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계천은 태고 적부터 흐르고 있었다.고려 때 한양에 궁궐을 축조하고 남경을 건설하였다.한양에는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았다.자연하천 청계천을 특별관리를 할 필요가 없었다.그때까지는 청계천은 그냥 이름없는 자연하천에 불과했다.
그 자연하천 청계천은 조선왕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역사의 중심무대로 등장한다.
백악과 남산 낙산과 인왕산 내사산(內四山)을 중심으로 한양도성을 둘렀다.풍수지리상 명당 조건을 완벽히 갖춘 한양이다.
명당 한양도성 안쪽에서는 생기(生氣)를 뒷받침해주는 명당수 내수(內水)가 필요했다.그 명당수는 서출동류(西出東流)해야 한다.
인왕산에서 시작한 청계천은 내사산에서 도성 안으로 몰려드는 물줄기를 끌어안고 도심을 가로질러 동쪽으로 흘러 한강을 만난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힘차게 흐르는 한강이다.그 한강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청계천과는 서로 역수(逆水)로 기능을 해서
한양도성의 생기를 북돋아주는 시너지효과를 낸다.
조선왕조는 한양에 도시를 건설하게 되면서 청계천은 도시의 공간구조를 구획하는 중심축이 되었다.
청계천을 따라 동서로 가로지르는 대로(大路)가 형성되었다.청계천 이북에는 궁궐과 종묘 사직 관아들이 배치되었고
동서대로와 청계천 사이에는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市廛) 상가들이 형성되었다.청계천 이남에는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세종 때 집현전 학자 이현로(李賢老)는 "풍수상의 명당수로서 청계천을 늘 깨끗하게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집현전 교리 어효첨(魚孝瞻)은 도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므로 더러운 것이 많이 생기기 마련이며 따라서 이것을
배출할 하천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종은 이 두 사람의 논쟁에서 어효첨의 주장을 받아들여 청게천을 생활하천으로 결정,준설작업을 벌인다.
그로부터 조선왕조 500년 동안 청계천은 도성에서 배출되는 많은 생활쓰레기를 씻어내는 하수도로서 기능을 맡게된다.
청계천은 내사산에서 흘러 들어오는 지천을 통해서 서울 곳곳에 생명수가 전달될 수 있었으며 반대로 서울 곳곳에서 버려지는
더러운 것이 청계천을 통해서 배설됨으로써 도시 전체가 깨끗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청계천은 수도 서울의 중요한 배설기관이었다.
역대 정부는 서울시민들의 생활개선을 위해 청계천 준설작업을 벌였다.
태종 세종 영조 순조 고종 등 조선의 왕들은 청계천 관리에 심혈을 기울였다.태종은 개천도감을 설치하고
52,800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대대적인 하천을 쳐내는 개천공사를 실시하였다.이때 이름없는 자연하천 청계천을
'개천(開川)' 이라는 고유명사를 얻는다.세종 영조 순조 고종 대에 대대적인 개천준설작업을 벌여 개천관리에 나섰다.
청계천은 당시 상업과 수공업의 중심지였다.청계천 주변은 도성 내 대표적인 유흥가였고 또 도성사람들의 놀이터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개천이라는 이름 대신 청계천으로 불리기 시작했다.또 여러차레 개수작업도 벌였다.
해방과 6.25한국전쟁 이후 청계천 변에는 판자촌이 형성되는 등 크게 변화한다.
1958년부터 시작한 청계천 복원공사는 광교에서부터 마장동까지 청계천을 완전 복개했다.
그 자리에는 길이 5.6킬로미터 폭 16미터의 고가도로를 건설하였다.바로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의 상징물로 등장한다.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의 상징물 청계천 고가도로는 서울의 흉물로, 골치덩어리로 변한다.
2002년 7월 청게천 복원을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간다.1년동안 각계 의견과 전문가들의 진단 검토를 거쳤다.
마침내 2003년 7월 청계천복원공사를 시작된다.모두 3867억원의 비용을 투입해 2년3개월안에 복원을 마무리한다.
청계천은 서출동류(西出東流)의 명당수였다.서울의 도시팽창으로 서출(西出)의 수원(水源)을 학보하기가 어려웠다.
동쪽 뚝섬 근처 한강에서 물을 전기로 광화문까지 끌어올려 동쪽으로 흘려보내야 했다.동출동류(東出東流)의 청계천이다.

육중한 콘크리트 구조물 고가도로가 짓누르고 있던 청계천이었다.그 고가도로 밑에서는 생활하수 등 각종 쓰레기가
쌓여 몹시 썩어가고 있었다.서울의 흉물, 시멘트로 복개된 청계천에 그 고가도로를 걷어내고 물길을 내고 나무와 꽃을 심었다.
서울 도심지 또하나의 명물 공원으로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새 물길에는 새들이 찾고 물고기도 몰려 서울의 허파기능을
하고 있는 청계천이다.

경복궁~육조거리~운종가~광통교~숭례문 한양도성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중심통로에 자리한 광통교다.
왕이 능행을 하거나 성밖으로 행차를 할 때 이 광통교를 건너 다녔고 중국에서 사신들이 오고 갈 때에도 이 광통교를 건너
궁궐로 들어갔다.

조선 초 도성건설 때 처음에는 흙으로 만든 토교(土橋)였다.1410년(태종 10) 8월에 큰 비가 왔다.
흙다리가 떠 내려갔다.그리고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는 피해가 발생하였다.흙다리 대신에 돌다리를 새로 놓았다.
조선의 초대 왕비 신덕왕후 강비의 정릉의 돌을 사용해서 돌다리(石橋)를 건설한 것이다.

광통교 남북 양쪽 교대에는 정릉의 부재로 사용되었던 신장석(神將石)과 금강저(金剛杵)가 생겨진 우석(隅石) 등
여러 개의 석물이 남아있다.이 석물 가운데는 거꾸로 놓인 석물들이 보인다.이를 놓고 서로 다른 해석이 나온다.
태종 이방원이 신덕왕후 강비에 대한 원한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그 왕릉의 돌로 다리를 만들어 뭇 사람들이
밟고 다니도록 했다는 해석이다.
당시 운반기술이 시원치 않아 그렇게 되었다는 주장이다.석재 하나에 거의 10톤이 넘는다.이 석재를 어렵게 옮겨와 석물의
무늬를 읽지 못한 석공들이 잘못 놓은 것이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워낙 무겁고 육중하기 때문에 바로 잡는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신덕왕후에 대한 원한 때문에 교대를 거꾸로 놓았다면 모두 거꾸로 놓아야 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석물은 바로 놓여 있는 것,거꾸로 놓인 것,옆으로 누워 있는 것 등이 뒤섞여 있는 점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천 준설사업에 가장 심혈을 쏟은 영조이다.
오간대문 현장에 지휘소를 마련하고 거둥하여 준설작업을 지휘한다.
그는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고 57일간 연인원 21만명을 투입하여 대대적으로 개천을 정비하였다.
자신이 80평생 동안 한 3가지 일 중 하나가 준천이라고 말할 정도로 개천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영조다.

영조가 개천작업을 지휘한 현장에는 준천사 지휘소와 개천정비작업을 그린 벽화가 있다.그 옆에는 영조가 공들여 정비한 오간수문
사진이 걸려있다.영조는 백성을 지극히 사랑한 군주였다.개천 정비를 위해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하지 않았다.일반 노임보다 높은 돈을 주며 우수한 노동력을 동원한 영조다.'위민(爲民) 애민(愛民)'의 영조의 정신을 읽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육중한 콘크리트 구조물 거대한 고가도로를 떠받들고 있던 시멘트교각이다.
서울의 흉물 고가도로를 걷어치우고 청계천을 복원했다.청계천을 덮고 있었던 고가도로의 교각
그 일부를 청계천 하류에 '근대화의 상징물'로 남겨 기리고 있다.


서울 청계천 주변에는 슬럼가 '판자촌'이 있었다.서울의 어두운 모습 판자촌을 하류에 재현했다.
당시 청계천 주변 판자촌에 있었을 '마장국민학교''청계다방' '서울상회' 간판과 그 정경에서 그 옛 추억을 떠올렸다.


마장동을 지나면서 복원된 청계천 위로는 도시고속도로 교각이 놓여있다.그 고속도로 밑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청계천 주위에는 나무와 꽃들이 자라고 있다.삶에 지친 서울시민들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도심지의 허파'로 기능을 하고 있다.

예로부터 청계천 하류는 인체에 비교해서 항문에 해당한다고 했다.청계천이 복개되었을 때 그 하류에 서울의 생활하수를
처리하는 종말처리장을 두었다.또 그 옆에는 장안평 중고차매매시장이 있었다.최근에 서울의 지하철 차량기지창이 들어섰다.

서쪽에서 시작해서 동쪽으로 흘러온 청계천은 북쪽에서 남으로 흘러온 중랑천을 만난다.
이렇게 두 물줄기가 만들어낸 큰 내(漢川)은 남쪽으로 흘러 응봉 입석포에서 한강과 만난다.
동쪽에서 발원한 외수(外水) 한강은 서쪽으로 흘러내려와 내수(內水) 청계천을 만나 서로 역수(逆水)로 기능한다.
이렇게 만난 두 역수(逆水) 한강과 청계천은 서울의 안밖에서 감싸고 흐른다.
내외 명당수의 보호를 받은 서울이다.그래서 세계에서 보기드문 명품도시로 명성을 얻고있는 서울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