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의 의미
하찮은 한 톨의 곡식이라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천근(千斤)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이 작은 낟알 속에서 우리는 봄의 환희(歡喜)와 들뜬 그 욕망(慾望)들이 웅성거리던 대지(大地)의 움직임을 듣는다. 꽃샘추위에서도 다시 얼어붙지 않고 고운 꽃술을 간직했던 가냘픈 한 그루 꽃나무의 의지(意志)를 본다.
여름의 천둥소리와 폭풍우(暴風雨) 그리고 화살처럼 땅 위에 꽂히는 따가운 햇볕 속에서, 혹은 가뭄이나 홍수(洪水)속에서 성장(成長)을 향해 발돋움 친 고난(苦難)의 역사(歷史)를 알 수 있다. 그늘이 아쉽던 휴식(休息)에의 유혹, 목 타는 갈증의 형벌(刑罰), 낮잠을 거부(拒否)하며 지평(地平)을 응시하던 충혈(充血)의 긴장(緊張) ─ 벌레들은 또 얼마나 많이 푸른 잎을 갉아먹고, 자갈은 또 얼마나 뿌리의 노동(勞動)을 방해 했었던가.
거기에는 또 슬프고 외로운 가을의 낙엽(落葉)이 쌓이기도 한다. 성숙(成熟)은 영광(榮光)의 시간(時間)위에서 죽는다. 열매가 맺으면 나뭇잎은 진다. 이 아이러니의 슬픔 속에서 숱한 별똥이 떨어지는 아픔을 견디었다. 그러다 또 겨울인 것이다. 침묵(沈黙)이 대지(大地)를 회색(灰色)의 외투로 덮을 때, 우리는 깊은 땅굴 속에 먹이를 저장하는 곤충처럼, 열매를 쌓아 두어야 할 곡간을 찾는다. 얼음과 눈 속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한해의 노동(勞動)으로 가꾼 지성(知性)의 열매와 언어의 낟알들을 소중히 운반해 가야 된다.
그러나 노새의 걸음걸이는 답답하며 썰매의 날은 또 무디다. 짐 실은 수레를 끄는 야윈 노새의 등을 채찍질하는 손도 동상(凍傷)에 걸려 있다.
이것이 한해의 의미(意味)인 것이다. 농부(農夫)가 밭에서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한해의 그 변화(變化) 많은 노동인 것이다. 우리는 작은 밭을 하나 마련했고 여기에 언어(言語)의 씨앗들을 뿌렸다. 벌써 한해가 지나고 이제는 또 새 밭에 새 씨앗을 뿌리는 철이 돌아왔다. 슬픔도 없으며 웃는 축제(祝祭)의 그 여유도 없다. 갈고 또 갈아야 할 것이다. 그 밭에서 우리는 피와 땀이 한 알의 곡식으로 바뀌어 가는 기적들을 지켜봐야 할 것이다.
벗이여 당신은 알 것이다. 하찮은 한 톨의 곡식이라도 손바닥 위에 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천근(千斤) 같은 무게를 느낄 것이다. 봄·여름·가을·겨울…… 어떻게 그 많은 계절(季節)이 우리 곁을 지났는가를 아는 사람은 한 톨의 곡식을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지은이 : 이어령, 『문학사상』 197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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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시
윤 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쪽
홍일표
빛을 탕진한 저녁노을은 누구의 혀인지
불붙어 타오르다가 어둠과 연대한 마음들이 몰려가는 곳은
어느 계절의 무덤인지
돌의 살점을 떼어낸 자리에 묻혀 숨 쉬지 않는 문자들
하늘은 돌아서서
흐르는 강물에 몸 담그고 돌멩이 같은 발을 씻는다
밤새 걸어온 새벽의 어두운 발목이 맑아질 때까지
딛고 오르던 모국어를 버리고
맨발로 걸어와 불을 밝히는 장미
몇 번의 생을 거듭하며
붉은 글자들이 줄줄이 색을 지우고 공중의 구름을 중얼거리며 흩어진다
마음 밖으로 튀어나온 질문이 쓸쓸해지는 해 질 녘
걸음이 빨라진 가을이 서둘러 입을 닫는다
뼈도 살도 없이
오래된 이름을 내려놓고 날아가는 구름
비누거품 같은 바람의 살갗이라고 한다
허공을 가늘게 꼬아 휘파람 부는 찌르레기
입술이 보이지 않아 아득하다는 말이 조금 더 또렷해졌다
『문학사상』 2021년 9월호 발표
호박풀떼
이태관
낡아가는 것과 삭아가는 것
천년의 사랑도 순간에 지나네
해가 짧아질수록 네게 가는 길이 마냥
섭섭하지는 않겠다
낡은 몸들이 바람을 타고 움직인다
양파를 들이고 감자를 캐고 오이와 가지를 지나
참깨는 털어도 털어도 언제나 부족했다
자라나는 호박잎이 담장을 덮고
그 잎 헤치며 어머니는 예쁜 애호박을 찾았다
가을이 오기 전에 꼭꼭 숨어라
술래에게 이긴 아이가
늙은 호박이 된다
담장에 기대 천천히 낡아가다가
눈 내리는 오후가 멈칫, 힘에 겨울 때
몸을 풀어 천천히 삭아가는 맛
아내는 아직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 『어둠 속에서 라면을 끓이는 법』(현대시, 2023)
* 추신 : 유정독서 모임은 11월 09일 14시,목요일에 실레마을 김유정문학열차에서 진행됩니다.
이번 주에는 김유정의 소설 <가을> 과 <두꺼비>를 읽으며 비평적 토론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김유정문학열차에서의 유정독서 모임은 관심 있는 모든 이들에게 공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