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심 좋은 함라 고을 삼부자집 곳간은 활짝 열려
마한 함해국(咸奚國)의 중심 고을.. 함라산자락은 스님이 장삼을 펼친 명당 형국
돌담길 걷는 촌로.
함라산 전경.
함라관아터.
함라면 함열리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인심 좋기로 소문이 자자한 고을이다. 마을의 역사는 마한시대 52개 부족국가 중 하나인 함해국(감해국)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백제시대에는 감물아현(가물아현), 이후엔 함열현, 함열군 등을 거치며 오래 전부터 익산의 중심 마을로 위치했다.
웅포면과의 경계를 이루는 함라산을 뒤로하고 마을이 형성됐으며 마을 앞으로는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해도 산에서 내려오는 풍부한 물이 마을 앞을 가로지르는 천과 만나며 전형적인 배산임수 형태의 전통마을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아름다웠던 계곡과 냇가의 풍광을 찾기 어렵게 변했다.
마을의 중심 기능을 하던 관아와 객사는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그 기능을 상실했고 근대기에 등장한 부농 가옥들이 새롭게 고을의 얼굴이 됐다. 바로 삼부자집이 그것인데 한 마을에 만석지기 부잣집이 셋이나 나오기도 어려운데 서로 경쟁이라도 하는 듯 베풀기를 서슴지 않아 역시 ‘인심은 함열’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원광대학교 산학협력단과 대안문화연구소는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구술사 정리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익산 각 읍면을 순회하며 옛 역사와 풍속 등에 대해 구술을 받고 영상과 녹취 등을 통해 기록하는 작업으로, 작년엔 금마, 여산, 왕궁, 춘포, 함열 까지 5개 읍면에 대한 정리를 마쳤으며 올해 첫 발걸음을 함라면으로 향했다. 본지는 조사팀과 동행하여 함라 삼부자집과 얽힌 일화에서부터 주변에 전해 내려오는 역사와 신비로운 얘기까지 마을 어르신들의 구술을 직접 들어봤다.
▣ 함라산자락이 품은 마을
함라면 함열리는 함라산의 품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자연마을로 그 역사는 마한시대까지 올라갈 정도로 역사가 깊은 고을이다. 현재 함열역이 위치하고 있는 함열읍이라는 지명도 함라면 함열리에서 따온 것으로 호남선 철도가 현재의 위치에 놓이기 전만 해도 함열리가 지역의 중심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철도부설과 관련해서 조선총독부는 원래 강경에서 함라면을 통과해 군산으로 연결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함라 사람들의 반대로 인해 방향을 틀어 함열읍에 역이 세워지게 됐고 익산역으로 연결됐다고 전한다.
반대한 이유에 대해 함라면 주민 이진만씨는 “삼부자집을 비롯한 유지들이 철마가 지나가게 되면 땅이 울린다고, 조용한 고을이 시끄럽게 되는 것도 있고 특히 조상님들 묏자리가 있는데 땅이 울리면 뼈까지 흔들려서 큰일 난다고 해서 부자들이 돈을 싸가지고 가서 반대했지”라고 전한다.
이에 덧붙여 조상호(70) 씨는 “그 때 부자들이 큰돈을 근처 일본인 농장주들에게 갖다 주니까 그놈들이 돈을 받고 총독부에다가 설계변경을 요청해서 이렇게 됐다. 그런데 그 후로 함라 마을이 서서히 쇠퇴해버렸다”고 말했다.
실제 함열리에는 ‘관종일랑(關宗一郞)’ 이라는 일본인이 1917년 ‘관농장’을 설립하고 총 166정보(165만평방미터)를 소유했다는 기록과 더불어 일본인의 농장경영 흔적이 남아있어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 스님 밥그릇 자리에 삼부자집이
함라산의 산세는 장삼을 입고 염주를 두른 스님이 두 팔을 펼쳐 마을을 감싸고 있는 형국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해발 240.5m의 함라산 정상에서 양쪽으로 수려하게 뻗어나간 산자락은 온화한 느낌의 선을 그리는 장삼자락과 닮아 있고, 특히 산 중턱에 5백 미터 가량 줄지어 늘어서 있는 바위들은 스님이 목에 걸고 있는 염주와 같다고 하여 염주바위라고 불린다.
함라 삼부자집의 터가 명당인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다. 세 가옥의 위치가 함라산의 스님이 시주를 받는 주발에 해당하는 곳이어서 큰 부를 이룰 명당이라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독특하게도 세 가옥이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지 않고 한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1920년대 조사에 따르면 주변지역에 만석꾼이 호, 천석꾼이 4호, 백석꾼이 20여 호가 거주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중 만석꾼 3호가 모두 함열리에 처마를 맞대고 있을 만큼 집중돼 있다는 것은 특이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부를 얻은 후에 큰 집을 지었고 이 곳에서 부를 누리기도 했지만 점차 쇠퇴했다는 점은 생각해볼 일이다.
▣ 함라 삼부자집 이야기
함라 고을에서 가장 자세하게 많이 남아 있는 것은 역시 삼부자집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조해영, 이배원, 김안균 가옥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삼부자집은 현재 문화재로 등록돼 귀중한 자료로 연구되고 있으며 근대 한옥 중에서 비교적 온전히 남아있는 가옥으로 관심을 받고 있다.
특히 1.5Km의 돌담길은 익산 둘레길의 명소로 부각되며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다.
◇ 조해영 가옥
함라마을은 임천 조씨의 집성촌으로 4백 년 전부터 조씨 가문이 정착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현재도 함열리에는 임천 조씨가 다수를 이루고 산다.
조해영 가옥은 돌담길의 초입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집으로, 풍수가의 말에 따라 대문을 서쪽으로 냈으며, 12대문집이라고 불릴 정도로 규모가 커서 90칸의 방에 50여 명이 살았다고 한다. 현재는 옛 영화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곳곳이 헐리고 사라져 본채와 농장채, 솟을대문 등만이 남아 있다. 이는 한국전쟁당시 대식구의 피난생활에 일부를 헐값에 팔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조해영 씨의 가문이 부를 축적하게 된 것은 그의 고조부인 조한기 때부터였다. 조한기는 1838년(헌종 3년) 함열에서 출생해 사천군수, 정읍군수를 지냈는데 이때 기반을 다져 이미 3만석지기의 부자가 됐다. 정읍군수를 지낼 당시에는 사재를 털어 관헌을 짓고 백성들을 굶주림에서 구하는 일에 앞장서 칭송받기도 했다. 태인 피향정에 , 기근에 사재 5백석을 들여 군민을 도왔다는 조한기의 송덕비가 남아 있다.
지금도 함열리 주민들은 조해영 가옥을 정읍집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정읍에서 와서 집을 지어서 그렇게 불렀다고 얘기한다.
조해영 가옥은 궁궐을 짓던 대목장을 불러다 지었으며 상량문에 1918년이라고 적혀 있어 이배원 가옥(1917) 보다 1년 늦게 지어진 것이라고 알려졌으나 조해영의 동생 조교영씨에 따르면 그 훨씬 전부터 집을 짓기 시작해 몇 대에 걸쳐 지어졌다고 하므로 이배원 가옥보다 앞선 것으로 보인다.
◇ 김안균 가옥
김안균가옥 화초담
김씨 가문이 부자가 된 내력은 신비한 전설과 함께 한다.
김안균의 선조는 가난한 선비였는데 마차를 끌며 생계를 유지하던 어느 날 황등에 갔다가 말을 끌고 돌아오는 길에 쓰러져 있던 스님을 발견한다. 스님을 마차에 태우고 집으로 데려와 극진히 보살피자 스님이 깨어나 그에게 자기가 쓰러진 자리에 묘를 쓰면 부자가 될 거라고 해 그렇게 했더니 가세가 회복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후 후손이 벼슬을 하게 되고 기반을 잡자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고, 김안균의 부친인 김병순에 이르러 만석꾼이 된다. 김병순은 1926년 함열현 와리에 함화농장을 설립했는데 익산, 김제, 옥구 등에 많은 소작지를 두었고 천명이 넘는 소작인을 두었다. 김해균도 사업 운영에 힘을 쏟아 부를 확대해 나갔다.
김안균 가옥은 현재 99칸으로 지어진 전라북도에 남아 있는 가장 큰 고택이며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상량문에 따르면 안채와 사랑채는 1922년,행랑채는 1930년에 지어졌으며 경복궁을 짓던 목수를 불러다 지었다고 한다.
◇ 이배원 가옥
이씨 가문의 부는 가장 최근의 일로 기억되고 있었다.
임피에 살던 이배원의 부친 이석순은 형편이 어려워 처가살이를 위해 웅포로 가던 중 함라 객주에서 하룻밤 머물게 됐다. 그곳에서 신세타령을 하게 됐는데 사람들이 처가살이하러 가지 말고 차라리 누룩장사를 해보라는 권유를 받고 그날로 고산이나 완주에서 누룩을 가져다 팔아 돈을 벌었다. 그 뒤 현재 가옥 옆에 초가를 지어 함라에 눌러앉게 된 이석순은 웅포에 배2척을 마련해 곡식장사에 나섰고 돈을 크게 벌었다.
전하는 이야기로 배가 겨우 가라앉지 않을 정도로만 엽전을 싣고 왔으며, 엽전이 너무 무거워 배가 가라앉았다는 이야기, 몰락한 이배원 가옥의 창고에 엽전으로 가득 찬 항아리가 나왔고 창고 바닥을 긁으면 지금도 엽전이 나온다는 설도 있다.
이배원은 아버지의 부를 물려받아 함열면 와리에 삼성농장을 설립·운영했고 축산업과 농업 등도 관여하며 부를 확대했다.
이들 삼부자의 부가 얼마만큼 인지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쉽게 감이 잡힐 것이다.
이배원 씨의 장자이며 당대 유명한 서예가였던 이집천 씨가 지은 별장이 함라마을에 있는데 사람들은 이를 따로 구별해 이집천 가옥이라고 부르고 삼부자집과 합해 사부자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규모 별장과도 같은 이집천 가옥은 서벽정이라는 사랑채와 육모정, 사모정 등 세 개의 건물로 이뤄져 있고 정원 조경이 특히 아름답게 꾸며져 일본인들이 그림엽서로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이 가옥을 짓는데 당시 돈 2백여만 원이 들었으며 4년간의 공사와 연간 유지비만 1백만 원이었는데 2백만 원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자그마치 약 2천억 원에 달한다. 그야말로 엄청난 부가 아니면 꿈도 못 꿀 규모가 아닌가.
▣ 곰개가서 소금가마니 져오세
삼부자가 한 마을에 가까이 사는 것도 신기한 일인데 이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곳간을 풀어 인심을 행한 일은 지금까지 회자되는 이야기다. 이들의 이런 선행은 토지개혁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몰락 과정에서도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조상호 씨는 “예전 농한기에 할 일 없는 소작인들이 삼부자집 담장에 줄지어 서 있으면 누가 와서 ‘이보게 할 일 없으면 곰개 가서 소금이나 져오세’ 했다는 겁니다. 그 말은 부잣집에 가서 빗자루라도 들고 왔다 갔다 하면 밥은 줬거든. 그게 미안해서 조금이라도 보은코자 재 너머 곰개에 가서 소금 한가마 지어다 주고 밥을 얻어먹자는 말입니다”고 말했다.
이들의 선행은 곧잘 동아일보를 비롯한 신문에도 여러 차례 보도가 될 정도로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옛 과거 보러 가던 선비들이 삼례에서 논산으로 가지 않고 꼭 함라에 들려 쉬어 갔다는 얘기도 있는데 함라 고을의 인심이야말로 대대로 내려오는 소중한 유산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완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