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감록이 예언한 십승지마을을 찾아 떠나다
남민 저 / 소울 메이트
시대가 수상하고 하루하루 불안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고통과 죽임, 상해와 기아, 전쟁과 파괴, 재해와 질병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 무릉도원, 파라다이스, 신천지, 천국을 갈망한다.
저자는 무한 속도와 무한 경쟁에 시달리고 있는 불안한 현대인들에게 조선인들이 이상향으로 여겼던 정감록의 십승지를 소개하며 쉼과 느림, 심신의 건강과 힐링을 말한다.
정감록은
미래의 국운을 예언한 도참서이자 난세에 신음하는 조선 백성들에게 안전과 평화의 땅, 피신처로서 십승지를 소개한다.
이씨 조선왕조가 국운을 다한 후 800년 정씨 왕조가 계룡산에서 등장하고, 이어 조씨의 1천 년이 가야산에서, 다시 범씨의 600년이 전주에서 이루어진다고 했으니 정감록은 감히 세상에 드러내놓을 수 없는 금단의 책이었다.
정감록은 언제 누가 지었는지 지은이가 불분명하다. 일반적으로 정감록이라고 하는 좁은 의미의 비결서는 『감결』을 말한다. 수많은 번역본이 존재하며 내용 또한 조금씩 다르다.
정감록은 촉나라 도인 정감과 완산 이백의 둘째 아들 이심과 셋째 아들 이연이 조선 산하를 둘러보며 풍수를 바탕으로 조선의 국운과 미래를 예언하는 질문과 답변을 기록한 글이다. 그러나 촉나라 정감은 가공인물일 가능성이 크고, 혹자는 역성혁명한 조선의 개국을 합리화하기 위해 삼봉 정도전이 교묘하게 꾸며낸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것도
옳다고 확정짓기 어렵다.
정감록이 말하는 십승지는 사람의 씨를 보전할 수 있는 곳이다. 즉 나와 나의 후손이 난리 때 숨어들어가서 살면 생명을 보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조선 중.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왜와 만주족의 외침과, 각종 민란과 정치적 사화가 끊이지 않았다. 피폐해진 백성들과 관직에서 쫓겨난 선비들이 보신보명할 안식처가 필요했는데 정감록에서 말한 십승지가 그들에게 해방구였다.
십승지의 핵심은 목숨을 보전하는 '보신보명'이었고 보신보명의 핵심은 '삼재불입지지'다. 전란으로 부터 안전해야 했고, 흉년이 없는 땅이어야 했고, 전염병이 없는 곳이어야 했다. 전란, 흉년, 질병이 들어오지 못하는 '삼재불입의 땅'으로 마을은 입구가 보이지 않는 땅으로 외부 세계와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어야 했다.
60~70여 종에 이르는 비결서가 주장하는 십승지가 수없이 많지만 가장 공통적이고 대표적인 곳은 백두대간을 축으로 태백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내륙산간에 집중되어 있다.
십승지는
영주 풍기,
봉화 춘양,
보은 속리산,
남원 운봉,
예천 금당실,
공주 유구. 마곡,
영월 연하리, 미사리, 노루목,
무주 무풍,
부안 변산,
합천 가야를 으뜸으로 친다.
무더운 여름에 심심파적으로 읽을 수 있는 산뜻한 책이지만 아프고 안타까운 역사 이야기가 십승지 소개에 첨가되어 있어서 조상들이 겪은 고통과 고난에 마음이 아파진다.
이순신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지 않고 숨어서 봉화 춘양에서 살았다는 은둔설이 그 한예라고 볼 수 있다.
은둔설은 승전을 확인한 장군이 자신의 전사를 발표하고 실제로는 야음을 툼타서 은둔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인데
이는 전사 사실을 장남 회와 조카 분, 그리고 몸종인 김이 세 사람만이 알고 있었다는 점과 장군의 장례식 과정에서 생긴 많은 의문점이 드러난 데서 비롯된 설이다.
정설에 의한 장례를 보면, 11월 19일 사망했다는 이순신 장군의 시신은 20일이 지난 12월 10일 고향 아산으로 옮겨졌고, 국가가 장례비용을 지원했음에도 그로부터 80일이 지난 다음에야 치러졌다. 또한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1614년, 묘가 특별한 이유 없이 이장된다. 여기서 말못할 사연이 있다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그런 결과로 은둔설이 제기되었는데 은둔한 곳이 어디인지는 특별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이 은둔해서 살았다는 유일한 마을이 있다.
봉화 십승지마을 도심촌이다.
도심촌에 갑옷골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순신장군이 들어와 살아서 생겼다는 말이 전해온다. 400년 동안 이어진 구전이나 뚜렷한 증거가 없어 인정받기 어렵다.
이순신 장군이 도심촌에서 은둔했다는 사연은 이렇다.
임진왜란이 끝나는 해 유성룡은 당파싸움으로 자신이 더 이상 조정에서 이순신장군을 옹호할 수가 없다는 것과 이순신 장군이 승전의 장군이라할 지라도 선조의 핍박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노량 전쟁을 끝으로 장군이 봉화도심촌으로 피신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를 했다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아들과 조카에 의해서 전사자로 발표될 때에 봉화 도심촌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15년간 은둔하다가 1614년에 사망을 했다는 것이다.
노량해전은 이순신 장군에 평소해 하지않은 야간 전투였으며 왜군이 전쟁을 포기하고 도망가는 상황에서 조선 해군이 서투 야간 전투를 벌일 일이 없었던 점도 은둔설을 뒷받침한다. 또한 장군이 전사한 직후에 휘하의 장수가 아닌, 처음으로 참전한 어린 조카가 함선에서 지휘를 했다는 역사적인 정설도 의문점이 많은 것이나 은둔설을 뒷받침할 결정적인 자료가 나와야만 이순신장군의 봉화 춘양에서의 은둔이 인정될 것이다.
세조의 딸, 세희공주와 김종서의 손자가 숨어 살았던 보은 속리산,
흥부놀부전의 실제적인 배경인 남원 운봉
명성왕후의 비궁이 세워졌다는 예천 금당실,
전라도 속의 신라마을 무주 무풍,
허균, 유형원, 박지원의 땅 부안 변산,
최치원의 은둔지 합천 가야 등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저자는 십승지 마을의 자연을 해치지 않고 특수성을 살려 힐링의 장소로 사용할 것을 제안하며
느림과 쉼, 진정한 휴식과 건강, 행복은 욕망을 내려놓을 때 한발짝 더 다가설 수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