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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박해의 역사
왜 독일인들은 유대인 박해에 암묵적인가?
글쓴이 : 슈타인베르퍼
유대인의 역사를 볼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참으로 대단한 민족이고 이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많은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동시에 그들의 종교적 배타성과 선민의식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며칠 전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를 보았습니다. 폴란드 유대인 출신인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라프 슈필만(피아니스트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입니다.)의 생존기를 다룬 이 영화는 주인공의 나치치하 시기의 고초와 삶의 질곡을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독일 장교의 도움을 받아서 살아남는 부분에는 아이러니를 느끼게 합니다. 유대인 학살을 다룬 여러 영화, 수기, 사서들을 보았지만 항상 머리를 맴돌았던 것은 왜 유럽인(그것도 유럽 역사상 가장 좋은 시기에 자라고 교육을 받았던), 특히 독일인들이 유대인에 대해서 그렇게 박해를 했나 하는 점입니다.
유대인 박해의 역사는 모세의 출애굽부터 시작하는 기원전부터 존재했는데 이당시 이집트의 노예였던 유대인들이 모세에 의해 인도되어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됩니다. 세월이 흘러 기원후 1세기에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어지고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방랑)를 통해 전 세계로 흩어지게 됩니다. 이후, 로마제국의 멸망 때까지 박해와 억압에 대한 완화가 반복 되어지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데, 이 시기부터 서양사에서 유대인은 이방인으로서 여기저기서 배척 받게 됩니다.
그러는 가운데 수세기가 흐르고 이슬람의 세력이 커지면서 예루살렘은 이슬람 군대에 다시 점령당하게 되고 이들은 다시 스페인까지 진출하게 되는데 북아프리카에 있던 많은 유대인들이 스페인, 포르투갈 등의 남유럽 쪽에 이주하게 됩니다. 이들 남부 유럽출신의 유대인들은 세파르디로 불리게 되고 중세 스페인의 종교 박해가 있을 때까지 나름대로 번창하며 살다가 15세기 이후 대대적으로 추방당하게 됩니다.
한편, 스페인, 포르투갈 등의 종교박해를 피해서 간 유대인들은 독일, 영국(영국의 유대인 이민은 이미 노르만족의 영국 정복 때부터 기원함) 보헤미아 등의 중북서유럽으로 정착하게 되는데 이들은 아슈케나지로 불리게 됩니다. 러시아의 유대인 중에는 소위 “하자르 왕국(Kingdom of Khazar)” 출신이 있는데 이 왕국은 흑해와 카스피해의 중간에 위치한 왕국으로서 혈통적으로 유대인이 아니며 당시 이 지역에서 상업을 하며 경제력을 키우던 유대인들에 의해 전도되어 유대교를 받아들였는데, 세계사에서 비유대 혈통이면서 유대교를 국교로 삼은 예는 하자르 왕국 케이스가 유일합니다.
현재 하자르 왕국 문제는 매우 첨예한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현대 유대인의 거의 80% 이상이 아슈케나지 유대인인데 이들의 기원이 하자르 왕국이라고 한다면 오늘날 이스라엘에 있는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땅을 주장할 권리가 없어지기 때문에 아랍의 일각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주장 입니다.(유대인 역사가 아더 코스틀러가 이러한 주장을 실은 책 "13번째 지파"를 내놓고 엄청난 논란에 휩싸인 후 의문의 자살을 했습니다.)어찌 됐던 하자르 왕국 멸망 이후 러시아에 병합된 이들은 당연히 유대인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또한 13세기에 폴란드 왕이었던 보레슬라프는 전쟁, 기근 등의 여러 사정으로 인해서 약화되는 인구와 자신의 세력 확보를 위해 유대인 이민을 받아들입니다. 이들의 중심지가 오늘날의 폴란드 도시인 크라코프(크라카우-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멀지않음)와 카토비체인데 이 이주가 2차대전 당시 250만 이상의 유대인들이 폴란드에 살게 된 기원이 됩니다.
세파르디는 까스티야어와 히브리어가 결합된 “라디노”란 고유의 언어를 사용했고, 많은 아쉬케나지들이 독일어와 히브리 방언이 결합된 유대인 사회의 링구아 프랑카가 된 “이디시어”를 사용하게 됩니다.(오늘날 이스라엘 사회의 주류는 북동유럽에서 건너온 이들 아쉬케나지 들입니다.) 소수이긴 하지만 원나라 시대 중국에도 상인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유대인 시나고그가 세워지게 되는데 후난(胡南)성의 카이펭 지방에 여행을 한 마르코 폴로에 의해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후 십자군이나 흑사병, 종교상의 변혁 등을 거치면서 유대인은 여러 홀로코스트(집단학살-‘쇼아’)을 경험하는데, 중세초기에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을 박해했던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이 예수님을 팔아넘겨서라기보다(예수님의 피값으로 유대인이 방랑한다는 예기는 13세기 이후에 고착화 됩니다), 유대인들이 기독교 소년/소녀들을 납치해서 소위 “피의 의식”(Blood Libel)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실제로 이 의식이 일부 광신 유대교도에 의해 행해졌다는 기록이 더러 있습니다.) 최초의 “피의 의식”에 대한 재판은 영국 노어위치에서 시작되는데 이러한 재판은 이후 나폴리, 사라고사, 다마스커스, 러시아의 키시니에프(1903년에 발생) 등 전 유럽/중동에서 행해졌고, 서구 사람들의 마음속에 잔인하고 사디스트적인 유대인에 대한 인상을 각인 시켰습니다. 또한 서구 사회에서 널리 퍼져있던 유대인에 대한 인식중 하나가 포주로서의 이미지인데, 실제로 폴란드 남부를 중심으로 백인 노예가 오스만 제국 등으로 팔려 나갔고, 이것이 서구인들 사이에서 유대인에 의해 행해졌다고 증폭됐어 이후의 근대사회까지 발생하는 서구사회 내 유대인 박해의 주요 모티브 중 하나가 됩니다. 히틀러가 살았던 비인에서도 나슈마크트 주변의 거리에서 유대인 포주가 운영하는 사창가가 있었습니다.
16세기에는 이태리의 베니스에서 최초의 유대인 거주지역인 게토가 성립되게 됩니다. 한편, 독일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초기에는 유대인에 호의적이었으나 종교개혁 과정에서 여러모로 신교와 충돌을 일으켰던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키우게 되고 이에 대한 글을 남김으로서 근대적인 의미의 반유대주의 선구자란 오명을 남기게 됩니다.
서구사회에서의 샤일록과 같은 수전노, 고리대금업자 유대인의 이미지는 12세기 전후부터 보편화 된 것으로 알려지는데, 영국의 역사가 데렉 윌슨은 이에 대해 끊임없는 박해와 방랑 생활 속에서 자신의 재산이나 동산을 소유하기 힘들었던 유대인들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찾고 있습니다. 즉, 이들은 언제 어느 지역에서 추방된다 하더라도 그들 특유의 장사와 재정 기술을 머리속에 가지고 떠났던 것입니다. 또한, 중세시대까지 고리대금을 부정한 사업으로 치부했던 서구의 문화에도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나폴레옹 전쟁과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유럽에 자유주의가 만연 하는데, 유럽 각지의 게토나 그들만의 커뮤니티에 살던 유대인들은 일시적으로 해방을 맛봅니다. 하지만 이후의 반동정치로의 복귀와 각국 지배자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유대인 정책은 천차만별의 행태를 띄게 됩니다.
이미 1500년에 신대륙에 정착한 유대인의 기록이 있었는데 본격적인 유대인의 미국 이민은 1849년의 샌프란시스코 금광 발견과 1881년 러시아 황제 암살(암살범이 급진적인 유대인 이었습니다.)에 및 이후의 유대인 박해(포그롬) 및 신대륙 이민에 의해서 입니다. 러시아의 유대인 박해는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이들 러시아, 폴란드계 이민들이 주로 정착한 곳이 뉴욕(브룩클린), 시카고 등의 미국 중동부 도시 들이며, 오늘날 시카고에는 슬라브식 성을 가진 유대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 현대음악의 선구자인 조지 거쉰-러시아식으로 게오르기 게르쉰-과 재즈의 거장 베니 굿맨, 워너브라더스 영화사의 워너 형제들 등 슬라브 지역 유대인의 상당수가가 이때 건너왔습니다. 러시아 황제의 유대인 박해는 엉뚱하게도 미국의 영화 음악 등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부흥을 가져 왔습니다. 그리고 독일이나 중유럽으로도 많은 숫자가 건너 왔는데 이중 많은 이들이 히틀러의 가스실에서 죽게 됩니다.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이때의 유대인 박해가 우리나라와도 관련이 있다는 사실 입니다. 짜르의 유대인 박해를 지켜보던 유대인들 사이에 분노가 극에 달하고 반러 감정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여 노일전쟁 당시 군자금 부족에 시달리던 일본에게 유대인 재벌가 로스차일드 계열의 "쿤&롭社"(오늘날의 리먼 브라더스)의 야콥 쉬프(제이컵 시흐)가 대부를 해줍니다. 이 돈으로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를 하게 되고 쉬프는 국빈 대접으로 일본을 방문 하게 됩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유대인 문제가 나올 때 가장 첨예한 대립을 불러 일으켰던 것은 바로 “시온의정서” 입니다. 러시아제국의 비밀경찰에서 유대인 박해를 위해 조작 했다고 알려지는 이 책은 유대인의 지도자 그룹이 모여서 미래의 유대인 세계 지배를 하기위한 가이드라인으로 제작 됐다고 알려져 있습니다.(한글판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성<Sex>이나 메스미디어를 통한 대중의 지배부분에서는 어떻게 19세기에 그런 글이 나올 수 있는지 놀라운 부분이 있습니다.) 시온의정서는 나치 치하에서 독일에 대량 인쇄 됐고, 세계 각국에서 반유대주의 얘기가 나올 때 단골로 나오는 책입니다. 짜르의 비밀경찰인 오크리나가 조작했다고 공식적으로 밝혀지곤 있으나 확실한 진위 여부는 논란만 계속 되고 있습니다.
유럽의 유대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영국은 20세기 초에 소위 동아프리카 이주안을 구상하는데 유럽 유대인들을 오늘날의 우간다로 이주시킨다는 계획이었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의 엄청난 반발을 사게 됩니다. 1차대전이 일어나고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있던 오스만 터키와 대립하던 영국은 유대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1916년 벨포어 선언을 발표하고 유대국가 건설에 청사진을 재공 합니다. 사실 벨포어 선언은 공식적인 대외 발표가 아니라 영국 시온주의 단체 대표인 빅터 로스차일드 경에게 당시 영국 외무장관 이었던 아더 벨푸어 경이 “(유대인이 영국의 對독일전 승리를 도와주면)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의 권리를 보장 하겠다”는 개인적인 편지 입니다. 벨푸어 선언이 나올 즘에 영국은 이미 독일에 항복을 고려 할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유일한 구제책은 미국을 전쟁에 끌어 들이는 것이었고 영국에 있던 유대인 대표인 화학자 “카임 와이즈만” 박사(영국군에게 독일에 대항 할수 있는 독가스를 개발해주고 지지를 얻음. 훗날 초대 이스라엘 대통령이 됨)에게 국제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유대인들의 협력을 구하게 되고 결국 유대인 거부인 로스차일드 가문이 움직여서 벨푸어 선언을 이끌어 내게 됩니다.
한편 이에 대한 후속 작업으로서 전 세계 유대인은 하루아침에 친독에서 친영으로 돌아서게 되고 미국 內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운터마이어(Untermyer) 변호사나 그가 윌슨 대통령의 추문 사건을 협박해서 임명시킨 대법원 판사인 브랜디스(Brandies) 대법관 등의 유대인들이 서섹스호 사건(미국 전함 서섹스호가 독일 유보트에 격침 되었다는 사건, 완전 허구로 판명)을 조작해서 미국을 참전 시키게 됩니다. 훗날 서섹스호 사건이 조작으로 판명 되면서 공식적인 미국의 참전 명분은 우리가 흔히 아는 루시타니아호 사건 이라고 얘기 되고 있는데, 이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루시타니아 호 사건은 1915년에 발생 하였고 미국의 참전은 1917년 4월로 2년의 시차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서섹스호 사건은 역사 속에서 완전히 잊혔고 독일은 1917년 11월에 패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의 베르사유 강화 조약에도 위의 유대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는데(독일 외상 인 유대인 발터 라테나우는 이 조약에 서명 했다는 이유로 몇 년 후 암살당합니다.), 독일은 알자스-로렌 땅과 폴란드 서쪽 단찌히를 비롯한 모든 해외식민지를 잃습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배후 음모(설)에 독일인들은 크나큰 분노를 하게 됩니다. 여기서 부터가 유대인 학살의 단초가 됩니다.
1차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은 남부의 바이에른이나 기타 지역에서 일시적이긴 하지만 소위 소비에트 위원회가 성립합니다. 러시아 혁명을 통해서 많은 러시아인들이 서방으로 망명(이 당시 파리시의 택시 기사의 1/3이 러시아인이었고 비자가 필요 없었던 국제 도시 상하이에서는 많은 러시아 귀족/장군들이 호텔의 문지기를 하고 이들의 딸들은 몸을 팔게 됩니다.)하고 그들의 재산을 박탈당한 속에서 많은 독일인들이 비슷한 운명을 겪지 않을까 공포에 떨게 되는데 독일 공산당의 전신인 “스파르타쿠스단”이 1919년에 반란을 일으키자 주로 제대군인 출신의 우익계 병사들은 “자유군단”을 조직해서 이에 대항합니다. 1차대전후의 혼란기에서 실제로 많은 유대인들이 사회주의 내지는 공산주의 편에 서서 활약을 하는데 공산당선언을 한 마르크스는 차치하고라도 바이에른 소비에트 위원회의 의장인 쿠르트 아이즈너, 에리히 뮈흐잠과 스파르타쿠스단의 지도자 리프트크네히트의 부인인 여전사 로자 룩셈부르크, 러시아의 트로츠키(트로츠키의 역할은 참으로 결정적이어서 당시의 서구인들은 러시아 혁명에서 레닌과 트르츠키 두 사람만 기억 할 정도였습니다.), KGB의 초대 국장 격인 제르진스키, 헝가리 소비에트의 당수로서 잠시나마 헝가리를 지배했던 벨라 쿤 등 여러 유대인 좌익 활동가들이 등장 합니다.(독일 역사가인 브리기테 하만의 책에 따르면 이당시의 독일 내 좌익 지도자 그룹의 10% 이상이 유대인 출신 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우익의 왜곡 선전과 맞물려서 상당수 독일 국민들에게 “공산주의=유대인”의 등식이 성립하고, 이러한 인식이 훗날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에 대해 대중적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한 요인이 됩니다.
1929년에 미국에서 세계대공황이 발발하고 그 여파로 독일경제도 침체 상태에 놓이게 되는데, 당시 실업자가 정부 통계로 600만 이상이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중산층이 몰락하고, 중도좌파와 중도우파 정당들이 지지기반을 잃어가는 와중에서 독일인들은 극좌와 극우사이의 선택에 놓이게 됩니다. 결국 독일인들은 히틀러를 택하게 되는데 이에 대한 반발로서 33년에 국제 유대인 연맹(회장 운터마이어)이 암스테르담에 모여 독일 상품 불매운동을 전개 합니다. 수출에 의존하는 독일은 이에 대한 반발로서 자국 內 유대인 상점 불매운동을 전개하고 이후의 여러 유대인 박해 법안과 크리스탈나흐트(1938년 독일 외교관이 파리에서 유대인에 의해 살해된 것을 계기로 전독일의 유대인 소유 상점의 유리를 깨고 약탈한 사건)를 거치면서 결국은 아우슈비츠의 가스실과 소각로로의 길을 가게 됩니다.
중세 말 독일에서의 유대인 박해
글쓴이 : 마사유키 후루카와
이 글은 중세 말기에 독일에서 일어난 유대인 집단학살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분석하려고 한다. 기독교 사회에서 이교도들에게 가해진 잔혹한 억압 현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중세시대의 유대인 박해는 디아스포라의 개념과 관련지어져 왔다. 현재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통설은 유대인들이 기독교 신앙이 지배하는 중세 유럽에서 근본 없는 떠돌이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유대인들은 그들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기독교 사회에서 추방된 소수자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 한 예로 낭만파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가 쓴 소설 『바하라흐의 랍비(Der Rabbi von Bacharach)』 중 한 구절을 보자. 하이네 역시 유대인이었으며, 라인 강 유역의 작은 마을인 바하라흐에서 일어난 한 유대인의 추방에 관한 이야기를 썼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첫 번째 장소인 바하라흐는 유대인 박해의 역사에 있어서 중대한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당신은 여기서 시민권을 잃어버린 채 서로 격리되어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작은 유대인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로마 제국이 지배했던 시대부터 바하라흐에 거주했으며, 심지어 살아남기 힘든 시절에도 박해로부터 도망쳐온 그들의 종교적 동지들을 받아들였다(Heine 55: L.11-15).”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바하라흐의 랍비 아브라함(Abraham)은 그러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는 아기를 한 명 살해했다는 혐의 때문에 마을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는 이 마을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는 마을의 랍비였다. 그의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유언은 그가 아버지와 같은 일에 종사하는 것이었고, 그가 생명에 중대한 위협을 느끼지 않는 한 바하라흐를 결코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명령이었다(Heine 56: L.16-19.).” 랍비 아브라함은 그의 자발적인 동기 때문이 아닌 거짓된 고발에 따른 추방 선고 때문에 마을을 떠나야 했다. 하이네의 이 이야기는 중세 시대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라는 확실한 개념 위에서 성립되었다. 19세기 초에 쓰여진 낭만주의 문학은 우리에게 특정 사회에서 이질적인 존재이며 단지 추방된 디아스포라(Diaspora)였던 유대인이라는 주제를 제시하고 있다. 현 세계에서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들의 고향에서 떠나 낯선 나라로 옮기라는 강요를 받는다. 디아스포라의 개념은 재분석되면서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이것은 비단 유대인 역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떠한 역사적 개체들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유대인의 디아스포라는 여러 다양한 종류의 디아스포라 중 대표적인 한 예로 인식된다(Akao 46). 따라서 하이네에 의해 제시된 유대인의 개념이 디아스포라 개념에 대한 현재의 논의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 우선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의 개념을 대표하는가? 중세 유럽의 역사에서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박해받거나 추방되었다. 그렇지 않은가? 유대인들은 매우 이질적인 존재였고, 글자가 의미하는 그대로 디아스포라였다. 하지만 디아스포라 상태로 사는 유대인의 운명이 필연적으로 특정한 사회 내에서 그들의 특이성에 기초한 것이었는가? 유대인의 비극적인 상황은 박해가 일어났던 중세 독일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었나? 게다가 유대인들이 고난의 나날들에서도 살아남았던 대량학살이라는 경험을 가진 독일 역사의 특수성이 근거가 될 만한 어떠한 증거도 없이 언급되어 왔다. 이처럼 폭넓게 받아들여진 이해, 즉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실질적으로 행해지고 그것이 중세 초부터 지속되고 있다는 것은 역사적 관점에서 연구되어야 한다.
이것은 이러한 주제를 연구하기 위해서 중요한 단서가 된다. 유대 민족에 대한 박해는 중세 유럽의 기독교 세계나 중세 독일에서만 일어난 특수한 현상은 아니다. 중세 말 독일의 유대인 박해는 오히려 근대 초에 일어난 ‘종교적 폭력’의 선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572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은 비교될 수 있는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미국의 역사학자인 나탈리 데이비스(Nathalie Z. Davis)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 경제적 이유와 같은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요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데이비스는 그 사건이 종교적 이념에 대한 광신적 믿음으로 보이는 소위 ‘온당한(rational)’ 이유에 기반 하여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데이비스에 의해 정의된 종교적 폭력의 개념은 중세 말 독일에서 일어난 유대인에 대한 박해에도 적용될 수 있다. “종교적 폭력은 어떠한 정치적 혹은 그와 관련된 권력과도 상관없는 일반 시민에 의해 언어와 무기를 가지고 특정한 종교적 대상에 대해 가해지는 모든 종류의 폭력을 의미한다(Davis 203).” 확실히 중세 유럽의 기독교화와 유대민족에 대한 박해 사이에는 어떠한 연결고리가 있다. 여기에서 기독교화와 유대인 박해가 우리가 쉽게 상상하는 고착화된 방식에 의해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의문이 떠오른다.
유럽의 반유대 역사에서 1096년은 ‘운명적인 여름(Poliako)’으로 불리며 대단히 강조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 되고 있다. “중세 유럽의 문명에서 기독교 십자군의 역할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즉, 상업 활동과 지적 기반의 진화는 도시 부르주아 계급의 발전을 가져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독교에 기반 한 유럽이라는 자의식의 확립으로서, 이러한 점은 기독교 십자군 초기에 쓰인 역사 문헌에서 나타난다(Ruciman 113).” 그러한 사실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십자군을 옹호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은 복음서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장소로서 강조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정확히 유대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물론 기독교도의 명백한 적은 이슬람교도들인데, 이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기독교인들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슬람보다 더 나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 그 자신을 공격했기 때문이다(ebd.).” 많은 사람들이 십자군의 부름에 진정으로 답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들 중 몇몇 사람들은 자신들이 공격할 첫 번째 목표물이 이슬람교도가 아닌 유대인이라고 생각하며 십자군을 떠났다. 그 결과 유혈 폭력이 슈파이어, 보름스, 마인츠 같은 몇몇 도시에서 일어났다. 이 도시들은 당시 독일에서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지역이었다. 유대인들은 광범위한 폭력을 예견했을까? 문헌으로 판단해 보건데, 아마 그들은 결코 기독교인들에 의한 그러한 박해를 예측하지 못한 듯하다.
제1차 십자군이 시작되었을 때 프랑스에서는 한 가지 소문이 떠돌았다. 만약 십자군들이 성지에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들이 유대인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프랑스에 있는 한 유대인 공동체는 라인 지역에 있는 또 다른 공동체에 이 소문을 알려주었다. 이 문제를 논하고 있는 편지에는 프랑스에 있는 유대인들을 적으로부터 구해달라는 요청이 담겨 있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마인츠에 있는 한 유대인 공동체는 그러한 요청을 받았고, 물론 그들은 프랑스에 있는 이웃에 관심을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인츠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그때까지 그러한 소문을 결코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소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낙관적인 답변을 주었다(Aronious No.177). 이것은 당시 독일에서 나타난 전형적인 상황 중 하나이다. 제1차 십자군이 진행되고 있을 때, 자신의 삶이 위협받을 거라고 생각한 유대인은 많지 않았다. 유대인 탄압에 대한 많은 문헌들을 고려할 때, 이러한 낙천적인 태도는 실망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1096년 여름에는 기독교 사회에서 유대인에 대한 광범위한 박해가 전혀 예측 가능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교회와 정치권력 모두 폭력을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러한 폭력사태가 일어날 거라고 판단하지 않았다. ‘왕실 금고의 시종(das Kammerknecht)’이라 불리는 유대인들은 경제적으로 성장해 있었고 권력자들로부터 그들의 행정력을 높이 평가 받았다. 공문서들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종교신앙을 전파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보호가 항상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13세기 말의 시대적 상황은 유대인에 대한 보호조치가 그 한도를 넘어 끝났음을 드러내었는데, 그 이유는 슈타우펜 왕조의 몰락이 왕의 권력을 약화시켰기 때문이다. 이는 독일의 몇몇 지역들에서 유대인에 대한 수많은 폭력적 박해들을 불러일으켰다. 정치권력의 약화가 이러한 박해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다. 유대인을 위협한 또 다른 요소는 그들의 경제력이었다. 물론 경제력이 없는 유대인들은 통치자들에게 있어 이용가치가 없었다. 이러한 요인은 통치자들에 의한 유대인의 추방을 야기했다. 이는 유대인에 대한 억압이 두 가지 방식으로 행해졌음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비통치자에 의한 폭력적인 박해와 통치자에 의한 추방이었다. 이 두 가지 유형의 억압 방식에 근거하여, 유대인 탄압이 독일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었다는 주장은 그럴싸해 보인다.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초까지 통치자에 의한 유대인의 박해와 추방은 독일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발생하였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는 1321년에 유대인이 추방령으로 고통 받았다(Nahon; Chazan; Mentgen). 이 사건은 1290년에 앙주 가문의 지배하에 있던 잉글랜드와 유럽 대륙의 지방에서 유대인이 추방당한 사건에 뒤이어 일어났다.
다른 유대인 집단들 또한 샹파뉴 백작령, 부르고뉴, 그리고 바르(Bar) 지방에서 추방이라는 같은 길을 걸어야 했다. 이 지역들에서 일어난 박해는 신성로마제국 서부로 유대인들의 유입을 증가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한 상황이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외적 갈등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 공동체 사회들 간의 내적 갈등 또한 야기 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브라반트와 네덜란드의 경우는 유대인들이 증가한 예로써 연구되어 왔다. 클루제(Cluse)는 이 지역의 유대인 인구증가가 프랑스에서의 유대인 배척이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상황은 14세기 초 브라반트 지방과 몇몇 도시들 사이의 정치적 갈등에 이용되었다. 따라서 브라반트 지방에서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박해는 특정한 정치적 관계와 지역적인 상황에 따라 제한을 받았다는 그의 주장은 신빙성이 있다. 이는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전 국가적으로도 전 유럽적으로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작은 단위의 지역 차원에서는 행해져 왔음을 의미한다. 가장 폭력적 추방의 대부분은 단지 한 도시나 공동체에서 벌어졌고, 결코 지역 단위 바깥으로 그 영향력이 확대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추방이 각 지역에 따른 개별적 이유들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유대인에 대한 많은 박해들이 많은 지역들에서 동시에 일어난 것이 우연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반유대운동은 기독교의 발달과 중세 시대에 유대인들은 국왕에게 세금을 내서 왕실 금고를 채워주는 반대급부로 국왕권에 의해 보호를 받았다.
여기 한 예가 있다. 이는 반유대운동의 발달과 실제적인 폭력행위들 사이의 관계를 고찰하기 위한 것으로서, 라인 강 유역 중부에서 일어난 ‘선량한 베르너(Der gute Werner)’사건이다. 사건의 장소는 라인 강 중부지방의 작은 마을인 오버베젤(Oberwesel)부근이고, 때는 1287년 성금요일 미사 날이었다. 어린 기독교인 소년 베르너는 한 무리의 유대인들에 의해 3일 이상 고문을 받아, 과다출혈로 죽게 된다. 그의 시체는 오버베젤 남쪽에 위치한 바하라흐라는 작은 도시로 떠내려갔다. 소년의 시체는 빛을 발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소년의 시신과 관련된 또 다른 기적은 그를 숭배하는 많은 사람이 (병을 치유하는 힘을 가졌다고 믿어지는) 시신이 안치된 바하라흐를 방문한 것이었다. 오버바젤의 유대인들이 이 ‘선량한 베르너’의 살해 혐의를 받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진실여부는 더 이상 밝혀낼 수 없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 당시 유대인 추방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정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러한 박해는 오직 한 장소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모젤, 라인, 루르(Ruhr) 등 유대인이 거주하는 20개 이상의 지역들이 유대인에 대한 광포한 배척에 연루되었다. 심지어 그 지역의 통치자들이나 왕도 그러한 유대인 배척 사태를 막지 못했다. 14세기에 쓰인 베르너의 성인열전은 신앙을 위한 그의 순교가 일종의 희생 의례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 사건은 성체에 대한 신성모독이라는 비난을 불러일으켰다고 주장하고 있다(Rubin 1992). 이 성인전은 오버베젤의 유대인들이 성목요일의 성찬 미사에서 돌아오는 어린 베르너를 납치했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그들의 목적은 베르너에게서 그가 납치되기 직전에 받은 성체를 빼앗기 위한 것이었다. 이 사건의 결과, 베르너에 대한 뿌리 깊은 숭배의 전통이 생겨났다. 성인숭배는 유대인 축출과 관련하여 인식되었다. ‘선량한 베르너’에 대한 숭배가 라인 강 중부 지방에서 광범위하게 퍼졌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실이다. 근거가 되는 증거들은 유대인에 대한 다른 동시대의 박해들이 좁은 지역에서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비슷한 박해 사건들은 유럽의 다른 여러 지역에서도 나타났다. 이미 언급된 프랑스에서의 유대인 추방은 1290년대에 파리에서 일어난 성체에 대한 신성모독 이야기와 관계가 있다(Chazan). 성체에 대한 신성모독은 당시에 잘 알려진 것이었다. 이 에 관한 이야기는 유대인들이 기독교도들에게서 성체를 훔친 사건을 말해주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 기독교인 측에는 여자들과 아이들이 포함되어 있고, 유대인은 몇몇 동료들이 모여 집단으로 범죄를 저지르도록 되어있다. 그들은 성체를 훔치고 그것에 고문을 가한다. 이러한 점은 이 사건이 양쪽 측면에서 검토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유대인 박해가 각각의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는 반유대 행위를 지지하는 전통이 폭력적 박해의 행위들 이면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화의 확산은 13세기 말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기원은 언제일까? 제4차 라테란 공의회가 그 기원으로 정의될 수 있다고 이야기된다(Dekrete 230). 그 첫 번째 헌장(constitution)은 성변화(transubstantiation)의 개념, 즉 빵과 포도주가 미사에서 그리스도의 피와 살로 변한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이론을 밝히고 있다(Rubin 1991). 이 이론의 확산은 성체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상정할 수 있는 개념을 낳았고, 이는 성체 그 자체가 숭배의 본질적 대상이라는 인식으로 이어졌다. 그러한 전통에 기초한 박해가 13세기 초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선량한 베르너’의 이야기는 유대인에 대한 폭력적 박해 사건의 전형적인 사례로 인식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또한 명예를 위한 살인과 유대인에 의한 성체의 신성모독을 담고 있다. 이러한 전승은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한 종교적 불관용과 유대인의 재산에 대한 공격 모두를 정당화하였다. 이 개념에 기반 한 이야기들은 종종 유대인들이 성체를 탈취하여 자신들의 구역에 감추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빼앗긴 성체를 되찾는 것은 유대인 구역의 약탈을 정당화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유대인이 행한 몇몇 성체 도난사건은 1300년경에 슈레트스타트(Schlettstad)의 루돌프가 쓴 서사 문학에 기록되어 있다(Rudolf von Schlettstadt; Gurevich. about Rolle of Mendicants, Cohen). 이 기록의 대부분은 포교활동을 위한 자료로서, 이는 소위 ‘린트플라이슈(Rindfleisch) 박해’라 불리는 사건과 관계가 있다. 이 학살은 1298년 4월 20일 프랑켄 지방의 뢰팅겐(Rottingen)에서 시작되었다(전체적으로 Lotter의 글 참조). 석 달도 안돼서 프랑켄 주변의 약 130개에 달하는 장소가 공격당했다. 이 사태의 주동자인 린트플라이슈는 푸줏간 주인이나 몰락한 귀족으로 짐작되며, 스스로 왕이 될 거라고 주장했다고 전해진다. 린트플라이슈를 왕으로 모시는 하층 시민들이 유대공동체들을 공격했던 것이다. 이러한 광포한 박해 사태들은 후에 성체를 모독한 유대인을 공격한다는 주장에 기초하여 박해자들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반유대운동이 더 광범위해질수록 폭력은 더 쉽게 확산될 수 있었고, 박해의 양상은 연속적인 형태로 고착화되었다. 가장 최후에 나타난 박해의 물결은 1336년 프랑켄 지방의 뢰팅겐에서 비롯되었다. 이미 그 도시에서는 린트플라이슈 왕이 나타난 바 있다. 반유대운동의 새로운 물결의 원인을 연구하는 데에는 두 가지 분석법이 있다. 하나는 성체가 그리스도 성체절에 약탈되었다는 의견이고, 또 다른 것은 기독교도 아이 하나가 유대인들에게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몇몇 박해들이 위시크하임(Uissigheim)의 아르놀트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는 아름레더(Armleder), 즉 팔에 가죽 끈을 두르고 유대인을 학살하는 무법자들의 왕이었다. 박해 행위 자체는 약스트(Jagst)와 타우버(Tauber) 지역 주변의 유대공동체들이 있는 좁은 지역에서만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다음 해 여름에는 반유대운동이 프랑켄 지방 전역과 심지어 마인 지방까지 확산되었다.
유대인 공격은 더 이상 한 작은 지역에서 일어나는 국지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공격자 집단은 과거의 박해사건에서처럼 그 어느 도시에서도 일정한 수의 시민들에게 지지 받았다. 이것은 11세기 십자군 시대의 박해와 비슷한 것이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반유대운동이 일어난 지역이다. 13세기 이후의 박해운동은 결국 프랑켄 지방과 라인 강 중부 지역, 모젤 지방까지 퍼졌다. 1338년 초에 박해는 알자스에 이르렀으며, 그 지역의 주모자는 위시크하임의 아르놀트의 사례를 따라 왕이 되었음을 선포했다. 제국의 힘은 바이에른의 루드비히와 황제, 그리고 로마교황청 사이의 갈등 때문에 확실히 약해지고 있었다. 이 사건들에 기초하여, 절대적 권력의 부재 혹은 취약함이 박해의 발생과 확실히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럴듯해 보인다. 통치자는 1287년 ‘선량한 베르너’ 사건, 1298년 린트플라이슈 왕의 박해와 1336년 아름레더의 왕에 의한 박해와 같은 그 어떠한 박해 사건들도 막을 수 없었다. 통치자들이 한 일이라고는 고작 각각의 폭동이 끝난 후에 그 주모자들을 추방했을 뿐이었다. 예를 들어, 아름레더의 박해의 경우 주모자인 아르놀트는 1336년에 호헨로헤(Hohenlohe)의 고트프리트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뷔르츠부르크 주교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으며, 그 해 가을에 사형 당했다. 이것은 아름레더에 대한 기소가 1336년쯤 종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영향력은 넓게 확산되었으며, 소위 아름레더 사건이라 불리는 일련의 박해들이 1338년까지 계속되었다.
다음 사례는 유대인 박해의 제의적인(ritualistic) 속성에 관한 것이다. 한 가지 전형적인 예가 1287년 ‘선량한 베르너’ 사건에 뒤따라 발생한 안더나흐(Andernach)의 폭동이다. 안더나흐는 라인 강 중부 유역의 도시로서, 유대인들이 상업중심지에서 가까운 도심에 거주지를 갖고 있는 곳이었다. 그 곳에는 시청 주변에 시나고그, 학교, 믹바(mikveh, 정결의식을 행하는 탕), 빵 굽는 오븐과 같은 공동 시설들이 있었다. 이 유대공동체는 유대인이 베르너를 살해 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1287년에 공격을 받았다. 시민들은 유대인들을 욕하기 위한 깃발과 노래들을 만들어 냈고, 그들의 집을 공격했으며 대주교의 재산을 몰수했다. 유대인들은 안더나흐를 떠나 가까이 있는 대주교의 성으로 탈출했다. 유대공동체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쾰른 대주교 지그프리트는 판사들과 한 시민 단체에 중재 법정을 맡겼다(CDRM 2; No.325). 그 재판에서 기사, 판사, 도시 귀족과 시민 공동체는 그 도시에서 유대인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맹세를 해야만 했다. 시민들과 시정관(Schultheis)은 유대인들이 빼앗긴 재산을 찾아서 돌려줘야만 했다. 모든 시민들이 부서진 시나고그와 유대인들의 거주지를 돌려주었고, 대주교 재산을 처음 상태로 되돌려 놓았다. 그 배경에는 대주교가 유대인에게 제공한 특권들이 쾰른의 종교법과 안더나흐시에 의해서도 공인되었다는 사실이 있다. 성 베드로의 유산과 유대인 학교 같은 대주교의 재산을 파괴한 자들이 도시에서 쫓겨나고 그들의 재산이 몰수된 이유는 이 때문이다. 더욱이 시정관, 기사, 판사, 그리고 도시 귀족들은 유대인들이 8월 11일에 그들 자신의 집으로 즉시 돌아가야 한다고 선포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 도시가 왜 그런 판결을 내렸는가 하는 점이다. 대주교와 안더나흐시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는 고위 성직자들은 유대인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은 동시에 그 지역 군주의 권리에 또 다른 손상을 입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특히 박해를 야기하는 비난에 주목했다. “판사들과 도시 귀족들은 유대인을 욕하는 깃발과 노래를 멈추게 해야 한다. 그러한 행위들은 갈등을 불러일으키므로, 그 규칙을 어긴 누구라도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Item scabini prohibebunt et deponent vexilla et cantus probrosos sub certa pena prout ipsis videbitur expedire quia de talibus possit discordia exoriri) (ebd.)” 여기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유대인의 인권이 아니라, 유대인 박해가 군주의 권리를 손상시킨다는 개념이다. 시민들에 의한 박해는 한 공동체의 시민권 범위에 대한 정의와 관련된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의는 대주교나 고위 성직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과는 다르다. 누군가가 그러한 박해에 참여했을 때, 그것은 남녀 시민 자신의 합법성과 종교적 신념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유대인을 매도하는 깃발과 노래를 만드는 것은 공동체의 구성원과 외부인을 구별 짓기 위한 의식의 한 형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점은 데이비스가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에 대한 해석으로 제기한 의견과 중첩된다.
“그리스도의 사형집행자들의 ‘게임’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조작된 행위들과 의식들(ceremonies)은 16세기에 일어난 행위 자체에 대한 폭동의 진정한 의식(consciousness)을 가려버린다. 게임과 의식은 죄의식 없는 유혈참사를 위한 여러 조건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살인이 남긴 가장 중요한 점은 살인자들과 그들이 죽인 중세 독일의 도시에서 법정을 주관하고 세금을 징수하는 역할을 하는 고위 공직자. 법정에서 부과되는 벌금의 일부는 이들의 주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이들이 모두 인간이었다는 사실이다. 바람직하지 않은 요소들은 ‘기생충’이나 ‘악마’로 변모되었고, 폭력적인 의식은 비인간화 과정의 마지막 단계였다(Davis 233).” 지배자들은 유대인들을 동산이나 부동산으로서 그들의 공동체에 포함시키려 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유대인들을 외부인으로 취급했고 그들을 몰아내고자 노력했다. 바로 이 시대는 기독교 공동체로서의 도시가 유대인을 외부인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거부했던 상황을 목격했던 것이다. 왜 유대인들은 그렇게 무자비한 기독교 도시들을 떠나지 않았을까? 만일 그들의 공동체가 기독교 공동체로부터 독립해서 존재했다면, 그들은 쉽게 방랑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유대인 박해시대에 그러한 독립적 공동체들의 존재는 디아스포라로서의 유대인의 정체성을 증명했을 것이었다. 그러한 유대공동체의 이미지는, 예를 들어 아이작 비어(Yitzhak Bear)에 의해 제시된 다음과 같은 분석과 관련이 있다. “케힐라(kehillah, 유대공동체)는 유대 역사의 내재적 산물이다. 주변의 이교도 세계와 동시대 그리스 도시들과는 대조적으로, 공동체의 구조가 그것을 만들어 내는 사회종교적 이상들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그 이상들을 구체화하려고 해야 한다는 자명한 조건 하에서, 케힐라의 조직적 구조가 모든 지역과 모든 사회ㆍ경제적인 계층들(농부, 장인, 상인들)에 적합함에도 불구하고, 디아스포라의 삶은 케힐라를 만들어내지 않았다(61).” 비어는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공동체들과는 완전히 다른 유대인 공동체의 어떠한 특정한 형상을 보여준다. 유대공동체의 이러한 이미지는 그것들의 실체와는 일치하지 않는 듯하다. 중세도시에 관한 전통적인 연구는 도시 사회의 유대공동체들이 ‘특이한 요소’이자 ‘독립적인 사회’였다는 합의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13세기 이전에 이 두 가지 측면들이 명확한 형태로 구분되어 인식되었을까? 중세 초기부터 수많은 교회문서들은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혼혈을 금지하고 비난했다. 이 사실은 두 공동체가 명확한 방식으로 분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역사를 돌아보면, 유대인 박해가 13세기 말부터 계속됨에 따라 기독교공동체와 유대공동체가 분리되어 갔다고 생각하는 것이 신빙성이 있다. 문제는 유대공동체가 분리의 과정에서 기독교 공동체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었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이 시대에 쓰여진 문헌은 유대공동체가 다른 공동체 사회와의 교류 없이 그들 사회체제를 유지하기 어려웠다는 점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당시 로텐부르크(Rothenburg)의 랍비였던 메이르(Meir)의 레스폰사(responsa, 유대 율법에 관한 질문에 대한 답변들)을 보도록 하자. 이 법적인 조언은 도시를 떠나려고 하는 유대인 성인 거주자를 막을 수 있을지 없을지에 관한 질문을 포함하고 있다(Agus No.527). 랍비 메이르는 그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만약 11명 이상의 성인 남성이 남아 있다면 그 사람을 떠나도록 하라. 하지만 10명 이하의 성인 남성만 남아 있다면 다른 사람을 대신 고용하고 떠나게 하라. 이것은 10명의 성인 남자가 유대식 예배를 조직하는데 필요한 정족수(minyan)이기 때문이다. 이 조언은 신성로마제국의 유대공동체들이 거의 구성원을 갖지 못했고, 특히 성인 남자의 수가 부족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 랍비의 레스폰사는 적합한 방식의 예배를 위해 다른 도시로부터 사람들을 고용한다는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이 레스폰사는 (예배에) 필요한 인원수를 구성하고 성가대를 고용하기 위한 예산을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나누어 부담할 수 있다는 또 다른 규율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작은 유대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유대주의에 기반한 예배라는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따르고 싶다면 도시의 또 다른 큰 유대공동체 가까이에 살아야만 했다. 중세 초 이후 유대인들은 기독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소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도시에 집단 거주지를 만듦으로써 그들만의 문화적 관습을 유지했다.
공동체내에서 유대인들이 그곳을 떠나는 문제나 갈등들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에 대한 많은 규정들이 있다. 이러한 점은 중세의 유대인들이 방랑하는 종족으로서의 삶을 편하게 여겼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이다. 바르첸(Barzen)은 신성로마제국의 유대공동체들이 서로 관계를 맺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몇몇 공동체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했다는 예를 제시했다(2002; 2004). 마인츠, 보름스, 슈파이어를 포함하는 케힐로트 슘(kehillot SchUM)은 초기 단계 네트워크의 사례를 보여준다. 13세기 말 유대공동체 네트워크의 범위는 프랑켄과 라인 지방에 공동체를 만들면서 넓어졌다. 그 네트워크는 랍비 메이르의 레스폰사에서 보여 지는 것처럼 인사 업무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유대인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것은 또한 유대공동체간의 네트워크가 신성로마제국의 일부로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처럼, 유대공동체들은 결코 기독교 공동체와 분리되어 있지 않았고, 오히려 공동체로서 고유의 특성들을 확립하기 위해 상호적으로 교류했다. 안더나흐에서 일어난 박해의 경우에는 유대인들이 도시에서 추방당했다. 그들은 탈출하기 위해 흩어지지 않고, 대주교의 성으로 도망갔다. 그것은 돌아가야 할 그들의 장소가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들의 고향인 안더나흐였음을 증명한다. 유대인들은 도시에서 일시적으로 추방당했을 때,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위 사실들을 고려해 볼 때,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기독교도와 유대인의 두 공동체의 형성과정에서 점점 확장되었다. 심지어 박해 받을 때에도 유대인들이 돌아갈 유일한 장소는 그들의 고향이었다. 그들은 반복된 박해에도 불구하고 계속 고향으로 돌아갔고, 이것은 또 다른 박해를 야기하였다. 14세기 중엽 흑사병이 창궐했던 기간에 일어났던 대 박해는 그러한 상황이 확대된 결과였다.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 현대의 디아스포라로 여겨지는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는 디아스포라에 기초한 모호한 정체성에 주어지는 중대한 의미와 문화적 상황을 역설했다. 사이드에 의한 분석들은 우리에게 두 가지 핵심을 제시한다. 첫째, 그러한 자아 정체성(self-identity)은 강력하게 근대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오직 신학자나 교육받은 사람들만이 사이드가 성 빅토르 대수도원의 위그(Hugh of Saint
Victor)의 예를 들어 설명한 그러한 자아 정체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근대의 교양인들에 의해 연구되어 왔던 추방된 유대인의 이미지는 유대인 시인이었던 하이네와 그 시인에 의해 묘사된 바하라흐의 랍비 아브라함의 이미지들을 떠올리게 한다. 하이네는 하나의 절대적 특성으로서 유대인의 방랑을 강조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말로 필요로 했던 바로 그 지식을 획득했다는 사실 때문에 디아스포라로서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1300년경에 독일에 거주하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하이네와 사이드가 제시한 그러한 개념을 공유하지 않았다. 랍비와 같은 오직 소수의 유대인들만이 그들 자신의 위치를 디아스포라의 큰 틀과 연관시킬 수 있었다. 독일의 유대인들은 비록 심하게 공격당했어도 그들이 사는 장소를 떠날 방법이 없었다. 반유대운동의 발전과 유대인들이 계속 동일한 장소에 머무르려는 성향으로 인해 상황은 위태로웠다. 그러한 갈등의 긴장상황은 흑사병에 대한 루머에 의해 야기된 박해의 광범위한 확산 때문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제까지 조사된 바에 따르면, 유대인들의 상황에 대한 몇 가지 가설들이 있을 수 있다. 우선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적어도 13세기 말까지는 독일과 북프랑스에서 서로 분리되어 개별적으로 일어났다. 각 도시에서 연속적으로 박해가 일어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1280년대의 ‘선량한 베르너’ 사건 전까지는, 개별적 박해들은 제한된 작은 지역에서 나타났고 결코 외부로 확산되지 않았다. 14세기 전까지 유대인에 대한 박해의 공통적 특징은 지역성을 띠고 있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 가설은 박해에 한 가지 예외가 있다는 것인데, 이는 곧 십자군 운동 과정 하에서 이루어진 박해를 말한다. 그러나 이 사건 자체는 다른 것들과 구별되는 케이스로 볼 수 있다. 십자군 하에서의 박해는 그렇게 긴 시간 지속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각의 일시적이고 분리된 박해는 국경을 넘어 광범위한 지역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다른 박해들의 근원 중 하나가 되었다. 각 도시의 시민들은 같은 역사적 경험을 공유한다. 다양한 계급들에 속해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 경험을 통해 기독교인들과 유대인 사이의 차이점을 알게 되었다. 13세기에는 몇몇 정치적 정책들이 유대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교회법에 의거한 유대인 보호 규정들 혹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군주들에 의해 만들어진 ‘왕실 금고의 시종’과 같은 특별한 정치적 합의가 바로 그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정책들이 이들 두 종교 집단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
마지막으로, 13세기의 탁발수도사들은 포교활동을 위해 어느 장소든 방문했다. 이러한 활동은 시민들의 기독화에 기여했으며, 이는 종교적인 원론이나 정부의 법보다 아주 효과적이었다. 이러한 기독교화 작업은 유대인을 외부인으로서 인식하고 이들의 박해를 정당화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결국 1300년대 독일에서 어떠한 유대인들도 자신들을 박해했던 공동체들의 성장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경제적 힘과 방랑하는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에 기초한 정서적 편안함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랍비 메이르의 레스폰사가 보여주는 것처럼, 도시의 유대인들은 일상적인 종교적 관습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이 살았던 장소를 떠나길 바라지 않았다. 이는 왜 사회의 소수자였던 유대인들이 유대 네트워크를 위한 연결망으로서 그들의 도시들을 필요로 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