 치성을 봉행함에 갑자기 뇌성이 일어나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는데, 치성이 끝나자 일기가 다시 쾌청하여 원상으로 회복하였다.
19) 수륙대치성(水陸大致誠)
천기 118년(4321, 1988, 戊辰) 9월 30일, 본부 및 전국지방대표와 임원 55명이 참가하여 서울지부와 여주지부의 주선으로 강화도 봉천대에서 수륙대치성을 올렸다.
20) 망량치성(魍魎致誠)
천기 123년(4326, 1993, 癸酉) 6월 24일, 화천절 기념치성을 맞이하여 전국에서 300여 신도가 모인 가운데 자시에 영대치성을 봉행하고 난 뒤, 영대옆 잔디밭에서 경내의 모든 전기불을 소등한 가운데 망량치성을 올렸다. 여기에는 개고기, 막거리, 묵, 찰밥, 오색과일, 어물 등의 제수를 진설하였고, 각 지부에서 준비한 10원짜리 동전 각 얼마씩을 신위전에 올렸다. 그리고 오색으로 만든 오방기와 오색관 50개를 준비하여 치성시에 사용하였다. 교조님 재세시 천지공사에서 천지(天地)는 망량이 주장(主張)케 하시니 그 깊으신 뜻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리오.
21) 조왕치성
천기 123년(4326, 1993, 癸酉) 7월 17일, 전국의 도생 각 가정마다 부엌에 3되 3홉으로 떡시루와 과일 5가지, 술과 포를 준비하여 진설하고 조왕신에게 치성을 올렸다.
상제님이 천지공사에서 일월(日月)은 조왕이 주장케 하시니, 치성의 의의를 교령으로 전국지부에 시달한 별첨 공문 내용의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금번 실시하는 조왕치성을 도인 각 가정마다 빠짐없이 실행하여야 천지운로에 적응함으로 각 지방대표에게 다시 한번 당부하고자 합니다. 상제님이 천지공사에서 "좌선 四三八 천지는 망량이 주장, 九五一 일월은 조왕이 주장, 二七六 성신은 칠성이 주장"이라 하신 삼대치성을 오는 구월 기념절 이내에 하기로 여러 도인분들과 같이 뜻을 합하여, 망량신 치성을 지난 화천기념일에 엄숙하게 실행하였으며 조왕치성에 즈음하여 그 중요함을 말하고자 합니다. 인간이 하루 세끼를 먹지 아니하고는 살 수 없습니다. 식사를 장만하는 곳에 조와이 계시어 1일 3식을 보살펴 주신다고 생각할 때 그 은덕이 너무나 크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 은혜에 다같이 보답합시다.
상제님이 ‘지천태운으로 곤도에 녹을 붙였다.’ 하심은 바로 일월은 조왕이 주장토록 하신 원리라 지천태가 이루어지고, 곤도에 녹이란 바로 조왕이요, 조왕과 더불어 취사하는 각 가정의 가모가 한 평생 성의를 다하여 그 가족에게 식사를 제공할 때 여기에 화복을 맞는 조왕이 계심이라.
과거 우리 조상들은 자손들에게 바로 이런 교훈을 하셨습니다. 선천시대는 너무도 못살아서, 절화지경에 이르러서 불을 때지 않으면 자손들에게 가르치기를, ‘양식이 없어서 밥은 못짓더라도 솥에 물을 붓고 불을 때라. 그래야 우리집 조왕이 연기를 타고 천상에 올라가 조회에 참석하여 복을 타오신다. 불을 아니 때면 조왕이 조회에 못간다.’고 하셨습니다.
상제님께서 일월은 조왕이 주장케하사, 선천에서 무척이나 고생하던 주부해원을 위주로 곤도에 녹을 붙이고 지천태운을 정하심에 각성하여 조왕치성에 적극 참여하여야 할 줄 압니다.
주부는 일찍 일어나서 취사처를 소재하고 밥을 지읍시다. 상제님 하신 말씀이, ‘늦잠 자는 사람은 내 눈에 송장으로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문명과학에 힘입어 전기밥솥에 스위치만 켜놓고 늦잠 자는 습관을 고칩시다. 상제님이 정하신 인간개벽 시대를 맞이하여 무엇으로 면하리오. 그 심오하고 오묘한 법칙을 공부 없이 알 수 없고 안다고 할지라도 이법 위주라야 하겠습니다. 만시지탄이라 아니할 수 없어 천신만고를 무릎 쓰고 한 가지라도 알았으면 실천에 옮겨야 하겠습니다.』
22) 영대에서 천제(天際) 봉행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핵문제가 대두되고, 이로 인하여 남, 북한의 대치상태가 시간이 흐를수록 첨예한 긴장속으로 빠져들면서 전쟁설등이 유포되어 민심이 동요되고 사회기강이 문란하여지자, 김대수 법종사님이 천제를 봉행하기로 결정하시고 교령(敎令)으로 전국의 지방대표들을 소집하여 천기 124년(4327, 1994, 甲戌) 5월 21일, 본부 및 지방대표가 60여명이 모인 가운데 영대에서 천제를 봉행하였다.
천제를 봉행한 일주일 뒤에 북한을 통치하던 김일성이 갑자기 사망하고, 남북 대치정국이 핵문제에서 김일성 조문문제로 옮겨갔으며, 북한 핵문제로 조성되었던 긴장상태가 조금씩 안정되어 갔다.
23)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다
근래 보기드문 가뭄과 불볕더위가 계속되자 전국의 농토와 식수가 말라 들어가고 민심이 각박해져갔다. 천기 124년(4327, 1994, 甲戌) 6월 24일, 상제님 화천절을 맞이하여 자시에 영대치성을 올리고, 전국의 신도 2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영대옆 잔디밭에서 우사신명(雨師神明)에 기우제를 올렸다. 행사시 창공에 별들이 초롱하게 빛나더니 기우제를 마치자마자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이튿날까지 내린 비는 전국의 가뭄을 해소하고 지나갔는데, 그것은 기상관측소에서도 미처 관측되지 않았던 갑자기 발생한 태풍으로, 태풍피해는 주지않고 비만 주고 갔다고 해서 사람들은 이를 효자태풍이라고 불렀다.
천기 125년(4328, 1995, 乙亥) 1월 20일, 전국적으로 가뭄이 계속되고 저수지의 물이 말라들어가자 본부 및 전국지부에서 낮 12시에 기우제를 봉행하였다.
24) 망량치성(魍魎致誠)
천기 125년(4328, 1995, 乙亥) 6월 24일, 화천절 기념치성을 봉행하고 대령전 마당에 개고기, 막걸리, 메밀묵, 찰밥과 과일 5가지, 어물(魚物)3종류로 하여 제수를 준비하여 전국 도생 2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오후 11시부터 12시까지 경내의 전기불을 켜놓고 참가한 모든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망량신치성을 올렸다. 위목에는 이매망량귀신귀졸지위(魑魅魍魎鬼神鬼卒之位)라 하였으며 청홍황백흑 오색관 50개와 오색깃발 5개를 준비하여 치성에 사용하였다. 그리고 각 지부에서도 7월 2일 오후 11시부터 12시까지 각 지방신도들이 참석하여 정해진 절차에 따라 망량치성을 봉행하였다.
25) 성답(誠畓)의 매각
본교의 연례치성의 경비를 일부 충당하던 성답은 중부도생 4인 명의로 되어있고 증산법종교 명의로 명세증명 되어있었다. 본교 소유 성답 중에서 쌍용리에 소재한 275-1, 275-2의 성답은 특조때 증산법종교 명의로 소유권 이전을 하였다.
부동산 실명제 실시가 발표되면서 본교의 4인의 명의로 되어있던 성답을 매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천기 125년(4328, 1995, 乙亥) 12월 25일, 정기총회에서 성답을 매각하기로 결정하였다.
천기 126년(4329, 1996, 丙子) 5월 5일, 용암리 소재 성답 22.5두락과 성계리 소재 4.5두락에 대한 매매계약을 체결하여 총 81,000,000에 매각하였다. 그리고 매각대금은 은행에 예치하여 연례치성행사에 사용하기로 결의하였다.
2. 교단의 위기극복
1) 이계원 사건(李桂元 事件)
초대 영주지부(榮州支部) 대표로 있던 이계원이 어느날 선사님께 간청하여 말씀하시기를, 영주지부와 별도로 새로운 지부를 설립하여 불상을 조성하여 봉안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선사님께서는 불가함을 밝히고 수락하지 않았다. 수차에 걸쳐 계속 상신하니 마침내 선사님께서, “마음대로 하라. 그러나, 장차 불상(佛像)이 불쌍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이계원은 선사님의 말씀의 진의를 조금도 깨닫지 못하고, 봉래산 마루턱에 건물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여 모시고 「봉래원 제2본부」라고 자칭하며 자신이 제 2본부장이라고 자임하며 영주, 봉화, 삼척지방의 수백호에 이르는 도생들을 포섭하여 운영하였다.
천기 89년(4292, 1959, 乙亥), 선사님이 선화하시자, 드디어 정성태와 더불어 본교를 이탈하고야 말았다. 그뒤, 그들을 따르는 신도들이 분란하여 신도들이 없어지게 되자, 다시 불교 천태종의 말사로 등록하여 천태종 사찰로 행세하다가 얼마지나지 않아 이계원이 사망하니 봉래원은 천태종의 재산이 되었으며, 모시던 불상은 예경하는 사람도 없이 빈집에 방치되고 말았다. 선사님의 예언대로 불상만 불쌍하게 되었으니, 가석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2) 김양호 사건(金良皓 事件)
선사님이 선화하신 이후, 기강이 느슨해진 틈을 타고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본교를 이탈하여 정도를 망각하고 사도로 빠져드니, 그 대표적 인물이 김양호이다. 그는 경북 청송 사람으로서 본교 초창기부터 교단의 기초를 세우는데 공이 있어 추종하는 자가 다수 있었다. 선사님이 선화하신 이후 사회사업을 경영하다 실패하자 실의에 빠져있던 중, 천하전에서 혼자 수련하게 되었는데, 3일째 되던 날 허령이 들어 제정신을 잃고 공허한 망상에 사로잡혀 횡설수설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그릇된 사의를 품고 천기92년(4295, 1962, 壬寅), 평소 그를 따르던 박순봉, 신현국, 신도균, 이화학, 김기환, 전재택, 김응환, 김재숙, 최병희 등의 무리와 공모하여 영남, 서산, 부산, 강릉, 원주, 삼천, 예천지부의 도생 다수를 유인하여 본교를 이탈하였다. 그는 천기 95년(4298, 1965, 己巳)에 자칭 청도대향원(淸道大享院)을 설립하여 원장이 되더니 경오년(4323,1990) 겨울에 별세하였다.
3) 사상만사건(別稱宗經大師秘訣事件)
사상만은 본교를 신앙하기 전에 점성술사로 행세하였는데, 경북 봉화에서 거주하다가 안동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안동지부에 납명하여 본교를 신행하던 중, 점술사인 맹인 처녀 모씨와 동거생활을 시작하면서 신앙생활이 그릇된 길로 빠져들게 되었다.
천기 93년(4296, 1963, 癸卯), 그는 당시 안동지부장인 김석진과 모의하여 소위 세칭 「종경대사비결」이라는 것을 과장 선전하여 말하기를, “장차 종경대사가 재생하여 천지공사를 관장 하게 되니 본교도 종경대사의 거처를 준비하고 맞을 준비를 하여야 한다.”는 등의 낭설을 유포하였다.
이렇게 되자 도생들의 신앙에 혼란이 발생되고 일부 몽매한 교인들이 이에 현혹되어 나감에 따라 그가 비결을 유포하는 진의를 은밀히 조사해보니, 낭설을 퍼뜨려 계획적으로 본교의 내부분란을 획책하고 있다는 암계가 노출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모든 사실이 백일하에 밝혀지자 그는 본교를 이탈하여 유랑생활을 전전하여가다가 갑인년(4307, 1974)겨울, 안동에서 노상횡사 하게 되니 돌볼 사람하나 없는 지경이었다. 이에 안동지부장 이창섭이 손수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지내 주었다.
4) 상제님 옥체시봉 소송사건(上帝任 玉體侍奉 訴訟事件) (一名:靈臺破封事件)
천기 103년(4306, 1973, 癸丑) 3월 25일, 강경형(姜炅馨)은 갑자기 본부를 찾아와서 회장님과 상면을 요청하였다. 이환우 회장님과 상면한 자리에서 강경형은 객망리에 있는 선산을 성역화하려고하니 협조해 달라고 부탁하고 돌아갔다.
강문(姜門)의 상제님 칠촌질(七寸姪)되는 강경형<족보상명:강석환(姜石幻)>은 전북 정읍군 덕천면 신월리 412번지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서기 1920년 7월 7일 생으로서 상제님의 재종숙되는 성회의 손자로 상제님 화천후 64년이 지난 서기 1973년 양력 5월 1일자로 호적상의 양자로 입적(養子入籍)한 사람이다.
그후 7월 3일, 재차 방문하여 이환우 회장님과 상면하여 말하기를, 상제님 체백을 객망리 선산으로 이장하겠다고 하는지라, 회장님은 따님이신 강순임 선사께서 혈심정력을 다하여 성부님의 체백을 찾아 안장하여 본교에서 영원히 봉안하도록 하셨는데, 지금와서 상제님의 양자로 입양하였다고 해서 상제님의 체백을 객망리 선산으로 이장하겠다는 말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임을 분명히 밝혔다.
강경형은 9월 25일, 또다시 찾아와서 상제님의 체백을 모신 영대의 문을 잠그는 쇠통이 작아서 큰 것으로 사왔다고 하면서 그것을 주고 갔으나 사용하지는 않았다.
10월 16일, 이환우 회장님은 교무관계로 경주에 출타 중이셨고, 총무 김춘도는 공주 동학혁명비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외출중이었으며, 본부에는 남,녀 신도 너댓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날, 강경형은 이장허가를 발부받아 영구차를 전세내어 강영호 외 친척 몇사람과 인부 10여명을 대동하고, 원평지서 주임의 호위를 받으면서 오후 3시경 본부로 들이닥쳐 바로 성묘원인 영대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 데리고 온 인부들을 시켜 정씨 성모님의 봉분을 부수었다.
본부에 있던 서무 이태우는 너무나 갑자기 당하는 일이라 경황중에 지서주임을 붙잡고, 교단대표도 없는 가운데 교단 내에 들어와 무례한 짓을 하는 저들을 저지해 달라고 하니 지서주임이 말하기를, “법적으로 이장절차를 밟고 왔기 때문에 경찰로서도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강경형이 신변보호를 요청해서 와보니 형편이 정반대다.”고 하였다.
이렇게 되자, 이태우는 경주에 출타중인 이회장님에게 전보를 치러가고 회장님의 자제 상흥이와 양당이 본부 옆에 살고 있는 신도 배환규를 찾아가 울면서 위급한 사실을 통고하니, 마침 몸이 아파 집에 누워 있던 그는 그 소리를 듣고 황급히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용화동으로 달려갔다. 마침 이날이 중부지부 도생들의 곗날이라 부근의 교인 수십명이 용화동 이원용의 집에 모여 계를 하고 있었는데, 배환규가 이원용의 집에 도착하여, “강경형이가 영대를 부수고 상제님의 체백을 도굴하여 가려하니 본부로 빨리 모이라.”고 소리쳐 알리고, 다시 쌍용리로 내려가 도생들의 집을 돌며 이 사실을 통보하였다.
용화동에서 계를 하다 급보를 받고 달려온 중부지부장 손병대를 비롯한, 남,녀 교인 10여명이 영대로 올라가려하자 지서주임이 이를 제지하는지라, 교인들은 우리 본부인데 경찰이 경우도 모르면서 왜 막느냐고 하면서 제지를 뚫고 영대로 올라갔다. 강경형 일동은 미리 준비해온 큰 망치와 정을 가지고 시멘트로 만들어 놓은 봉분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 창호지와 보자기로 체백을 싸서 나오려 했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관이 깨끗하게 옻칠한 것이라, 관채로 출구하려다가보니 부수어 놓은 구멍이 작아서 시간이 지체되고 있는 중이었다.
이때에 영대로 올라간 여신도 양당, 광당, 창당, 화정, 백옥순, 유인순 등이 깨어진 시멘트 조각을 들고 봉분을 두드려 울리면서 “안에서 나오지 않으면 다 죽을 터이니 나오라.”고 결사적으로 소리치니, 안에 있던 인부들은 당황하여, “우리는 아무 죄가 없소. 다만 품팔이로 온 사람이니 살려주시오.”라고 하면서 밖으로 기어나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지서주임은 자기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며 김제 경찰서로 상황보고를 하였고, 보고를 받고 정보과 경찰 6명이 긴급출동하여 본부로 왔다. 이때 쌍용리 및 금산리 일대 그리고 전주, 김제 등지에서 급보를 받고 80여명의 신도가 본부로 몰려와 분위기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며 험악해져 갔다.
현지에 출동한 경찰들이 신도들의 영대 출입을 제지하자, 박화진이 큰소리로, “우리 교인들의 영대 출입을 누가 제지하느냐?”고 항의하였고, 분노한 신도들은 제지선을 뚫고 영대로 올라갔다. 격앙된 100여명의 신도가 운집한 가운데 박화진은 경찰의 입회하에 강경형과 담판을 지어 본교의 대표로 있는 회장님과 김춘도가 돌아오면 체백의 이장문제를 해결하기로 합의하였고 밤11시경이 되어서 강경형 일행은 돌아갔다.
급보를 받고 밤차로 본부로 올라온 이환우 회장님은 이튿날 다시 온 강경형과 마주앉아 지금까지 취한 부당한 행위를 따졌고, 강경형은 양자의 도리를 하기 위해 체백을 모셔가야겠다고 맞섰다. 이에 회장님은, “성골 이장문제는 지부장회의를 통해 전체 교인의 뜻을 모아 답변해야 할 문제이고, 또한 본교에 본부를 두고 있고 본인이 회장으로 있는 증단교단통일회 임원들과도 상의해 볼 문제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답변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본부에서 각 지부에 긴급공문을 발송하여 10월 20일 전국에서 20여명의 지부장과 중부지부 신도 50여명이 모여 긴급 대책회의를 열었다. 회의결과, 이환우 회장님과 김대수 부회장님이 강경형을 만나 이번 사건을 원만히 해결하기 위해 강경형에게 선산 위답 10마지기를 사줄 것을 제의하기로 하였는데, 강경형이 이를 거부하므로 전주 검찰청에 강경형을 상대로 ‘무단주거침입, 기물파손, 성골현지봉안’의 건으로 고소를 제기하였다.
한편, 각 지부장은 신도들에게 재판에 승소하기 위한 기도와 이번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제반경비 등의 적극적 지원을 아끼지 않기로 결의하고, 소송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이환우 회장님은 위원장으로 모든 일을 통괄하며, 제반 경비지원 등 자금담당에는 김대수 부회장이 책임지고, 법정출입 등 송무관계는 총무 김춘도가 담당하고, 모든 구비서류는 이태우가 맡기로 하였다.
증산교단통일회 회장을 맡고 있던 이환우 회장님은 증산교단통일회 종무원 종무위원들에게 긴급공문을 발송하여 강경형의 성골이장 감행기도로 인한 성묘원 파손 사실을 알리고 긴급회의를 소지하였다. 10월 24일, 증산교단통일회 임시긴급종무원회의가 소집되어 각 교단의 대표가 회의에 참석하였는데, 이날 홍범초는, ‘성골은 교단에서 모셔야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한편, 강경형은 양력 11월 29일 전주 지방법원 제3민사부에 법종교 대표 이환우, 총무 김춘도를 상대로, ‘양부의 유골을 인도하라.’는 소송을 제기하고, 양력 12월 8일, ‘유골 이전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어, ‘김제군 금산면 금산리 104번지 증산묘원 안에 납골된 강일순, 정치순 유골은 누구를 막론하고 손상, 은닉, 기타 방법으로 이전하거나 타에 양여할 때는 형벌을 받음’이라는 고시문을 영대에 붙였다. 이에 본부에서는 12월 14일 동도법종교본부 명의로 강경형을 상대로 ‘목조와즙 2층건물, 영대 1동, 상층 5평 4홉 하층 16평 2홉에 대한 출입금지가처분 신청’을 내어 ‘강경형 및 제3자는 출입하거나 손괴해서는 안된다.’라는 고시문을 영대에 붙이게 되었다.
강경형이 이환우와 김춘도를 상대로 ‘유골인도소송’을 제기한바, 천기 104년(4307, 1974, 甲寅) 양력 3월 22일, 전주지방법원 제3민사부 합의부 재판장 이두형 판사는 판결에서 원고 강경형의 청구를 기각하고 소송비용은 원고의 부담으로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 판결요지는 다음과 같다.
「증산교의 대분파로서 위망 강일순의 묘소를 이장 관리해온 법종교의 신도들이 위망 강일순과 동 정치순의 영대 및 분묘를 관리 수호하고 있어 위 영대와 분묘는 적어도 위 법종교도들의 신앙의 대상이며 정신적인 상징으로서 성역화된 사실을 인정할 수 있고, 달리 이를 좌우할 증거가 없다. 따라서 위에서 인정한 사실을 종합하면, 위망 강일순 및 동 정치순의 분묘는 법종교의 소유 관리하에 있음이 명백하고, 법종교의 사실상 대표자라는 피고 이환우나 그 신도의 하나인 김춘도가 이를 점유, 관리하고 있다 할 수 없으니, 피고 등이 이를 점유, 관리하고 있음을 전제로 하는 원고의 이 건 청구는 나머지 점에 대하여 더 판단할 필요없이 그 이유없다 할 것이다.」라고 명시하였다.
본교에서는 전주지방법원 제4민사부에 ‘강경형은 전북 김제군 금산면 금산리 104의 지상부속건물 제1호 목조와즙 2계건 영대, 묘등 건평 상층 5평4홉, 하층 16평2홉안에 있는 망 강일순의 유골을 이장하여서는 아니된다.’는 ‘유골이전금지 청구소송’을 제기하여 천기 104년(4307, 1974, 甲寅)양력 9월 5일 합의부 재판장 김용은 판사는 본교 승소판결을 언도하였으니, 그 판결요지는 다음과 같다.
「망 강일순 및 정치순의 분묘는 동 강일순의 유언과 동인의 무남독녀이던 망 강순임의 의사 및 그 신도들의 총의에 의하여 위 동도교법종교를 비롯한 증산교 신도들의 성역으로서 영구히 귀속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고, 피고가 위 망 강일순이 사망한지 60여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서 그 호주 상속인으로 되었다손 치더라도 무릇 유골에 대한 호주 상속인의 소유권은 그 성질상 다른 물건에 대한 소유권과는 달라 오로지 유골의 매장관리 및 제사공양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범위내에서 인정되는 것으로서 그 권리의 신앙성, 공공성이 현저하다 할 것이므로 피고가 본 건물에 대한 증산교 신도들의 참배를 배제하여 이를 딴 곳에 이장하려 하는 것은 신의칙에 비추어 허용될 수 없다 할 것이다.」라고 판정하였다.
강경형은 이 판결에 불복하고 광주고등법원 제2민사부에 항소하였으나, 천기 105년(4308, 1975, 乙卯)양력 4월 11일, 합의부 재판장 박영서 판사는 항소인의 항소를 제 1심 판결과 같은 이유로 본교의 승소판결을 내렸다.
강경형은 이 판결에도 불복하고 대법원에 상고(上告)하였으나, 천기105년(4308, 1975, 乙卯) 양력 6월 24일, 합의부 재판장 대법원 판사 홍순엽은 강경형의 상고를 기각하고 본교에 승소를 언도하였다.
천기 105년(4308, 1975, 乙卯) 4월 15일, 화천기념일을 맞이하여 부서진 영대를 보수하고 안호상 박사 등 내외귀빈을 초청한 가운데 전국의 신도가 모여 영대환봉치성(靈臺還封致誠)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이렇게하여 3년간의 시간을 경과하여 진행된 옥체시봉소송사건이 본교의 승소로 끝맺게 되니, 그동안 앞에서 사건을 맡았던 이환우 회장님과 임원들, 그리고 후방에서 물심양면으로 적극적으로 지원해 준 중앙지부를 비롯한 각처의 전국 신도들의 정성과 본교를 위해 협조하여 준 많은 형제교단의 성원이 있었고 이 사건을 극복하면서 도생들의 단합과 신행심이 더욱 깊어졌으니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