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내린 눈이 채 다 녹지 않았지만,
서울 성북동 길상사 대웅전 앞마당은 수백 명의 신도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일요일인 2월 12일 오전, 곧 참선 수행인 동안거(冬安居)를 끝낸 법정(法頂) 스님이
이곳에서 대중들에게 법문을 전하게 된다.
산 속에서 쓴 ‘무소유’ ‘산방한담’ ‘텅 빈 충만’과 같은 산문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종교의 벽을 뛰어넘어 수많은 독자들에게 사색과 수도를 통한 인생의 참뜻을
전해 온 바로 그 사람이다.
“새해 복 받은 업으로 날마다
복된 말을 맞으십시오.” 스님이 말문을 열었다.
의 음성은 편안하면서도 강렬했다. “제가 겨울 동안 겪었던 일을 말씀드리지요.
(-중략..- 아래에도 많은 줄였음을 이해요)
사람들이
메말라가고, 새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물이란 것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 쓰듯 한다’는 말은 얼마나 무엄한 표현인가요?”
스님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보드랍고 맑고 투명한 물도 한 번 얼어붙으니 도끼로도 잘 안 깨질 지경이었습니다.
우리 마음도, 이렇게 한 번 얼어붙게 되면, 모진 마음을 먹게 되면,
바늘 하나 꽂을 틈도 없이 메마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여수(心如水), 마음이란 물과 같습니다. 물은 흘러야 하고,
흐르는 것이 물의 생태입니다. 흐름으로써 자연도 살고 만물도 살지요.”
흐르지 않는 물은 생명력으로부터 소외된다. 스님은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마음이 갇혀 있으면, 흐르지 않고 얼어붙는다면, 온전한 마음이 아니라 병든 마음이라는 것이다.
“마음을 닦는다는 표현은 관념적입니다.
마음이란 닦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입니다. 용심(用心)이지요.
내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꽃이 필 수도 있고 어두워질 수도 있습니다.
내가 가시돋힌 말을 친구에게 한다면, 그 말이 친구에게 닿기도 전에 내 자신이 괴롭게 됩니다.
온전한 마음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맑은 마음으로 말하면, 그림자가 실체를 따르듯 즐거움이
그에 따르게 됩니다.”
가족이란 몇 세에 걸친 인연의
씨앗을 뿌렸기 때문에 가족으로 만난 것이라고 스님은 말했다.
배우자를 싫어하면 내 자신의 삶을 먹칠하는 것.
“내 아내, 내 남편이 부처요 보살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을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마음이 부처의 마음이 되고 보살의 마음이 되며 업(業)이 남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업을 남긴다면 이 다음 세상 또 어디선가 만나 지지고 볶게 됩니다.
” 스님은 “오늘을 계기로 마음을 다 풀어버리라”고 말했다.
“마음이 물처럼 너그럽고 따뜻하게 흘러야 인생에서 화창하고 향기로운 봄을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싸락눈이 내리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책 읽고 사색하는 것을 좋아했던, 등대지기가 되고 싶어했던 스물두 살 청년 법정은
홀연히 집을 나섰다. 전쟁의 포화를 겪은 뒤 그는 세속적인 욕망의 끈을 놓아버리려 했다.
그때가 1954년. 고통스러운 방랑의 길을 떠난 지 이윽고 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경남 통영 미래사에서 그는 효봉(曉峰) 스님으로부터 예비승려가 되는 사미계를 받았다.
스님은 계를 받은 1956년 7월을 출가한 때로 꼽는다.
“잠깐 같은데 50년이 훌쩍
지났어요. 특히 출가 초기에 괴팍을 많이 떨었던 게 반성이 되는군요.”
젊은 법정은 혈기왕성한 승려였다. 사람들이
그랬다. 마치 억새풀처럼,
늘 서슬 퍼런 기세였다고. 가까이 하면 베일 것 같다고.
“풋중일 때는 아직 출가의 긴장감이 살아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한 사진기자는 그를 만나러 산으로 올라왔다가 눈빛이 너무 무섭다며 그냥 내려가기도 했다.
‘설사 부처가 가는 길이라도 누가 한 번 간 길이라면 나는 그 길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
선(禪)불교의 가르침이기도 했고, 법정 역시 그렇게 살았다.
그는
학승(學僧)이었다. 함석헌 선생과 함께 ‘씨알의 소리’ 발행에 참여했고,
한글 대장경 번역 작업도 맡았다. 불교신문사 주필로 있던 1960년대, 신문에
‘월남전 파병을 반대한다’는 글을 실었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이 쓰던 ‘무운장구’라는 말을 다시 끄집어내면서
우리 젊은이들의 목숨을 내놓아서야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당시 총무원장이 ‘승적을 박탈하겠다’며 펄쩍 뛰었다.
“그 때부터 제도권 불교와는 그만 인연을 끊은 셈이지요. 가타부타
언급하지 않았어요.
더구나 이젠... 나서지 않을 겁니다. 후배들도 많고.”
그 후에도 시국을 비판하며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고 있던 어느 날,
법정은 정권에 대한 증오심이 스스로의 마음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증오심이란, 독을 품은 것이지요. 내 수행이나 인간 형성에도 도움이 안 되겠다 판단했습니다.”
1975년 10월, 촉망받는 중진 스님이었던 법정은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서
전남 순천 조계산 자락 불일암으로 옮겼다. 다시 모든 것을 버리고 산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한 칸 암자에서 혼자서 밭을 매고 밥 지으며 17년을 살았다. 그
의 주옥같은 산문집들이 이때부터 한 권씩 나오기 시작했다.
명예를 내버린 그가 되찾게 된 것은 사색의 자유와 자연과의 교감이었다.
“자연처럼 위대한 교사는 없습니다. 사람은 자연에 귀의하고 흙과 가까워야 합니다.”
‘더 나눌 것이 없다고 생각될 때 나누어라’
‘자주 버리고 떠나는 연습을 하라.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자기답게 사는 것이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에 있다.’
...
그의 수행과 사색에서 나온 철학적 언어들은 수많은 독자들의 가슴에 화인(火印)처럼 남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산 속
암자에도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
는 아예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1992년이었다.
강원도 어느 산골에서 화전민이 버리고 간 오두막을 찾아냈다.
이곳이 어딘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가까운 지인들도 아직 그의 거처를 모를 정도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저녁 10시에
자는 일과를 매일 지키는 그는 조반 전에 녹차를 마시며
참선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과라고 밝힌 적이 있다.
그때야말로 가장 맑고 향기로운 자연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오전에 글을 쓰고, 오후에는 장작을 패거나 눈을 치운다.
불교계에서 영향력이 강한 ‘큰 스님’이라는 말에 그는 늘 손사래를 치곤 했다.
“큰 스님? 그럼 작은 스님도 있는가? 대추기경이 있고 소추기경이 있고 그런 건가?”
하지만 그는 다시 붓을 들었다. 왜
그랬을까. 불일암 시절
그를 찾아온 한 프랑스 철학자가 이런 질문을 했다.
“이렇게 외진 곳에서 혼자 살고 계신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땐
“나도 모른다. 내 식대로 살 뿐이다”고 대답했지만 그 질문이 그 후에도 늘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가 사는 방식을 남에게 강요할 게 아니라, 이렇게 자연에서 배우고 얻어들은 것들을
사람들과
나눠야 되겠구나.’ “그런데... 그러고 나서 예전에 쓴 글들을 보니까 참 치기만만합디다.”
스님은 또 그랬다. 바다에서 오래 살면 바다를 닮고, 산에서 오래 살면 산을 닮는다고.
이 책에서 스님은 ‘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산을 건성으로 바라보고 있으면 산은 그저 산일 뿐이다.
그러나
마음으로 활짝 열고 산을 진정으로 바라보면, 우리 자신도 문득 산이 된다.
내가 정신없이 분주하게 살 때에는 저만치서 산이 나를
보고 있지만
내 마음이 그윽하고 한가할 때는 내가 산을 바라본다.”
50년 동안의 수행 끝에 스님이 이른 곳은 과연
어디일까.
“허허... ‘현재의 나’일 뿐입니다. 과거를 회상하거나 불확실한
미래에 얽매이지 않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최대한의 삶을 살아갈 뿐이지요. 연륜 값을 하고 있는 건지,
수행자답게 살고 있는 것인지 의문을 품고, 함부로 말과 행동을 하지 않을 뿐이지요.”
오랜 칩거 생활에서, 법정 스님은 ‘고독’할 수는 있어도 ‘고립’돼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고독해야 마음이 투명하게 맑아질 수 있지만 고립은 단절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한 생애에서 남는 것은 재산도 명예도 아닙니다.
얼마나 주변 이웃에게 덕(德)을 베풀었는지가 중요해요.
바로 덕이야말로 사람의 근원적인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많은 사람들은 덕을 쌓을 줄을 모릅니다.
잘 살고 편리해도 덕이 없으니 외롭고 마음이 황폐해지는 것이죠.
무슨 일을 하든 이웃에 덕이 되는 따뜻한 가슴과 포용력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