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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이루는 그들의 방법론
그녀와 그가 욕망을 이루는 방식은 피해자의 꿈의 조작이다.
꿈의 해석이 정신분석학에서 프로이트가 신경증 환자를 분석하고 억압된 무의식을 찾아내 치료를 위한 방법론이었다면, 그 꿈을 꾸는 ‘지정된 환자’의 꿈을 공개함으로써 공개되지 않았으면 드러나지 않을 사람을 신경증환자라고 인정받게 할 수도 있다. 그에게 익명의 X의 꿈을 들여다보는 일은 익명의 X가 치유를 받고 회복을 통해 건강한 자아를 찾도록 도움을 주는 일은 아니었다.
익명의 X가 익명이 아닌 이름이 공개가 되는 시점과 더불어 익명의 X에게 얼마나 많은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가를 입증하기 위한 방법론이었다. 그 권력의 도구로서의 감시장치에 충분히 많은 정신분석학적 이론이 적용되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꿈을 만드는 기계, 그 꿈을 전송하는 기술적 장치들이 있다. 그 능력은 자신에게 전능할 수 있는 자격을 준 일군의 무리들이 허용한 일이고, 법이라는 억압장치의 규제를 피해서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돕는 힘이다.
그 꿈은 장기간에 걸쳐, 어떤 종류의 공포스런 체험이거나 수치를 느낄 경험과 결부되어 피해자의 무의식을 지배하게 된다. 꿈의 어둠과 공포가 많이 누적될수록 그 남아있는 영향과 안좋은 기억은 깨어있는 동안의 의식을 훨씬 더 많이 지배하게 될 것이다. 어떤 주입된 꿈이 섹스와 관계된 징후들로 읽힐 수 있는 여지가 많을수록, 피해자의 무의식을 지배하거나 억압하는 내용들은 그녀의 성적경험과 결부시키기 용이하거나, 성적인 욕망이 강한 자아로 읽혀질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익명x의 완성형으로 소망해서 만들어가는 그의 욕망의 산물이다. 영화감독의 욕망이나 유쾌하거나 공포스런 무의식이 영화스크린에 연속사진으로 표출되듯이, 그가 만든 소망형에는 그의 무의식이 곳곳에 드러난다. 그래서 익명 x였던 피해자의 꿈에 드러난 그녀의 배우자는 그가 바라는 대로의 사악한 사탄이거나 뱀인 존재로 묘사가 되고, 그녀가 보내질 곳은 최초의 납치사고가 일어났던 어떤 장소로 꿈에 드러난다. 조각가로서의 그는 피그말리온을 조각하되 아름다운 배우자로 소망하는 어떤 절대미적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이 처치해야 할 가장 괴물스럽거나 사악하거나 사랑받지 못할 여성으로 조각된다. 그는 다시 로뎅으로 투사되어 카미유 클로델의 에로스만을 충동시키면서, 동시에 가장 비참하게 버려지는 정신병원과의 결합을 구상한다.
그와 그녀가 욕망을 이루는 방법론으로서의 거울 단계
라깡의 정신분석학에서 거울단계는 생후 6-18개월의 시기를 이르는데, 이 시기의 아이는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반기며, 이 비춰진 모습과 자신과 완전히 동화하게 된다. 또 아이는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이상적인 자아이면서, 총체적이고 완전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상상계라고도 불리는 이 시기는 사회적인 관계속에서 타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을 배우기 이전의 시기이기 때문에 자신이 인식한 것을 완전하다라고 생각하지만, 성장함에 따라 외부세계, 언어의 세계와 질서의 세계를 마주하면서 변화와 굴절을 겪게 된다.
그녀와 그는 일종의 성장저항적인 피해자의 성격을 부각시키고 싶어하는 의지가 있고, 신경증 환자에서 나타나는 현상처럼, 거울단계에의 집착적 현상을 피해자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싶었다.
익명 X라는 피해자는 될 수 있는 한, 자기세계에 갇혀 있는 환상의 세계의 거주자이어야 하고,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지각이 없거나 상상계적 오인(meconaissance)의 구조를 가져야 하며, 적당하거나 과도한 정도의 정상치를 벗어나는 광기의 소유자여야 한다.
실제로 사건에 사용되는 이 환청이라는 것의 성격이 기존의 정신의학계에서 뇌신경의 이상으로 들리는 정상적이지 않은 소리를 이르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 환청을 듣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환청이 기술적인 조작이라는 전제에 대해서 침묵하기만 한다면) 정신적 이상상태를 언급하기에 충분 했을 것이다. 원래 큰 종류의 사건의 기도에는 그 사건의 큰 크기만큼이나 범죄에 사용되는 기법도 가공할 정도이거나 일반적인 상식과 상상의 수준을 넘어서게 마련이다.
그녀와 그가 입력한 내용은 환청소리가 진실일 수도 있거나, 거짓일 수도 있거나의 문제와 관계없다. 피해자가 환청소리를 따르는가 실재의 자신이 파악한 내용을 판단근거로 사용하는 가의 관찰을 통해, 그 반대의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익명X의 현실인식에 이상징후가 있다는 사실의 개연성과 필연성을 증명하는 것만이 그들에게는 긴급한 사안일 따름이다.
그리하여, 익명 X라는 여성이 성장기에 경험한 사실과 다른 이야기들이 진실값 이라고 주장하는 환청을 사용한다. 혹은 어떤 종류의 사회적 신분과 지위나 가문의 혈통이 다른 사람의 경우를 등장하게 하고 한 사람을 선택하라는 시나리오를 쓰기도 한다. 어떤 선택을 하던지, 그들이 준비한 다음 대답은 “네 주제에 그런 사람을 원한다니…”의 주장으로 시작하는 일종의 폄하의 수준을 넘어서는 멸시의 언어들이다. 그 주장을 통해, 그들은 자신의 환상으로 어떤 과분한 배우자를 선택하려고 하고 주장하는 현실파악이 안되고 자기 현실과 사회적인 현실, 그것이 바라보는 타인들의 눈에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대한 고찰이 전혀 없는 전형적인 거울단계 자아로 낙인을 찍어버린다. 그 환청이 그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유도장치라는 것을 숨기기만 한다면 그들의 의도대로 관찰하는 정신분석학자들은 그 상태로 분석을 해 줄 것이었다.
혹은 다른 종류의 사실관계가 발생을 한다. 이렇게 진행되던 그들의 시나리오의 제동이 걸리기 시작하는 것은 그 환청이 사실 익명X의 비밀과 관계된 진실이었다는 강력한 주장이 나옴에 따라 그들은 더 강한 시나리오가 필요했고, 설득을 시키기 위한 장치들이 필요했다.
여전히 그들은 그녀가 주장하는 새로운 현실, 즉 익명X를 둘러싼 비밀스런 출생의 배경과 사건들의 진실성이 거짓임을 입증하기 위한 작업들은 진행이 되는 것이면서, 더 강한 종류의 덫의 장치가 필요하게 된다. 그녀의 전생은 히틀러였다는 덫의 장치이다.
수용소의 역사라는 인류역사가 기록하는 근간의 최고의 광기의 역사를 차용한다. 그의 더 강한 환청과 공격과 멸시는 더 강렬한 반박과 다툼과 고성을 불러일으키고 현실화되게 하기 위한 장치들이다. 그렇게 외부로 드러나 관찰될 수 있는 현상으로서 고성의 광기는 그의 설정에서는 곧바로 수용소의 광기와, 그 광기의 시나리오를 구동했던 한 역사적 인물로 연결되는 정신분석학적 기초를 튼튼하게 닦아 줄 수가 있게 된다. 그리하여, 어느 한 광인의 광기의 역사였던 참혹한 역사의 중죄를 묻는 심판장으로 변하게 되는 고문의 현장은, 그 고문의 정도나 그것이 정신적으로 미치는 다양한 부작용임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의 용인과 인정을 받는 과정속에 자리하게 된다. 이미 광인이었던 자에 대해서, 이미 유죄인 어떤 사람에 대해서, 이미 유죄였으나 처벌을 명확하게 받지 않았던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약한 의심 속에서 일지라도, 만약 그것이 사실일 경우, 이 정도의 고문과 이 정도의 박해라는 것은 삶을 송두리째 빼앗거나, 교수형에 처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너그러운 처벌일 수 있어지는 것이라서, 그 쇼를 보는 관걕은 고문당하는 피해자의 일신과 안위에 대한 우려보다는 오히려 처벌이 더 강해야 한다거나, 모든 것을 박탈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가해자의 의견에 동의를 할 수 있게 되고, 그 가해자의 여러가지 선처에 대해서 오히려 경외심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단, 이 가해자, 그녀와 그의 주장이 전혀 근거 없거나 음모의 일부였다는 사실이 명백해지기 전까지는 그러하다
그들이 거울단계의 피해자 주체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
아이들의 성장과정에서 영유아기의 외부세계와 아이의 관계를 좀 떠올려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이 시기의 아이가 자기를 인식하는 과정, 자아를 자아로서 인식하는 과정에 거울을 보고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는 것에서 최초의 자기자신, 혹은 자기신체와 자아의 인식이 이루어진다 라고 한다면, 아이가 기뻐하고 환호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본인이 인식한 자신의 거울속 이미지이다.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싼 세계 역시 아이에게 어떤 종류의 관계의 의무나 외부대상세계에서의 지위나 역할, 의무에 대해 요구하지 않고 대부분은 아직 순수하게 열려 있는 상태이다. 아이는 말하고 걸을 수 있고, 자신의 생명유지에 필요한 것들을 외부로부터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데에 익숙하다. 18개월까지 남아있는 거울속의 이미지 인식상태는 점차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이 인식한 이미지와 타인에 의해 인식되는 이미지와의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교정이 되어가며 리비도를 형성해간다.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현실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할 수 밖게 없고 이 과정은 완성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상태가 된다.
‘거울을 본다’라는 행위가 어른이 되어서 여전히 매일 습관적으로 하는 행위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거울단계라는 어떤 정신분석학적 개념을 조금 넘어서서 이 거울단계가 단지 거울을 보는 행위라는 단계로의 문자 그대로, 혹은 기표 그대로의 의미가 통용되는 상황이라는 것을 가정해보자.
그럴 경우, 어떤 상황적 판단에서는 일상을 시작하고 외부세계로 자신을 향하게 하기 직전의 매일 외부세계와 관계를 맺을 준비를 하는 단계로서의 거울보는 행위를 생각해볼 수 있다. 매일의 수면은 죽음으로의 한시적 탈출이고, 매일 매일의 기상은 다시 아이로 태어나는 매일의 일과적 하나이다. 그리고, 아이상태에서 외부세계와 변증법적 상호관계 수정을 위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잠깐의 나르시시즘적일 수 있는 행위나 잠깐의 자기확인에 대한 절차나 과정으로서의 거울단계라
는 것을 가정해보기로 하자.
피해자 익명X는 거울을 본다.
가해자중의 어떤 이가 도모했다던 외모를 전파기술적 힘으로 바꿔서 자신이 보는 이미지는 대칭상태가 원만하고 그 조건하의 가장 이상적인 상태의 외모로 보이게 하지만, 그것이 상이 역으로 맺어졌을 때 외부대상세계에 속한 타자들은 정반대로 균형이 맞지 않고, 어딘가 왜곡이 되거나 일그러져 보일 수도 있는 상태의 느낌을 가지는 얼굴이 되었다라고 하는 현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로 하고 피해자 주체의 현실이나 자기인식과 대상세계와의 관계문제를 생각해본다.
이럴 경우 외부대상세계에서 바라보는 피해자 주체에 대한 인식은 얼굴이 잘생기지 않고, 기형적인 어떤 단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것이고, 별 호감을 크게 가지기 어려운 인상일 수 있다.
그런데 반대로 주체가 인식하는 자기인식상태는 웃는 모습이 밝고 예쁘며 균형잡혀있는 외모로, 몇가지 외모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커버가 되는 부분이 있는 그럭저럭 자기애를 가지기에는 부족하지 않은 외모일 수 있다. 이 외모의 논쟁이 대상세계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중요한 열쇠로 작용하는 경우, 일어난 사건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외부세계의 판단과 자기판단에서 자아는 폭탄이 떨어지듯 매번 상시적으로 떨어지는 외부세계의 평가에 대해서 판단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 판단에 맞게 자기인식상태를 교정을 하며 변증법적 상호교류를 해야한다. 불행하게도 자아인식이 거기까지 이르는데에는 여러가지 상황이 벌어진 이유와 그 차이가 발생한 원인에 대해 알기 전에는 인정하기 어렵거나 이해가 가능하지 않아서 교정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될 수 있다. 이 상태는 다른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피해자 본인의 원래의 성장단계가 거울단계 고착화된 정신적 상태여서일 수도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거울단계 고착화를 도모하기 위한 외부조작에 의해 강화되고 표류하는 상태의 단계일 수 있다. 20년의 세월동안 이 인식이 어떤 교정이 불가능한 상태였다라고 한다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가령, 그 주위의 어떤 방문객이거나 잘 알지는 못해서 흉금을 털어놓는 사이가 아닌 아는 관계의 사람들이 가끔씩 인사치례라거나 혹은 거짓임이 명백하지만 전하는 말을 하달받은 경우일 때 그들은 그 피해자 주체의 인식을 흐려놓는 일을 한다 “참 예쁜 얼굴이네”라는 발언은 주체의 거울속 자기인식과 맞물려서 최소한 그럭저럭 보기에 나쁘지 않은 얼굴이라는 외부세계와 자신과의 타협과정을 거친 판단결과를 가지게 된다.
환청이라는 방법을 동원하는 경우의 외부세계와의 관계도 이렇게 불안정하고 깨어지며 참혹해질 준비가 되어 있는 경우가 된다. 외부인들은 모두 사악한 여성이라거나, 문란한 여성이라거나 기타 여러가지 안좋은 인식을 형성할 소문들을 방송매체로부터 전해 들어서 그 인식이 고정화되어 있는 경우였었더라면, 본인이 환청을 통해서 듣는 어떤 종류의 방송전달메시지는 간혹 그 내용들이 섞여 있다고 하더라도, 자아가 파괴가 올 정도가 아닌 칭찬이나 업적에 대한 인정의 언어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럴 경우, 외부세계에서 벌어지는 일, 외부세계의 현실과 자기내부세계나 그 내부세계로 전달하는 메시지에 기인한 주체의 자기인식에는 필연적으로 큰 거리가 형성이 되게 된다.
외부에서 기본적으로 공유하는 내용을 현실이라고 알고 있는 정신분석자는 그 내용이 참임을 근거로 하여서, 자기애가 지나치거나, 현실인식에 문제가 있거나, 자기상상이 만들어낸 세계에 빠져있는 전형적인 거울단계의 신경증적 환자로 판단하기에 쉬워진다.
어떤 행위의 의도성을 사후에라도 추정해야 하는 경우라면, 가해자의 의도는 굳이 알리고 싶지 않은 참혹한 외부현실에 대해서 피해자는 알지 말고 너 자신을 조금이라도 보호하라는 어떤 종류의 긍정적인 보호의 의도라기보다는 어떤 사실에 대해서 감춤을 통해 부정적인 진단을 보다 더 정밀하고 확고하게 하면서, 심지어는 그 진단이 나와서 고통을 당하는 주체의 상황이 있다는 사실을 호소하는 일 조차를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리는 의도라고 보여지게 되는 부분들이 있게 된다.
그럴 경우, 가해자로서 혹은 상위의 드라마를 조직하는 감독으로서 조각해내고 싶은 실제 리얼리티 TV의 주인공은 버려진 정신적 발달의 문제가 중심이 되는 주인공으로 그려진다.
이 주인공의 재기를 도모하게 될 때, 그 재기를 그리는 사람의 노력은 그래서 더 많은 경우의 편견과 싸워야 하고, 그 가운데에는 원래의 대중에게 각인된 넓게 인정되었던 편견과 싸워햐 하는 곤란스런 투쟁이 기다리고 있기도 했었다.
유도되는 죽음의 충동과 유도된 실존적 자유: 유도된 오인의 지속성과 자살명령, 관음과 가학적 성관계, 이상상황의 정상화 혹은 자살
1차적 자기애의 원리의 구현과 리비도적 성본능, 혹은 나르르시시즘적인 성본능의 가시적 형태로서의 잘 꾸며진 기술적 자위의 연출은 일차적으로는 자기애의 시각적 표상화를 염두에 둔다. 그 숨겨진 가능성과 기술구현의 원리에 대해서 무지한 그 순간까지는 거울단계의 자아가 가진 자아 자신에 대한 잘못된 자아관이나 상상계의 자아가 사회와의 관계를 맺으면서 상징계 실재계로 건강하게 발전하지 못한데에 따른 괴리의 극복에 실패한 것에 따르는 병적인 증상으로 보여지기에 적합하다. 거울단계의 자아는 현실의 인식에도 실패하고, 외부세계와의 조화에도 실패하고 외부세계와의 조화에 따른 건강한 자아 성립에도 실패한다.
실재로 그들이 초점을 맞춘 아주 중요한 사건은 주어진 학력에 대한 불인정과 그 인정받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능력밖의 거대한 것을 소망하는 여전히 상상속의 거울속자아를 추구하는 모습으로 그려나가는 전체 인생사의 중대한 사건과 연관이 된다. 자아는 일차적으로 자기 자신이라고 보던 모습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데 실패하고 그것을 상상적 치환을 통해 자기 자신이 아닌 만들어진 대체물과 이름으로서 치장하려고 하는 과대망상자이거나 신경증환자여야 적합한 것이었다. 이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지위와 화해 하지 못한 병적인 신경증은 과도한 자기애나 자기애적 사랑의 아주 극단적인 도착증(당시 사회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이라고 보일 수도 있는 자기와의 사랑에만 집착하는 인물로 묘사가 되기 시작한다. 자기 능력에 맞는 기준을 가지지 못한 배우자 찾기는
항상 자기의 기준과 부합하는 배우자를 거부하고, 더 나은 것을 추구하지만 실패할 수 밖에 없고, 이것은 결과적으로는 건강한 성적 관계가 아닌 도착증적인 성관계를 맺는 여주인공으로 그려지게 된다.
이 자기애적 도착적 성관계는 결국 자기 이외의 다른 부합된 사람과의 사랑을 거부하는 사랑임과 동시에 성본능의 쾌락원리만을 추구하면서 강박적이고 반복적으로 추구하는 모습이 되게 된다.
이 모습은 그 쾌락의 병적이고 극단적인 면을 넘어서는 죽음에의 충동이 된다. 그리하여, 그 자아를 감시하고 있는 초자아로부터의 끊임없는 죽음에의 명령, 즉 자살을 하라고 하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물론, 이것이 어떤 종류의 감춰진 비하인드 스토리가 드러나기 전까지 가해자들이 비교적 성공적으로 그려왔던 화면속의 어떤 익명의 여주인공 X에 대한 병리적인 현상과 진단일 수 있다.
거울단계를 극복하지 못한 자아의 오인 현상은 진실일 것이라고 생각되는 어떤 배후의 이야기들이 나오면서, 오인의 성격을 정반대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 오인의 해명의 이전의 오인과 그 오인의 해명 이후의 사건은 하늘과 땅이 전복되는 것 만큼이나 자아의 자기인식에 있어서는 전복적이다.
오래된 공격의 발달사를 추적해보면 상당히 지속적이고 정교하게 제작된 오인을 위한 구조가 있다. 이 부분을 먼저 쓰고 거울단계의 오인의 구조에게 언급을 하게 되겠지만, 전통적인 방법으로서의 유도된 오인의 구조에는 주쳬를 파편화하는 방식이 동원된다.
사이버 형태의 공격이 아닌 현실적인 드라마의 구성을 위한 플롯 작업을 하는 단계에서의 주체의 자기자신에 대한 오인은 대상세계와의 관계맺음에서 형성이 된다. 가령 주체가 관계를 맺는 대상세계가 가정과 학교인 경우에는 주체가 어떤 외부세계로부터 받는 반응에 오인의 요인들이 잠복해있다. A라는 행동에 대한 반응은 yes이거나 no일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무응답이다. 환경이나 대상세계에서 조작된 반응은 의도적인 yes이거나 no이다. 대상세계에서 받는 A라는 행동에는 자연인 상태의 타자 혹은 자연상태자체의 대상세계가 가지는 답이 늘상 존재한다. 여기 강력한 파워 리바이던이 개입을 한다. 그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를 대리하는 자는, 선생님이거나 권력을 부릴 수 있는 교장선생님이거나 학급의 부잣집 아이이거나, 반장이거나. 작은 꼬마 영웅들의 세계에서 우상화될 수 있는 존재이면 충분한다. 그는 그 권력의 힘을 통해 대상세계의 반응의 답을 표면적으로 yes로 고정해놓다가, 자신이 필요할 시에 no라고 변경시킬 수 있다.
주체는 행동 A에 대한 반응으로 응당의 yes를 인식하고 자신과 대상세계와의 관계를 조정한다. 그 yes값에는 진실과 동떨어진 비율값이 존재를 한다. 주체가 100% 라고 인식한 yes의 값은 실제로는 70%일 수 있다. 반대로 어떤 100% no의 값의 실제는 70% yes의 값일 수 있다. 이럴 경우 대상세계의 왜곡에 따른 어떤 종류의 반응의 절차에는 주체가 가지는 오인의 구조가 형성이 된다.
이 오인의 구조는 비단 학교와 가정의 소규모의 세계에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고, 좀 더 확장이 되는 경우에는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과정에서의 학력점수조작에 의한 자아인식과 자신감의 형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더 나아가서는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고 조정하는 인식구조에도 영향을 미친다. 지속적인 오인의 구조를 통해 본래 자기의 역량보다 항상 못미치게 인식한 구조가 정착이 되었다면, 누군가 비밀을 아는 이들에게는 이미 어긋나고 오인으로 형성된 자아이고 자아는 현실적인 가능태의 자아와 상당한 수준의 거리감을 형성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이 과정에서 자신이 극복하려는 어떤 조건의 한계에 대한 다른 도전에 자신이 계산하는 역량의 값과 사회적으로 반응이 돌아오는 수준의 값에는 항상 오차의 수준이 높아질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어떤 제한된 연구집단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알고 있는 사실수준과의 주체의 인식수준에는 이런 구조적으로 만들어진 오인에 따른 자아의 현상적 왜곡이 발생하게 된다.
공격이 사이버의 비가청 음성에 의한 공격으로 접어들때의 오인의 구조는 이 왜곡이 발생하는 구조를 좀 더 분해하고 파편화시킨다. 종래에는 단일한 종류의 인식과 교정이 어느 정도 가능한 상태라고 볼 수 있었다면, 이 음성공격에 의한 자아의 파편화는 판단부재의 결과를 예상하고 짜여진 구조라고 추정이 가능하다. 이전에 받던 사회적인 인정의 수준이 60%의 수준이라고 상호 관계를 통해서 인식하는 것이라면, 음성은 0%의 인정의 수준부터 100%상태의 인정의 수준까지 다양한 수준의 인정의 상태를 전시한다. 이 중에 어떤 수준의 인정과 교류를 하는가는 음성 전체의 구조가 어떤 쪽으로 치우쳐 있거나, 사회구성원들의 반응이 어떤 수준에서 반향을 보이는가에 훨씬 더 가깝게 관계한다. 이 상태에서 또 다른 종류의 인식의 오류는 조작된 어떤 정보를 사회구성원에게는 보여주지만 주체에게는 보여주지 않을 때이다. 이런 경우 학교시절의 조작된 yes의 실제값에서 발생하는 오차이상만큼 커다란 오차가 구성원들의 반응과 주체의 자아인식 사이에서 발생을 하게 된다. 이 경우, 자아는 다양한 인정수준의 어떤 것에 편향하여 자아를 확립해야 할지를 망설이거나 혼돈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 혼돈상태는 자아의 자아상에 대한 파편화작업이면서, 교류가 불가능한 상태, 행동의 기준을 확립하기 어려운 교착상태로 몰고간다. 자아는 침묵하게 된다.
오인의 구조는 피해자의 자아, 피해자의 주체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대상을 관찰하는 관찰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작용을 하게 된다. 어떤 행위의 수준이 자연적인 상태에서 발생한 주체의 의지인 것 처럼 보여지는 일련의 행위들에 교묘하게 작동하기 시작한 조작이나 조종상태가 개입을 하기 시작할 때, 놀랍게도 주체의 무의식은 그것을 알고 주체와 불화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주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종류의 죄의식처럼 발현되는 불쾌감과 거부감과 행위에 대한 침묵이 실제로는 초자아가 인식하고 있는 자아에 대한 파악에 의거하여, 사실이 분명해지는 어느 순간 분명해지고 그것에 대한 단호한 확신으로 가시화될 수 있는 지점이 생기게 된다. 이것이 초자아임을 위장해서 음성으로 자살을 요구할 때 실제의 진정한 초자아가 그 명령에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삶을 주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의 관찰자의 눈은 보이지 않는 기술에 대한 완전한 정보 공유가 이뤄진 이후에도 감각적으로 인식한 현상에 대한 이미지나 느낌에서 오랫동안 자유롭기 어렵다. 모든 것이 해명된 상태로 완벽하다고 할 경우에라도 피해자 주체에 대한 관찰자의 관계맺음은 그 상황이 강제에 의해서 일어난 현실이라고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지고, 그 대개의 원인은 관찰자의 감각적 경험의 현실이 실제로 해명에 의해 제공될 수 있는 현실을 압도하기 때문일 수 있다.
관찰자의 입장에서도 오인의 덫과 구조를 완전히 벗어나기에 어려운 지점이 있는 것은, 그와 관계하기도 할 것이다.
공격자로서는 오인의 구조를 전편의 상태로 고착화시키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거듭 반복되는 동일한 종류의 공격구조를 설계하게 되고, 피해자 주체는 오인의 구조의 시정을 포기하는 순간까지는 새로 인식된 새로운 자아상태를 대상세계와 조화시키기 위해 투쟁에 나선다.
이 상황에서 어쩌면 가장 중립적인 관찰자는 그들 모두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제3의 관찰자가 될 수 있다. 자연이 반응하는 방식이 인간의 관찰자로서의 방식과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은 그리 쉽게 간과할 일은 아닌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