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진미륵이 있는 논산시 은진면 관촉리 반야산에 있는 관촉사를 찾았다.
예전 육군 훈련소에 근무하면서도 한번도 찾아보지 못한 관촉사
부여에 수업하러 가기전 잠시 들른 관촉사!!
은진면 관촉2통 마을을 대바우라 부른다.
대바우는 대바우에 배를 묶어 대었다 해서 대바우라 하며
모양이 거북이를 닮았다 해서 거북바위라 부르기도 한다.
관촉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원진 기념탑
자유수호순국지사위령비 이다.
반야산 관촉사 일주문!!
사천왕을 모시고 있는 천왕문!
정왕문에 들어가기 전에 매표소가 있는데
직원이 안계셔서 그냥 입장..
다문천왕(多聞天王)
북쪽을 수호. 수정타에서 생활. 암측계의 사물을 관리하며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 하여 다문.
몸은 흑색, 왼손엔 비파를 잡고 오른손으로 비파줄을 튕기는 형상.
이빨을 드러내고 환한 미소를 지음. 야차와 나찰.
지국천왕(持國天王)
동쪽을 수호. 안민의 신으로 수미산 동쪽 중턱의 황금타에 있는 천궁에 삶.
선한이에게는 복을 악한자에게는 벌을... 온몸은 푸른빛이고 오른손에는 칼,
왼손은 주먹쥐고 허리에 대고 있거나 보석을 올려 놓은 형상. 음악의 신 건달바와 부단나
증장천왕(增長天王)
남쪽을 수호. 수미산 중턱의 유리타에서 생활.
자신의 위덕을 증장시켜 만물을 소생 시키는 덕을 베풀겠다는 신으로
몸은 붉은빛을 띠는 적육색. 노한 눈, 오른손엔 용을 움켜잡고
왼손은 위로 들어 엄지와 검지로 여의주를 들고 있는 형상. 아귀인 폐례다와 구반다.
광목천왕(廣木天王)
서쪽을 수호. 백은타에서 생활. 죄인에게 벌을 내려 심한 고통을 느끼게 하는 가운데
도심을 일으키도록... 몸은 백색. 오른손은 팔꿈치를 세워 삼지창을 들고 왼손에 보탑을 들고 있다.
입은 벌린형상, 부릅뜬 눈, 식혈육귀인 비사사와 용신.
정왕문을 지나 계단을 향해 오른다.
입구 부터 계단이라 조금은 버겁다.
관촉사 입구 좌측에 계단이 놓여져 있어 오르다 보니
계속해서 울타리만 걷돈다.
알고 보니 외부의 등산로 이다.
관촉사의 대웅전인 대광보전의 모습이다.
대광보전은 중앙에 비로자나 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측의 석가모니불, 노사나부처님을 모시고 있다.
관촉사 윤장대의 모습이다.
윤장대는
불교에서 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만든 것을 뜻한다.
책장의 일종으로 불교에서는 경전을 넣은 책장을 돌리면 경전을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을 쌓을 수 있다고 한다. 윤장 또는 전륜장(轉輪藏)·전륜경장(轉輪經藏)이라고도 한다.
중심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에 의지하여 원형 또는 다각형의 나무장을 올린 뒤
여기에 경전을 넣고 손잡이로 돌릴 수 있도록 만든다. 경전은 경장뿐 아니라
율(律)과 논(論), 여러 고승들의 장소(章疏)도 함께 넣어 둔다.
측면에서 본 대웅전의 모습..
관촉사 석문으로 충남문화재 자료 제79호 이다.
관촉사 경내에 들어가려면 통과해야 하는 문으로 크기는 바깥너비 194cm,
안너비 137cm, 바깥높이 196cm이며 석문 자체의 크기는 높이 1.8m, 너비 2.0m이다.
다른 사찰에서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문으로 입구의 양쪽에
돌기둥을 세우고 윗면 천장에 5개의 장대석을 얹음으로써 4각형의 석문을 이루고 있다.
돌기둥은 너비 40㎝의 직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축조연대에 관한 고증이나 기록은 없으나
고려시대로 추정되며 사찰이라는 도장에 들어가기 위한 문이라는 뜻에서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한다.
구전에 의하면 관촉사를 창건하였을 때 참배객이 너무 많이 몰려
이를 막기 위해 담장을 쌓고 사방에 문을 내었는데,
그중 동문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이 석문이라고 한다.
충남유형문화재 제53호 인 관촉사 배례석(灌燭寺拜禮石)
관촉사 석등(보물 232)에서 약 10m 동쪽으로 떨어진 화단에 있는
직사각형의 대석(臺石)으로 길이 204cm, 너비 103cm, 높이 40cm이다.
바닥에는 2단의 직각괴임을 각출(刻出)하고 그 위의 면석에는 전면에 3개,
단면에 2개의 안상(眼像)을 새겼고, 안에는 고사리무늬 같은 버섯구름 모양을 양각했다.
1단의 면석 위에 2단의 괴임이 있으나 서남향의 면석은 마멸되어 잘 보이지 않는다.
윗면 중앙에는 커다란 연꽃單瓣八葉)이고, 중앙에는 커다란 원좌(圓座)가 있으며
그 안에는 가운데 1개와 주변의 8개의 씨방이 연주문(蓮珠文)처럼 돌려져 있는데 음각이다.
연꽃의 잎끝이 뾰죽하며 그 사이에 다시 중판의 연꽃잎이 뾰죽하게 양각되어
꽃이 가지에 달려 있는 듯 실감나게 조각되어 있다.
절을 찾은 불자들이 여기에 올라 합장 배례하며 극락을 동경하면서
불심을 키웠다고 하는 이 배례석은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218)과 함께
968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관촉사 석탑[ 灌燭寺石塔 ]
화강석으로 만든 높이 3.43m의 고려시대 석탑이다.
현재 남아있는 형태는 4층 석탑으로 보이지만 옥개석의 체감 비율로 보아
오층 석탑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상륜부는 별다른 장식 없이 보주(寶珠)만
올렸으며 기단부의 지대석(地臺石, 탑의 주춧돌)은 2층으로 쌓았다.
석탑 옆에는 보물 제232호인 관촉사 석등(石燈)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3호인 관촉사 배례석(拜禮石)이 있다
관촉사 석등[ 灌燭寺石燈 ]
1963년 1월 21일 보물232호로 제정되었다.
높이 5.45m의 화강석제로 이루어져 있다.
하대석은 8꽃잎의 복련(覆蓮)을 조각하고 윗면에 2단 받침을 마련하여
간주(竿柱)를 받고, 간주석(竿柱石)은 원주형으로 중앙부 원대(圓帶)에
4꽃잎의 복련을 장식하였다. 상대석은 방형이며, 하면에 8꽃잎의 앙련(仰蓮:위로 향환 연꽃火舍石)은 2층으로, 하층의 주화사(主火舍)는 마치 네 기둥집 모양으로 되었고,
상층 화사석은 형식적으로 전·후면에만 화창(火窓)을 조각하였다.
옥개석은 네 귀가 반전(反轉)을 보이고, 정상에는 보주(寶珠)가 있다.
968년(고려 광종 19)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성각으로 올라가는 계단 주변의 꽃들이 아름답다.
삼성각은 불교 사찰에서 산신(山神)·칠성(七星)·독성(獨聖)을 함께 모시는 당우를
일컫는다.
삼성각 중앙 입구에 있는 작은 돌에 얽힌 일화가 특이하다.
삼성각앞에서 바라본 관촉사의 전경이다.
크지도 작지도 않으면서 포근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삼성각에서 바라본 은진미륵..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 論山灌燭寺石造彌勒菩薩立像 ]
국보 제323호. 우리나라 석조불상 중에서 가장 큰 불상으로서 크기가 17.8m이다.
일명 ‘은진미륵(恩津彌勒)’이라고도 하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백호(白毫: 원래 흰 털을 뜻하지만,
후대에 보석 등으로 대체됨) 구멍에서 발견된 묵서(墨書) 기록을 통하여 고려시대인 968년경에 조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촉사는 비사실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은진미륵으로 유명하다.
해인사로 옮겨간 [목우자수심결], [몽산법어] 등의 판본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관촉사가 품은 가장 빼어난 보물은 단연 은진미륵이다.
우리나라 최대의 석불로 유명하지만 시민의 가슴에는 가정의 안녕과 행복을 염원하는 미륵불로
언제나 인자한 미소로 서 있다. 논산에서 제일 먼저 가볼 수 있는 곳이
은진미륵으로 유명한 관촉사다.
들판에 젖무덤 같이 소담하게 부푼 반야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관촉사는
시내에서 1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다.
이 보살 입상의 발 부분은 직접 암반위에 조각하였으며,
그 위에 허리의 아래부분, 상체와 머리부분을 각각 하나의 돌로 조각하여 연결하였다.
이 거대한 불상은 그 규모는 물론 토속적인 조각이라는 점에서도 단연 대표적인 작품으로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은진미륵 국보지정]
문화재청은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일명 은진미륵)을
2018년 4월 20일 국보 제323호로 승격하였다.
국보 제323호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論山 灌燭寺 石造彌勒菩薩立像)은
1963년도에 보물로 지정된 후 55년 만에 국보로 승격된 것이다.
이는 보물로 지정된 고려 시대 불교조각 중 월등한 가치를 지닌 대상을 국보로 승격시킴으로써,
국민과 해당 문화재에 대한 위상을 새롭게 공유하고 더 나아가 이 시대 불교조각에 대한
재평가도 함께 이루어지는 계기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된다.
* 미륵보살(彌勒菩薩): 석가에 이어 미래에 출현하는 부처.
우리나라에서는 미륵신앙이 현세를 구원하는 희망의 신앙으로 수용되어 폭넓게 유행함
‘은진미륵(恩津彌勒)’으로도 잘 알려진 이 석불입상은 높이가 18.12m에 달해
우리나라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고려 말 승려 무외(無畏)가 쓴 글인「용화회소(龍華會䟽)」와
조선 시대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
고려 문인 이색(李穡, 1328~1396)의 목은집(牧隱集)등에 이 석불입상의 기록이 남아 있는데,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고려 광종(光宗, 재위 949~975)의 명으로 승려 조각장 혜명(慧明)이
제작하였으며, 고려왕실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당대 뛰어난 조각장의 솜씨를 빌려
탄생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 혜명(慧明): 1025년(고려 현종 16)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 제작했다고 알려진 승려로,
당시에는 저명한 장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
석불입상은 좌우로 빗은 머릿결 위로 높은 원통형 보관(寶冠, 불상의 머리에 얹는 관)을 썼고
두 손으로 청동제 꽃을 들고 있다. 널찍하고 명료한 이목구비는 멀리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인상적이며, 불상의 재료인 압도적인 크기의 화강암에서 느껴지는 육중함은
고려의 권위와 상징을 보여준다.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정제미와 이상미를 추구한 통일신라 조각과는 전혀 다른
파격적이고 대범한 미적 감각을 담고 있는 조각상으로, 우리나라 불교신앙과 조각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독창성과 완전성이 뛰어나 국보로 승격할 가치가 충분하다.
석조미륵보살 입상을 다양한 각도에서 본 모습.
거북바위를 닮았다고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거북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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