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산방
한현숙
문학회 모임에서 봉산산방에 갔다. 봉산산방은 미당 서정주 시인 사후 10년 만에 원형 복원한 집이다. 곰이 마늘과 쑥을 먹고 웅녀가 됐다는 단군신화에서 따온 말로 한국적인 미학과 사상을 탐구하고자 했던 마음이 엿보이는 집이다. 시인이 직접 설계해 지은 집이라 한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시인이 직접 심고 가꾼 나무들과 소나무, 감나무 등이 마당을 지키며 일행을 반긴다. 일 층 전시장에는 시인이 직접 설계한 집의 설계도와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들이 전시돼 있다. 2층에는 시인이 시를 쓰고 고뇌한 창작의 산실이 옛 모습 그대로 복원돼 있다. 이곳에서 ‘질마재신화’, ‘떠돌이의 시’, ‘팔 할이 바람’, ‘산시’등 주옥같은 시집들을 출간했다. 미당의 육성과 모습이 담긴 영상물과 사진도 볼 수 있다. 야외 마당은 문학단체의 소규모 행사, 문학동아리의 학습 공간, 주민들의 문화쉼터로 이용되고 있다.
창작산실을 돌아보며 한 쪽에서는 시인의 시를 읽으며 탄복하고 한쪽에서는 친일, 독재찬양, 교언영색 등 시인의 행적에 대한 논란으로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한국적인 미학과 사상을 탐구하셨던 분이시지만 그의 고백처럼 어떤 이는 그의 눈에서 죄인을 읽고, 어떤 이는 그의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간다.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았기에 언제나 몇 방울의 피가 섞여있는 시를 지으며 살아야 했던 시인의 삶. 별이었던 때에도 그늘이었던 때에도 병든 수캐마냥 헐떡이며 삶과 시가 분리된 삶을 살았기에 후손들에게 감당하기 힘든 카르마를 남긴 것은 아닐까. 기대와 설렘으로 찾은 봉산산방엔 오래된 묵향이 눅눅하게 묻어나고 방문객은 이어지는데 집이 주는 아늑함과 생기는 찾을 수 없어 적막감만이 감돌았다.
미당은 아내사랑이 각별했다 한다. 이곳에서 삼십년 넘게 살다 아내가 사망하자 충격을 받고 쓰러진다. 곡기를 거부한 채 투병하다 혼수상태에 빠져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두고 영원히 잠든다. 시인의 명성엔 오욕의 발자취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서정주란 거목을 지탱해준 아내란 버팀목이 사라진 세상에서 팔 할의 바람을 홀로 맞는 것이 죽음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나보다.
시인은 세상을 떠났고 그의 뛰어난 작품과 권력에 굴복했던 역사는 고스란히 남아있다. 우리말을 가장 능수능란하고 아름답게 구사해 우리글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보여 주신 시인이요. 70년에 이르는 긴 창작 동안 천여 편의 시를 발표해 대표작이 가장 많은 시인. 시집을 낼 때마다 늘 새로운 관점, 대상, 기법을 선보이며 생의 마지막까지 시를 쓰다 가신 시를 위해 태어난 분. 예술가의 작품과 인생을 별개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인지 끊임없는 논란의 중심에서 자유롭지 못한 분.
미당에는 '아직 덜된 사람'이라는 겸손한 마음과 '영원히 소년이려는 마음' 이 모두 담겨 있어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삶을 살았으나 역사의 소용돌이 앞에선 미성숙했고 일신의 안위를 위해서는 영원한 소년처럼 삶을 살았으며 역사라는 흐르는 강 앞에 서서 권력이라는 징검다리를 디딤돌 삼아 탄탄대로의 삶을 누렸으니 격변의 역사 속에 좌지우지하던 비겁한 지식인의 자화상은 아닐까.
봉산산방을 나와 찹찹한 마음으로 까치산 등산로 향했다. 못난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처럼 굽은 소나무가 야트막한 산길을 굳건히 버티고 서있었다. 산길을 걸으며 윤동주의 ‘자화상’을 떠오려 본다. 일본 제국주의의 횡포는 날로 심해지고 우리민족이 겪고 있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던 시대. 아름답고 평화로운 세계를 이야기 하고 싶지만 동시에 시대를 대변해야하는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시인의 마음을 엿본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학창시절 미당의 시를 읊조리며 시인이 되는 꿈을 꾸기도 했다. 살포시 눈을 감고 그의 시를 낭송하며 울고 웃으며 상상의 나래를 펴기도 했다. 문학과는 먼 삶을 살면서도 마음 한편에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설렘을 간직하고 살았다. 미당에게도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외딴 우물이 있었다면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나에게도 외딴 우물이 필요한 까닭이 아닐까.
2017. 07. 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