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플루토에서 아침을 결말 포함 해석/후기
배우 킬리언 머피에게 별안간 빠져버렸다.
사람 자체도 매력있고 연기도 잘한다.
사실 처음엔 연기 잘하는 건 안중에 없었다. 얼굴의 느낌이 좋아 끌렸기 때문에..
이전에 봤었던 킬리언의 필모(인셉션, 배트맨 트릴로지, 그리고 기억도 안 나는 트렌센던스)들에서는
딱히 그의 연기력을 확인할 기회가 없기도 했다.
거기서 못했다는 건 아닌데 딱히 인상적이진 않았음.
(앞서 언급한 킬리언의 필모들이 죄다 인물이 아닌 굵직한 사건을 중심으로 스토리를 전개해나간다는 점에서 기인한 것 같다. 캐릭터의 깊이가 부족하니까 연기도 딱히 뽐낼 부분이 없는 느낌.. 아님 말구)
근데.. <플루토에서 아침을>을 보고 깨달았다.
이 사람은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구나
그래서인지 영화에 대한 해석도 해석이지만 킬리언 머피의 연기에 관해 할 말이 참 많이 떠오른다.
사실 난 ftm이든 mtf든 지지하는 입장은 아니다. (성별 트렌지션이 성역할 스테레오타입을 더욱 공고히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지만 순전히 연기에 관해서는 트랜스젠더를 연기하는 배우들을 보며 감탄했던 적이 꽤 있다.
예를 들자면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에서의 자레드 레토의 연기가 정말 정말 인상 깊었었다. (솔직히 킬리언 머피보다 더 잘했던 것 같기도 하다 ㅎ)
내가 이렇듯 트랜스젠더를 연기하는 배우들을 보며 연기에 감탄하는 이유는
사실 넘 당연한데.. 걍 배우 본체랑 전혀 다른 모습의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아예 다른 사람을 연기한다는 건,
사실 어찌보면 배우로서 당연한 거 아닌가 싶지만서도 굉장히 까다로운 일인 것 같다.
내로라하는 기성배우들도 배우 본인의 모습이 캐릭터에 과도하게 개입되는 경우를 많이 봤다.
아니면 자신의 모습이 개입되는 걸 극도로 기피하다가 내면에 아무것도 안 담긴..
저런 사람이 세상에 어딨어! 싶은 붕 뜨고 텅 빈 캐릭터를 연기해내는 경우도 봤다.
이 두 가지 케이스를 피해 인물을 창조해내는 것이 연기를 하는 데에 있어 (그리고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데에 있어)
가장 까다로운 지점이라 생각하는데 그런 점에서 킬리언은 꽤 퀄리티가 높은 배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되게 이성적인 척하며 덕질하는 사람 같애서 갑자기 되게 초라해진 느낌.. 그정도로 그를 좋아하진 않습니다)
물론 저는 비전공자에다가 연기에 뭐 열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아니지만
철저히 관객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러하단 얘기지요.
이렇게 서론이 길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오타쿠는 말이 많다는 것이 사실이구나)
해석으로 얼른 넘어가야지
해외 포스터. 이게 더 취향임
1. 우선 이 영화는 코미디로 분류되지만 내 기준.. 전혀 코미디 아니다 ㅋㅋ
아일랜드의 독립과 관련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영화 <뮤리엘의 웨딩>도 코미디 영화라고 소개되었지만 내 멘탈을 싹싹 갈아버렸었는데
<플루토에서 아침을>도 비슷한 느낌인 것 같다.
말을 뱉고보니 두 영화가 비슷한 구석이 많다.
우선 같은 노래가 영화속에 삽입된다..! 'sugar baby love'이라는 노래인데,
덕분에 이 노래는 내게 가장 찝찝한 상큼함을 선사하는 노래가 되어버렸다 ㅋㅋ
그리고 또 비슷한 점이 있다면 <플루토에서 아침을>의 패트릭과 <뮤리엘의 웨딩>에서의 뮤리엘은
세상 밝고 걱정 없이 사는 듯 보이지만 내면의 결핍이 크고 지독한 회피형이라는 것..인 것 같다.
둘은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무게를 어깨에 지고 살아가면서도 하나도 안 무거운 척한다.
그러다 불쑥불쑥 다 으스러진 어깨뼈가 드러나면 더 심장 찢어지는 거 알죠..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패트릭의 어깨뼈가 드러난 부분은 어디었을까?
먼저, 길거리에서 매춘을 하던 중
자신에게 마음의 빚을 진 경찰(죄없는 패트릭을 테러범으로 오인해 마구 구타했었다)에 의해 구출되어
그의 차를 얻어탄 뒤 대화를 나누는 씬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자길 다시 감옥으로 데려가달라고 장난스레 아양을 떨던 패트릭이
이런 일을 하다 길바닥에서 죽을 셈이냐며 다른 일을 찾아보라는 경찰의 말에
이전의 깨발랄함이 가신 놀랍도록 체념에 젖은 표정으로
'솔직히 저는 자격 미달인걸요.'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지하철에서 마주친 여성이 자신의 엄마인줄 알고 따라갔다가
열차 문이 닫혀 코앞에서 그를 놓쳤을 때의 공허하고 허탈한 표정도 내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이 씬에서 이 영화를 통틀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패트릭이 아닌 킬리언 본체의 모습을 본 것 같았다. 신기하고 반가웠다(?)
이 장면에서 몰입이 팍 깨졌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상반되는 모습이 극적인 순간에 대비되어서
더 인상 깊었고 좋았다. 이것도 의도한 걸까??)
이처럼 내내 철 모르는 듯 헤헤거리고 다니던 패트릭이
부지불식간에 툭툭 지친 내면을 떨어뜨릴때마다 가슴이 까마득하게 미어졌던 기억이 있다.
아!
또 이 영화의 코믹스러운 장면이라 일컬어지는..
망상 속에서 비밀요원이 된 패트릭이 샤넬 스프레이 향수로 테러범들을 제압하는 씬.
난 개인적으로 이 씬이 왜 웃기다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
먼저 망상 자체가 아일랜드인이자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테러범으로 몰린 패트릭이
경찰들에 의해 감금되고 구타당하며 진술을 강요 받다 시작된 것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향수'를 무기로 쓰는 모습이 마음이 아팠다.
일전에, 패트릭은 자신을 성적으로 학대하려 했던 중년의 남성의 얼굴에
샤넬 스프레이 향수를 뿌림으로써 간신히 위험에서 벗어났던 경험이 있다.
이처럼 자신을 위험에서 꺼내주었던 향수를 그의 유일한 무기로 삼은 모습,
향수를 모두에게 맞설 수 있는 최고의 무기처럼 여기는 모습은 정말 안쓰러웠다.
총도 아니고 두 주먹도 아닌 스프레이 향수로 자신을 지켜야만 하는 삶,
그러한 스프레이 향수만 없어져도 언제든 바스라질 수 있는 삶.
..이 잘 드러난 장면이라고 생각해서 굉장히 상징적이고 가슴 아픈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2. 실제로 저 망상 이후에 울컥할 정도로 안쓰러운 장면이 이어진다.
바로바로,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사랑했던 로렌스를 폭력에 의해 잃고
트라우마를 급한대로 억누르며 살아가던 패트릭이
로렌스와 함께 춤을 추는 환상에서 깨어나 아이처럼 우는 씬이다.
사실 나는 이 장면 하나로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이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이 영화는 죽었다 깨어나도 코미디 영화는 아니구나, 느꼈달까)
난, 심각한 건 딱 질색!
영화 내내 '심각'에 관한 대사가 많이 나온다.
패트릭은 '심각한 것은 싫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리고 패트릭이 말하는 '심각한 것'은 곧 '폭력적인 것'을 의미한다.
패트릭은 아일랜드의 독립 문제를 두고 벌어진 테러에 의해 오랜 친구 로렌스를 잃고난 후,
모든 종류의 심각한 것, 그러니까 폭력적인 것들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인다.
로렌스를 죽음에 이르게 한 폭력에 대한 증오와 반발심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패트릭이 그러한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낼 수 없으리라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다운증후군을 앓는 로렌스와 성소수자인 패트릭은 모두 사회적 소수자이기 때문에,
로렌스의 죽음은 패트릭에게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왔을 것 같다. 애통을 넘어 공포고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이렇듯 패트릭은 애써 심각한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려 하지만
패트릭의 세계에는 온갖 폭력적인 것들이 난무하고 있다.
사람들은 폭력적으로 성을 추구하고
때로는 폭력적으로 신념을 추구하기도 한다.
패트릭의 세 친구 중 한 명인 어윈 또한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 나름대로 힘쓴다.
(하지만 어윈 역시 자신의 동료들이 적을 살해하는 모습 앞에선 손을 벌벌 떨며 그만 오줌까지 지려버리고 만다)
그러나 어윈을 제외한 패트릭, 로렌스, 찰리는 이와 관련된 문제를 회피하는 모습을 보인다.
누군가는 조국인 아일랜드의 독립 문제에 신경쓰지 않는 셋의 모습을 비겁하다 여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한 폭력적이고 심각한 문제에 살갗을 대고 서있을 수조차 없을 만큼
나약한 존재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온갖 폭력적이고 심각한 일들로부터 떨어져
자신의 삶을 애써 살아가려 했던 (그리고 그와중에도 번번이 폭력에 휘말리고 희생되었던)
패트릭을, 로렌스를, 찰리를 누가 비겁하다고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누군가 폭력에 짓밟혀 비겁해졌다면 그건 그가 무르게 태어난 탓이 아니라 전적으로 폭력의 잘못일텐데...
이처럼 폭력적이고 심각한 것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그저 사랑받고 싶어하고 소속되고 싶어하고 떨치고 싶어했던 패트릭이란 인물은 꽤나 입체적이었다.
3. 사실 내 최애 캐릭터는 패트릭이 아니라 패트릭의 친구인 찰리다. (갑자기요?)
찰리의 서사가 풍부하지 않아서 아쉬웠을 정도였다 ㅠ
패트릭과 찰리의 관계가 영화 초중반에도 두드러졌더라면 좋았을텐데..
찰리와 패트릭
찰리는 패트릭이 자학적인 행동(자신의 아픈 기억을 웃음거리로 팔며 마술쇼에 선다든가..)을 할 때 나타나
그를 구해줬던 인물이다.
감정적인 찰리에 비해 훨씬 이성적이고 사람 자체가 뚜렷해서 좋았다.
조국의 독립에 정신을 쏟느라 자신에겐 무관심해진 어윈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되었을 때도,
찰리는 자신의 인생을 위해 덤덤하게 임신중절수술을 택한다.
그리고 패트릭과 함께 찾은 임신중절 시술소에서 패트릭에게
'만약 이 아이가 태어나면 어떻게 자랄까?'라고 물은 후
패트릭이 '나처럼 구제불능으로 자라겠지.'라고 답하자 갑자기(?) 마음을 바꾸고 아이를 낳기로 결심하기도 하는데,
이 씬도 인상깊었다. 둘의 연기도 좋았지만,
'난 구제불능을 사랑하잖아'라고 덧붙이는 찰리의 씩씩한 모습도 좋았다.
하하 아이를 낳기로 했다니 기특하구나!가 아니라,
스스로를 구제불능이라 여기던 찰리가
사회적 통념에 의하면(미혼모의 아이이므로) 구제불능으로 자랄 것이 뻔한 자신의 아이를 받아들임으로써
결국에는 자기 자신 또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좋았다.
그리고 아이를 낳은 후, 소울프랜드인 패트릭과 함께 서로 의지하며 아이를 키우는 모습도 뭔가 흐뭇했다.
영화를 가로질러 가장 내면적으로 단단하고 성숙해진 인물은 찰리인 것 같다. (패트릭: 저는요..?)
찰리야 행복해야 돼
4. 사실 이 영화는 내 취향에 부합하는 부분들이 좀 있어서 객관적인 판단이 어렵다.
먼저 그 소설의 장처럼 나뉘는 편집을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예시를 들자면.. 좋아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그랜드부다페스트호텔>이 그랬고
한국 영화중에서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가 그랬던 것 같다. (아닌가?)
암튼 그런 스타일이 좋아서 일단 기본적으로 내 취향이었다.
원작이 소설이다보니 소설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그랬다고 하는데.. 취향에 부합했음.
5. 그리고 아일랜드 출신인 킬리언 머피가 연기를 하면서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생각했다.
실제로 킬리언이 아일랜드 출신이라는 데에서 굉장히 소속감을 느끼는 걸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근데 몇몇 인터뷰를 보니 아직도 영국인들이 의도적으로 킬리언이 가진
아일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깎아내리더라.
자신은 아일랜드인이라고 몇 번을 강조해도 영국인이라고 칭하지를 않나..
몇 번을 정정해줬음에도 cillian을 영국식으로 읽어 실리언이라고 하지를 않나 ㅡㅡ
세상엔 참 싸가지 없고 미개한 종자들이 많구나 실감했다.
그리고 참담했다. 내가 보기엔 킬리언도 그냥 유럽 남자인데
그 안에서도 아일랜드인이라는 이유로 또 차별을 당하다니.
세상에는 첨예하고 치사한 형태로 겹겹이 쌓인 차별이 많구나 실감했다.
6. 사실 트랜스젠더라는 소재를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이 많았었는데
영화가 막 성별 트랜지션에 관해 심도 깊은 메시지를 던지지는 않는다.
패트릭이라는 캐릭터는 성정체성에 혼란을 느낀다는 점 보다는
갈 곳 없고, 약하지만 늘 사랑받고 싶어하는, 하지만 폭력적인 세상에 희생되고 마는
어찌보면 참 흔한 개인으로서의 특징이 더 두드러지기 때문에..
그래서 물 흐르듯 본 것 같다.
7. 마지막으로 킬리언 머피의 연기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진짜 작작 하려고 했는데 방금 또 생각남)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장면
전화국 직원인 척 위장하고 엄마를 만나러 온 패트릭이
엄마와 마주하자 긴장이 풀려 그대로 쓰러지고,
겨우 정신을 차린 후에는 태어나 처음 만나는 엄마를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장면..
왜 좋냐면 연기가 너무 좋음
cj 감성으로 만들었다면 패트릭이 애틋하고 막 효심에 미쳐 죽어버릴 듯한 표정을 지었을 것 같은데
그런 거 없이 순수한 호기심의 눈빛,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연기를 해서 좋았다.
그래놓고 막상 엄마의 집에서 벗어나고 나서야 울컥 감정이 올라오는 연결도 좋았다.
난 그편이 훨씬 현실적인 것 같다.
그도 그럴만 한 게,
패트릭은 내내 자신의 엄마를 '런던이 삼켜버린 유령 숙녀'라고 칭한다.
상상하기를 좋아하는 패트릭의 면모가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패트릭이 자신의 엄마에 대해 느끼는
막연한 거리감이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를 보며
애틋함을 느끼고 어쩌고 할 겨를도 없이
처음 보는 엄마의 얼굴을 (그간 상상만 해왔던 유령 숙녀의 실체를)
그저 신기해 하기만 하다가
나중이 되어서야 오랜 감정이 어지럽게 일어나는 쪽이 훨씬 현실적이지 않나?! 아님 말구.
-
주저리 주저리 감상이 길었다.
솔직히 전체적으로 봤을 때 취향인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고 앞서 말했듯 편집 스타일도 좋았고 무엇보다 노래가 많이 들어가서 좋았다.
불편한 장면도 꽤 있던 영화여서 딱히 추천하고 싶지는 않지만,
킬리언 머피의 팬이라면 꼭 봤으면 하는 영화기도 하다.
[출처] [영화] 플루토에서 아침을 결말 포함 해석/후기|작성자 봉윤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