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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의 명산 金鶴山
- 위 치 : 강원 철원군 동송읍
- 높 이 : 금학산·947m
1. 일 시 : 2012. 9. 13. 08:00 ~
2. 장 소 : 금학산 - 일정취소
3. 참석인원 : 명 (새내기 명)
4. 탐방코스 : 철원여중고 – 체육공원 – 메바위 – 능선 – 정승바위 – 정상 –
노란식수통 – 마애불상 – 거북이샘터 - 공터
5. 다녀온길 : 영서로 – 사내천로 – 문화마을2길 – 포화로 – 하오재로 – 두루미로 – 오대로 – 북원로 – 금학로 - 철원여중고
6. 오늘활동 상황
○ 08:00 --- KBS앞 출발( 휴게소)
○ 09:38 ---
○ 09:41 ---
○ 09:49 ---
○ 09:50 ---
○ 10:00 ---
○ 10:01 ---
○ 10:06 ---
○ 10:17 ---
○ 12:10 ---
○ 12:10 ---
○ 12:18 ---
○ 12:32 ---
○ 13:00 ---
○ 13:27 ---
○ 13:33 ---
○ 14:40 ---
○ 14:50 ---
○ 15:50 ---
○ 18:00 ---
7. 금학산 살펴보기
□ 개관
- 금학산(金鶴山·947m)은 강원도 철원에 위치한다. 산세는 부드럽게 보이지만 산 속으로 들어서면 곳곳에 매바위 능선, 큰바위 능선, 용바위, 용아릉 등 암릉이 연이어져있다. 가까이 백마고지가 위치하고 민통선과 인접한 산이다. 철원의 대표적인 명산. 학이 막 내려앉는 산형을 하고 있다해서 붙여진 금학산이다. 마애석불, 부도탑갓, 상정바위, 안양사 절터, 신적골계곡, 용탕, 칠성대 등이 있다.
- 금학산은 밖에서 올려다보면 부드러운 산세이다. 그러나 산속으로 들어서면 곳곳에 예기치 못한 매바위 능선, 큰바위 능선, 용바위, 용아릉 등 암릉이 돋ㄷ아나 있어 산세에 제법 무개를 더해주고 있다. 여기에다 아직 세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마애석불, 부도탕갓 등 볼거리가 군침을 돌게하며, 중요 등산로 마다에는 옥수가 철철 넘치는 여고약수, 바가지약수 등 세 곳의 약수터가 자리하고 있다.
8. 등산기행
□ 산행안내준비
<금학산종합안내도>
- 금학산은 서기 901년 후삼국 때 궁예가 송악(개성)에서 철원으로 도읍을 옮길 당시 도선국사가 '궁전을 짓되 반드시 금학산을 진산으로 정하면 이 산의 정기를 받아 앞으로 나라를 300년 동안 통치할 것이요, 만일 금학산이 아닌 산으로 정하면 국운이 30년밖에 못 갈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그러나 궁예는 도선국사의 예언을 무시하고 금학산에다 짓지 않고 고암선(철원평야 북쪽)을 진산으로 정했다. 그 후 금학산의 수목들은 죽지 않았음에도 3년동안 나무에 잎이 나지않았고, 곰취는 써서 못 먹었으며, 국운은 겨우 18년 통치 끝에 멸망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 금학산은 산 전체가 철원군에 속해있다. 등산거리는 약 2km 정도여서 짧은 편이나 코스의 굴곡이 있는 편이므로 2시간 이상은 잡아야 한다.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산행은 아기자기하고 재미있는 편이며, 부엽토길이 많아서 푹신함을 느낄 수 있다. 넓은 철원평야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능선에서 철원 시내를 훤히 내려다 볼 수 있으며 등산로 곳곳에 벙커나 참호, 전선 등 군사시설을 볼 수 있다.
<금학산등산지도>
- 금학산의 대표적인 등산로는 두 가닥이 있다. 첫째는 동송읍 북쪽인 이평7리 철원여자중고교 앞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 매바위 능선을 경유해 정상에 오르는 코스다. 이 코스 변형으로는 능선 입구에서 능선을 타지 말고 더 들어가 여고약수터 - 양궁장- 운동시설을 경유해 지능선을 타고 매바위 능선으로 오르는 코스가 있다. 두번째는 동송읍 사무소가 있는 이평리 번화가 현대자동차 동송영업소 앞에서 왼쪽 골목안 동송초교 정문 앞을 경유하는 코스다. 이 코스는 거북이 샘터를 경유하여 매바위 능선으로 오르는데, 철원여중고교에서 오르는 코스보다 약 30분 가량 짧다.
◇ 등산코스(철원군제공) ◇
▶ 철원여중고교 - 1.입구(등산로 안내판) - 금학체육공원 - 2.비상도로 - (650m) - 3.매바위 - (550m) 4.능선 - (700m) - 5.정승바위 - 6.정상 - 우측 하산로 - 7.노란물통(용탕) - 쉼터 - (470m) - 8.갈림길 - (330m) - 마애불상 - 갈림길 - 거북이약수터(2.비상도로)
□ 산행안내
<단체기념사진>
- 금학산이 소재한 철원군은 고구려시대에 철원 또는 모을동비라 칭하였다. 신라의 경덕왕시 철성이라 고치고, 그 후 궁예가 기병하여 서기 901년에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풍천원(현 철원군 북면 홍원리)에 정하고 국호를 마진이라 하였으며, 년 호를 무태, 성책이라 하고 그후 수덕만세, 정개라 정하여 18년간 통치하였으며 서기 911년에 국호를 태봉이라 개칭하였다. 고려 때 태조시(918년) 철원으로 개칭한 후 동주로 개명하였다. 성종 14년(995년) 을미에 단련사를 두었다가 목종 8년(1005년)을미에 이를 폐하고 현종 9년(1018년) 무신에 지동주사를 두었다. 고종 41년(1254년)갑인에 현령으로 강등하였다가 그후 목으로 하였다. 충성왕 2년(1310년) 경술년에 다시 철원부로 하였다. 이조 태종 13년 계사에 조선조의 통례에 따라 도호부로 고쳤다. 세종 26년(1434년)에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이관되었으며, 영조22년(1747년)에 춘천으로부터 진관도호부를 이설하여 3부 6현을 관할하였다. 고종 32년(서기 1895년) 5월 26일 현칙령 제 98호로 춘천부 철원군이 되었으며, 1869년 8월 4일 칙령 제 36호로 강원도 철원군이 되어 동별, 갈말, 서변, 신서, 송내, 관인 북면, 어은동, 묘장 등 9개 면을 관할하던 중 강회기원 후대정 3년(서기 1914년 3월 1일) 군면폐합에 따라 경기도 삭령군의 내문, 면 등 3개면이 철원군에 병합 서변, 동송, 갈말, 어운, 북면, 신서, 묘장, 내문, 인목, 마장의 10개 면으로 개편되었으며, 서기 1931년 4월 1 부령 제 103호로 서변면(철원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서기 1945년 8월 15일 일제강점으로부터 해방과 동시에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되어 철원군 전역이 공산치하에 들어 갔다가 6.25동란이후 국군의 북진에 따라 일부 지역이 수복되었으며, 서기 1963년 1월 1일 법률 제 1178호에 의거 구 김화군중 8개 읍면(김화, 서면, 근북, 근동, 근남, 원동, 원남, 임남)이 철원군에 편입되고, 신서면이 경기도 연천군에 편입되었으며, 서기 1972년 12월 28일 법률 제 2395호에 의거 전 철원군 북면 유정리, 홍원리와 내문면 독검리를 철원읍에, 전 평강군 남면 정연리가 갈말면에 편입되었다. 서기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 9409호로 철원군 서면 청양리와 도창리가 김화읍에 편입되었고,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 9409호로 갈말면이 읍으로, 1980년 대통령령 제 10050호로 동송면이 읍으로 승격 4읍 7면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오늘 들머리는 약수터 좌측의 금학정이라는 국궁장이 있고 오른쪽으로 10분정도 포장된 도로를 올라가면, 금학체육공원이 나온다. 약수터와 팔각정 및 체육시설등이 있으며, 그 사이로 등산로가 조성되어 있다.
<담터계곡>
- 담터계곡의 담터 지명유래는 산짐승을 사냥 후 먹고 버린뼈로 집주위에 담을 쌓았다는데서 연유한다. 이곳은 한여름에도 울창한 수목과 맑은물로 한기를 느낄 정도의 자연그대로의 계곡으로 여름철과 가을철 많은 관광객이 즐겨 찾고 있다.
<비상도로>
- 오늘 나들목에서 경유한 비상도로는 산의 밑부분을 따라 수평으로 길이 나 있다. 군 작전도로로 사용되는 곳으로 이 도로를 따라 들머리와 날머리가 만나게 된다. 이 도로 덕분에 어디로 내려오든 처음 출발한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용이하다. 능선을 향한 도로와 비상도로가 큰 사거리를 만들고 있으며 또 하나의 들머리역할을 한다. 직진하면 등산로로 이어지며, 우측으로 가면 담터계곡이 나온다.
<매바위>
- 가장 대표적인 바위로서 매의 부리와 몸체가 선명하게 보인다. 반대편 바위를 웅크린 암컷에 비유하기도 한다.
<능선>
- 철원평야를 조망하기에 좋은 넓은 공터가 나온다. 아래에는 벙커가 있다.
<정승바위>
- 궁예의 책사였던 종간의 모습을 닮았다고도 하는데, 옆에서 보면 사람의 형상이다. 그 앞에 작은 탑들이 있고, 여기서 궁예가 재기를 기원했다고 전해진다.
<정상석>
- 정상에 오르면 직사각형의 콘크리트로 된 헬기장이 있으며, 주변에 나무도 없이 완전히 개방된 공간을 만들어 삭막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특이한 광경이다. 옆으로 내려가서 계단을 오르면 정상 표지석이 있다. 그러나, 실제 정상은 군 초소가 있는 곳이라고 한다. 초소쪽 동남방향으로 호랑이가 포효하는 형상의 호랑이 바위가 있다. 현재는 민간인의 출입이 불가능한 지역이다.
- 정상에서 휘둘러보는 조망은 한 마리 새가 되어 하늘을 나는 기분이다. 특히 북으로는 매바위 능선 뒤로 백마고지와 민통선 뒤로 북녘 땅이 가물거린다.
그 오른쪽으로는 동송읍 번화가 뒤로 은빛 물비늘을 반짝거리는 학저수지가 철원평야와 함께 시원하게 펼쳐진다.
<노란식수통>
- 작은 표지가 내리막길을 안내한다. 조금만 내려가면 노란 물통 이라고 불리는 지점이 있는데, 현재는 물통은 없고 장비가 해체된 듯한 흔적과 전신주가 서 있는 곳이다. 우측으로 벗어나면 용바위와 동굴, 그리고 용탕이라고 불리는 저수지가 있다. 예전에 그 곳에서 급수를 하였는데 중간 저장고의 커다란 노란색 물탱크가 놓여져 붙여진 이름이다.
<갈림길>
- 마애불상을 보고 갈 수도, 아니면 그냥 지나쳐 갈 수도 있다. 각각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뉘는데, 나중에 합쳐진다.합쳐진 지점이 다시 갈림길이 되는데 다시 오른쪽으로 가면 거북이 약수터가, 왼쪽으로 가면 약수터를 거치지 않고 내려간다. 두 갈래의 내리막길은 최종적으로 서로 멀지 않은 곳에서 비상도로와 다시 만나게 된다.
<마애불상>
- 금학산 중턱에 소재한 여래입상인 마애불상은 큰 자연암석을 이용하여 음각된 것으로 불상의 머리부분은 육신체 위에 다른암석으로 머리형대의 자연석을 좌측으로 비스듬히 올려놓은 석불이다.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33호로 지정 관리하고있다.
- 금학산(947.3m)의 중턱에 소재한 마애불상(磨崖佛像)을 조성한 곳에 삼층석탑과 부도 탑을 구축하려던 유물들과 사지와 고려초기것으로 추정되는 와당(瓦當)들이 남아 있으나, 이곳의 사찰과 불상 및 석탑 등의 조성년대는 문헌상에 남아 있지 않아 미상이나 금학산맥과 연결되고 있는 보개산 구령주산 중에는 신라시대(서기 647년)창건한 심원사를 비롯하여 그 후 많은 사찰과 암자들이 차례로 창건(석대암,지장암, 성주암,남암,안양사,복해암 등)되었으며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금학산중의 산록에도 많은 사찰과 암자들의 유지가 남아 있다.
마애불상이 있는 주위에는 약 1,200㎡(400평)정도의 평탄한 곳을 택하여 당시 조성되었던 유물(삼층석탑, 2개의 부도탑의 옥개석,와당) 등으로 고대의 큰 사찰(고려초기)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여래상인 마애불상은 큰 자연석암(화강암)을 이용하여 음각된 것으로 온화한 미소와 옷자락을 잡은 법의가 양쪽으로 퍼지는 듯한 조각미의 형태는 신라시대의 기법이라 하겠다.
불상의 머리 부분은 육신체위에 다른 암석으로, 머리 형태의 자연석을(현재)좌측으로 약간 비스듬히 올려놓아졌으며, 마애불상의 전체 높이는 3m,폭은 2.5m, 머리부분의 높이는 90cm의 큰 석불이다. 현재 이 유지에는 석탑과 부도의 조각된 유물과 1974년 태고종 여신도(손계용)가 미륵 암자를 짓고 수도했던 자리와 오랜 역사속에 신도들이 불공을 드렸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1984. 6. 2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33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
<거복이약수터>
<고석정 및 순담>
- 고석정은 한탄강변에 있는 정자이다. 세운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과 고려 충숙왕(재위 1294∼1339)이 여기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그 외에도 고려 승려 무외(無畏)의 고석정기와 김량경의 시 등이 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의적 임꺽정이 고석정 앞에 솟아 있는 고석바위의 큰 구멍 안에 숨어 지냈다고 하는데, 이 바위에는 성지, 도력이 새겨져 있고 구멍 안의 벽면에는 유명대, 본읍금만이라고 새겨 있다. 현재 2층 정자는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져 1971년에 콘크리트로 새로 지은 것이다.
- 순담은 고석정에서 2㎞ 떨어진 곳에 있는 계곡을 일컬으며, 조선 영조(재위1724∼1776) 때 영의정을 지낸 유척기(1691∼1767)가 요양하던 곳이다. 이름의 유래는, 순조(재위 1800∼1834) 때 우의정을 지낸 김관주(1743∼1806)가 20평 정도의 연못을 파고 물풀인 순채를 옮겨다 심고서 ‘순담’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곳은 기묘한 바위와 깎아 내린 듯한 벼랑 등으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계곡에서는 보기 드문 하얀 모래밭이 천연적으로 형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