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지도는 한강 하류의 섬이었다.상류에서 떠내려온 흙이 쌓여 생긴 섬이다.난과 지는 난초와 지초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 두 꽃은 그윽한 향기를 내뿜는다.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중초도로 기옥되어 있는데 이 역시 아름다운 꽃이 피어있는
섬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았다.갈대숲이 무성하여 절경을 이루었고 철새들이 찾아오는 섬이었다.
난지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였다.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수많은 전쟁고아들이 생겨났다.
YMCA의 총무 현동완은 전쟁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난지도에 삼동소년촌을 건설했다.1952년 3월,마포구 상암동 8번지,
난지도의 땅을 사서 다섯 동의 건물을 짓고 이듬해에는 미 제5전투연대로부터 의연금을 지원받아 18개 동의 건물을 신축하여
250여 명의 전쟁고아를 수용했다.
"이곳은 너희들의 땅이다.지금은 모래밖에 없는 허허벌판이지만 너희들이 지상낙원으로 만들어라.너희들 스스로 이끌어 가야 한다."
현동완은 삼동소년촌을 보육 시설이라기보다는 소년들의 자치 단체로 만들었다.그들은 현동완과 함께 소년촌의 규칙을 만들었고
초등학교 과정과 중학교 과정을 공부했다.자체적으로 보이스카웃 활동도 하며 지역을 위해 일했고 나이가 많은 소년들은
어린아이들을 돌보거나 공부를 가르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현동완은 삼동소년촌 소년들과 함께 허허벌판인 난지도를 일궈 채소를 심고 꽃과 나무를 심어 아름다운 낙원을 만들었다.
그러나 해마다 장마철이 되면 폭우가 쏟아져 삼동소년촌을 휩쓸어버렸다.그럴 때마다 소년들은 인근의 초등학교로 대피했다가
돌아오고는 했다.
"창주 현동완 선생,선생이 전쟁고아 구호사업을 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대한민국 보건사회부 장관이 되어 나랏일
해주십시오."
하루는 이승만 대통령이 현동완을 보건사회부 장관에 임명하려고 했다.
"대통령 각하,보건사회부 장관은 제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전쟁고아 구호사업은 제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습니다."
현동완은 보건사회부 장관직 제의도 뿌리치고 전쟁고아들을 위해 모든 열정을 바쳤다.
어느 날은 한복 두루마기를 조금 짧게 만들어 YMCA 직원들의 근무복으로 착용하게 했다.
그리고 그는 다백의고견대자(多白衣考見大慈)라는 글을 써서 직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아니,원장님.이게 뭡니까?이거 한복 아닙니까?"
"그렇지.앞으로 이걸 위에다가 입게."
"네?아니 양복바지 위에다가 한복 두루마기를 입으라는 것입니까?그리고 이건 또 뭡니까?
다백의고견대자(多白衣考見大慈)?모두 흰옷을 생각하면서 큰 사랑을 보자?이런 뜻인가요?"
"뭐,그런 뜻이기도 한데,그냥 소리 나는 대로 읽게나."
"다백의고견대자...다백의고견대자...다 배기고 견디자?"
"허허허허,그렇지.잘 참고 견디자는 뜻이라네."
전쟁 직후,전쟁 고아들을 돕기 위해 한 순간도 일을 놓지 않았던 현동완은 1963년 10월 25일 삼동소년촌에서 소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는다.이후 삼동소년촌은 2006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기까지 1,000명이 넘는 소년들을
키워내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보육 시설로 성장했다.
삼동소년촌은 18년 동안 난지도의 주인이었다.그러나 장마를 견디지 못해 1969년 건너편 산으로 이주했다.삼동소년촌이
떠나자 집 없는 가난한 영세민들이 난지도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1960년대 대한민국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지방에서 서울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갈 곳이 없는 그들은 난지도로 몰려왔다.난지도는 영세민들이 주인이 되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구어 나갔다.
서울시는 1973년부터 난지도에 쓰레기를 매립하기 시작했다.쓰레기를 실은 트럭이 하루에 3천 대씩 쏟아져 들어왔다.
난지도에서는 농사를 지으면서 사는 영세민들이 있었으나 쓰레기 매립이 시작되면서 쓰레기장을 뒤져 소위 고물을
주워 파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난지도의 영세민들은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고물을 주웠다.그들은 하루에
여자가 평균 3천 원 남자가 6천 원 안팎을 벌었다.이들 중에 부부가 고물을 주워 생활을 하면서 아들을 고려대학교에
입학시킨 사람도 있었다.그들은 한 달 생활비를 5만 원 정도만 쓰고 나머지는 저축했다가 등록금으로 냈다.
쓰레기를 줍는 영세민들의 즐거움은 하루의 일과가 끝난 후 우물물에 흙먼지를 씻고 저녁을 먹는 것이다.
이들이 주운 고물은 하루에 약 5백만 원,일 년에 약 20억 원의 경제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장마는 피해 가지 않았다.서울시는 상습 수해 지역인 난지도에 제방을 건설하기로 했다.1976년 1월
영세민 취로사업의 일환으로 대대적인 제방공사가 시작되었다.이 공사에 동원된 영세민은 연 인원 10만 명이었고
5천6백 대의 건설 장비와 19억 원의 예산이 투입되었다.제방은 길이가 3천9백65미터,폭 20미터의 제방이 축조되어
약 87만 평이 수해의 위험에서 벗어났다.
서울은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으로 인구 1천만의 대도시가 되었고 막대한 쓰레기를 배출하는 도시가 되었다.
서울시는 1978년 난지도를 공식쓰레기 매립장으로 결정했다.난지도는 쓰레기가 매립되기 전까지는 갈대숲이 우거지고
미루나무가 무성한 땅이었다.갈대숲이 아름다워 결혼한 신랑 신부가 찾아와 사진을 찍은 뒤에 신혼여행을 떠나는 곳으로
유명했다.그러나 공식 매립지가 되면서 난지도는 쓰레기 섬이 되었다.악취가 풍기고 파리떼가 들끓었다.
난지도에는 서울의 쓰레기가 하루도 쉬지 않고 매립되었다.15년 동안 난지도에 매립된 쓰레기는 약 9천1백만 톤에 이르렀고
온갖 산업 쓰레기와 생활 쓰레기가 버려져 산처럼 쌓였다.이 높이는 평균 98미터에 이르렀다.
1993년 난지도는 더 이상 쓰레기 매립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서울시는 쓰레기 매립장을 김포군 검단면에
건설했다.
서울시는 난지도를 생태공원으로 조성하기로 결정했다.난지도 쓰레기 산에서 발생하는 오염된 물이 한강으로 스며들지 않도록
방벽을 쌓고 쓰레기에서 발생하는 매탄가스를 월드컵 공원과 서울월드컵경기장의 열에너지로 활용하는 방안이 모색되었다.
난지도는 생태공원으로 바뀌고 서울월드컵경기장이 건설되어 2002년 한일월드컵의 주 경기장으로 사용되었다.
월드컵공원은 평화의 공원 하늘공원 노을공원 난지천공원 난지한강공원(한강시민공원 난지지구)의 5개 테마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난지도 제1매립지는 노을공원 제2매립지는 하늘공원이다.
전쟁 후에는 전쟁고아들이 살았고 70년대에는 쓰레기 매립장이었던 난지도는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를 쏘아올리면서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다.
-------------------------------------------------------------------------------------------
위의 글은 2014년 2월 서울시가 발간한 '한강이야기 30선 한강이 말을 걸다'에서 옮겨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