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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락정중건시집전(魚樂亭重建詩集全) 역주(譯註)를 통해 본
어락정과 김세상(金世商)의 재조명
문학박사 나 천 수
가. 어락정중건시집 발간의 배경과 서지적(書誌的) 고찰
어락정(魚樂亭)은 안동김씨 김세상(金世商)이 안동부 풍산현 병산리에 늘그막에 휴식처로 지은 정자인데, 임진왜란 때 김세상이 졸한 뒤로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폐허가 되어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다.
그 뒤 4백여 년 후 그 후손인 안동김씨 군수공파 문중에서 1947년 의성군 옥산면 실업리로 정자를 옮겨 중건하고, 1964년 어락정안동김공제단비(魚樂亭安東金公祭壇碑)를 세워 그 동안의 기문, 발문, 한시 등을 모아 1989년 ≪어락정중건시집(魚樂亭重建詩集)≫을 간행하였다.
이 시집은 어락정 중건(重建)에 초점을 두었지만 어락정을 통해 정주(亭主)인 김세상의 사적(史的)인 사실을 발굴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김세상에 대한 문적(文蹟)이 임란(壬亂)을 전후하여 병화(兵火)로 소실된 것으로 보여 다만, 족보에는 이름과 ‘배 영천이씨’란 정도만 수록되어 있다. 그러다가 어락정과 김세상이 다시 지난 과거에서 오늘날 현재에 등장하게 된 것은 ≪겸암집(謙菴集)≫, ≪서애선생별집(西厓先生別集)≫, ≪영가지(永嘉誌)≫ 등의 숨은 자료[behindstory]가 발굴되면서다. 그러나 거의 광복 이후에 자료를 수집해 정리했지만, 아직도 그 자료가 미미한 실정이다.
따라서 논자(論者)는 ‘어락정’이라는 정자(亭子)보다 정주(亭主)였던 김세상의 인간성과 사적(史的)인 발자취를 역사상황의 논리로 접근해 보기로 한다. 비록 근․현대인 1989년에 발간된 어락정중건시집은 한자로 쓴 옛 문집형식을 그대로 따랐기에 서지적(書誌的) 고찰을 먼저 하고자 한다.
이 책은 2권 1책으로 사주쌍변(四周雙邊)에 유계(有界)이고 소흑구(小黑口)로 되어 있다. 쪽당 행(行)수는 10행, 행(行)의 자(字)수는 22자, 판심제(版心題)는 표제(表題)와 같은 ‘어락정중건시집전’이며, 판심(版心)의 어미(魚尾)는 상이엽화문어미(上二葉花紋魚尾)로 쪽수는 앞쪽 칼라 사진을 제외하면 142쪽이다.
목록(目錄)을 보면 권1에 서문, 서애선생 시(詩), 어락정 중건 원운시, 차운(次韻) 시가 251수 수록되어 있고, 권2는 부록(附錄)으로 행장(行狀), 유사(遺事), 중건기(重建記), 상량문(上樑文), 후지(後識), 발(跋)이 수록되어 있다.
나. 지금까지 발굴된 어락정과 김세상의 사적(史的) 자료
1. 어락정 김세상의 가승도
김세상(金世商)의 세계도(世系圖)를 보면 증조부 김삼근(金三近)이 비안현감(比安縣監)을 역임하면서 세상에 명성(名聲)을 얻게 된다. 더욱이 삼근의 아들 김계행[金係行(1431 ~ 1517)]은 1480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 교리, 성균관 대사성, 사간원 대사간 등 삼사(三司)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며 간쟁(諫諍)에 힘썼으나, 연산군(燕山君)때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제지되어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으로 낙향(落鄕)하여 ‘보백당(寶白堂)’이라는 당호(堂號)를 걸고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니 ‘보백당선생(寶白堂先生)’이라 불렀다.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는데 첫째 딸은 함양 박눌(朴訥)에게 출가하여 거린(巨麟)등 다섯 아들 모두가 문과에 급제 하였다. 둘째 딸은 풍산 류자온(柳子溫)에게 출가했는데, 증손자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문충공(文忠公) 류성룡(柳成龍)이며, 5형제 중 막내아들인 극신(克信)이 김세상의 부친으로 문천군수(文川郡守)를 지냈다.
<표1>의 가계 도표와 같이 김세상과 서애 류성룡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어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알면 ≪어락정중건시집≫를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그리고 인의예지신(仁義禮知信)이라는 유교의 오상(五常)에서 따온 다섯 아들의 이름을 먼저 알아야 시집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표1> 가계도표
시조 | 金宣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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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 | 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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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 | 三近 | ||||||||||||||
10세 | 係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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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 | 克仁 | 克義 | 克禮 | 克知 | 克信 | 壻 朴訥 | 壻 柳子溫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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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 | 淑寶 德寶 良寶 | 世周 | 世殷 | 世準 | 世商 | 巨麟 | 亨麟 | 洪麟 | 鵬麟 | 從麟 | 公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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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 | 起亮 | 仲郢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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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 | 雲龍,成龍 |
한편, 어락정중건시집에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의 생몰년을 완전하게 기록할 수 없는 점이 아쉽다. ≪고려사(高麗史)≫,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등 우리나라는 기록문화의 꽃을 자랑할 수 있으나 일반 백성의 가승도 기록은 당시에 이에 미치지 못하여 <표2>와 같이 등장하는 인물의 생몰년을 완전히 기록하지 못하기에 역사적 상황논리 따라 추론해 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먼저 밝혀 둔다.
이름 | 생몰년 | 문집 | 벼슬 등 | 비고 |
金三近 | 1419 ~ 1465 | 봉화, 비안현감 | 比安公 | |
係行 | 1431 ~ 1521 | 寶白堂實記 | 대사헌, 대사간 | 定獻公 |
克仁 | 1456 ~ ? | 영릉참봉 | 參奉公 | |
克義 | 1459 ~ 1517 | 진사 | 進士公 | |
克禮 | 1464 ~ ? | 생원 | 生員公 | |
克智 | ? ~ 1470 | - | 學生公 | |
克信 | 1474 ~ 1548 | 고성・문천군수 | 郡守公 | |
淑寶 德寶 良寶 | 충순위 충순위 | |||
世周 | 1491 ~ 1576 | 문학 | ||
世殷 | ? ~ 1543 | 영해교수 | ||
世準 | ||||
世商 | 1520 ~ ? | 충의위 | 魚樂公 |
<표2> 생몰년
2. 지금까지 발굴된 사료 등
앞서 언급했듯이 사찬(私撰)의 ≪겸암집(謙菴集)≫, ≪서애선생별집(西厓先生別集)≫과 관찬(官撰)인 ≪영가지(永嘉誌)≫에 어락정과 김세상의 사료적 기록과 이후에 발굴된 여타 자료는 고산 이유장(孤山 李惟墇)의 <어락정 차운(魚樂亭 次韻)>, 우천 정칙(愚川 鄭侙)이 쓴 <과어락정고기(過魚樂亭古基)>, ≪풍산현 향록(鄕錄)≫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옛 자료를 모아 국역(國譯)했지만, 아직 학계에서 어락정과 김세상을 사적(史的)인 시각으로 분석(分析)한 논문이 없기에 금반 역자(譯者)가 ≪어락정 중건 시집≫을 완역(完譯)하는 기회에 안동김씨 군수공파 문중에서 찾아낸 자료와 시집을 참고하여 어락정과 김세상을 사료적 상황논리에 맞게 재조명하고자 한다.
문집명 | 지은이 | 관련기록 | 생몰년 | 비 고 |
謙菴集 | 柳雲龍 | 年譜 | 1539 ~ 1601 | 1743년 간행 |
西厓先生別集 | 柳成龍 | 題魚樂亭 | 1542 ~ 1607 | 1633년 〃 |
永嘉誌 | 安東府 權 紀 外 | 永嘉誌卷1 / 豐山縣編 永嘉誌卷3 / 樓亭編 永嘉誌卷7 / 善行篇 | 1546 ~ 1624 | 1602 ~ 1608 까지 집필 |
孤山先生文集 | 李惟樟 | 魚樂亭 次韻 | 1625 ~ 1701 | 1775년 간행 |
愚川文集 | 鄭 侙 | 過魚樂亭古基 | 1601 ~ 1663 | 1833년 〃 |
魚樂亭重建詩集 | 安東金氏 郡守公派 | 漢詩集 | 1989년 〃 | |
豊山縣 鄕錄 | 屛山書院 | 忠義衛 金世商 | 1520 ~ ? | 1589년 〃 |
<표3> 어락정과 김세상을 밝히는 주요 문헌
첫째, 겸암(謙庵)과 서애(西厓) 두 분 선생이 어락정과 김세상의 이야기를 자신들의 문집에 남겼는데 여기에는 무슨 사연이 숨겨져 있는지 살펴보자. 겸암과 서애 두 사람은 형제지간으로 두 사람이 아마 임진왜란 이후 어느날 어락정에 들러보니 정주(亭主)인 김세상은 이미 고인이 되었음을 알고 슬픈 감정을 못 이겨 시와 글을 자신들의 문집에 남겼다.
1894년에 간행된 서애 류선생의 문집인 ≪서애선생 별집(西厓先生 別集)≫ 권1에 실린 시(詩)를 보면 다음과 같다.
「어락정을 쓰다. 8월 14일 백씨와 함께 정자에 오르다」-이하 생략-
여기서 8월14일이 어느 해인지는 나타내지 않았는데, 그의 형인 류운룡(柳雲龍)의 문집인 ≪겸암집(謙菴集)≫의 연보에 다음과 같이 자세히 나타난다.
「28년 경자년(1600년) 선생 62세, -중략- 8월 갑신일에 -중략-
「어락정을 방문하다. 정자는 화산 동쪽 산기슭 아래에 있는데 무인 김세상이 지은 것이다. 김(金)은 효행이 있었는데 이미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문충공과 함께 정자를 지나가며 구경하였다.」라 하였다.
그러므로 두 형제는 1600년 8월 14일에 함께 어락정에 오른 것임을 알 수 있고 임진왜란이 끝난 지 2년 후의 일이다. 한편 서애선생 글 중에 ‘여상명기정왈어락(余嘗名其亭曰魚樂)’란 대목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내가 일찍이 그 정자를 ‘어락(魚樂)’이라 명명하였다.”라 하였다. 정자의 당호(堂號)를 지어주고 받는다 것은 두 사람 간에 끈끈한 정의(情誼)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과연 무슨 정의가 있을 수 있는지를 먼저 간파해야 한다.
서애 류선생의 고향은 풍천면 하회리이고 최초 어락정이 있었던 곳이 하회리 바로 옆 마을인 병산리로 김세상이 사는 마을은 풍산현 사지리(현 소산리)로 매우 가까운 거리다. 따라서 김세상과 서애 류선생은 지척에 사는 이웃이었다. 비록 벼슬은 서애선생이 높지만, 고향에서 효자로 널리 알려진 김세상이 지역의 선배이기에 서애선생이 고향에 내려오면 자연스럽게 어락정에 들렸을 것이다.
또한 <표1>에서 본 바와 같이 두 집안의 혼맥(婚脈)를 보면 보백당 김계행의 사위가 류자온(柳子溫)인데 곧 김극신의 매형(妹兄)이 되며 또한 서애 류선생의 증조(曾祖)가 되므로 혈연관계가 있다고 보인다.
그러므로 서애 류선생의 증조할머니 친정 조카인 김세상이 이웃 동네에서 살고 있으니 나이를 극복하는 도의적(道義的) 교류(交流)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깊은 인연이 있어 형님인 겸암선생도 자연스럽게 ‘김세상 이야기’를 자신의 연보(年譜)에 등재하고 마찬가지로 서애선생도 문집에 ‘어락정 스토리’를 기록하였다.
그렇다면 김세상의 졸년을 분석해 보자. 1520년에 태어나 군역(軍役)으로 충의위에 소속되어 60세까지만 군역에 차출되니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1592년은 적어도 72세가 되어 군역은 면했지만 무인(武人)집안 출신으로 지역의 명망가로 추앙받고 있기에 의병(義兵)의 우두머리로 추대되어 참전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부산포로 상륙한 왜적들이 파죽지세로 서울로 진격하는 노정에 안동지역을 침범하기에 일본 정규군과 조선의 의병간의 전투에서 다소간에 왜적에게 진격을 멈추게 하는 효과는 있었을지언정 결국은 의병들이 전멸하여 시신마저도 찾지 못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은 어락정 중건시집의 사적(史的) 분석에서 논하고자 한다.
임란(壬亂)이 끝나고 서애 류성룡도 결국 척신들의 시기를 받아 고향으로 낙향하여 ≪징비록(懲毖錄)≫을 집필하면서 김세상의 뒤 이야기를 전해 듣고 형님인 겸암 류운룡과 함께 다시 어락정을 찾아 슬픈 감정을 이기지 못해 글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둘째, 고산(孤山) 이유장(李惟樟)의 어락정 차운 시를 눈여겨봐야 한다.
이유장(1625~1701)은 비록 김세상 사후에 태어났지만, 5대조 이훈(李薰)이 풍산현 입향조로 풍산현을 고향으로 하기에 병산리에 있는 어락정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유장도 어락정을 거닐며 어락정 차운시를 지은 것으로 문제는 시제(詩題)를 ‘어락정 차운’이라 하였으니 어락정의 원운 시에 차운했다는 말이다. 보통 정자 주인의 시를 원운 시로 하기 때문에 이유장은 김세상의 시(詩)에 차운(次韻)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 시를 살펴보자.
어락정 시에 차운하다 [魚樂亭次韻]
경승지의 풍월은 몇 해 동안 외로웠나 幾歲名區風月孤 기세명구풍월고
석양에 가는 길손 머뭇거리게 하네. 斜陽歸客爲踟躕 사양귀객위지주
정자에 오르니 얼마간 마음이 즐거운데 登臨多少心中樂 등림다소심중락
묻노니 물고기는 아는가 모르는가. 借問江魚知也無 차문강어지야무
차운시의 운(韻)이 고(孤),주(躕),무(無)이기 때문에 김세상이 지은 원운 시의 운이 고(孤), 주(躕), 무(無)였을 것으로 보인다. 1600년 8월 14일 겸암과 서애 류선생이 어락정을 찾은 이후 1676년 풍산현으로 낙향한 이유장이 차운시를 쓴 시기를 보면 대략 76년 이후의 일이니 이 때 까지도 어락정과 원운 시판(詩板)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셋째, ≪영가지(永嘉誌)≫는 옛 안동부(安東府) 읍지인데 용만(龍彎) 권기 선생(權紀 先生)이 스승인 서애 류선생의 명을 받아 7년(1602 ~ 1608)간 편찬했는데, 중도에 서애 류선생이 몰(沒)하여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이 안동부사로 부임하여 편찬이 완료된 것으로 관찬(官撰)으로 분류할 수 있는 사료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라 하겠다.
≪영가지≫ 제1권, 풍산현 각리 편에 “사지촌은 금산 서남쪽 2리 정산의 동쪽1리에 있는데 효자 김세상이 대대로 산다.”라 하였다.
≪영가지≫ 제3권, 누정(樓亭)편에 “어락정은 풍산현 남쪽 화산 동쪽 산기슭 곡강 위에 있다. 효자 김세상이 지은 것이다.”라 하였다.
≪영가지≫ 제7권, 선행(善行)편에 “김세상은 군수 극신의 아들이며 대사간 계행의 손자이다. 풍산현 사지리에 살았는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해 성심을 다해 봉양하고, 제사에는 반드시 몸소 극진히 정성을 다하여 집전하며, 공경하던 어머니가 돌아가심에 여묘(廬墓) 3년 동안 한 번도 집에 내려오지 않고, 사특한 과일과 채소는 드시지 않으니 향리에서 모두가 효자라고 칭찬한다.”라 하였다.
넷째, 안동 병산서원에 소장된 1589년 풍산현 향록(鄕錄)은 향안(鄕案)의 다른 이름이다. 향안은 조선시대 지방 양반들의 주도한 자치행정기구인 유향소(留鄕所)의 구성원 명단이다. 여기에 모두 289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충의위(忠義衛) 김세상(金世商)’이란 기록이 보인다.
충의위는 일종에 병과(兵科)로 조선 태종 18년(1418)에 설치하였던 오위의 전위(前衛)인 충좌위(忠佐衛)에 딸린 군대로 공신(功臣)의 자손들로 구성되었다. 조선시대는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모든 남자는 병적(兵籍)을 등록하여야 하는데, 김세상은 군수공의 아들이므로 충의위에 복무한 것 같다. 1589년도는 김세상의 나이 69세 정도이니 이미 군역(軍役)을 벗어났지만 원래 소속된 충의위를 기록한 것 같으나 이후 승차여부는 알길이 없다.
그리고 1592년 임란이 일어났을 때는 군역을 면했지만, 어버이에게 효자는 곧 임금에게 충성하는 신하인 만큼, 나이 먹었다고 그냥 있지 않고, 전국 각지의 의병 소식을 접한 후 출전하여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서애선생도 김세상을 무인이라 지칭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이 부분은 어락정 중건시집의 사적(史的)인 분석에서 다시 논하고자 한다.
다섯째, ≪우천선생문집(愚川先生文集)≫에 있는 ‘과어락정고기(過魚樂亭古基)’를 살펴보자. 우천(愚川) 정칙(鄭侙,1601~1663)은 안동 출신이니 어락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문집 권2에 다음과 같은 시가 수록되어 있다.
어락정 옛터를 지나다 [過魚樂亭古基]
어락정 옛터가 쓸쓸하고 잡초만 무성한데 遺墟寥落草萋萋 유허요락초처처
비탈진 어락정 옛 길을 오르내리네. 古徑縈紆高復低 고경영우고부저
아득한 먼 옛일 누구에게 물어 볼거나 往事悠悠誰與問 왕사유유수여문
숲 너머 해 지는데 새는 부질없이 우네 . 隔林斜日鳥空啼 격림사일조공제
보통 한시 해석에서 과(過)는 단순히 ‘지나가다’라는 뜻보다는 ‘지나는 길에 들르다’란 뜻으로 보아야 시적(詩的)인 맛이 살아난다. 정칙은 1601~1663년대 인물이고, 앞서 기술한 이유장은 1625~1701년대 인물이니 살아생전에 어락정을 지나면서 들렸던 사람은 우천 정칙이 먼저일 수도 있다. 우천이 병산리 화산 아래 있었던 어락정에 올라 보니 주인이 없는 정자의 모습에서 당시 자신의 우천정(愚川亭)도 사후에 이처럼 황폐해질 것이라는 회포를 담아 이와 같이 읊은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어락정 관련 문헌으로는 ≪안동의 문화유산≫, 안동의 지명유래≫, ≪안동시사≫, ≪안동의 현판≫등의 기록은 기존의 문헌을 재편집하는 정도이니 여기서는 더 이상 논하지 않겠다.
다. 어락정 중건 시집의 재조명
≪어락정중건시집≫은 한시(漢詩)로 된 시집이다. 여기서 먼저 염두에 두어야할 점은 한학(漢學)은 문학(文學)과 사학(史學) 그리고 철학(哲學)이 하나로 묶어진 학문이란 것이다. 오늘날의 대학교는 문학과 사학 그리고 철학을 분리하여 연구하지만, 과거에 우리 선조는 한학 그 하나로 모든 학문을 통달하였다. 그러므로 문과(文科)의 급제자는 곧 나라가 인정한 문학가요, 사학가이며 또한 철학가라 하여도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들이 쓴 역사를 읊은 기록이 비록 구술의 기록인 만큼 구술역사(口述歷史)도 인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으로 ≪어락정중건시집≫을 보면 이는 영사시(詠史詩)로 분류할 수 있다. 영사시(詠史詩)는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서술하거나 주관적인 회고로 읊은 시가이다.
≪어락정중건시집≫은 몇 가지 특별한 점이 보인다.
첫째, 원운 시 한 수에 무려 249명이 같이 차운 시를 썼다는 점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249명 중 두 사람이 서애 류성룡의 시에 차운함과 동시에 군수공파 후손 김현규의 원운 시를 차운했으니 거의 「기네스북guinness book)」에 올릴만한 이야깃거리다.
둘째, 어락정과 김세상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많지 않은 것은 임진왜란의 병화(兵火)와 혼란을 겪은 것과 전란 후에 후손들이 영체(零替)하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사람들의 입을 통해 구전(口傳)되는 것도 많았을 것이다. 구전도 구술(口述)을 모아 기록으로 남긴다면 비록 정사(正史)에 넣을 수는 없지만 역사를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다. 논자(論者/필자)가 금반 ≪어락정중건시집≫을 완역하면서 느끼는 바도 많다. 비록 4백여 년이 흐른 뒤의 구술이 얼마나 진실에 부합될지는 모르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한학(漢學)이란 문사철(文史哲)이 합쳐진 학문이다.
이 학문을 연마한 사람은 구술을 모아 자신의 학설을 발표할 만한 식견을 가졌기에 독자 제현들이 이 점을 먼저 인정해 주어야 영사시(詠史詩)의 ≪어락정 중건 시집≫이 더욱 빛나게 될 것이다.
먼저 어락정을 이전 중건에 따른 축하 시문의 성관별(姓貫別) 시문(詩文) 답지 내력을 살펴본다.
안동 金 41 | 아주 申 3 | 안동 權 24 | 함양 朴 2 | 단양 禹 5 | 진성 李 6 |
반남 朴 3 | 오천 鄭 2 | 광산 金 2 | 수성 羅 2 | 흥해 裵 2 | 평해 黃 1 |
의성 金 15 | 의령 余 1 | 밀양 朴 8 | 함안 趙 2 | 서흥 金 1 | 초계 鄭 1 |
경주 李 8 | 김해 許 1 | 경주 金 4 | 능성 具 2 | 벽진 李 2 | 성주 都 2 |
성산 李 2 | 함안 吳 1 | 예천 林 1 | 담양 田 1 | 파평 尹 3 | 영양 南 2 |
경산 李 1 | 전의 李 4 | 평산 申 2 | 김해 金 5 | 연안 李 3 | 광주 盧 3 |
남양 洪 4 | 해주 吳 2 | 전주 李 3 | 동래 鄭 3 | 아산 蔣 1 | 봉화 琴 3 |
중화 楊 1 | 김녕 金 2 | 월성 孫 2 | 나주 丁 1 | 신천 康 2 | 선산 金 1 |
남평 文 2 | 무안 朴 2 | 풍산 柳 2 | 울산 金 1 | 진주 姜 6 | 경주 鄭 1 |
하양 許 2 | 한양 趙 3 | 합천 李 1 | 의흥 芮 2 | 연안 金 1 | 영양 金 1 |
함창 金 1 | 전주 柳 1 | 부림 洪 1 | 삼척 金 1 | 영천 李 1 | 문화 柳 1 |
포산 郭 2 | 철성 李 1 | 순천 張 1 | 강릉 崔 2 | 상산 金 1 | 선성 金 2 |
성주 呂 1 | 해주 鄭 1 | 성주 李 1 | 청주 韓 1 | 경주 崔 2 | 재령 李 1 |
창녕 曺 1 | 상산 朴 1 | 80개 성씨 | |||
본관을 알 수 없는 성씨 : 8명 | |||||
崔 1 | 金 5 | 蔡 1 | 裵 1 |
<표4> 성․관별 축시답지 현황(249명)
위 표에서 본바와 같이 안동김씨 종중의 ‘어락정 중건’에 답시를 보낸 성․관이 무려 80개인데, 이중에 전라도 지역이 본관인 성씨는 11개 성씨 22명에 달했다.
이어서 시문을 지은 인물의 거주지를 살펴보자. 이 축하 시문은 1947년 전후로 옥산면 실업리로 이건하여 중건을 축하하는 시인데, 2018년 현재 거의 70여 년 전이라 당시 자료를 잘 보관한 군수공파 문중에서 찾아낸 모든 인물의 거주지와 생년을 표로 작성하였다.
시문 답지자 거주지 별로 보면 당시 전국 8도에서 제주도를 제외한 7개 시도의 35개 지역에서 시를 보냈으며 생년이 밝혀진 이들의 연령대를 보면 <표6>을 보면 한일병탄(韓日倂呑) 이전에 태어난 사람은 67명이요, 한일병탄 이후에서 일제 강점기의 암울했던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 133명임을 알 수 있고, <표5>에서는 거주지 분류가 가능한 사람이 249명에 달하니 전체 249명 중에 100% 인적사항을 7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자료를 보관한 군수공파 종중의 위선(爲先)의 정성에 경의를 표한다.
<표5> 시문 답지자 거주지 현황(249명)
<단위 명>
의성 44 | 안동 61 | 서울 6 | 예천 10 | 영주 16 | 대구 22 |
부산 2 | 공주 1 | 천안 2 | 제천 1 | 안산 1 | 영천 10 |
용인 2 | 청송 10 | 봉화 7 | 상주 4 | 문경 7 | 성주 5 |
청도 7 | 영덕 2 | 논산 1 | 산청 1 | 김천 1 | 전남 장성1 |
전북 남원1 | 경산 9 | 태백 1 | 군위 3 | 합천 2 | 고령 1 |
충주 1 | 강릉 1 | 경주 3 | 울진 2 | 포항 1 |
<표6> 시문 답지자 출생 연도별 현황(200명)
<단위 명>
1874년 1 | 1876년 1 | 1877년 1 | 1881년 2 | 1884년 1 | 1886년 2 |
1887년 1 | 1888년 2 | 1889년 1 | 1890년 1 | 1893년 1 | 1896년 1 |
1901년 6 | 1902년 1 | 1903년 2 | 1904년 4 | 1905년 4 | 1906년 8 |
1907년 7 | 1908년 9 | 1909년 11 | 1910년 4 | 1911년 22 | 1912년 11 |
1913년 7 | 1914년 9 | 1915년 5 | 1916년 7 | 1917년 10 | 1918년 8 |
1919년 6 | 1920년 4 | 1921년 2 | 1922년 2 | 1923년 6 | 1924년 1 |
1925년 3 | 1926년 6 | 1927년 2 | 1928년 1 | 1929년 4 | 1930년 1 |
1932년 1 | 1933년 2 | 1934년 1 | 1935년 1 | 1936년 1 | 1937년 1 |
1938년 1 | 1939년 2 | 1940년 1 | 1944년 1 |
≪어락정중건시집≫의 시는 영사시(詠史詩)로 서문, 행장, 제단비문, 유사, 중건기, 상량문 등은 사찬의 역사기록이다.
거의 대부분 문장은 옛 문헌에 언급된 ≪영가지≫기록, ≪겸암집≫, ≪서애문집 별집≫ 등에서 이미 밝힌 사항으로, 어락정은 김세상이 지었는데 당초에 안동 병산리 화산에 있었던 정자를 폐허된 뒤에 후손들이 힘을 모아 옥산면 실업리로 옮겨 중건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글로 쓰거나 시로 읊은 것들이다. 그런데 일부 글과 시문에서 언급된 역사적 사실은 이해를 돕기 위해 해설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첫째, 안동(安東) 권순(權淳)은 시에서 ‘교남의 경계되는 땅의 팔십 노옹’이라고 김세상을 호칭하였으며
둘째, 풍산(豊山) 류시복(柳時馥)은 중건 기문에서 ‘공(公) 또한 무인으로 왜적을 모두 토벌하여 한주(韓州)를 회복하였다.’라 하였다.
위 두 가지는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하니 한꺼번에 검토해야 할 사항이다.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간의 전쟁으로 김세상이 임진왜란 때에 의병으로 나아가 전쟁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1520년에 태어난 김세상은 졸년과 묘소와 관련된 기록은 실전(失傳)되어 없다. 없다는 것은 집에서 편안히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대체로 임종(臨終)을 묘사하는 고문헌의 사례를 보면 ‘졸우정침(卒于正寢)/정침에서 졸하다’이라 기록하였다. 정침은 ‘거처하는 방’이다. 거처하는 방에서 졸했다면 졸년을 모르고 묘소를 모를 것인가? 이는 불의의 재앙으로 자손들도 모르게 세상을 마친 상황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김세상의 졸년은 임란과 관련이 있다고 보인다.
임란왜란이 일어난 1592년 그때 나이 72세요, 임란이 끝나는 1598년으로 보면 나이가 78세다. 보통 칠순을 넘어서 팔순을 향해 가면 팔질(八耋), 또는 팔십노옹(八十老翁)이라 부풀려 표현하기도 한다. 그래서 권순(權淳)은 ‘나이 팔십 늙은이’라 읊은 것이다.
1592년 부산포에 상륙한 왜적들은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진격하였으니 조선의 나라는 그야말로 풍전등화였다. 무인(武人)의 집안이요, 군적(軍籍)이 충의위(忠義衛)에 속했던 김세상은 비록 노구(老軀)이지만 보백당 후손의 지방 명망가이기에 급히 조직한 의병의 상징적 우두머리로 추대 되었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의 우두머리는 대부분 전직 관료 또는 지방의 명망가가 추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후손 유진(有鎭)이 후지(後識)에서 김세상이 무과(武科) 급제를 하였다고 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무과 방목(榜目)의 기록을 찾지 못한 점이다. 아마도 당시 급박한 상황에서 식년 무과를 치를 수 없었기에 전시 현장에서 의병장에게 무과 급제의 은전을 내렸는데 전쟁 중에 이러한 일련의 문서마저 멸실된 것으로 보이니 매우 아쉽다.
의병의 구성은 의병을 이끄는 의병장의 가솔들이 참여하고 뜻을 같이 하는 일반백성과 면천(免賤)을 바라는 천민들이 참여를 하였다. 선조(宣祖)는 면천을 미끼로 많은 천민들이 전쟁터에 나오도록 부추겨 놓고, 전쟁 후에는 천민들은 면천을 시켜주지 않았다.
당시 의병의 임무는 근왕(勤王)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의병은 서울을 향해 출병한다. 김세상의 의병은 안동에서 북상 출병하여 한주에서 일본 정규군과 전투를 벌여 승전을 한 듯하다. 그러나 전투 경험이 없는 임란 초기의 의병들은 일본군 정규군에게 거의 전멸을 당하였다. 김세상도 이러한 의병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나라가 위급한데 앉아 있을 수 없어 충의(忠義)의 정신으로 출전하여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것을 누가 공훈록(功勳錄)에 기록할 것인가? 김세상이 의병으로 나아갈 때 구학(溝壑)의 일념이었겠지만, 막상 한주(韓州)의 어느 깊은 구렁 속에서 순절한 시신을 찾지 못하였다면 누가 이를 기록할 수 있었겠는가?
아무도 없었기에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버릴 뻔한 것을 훗날 서애 류성룡과 겸암 류운룡의 문집에서 어락정과 김세상이 드러나고 안동의 옛 읍지인 ≪영가지≫에서도 확인 되었기에 오늘날 「어락정과 김세상의 스토리텔링」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서애 류선생이 1600년 8월에 어락정을 방문할 때는 김세상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고 하였으니, 김세상의 졸년은 임진왜란 기간 중임을 짐작할 수 있다.
셋째, 김세상이 만년에 세운 어락정이 황폐된 이유는 무엇인가? 영사시에 어락정의 모습을 읊은 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쪽 | 지은이 | 시 원문 | 해 석 |
156 | 金寧 金璋燮 김녕 김장섭 | 魚亭經燹歲多深 어정경선세다심 | 어락정이 병화를 겪은 세월 매우 깊은데 |
169 | 安東 權永基 안동 권영기 | 舊亭灰失感懷深 구정회실감회심 | 옛 정자를 병화로 잃어 감회가 깊은데 |
174 | 烏川 鄭容煥 오천 정용환 | 舊亭燒失感懷深 구정소실감회심 | 옛 정자 불타 없어진 감회도 깊은데 |
245 | 金鍾煥 김종환 | 燹逢移築後崑岑 선봉이축후곤잠 | 병화로 옮겨 지으니 뒷산이 높이 솟았네 |
246 | 義城 金奎準 의성 김규준 | 累經兵燹是非岑 누경병선시비잠 | 여러 번 병화 거치니 시비도 크네 |
247 | 禹柄熙 우병희 | 舊亭灰燼草深深 구정회신초심심 | 옛 정자가 불타 재가되니 풀만 무성히 우거져 |
<표7> 어락정의 황폐 이유를 읊은 시
이상의 시문에서 두 가지 상황 논리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첫째, <표7>의 글로 보면 어락정은 난리로 일어난 불[燹]로 재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1600년 8월에 서애 류선생이 정자에 다시 들려 읊기를 ‘외로운 정자는 의구히 섰는데 옛 주인은 간데없구나.’라 하였다. 임란이 끝난 3년 후에 어락정을 직접 본 서애 류선생의 말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황폐되어 무너진 어락정’을 후세 사람들이 어락정을 본 적이 없으니 말이 말을 만들어 마침내 임란 때 병화(兵火)로 소실되었다고 구전된 것으로 여겨진다. 임진왜란 이후 전란은 1636년 병자호란을 들 수 있으나, 이때는 전쟁이 발발된 지 얼마 안 되어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항복하여 전쟁이 전국적으로 번지지 않았으니 어락정의 병화(兵火)와는 무관하다.
둘째, 우리나라의 기와문화가 백성들에게 까지 미친 것은 조선조 후반기부터이다. 그 이전에는 기와로 집을 짓는 것은 임금과 관련된 것만 지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선조조 당시 초야의 선비인 김세상이 기와로 된 정자를 지을 수 있었겠는가? 최초의 어락정은 목조 초가로 지었을 것이며, 목조 초가는 매년 초가지붕을 새로 엮어 개수하여도 내구 연수가 많아야 100년을 넘기지 못하니 어락정은 자연스럽게 황폐되어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실업리에 중건한 어락정의 구조가 「좌우 온돌방에 중앙 대청형」이니 최초에 지은 정자도 이와 같은 구조라면 어락정은 후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의 장소로서 기능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온돌방이 있다는 것은 학생들이 기숙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셋째, 지금까지 기록으로 김세상의 인간성과 평소 습관을 유추해 보자.
김세상은 충효의 이름 없는 별이었다. 조선조가 지향하는 최고의 덕목은 효(孝)이다.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도 곧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일이니 곧 효행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효자에게는 임금이 특별히 벼슬을 내린 사례가 많다. 김세상도 할아버지가 대사간과 대사헌을 지냈고 아버지는 군수를 역임하여 향방(鄕邦)에서 효자라고 이름이 났으니 효행으로 천거하면 벼슬을 받을 만한 조건이 되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정자를 지어 후학을 가르치며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며 살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 의병에 나아가 순절한 듯하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에서 누락되었으니 그야말로 이름 없는 별이 되어 버린 것이다. 김세상은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조선조에 평균 수명을 알 수는 없지만 회갑을 맞이하면 회갑잔치를 할 정도로 나이 육십이 되는 것을 기렸다. 그리고 칠십을 희수(稀壽)라 하였다, 칠십이 되는 것은 매우 드물다는 표현이다. 그런데 김세상은 팔십 늙은이[翁]이라 불릴 정도로 장수하였다.
이것은 철저한 자기 통제 즉 과식, 과음, 과색을 즐기지 않은 결과라고 여겨진다. 또한 그는 낚시를 좋아 했는데 낚시로 잡은 물고기를 반찬으로 먹은 듯하다. 어류의 지방은 육류의 지방보다 장수할 수 있는 물질이 많다. 특히 불포화 지방산이 많아 간, 신장, 위장을 보호하며, 동맥경화나 빈혈, 정력증진에 좋다고 한다. 이러한 효과를 알고 물고기를 섭취하지 않았을 것이나, 평소의 습관이 그를 장수하게 만든 것이다.
라. 맺는 말
‘어락(魚樂)’은 물고기의 즐거움이다. 이 말은 ≪장자(莊子)≫<추수(秋水)>에 나오는 말이다. 장자가 친구 혜자(惠子)와 함께 호수의 다리 위에서 노닐고 있었는데, 먼저 장자가 말하기를 “피라미가 나와서 유유히 노니 이것이 물고기의 즐거움일세.〔鯈魚出游從容 是魚樂也]”라고 하자, 혜자가 말하기를 “자네는 물고기도 아니면서 물고기의 즐거움을 어떻게 아는가? [子非魚 安知魚之樂也]”하였다. 그러자 장자가 말하기를 “자네는 내가 아닌데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른다고 어찌 단정하는가? [非我安知我不知魚之樂]”하였다고 한다. 김세상이 화산 동쪽 산기슭에 정자를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유유자적 하였다. 정자에서 위를 보면 화산의 장엄한 산봉우리가 보이고 아래로 굽어보면 낙강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이 보이는 풍광의 극치에서 은자(隱者)로서 자연 속에 살기에 정자에 현액도 달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서애 류선생이 정자를 찾아 그 풍광을 보고 ‘어락정’이라 명명하였다. 그러나 1592년부터 1597년까지 7년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정자 주인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임진왜란 때 병조판서와 도체찰사로 군무를 총괄하였던 서애 류선생이 낙향하여 다시 어락정을 찾았을 때는 주인 없는 정자가 잡초만 무성해진 것을 보고 가슴 아픈 감회를 느끼고 시 한수를 지어 정자의 벽에 붙여 놓고 갔는데 이 시가 훗날 김세상을 밝히는 단초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락정중건시집≫은 풍광을 읊는 서정시가 아니라 역사를 읊는 영사시(詠史詩)이다. 이 영사시는 문사철(文史哲)이 농축되어 있어 비록 사찬(私撰)이지만 김세상이라는 인물을 푸는 암호가 담겨 있어 퍼즐 맞추듯 풀어냈다. 어락정 김세상, ≪겸암집≫, ≪서애선생별집≫, ≪영가지≫, 고산 이유장 시, 우천 정칙 시, 풍산현의 향록, 그리고 249명의 251수에 달하는 차운 시는 영사시가 되어 어락정과 김세상을 밝히는 증거가 되므로 그 역사적 사실을 논자가 역사 상황 논리로 증명하였으니 이 모두가 사실인 것이다. 사실을 사실로서 입증하였으니, 앞으로는 이 논문이 기초가 되어 학계에서 더욱 심도있는 연구로 ‘어락정과 김세상의 스토리텔링’을 보완 발전시켜 나가기를 기대 한다. 학문이란 학자들의 논쟁 속에서 한층 더 발전하니 반론이 있기를 기대한다.
≪참고문헌≫
○ 단행본
金文鎭, ≪風山水月의 魚樂亭≫, 2017년
李性源, ≪우리집 보물은 오직 청백이 있을 뿐≫, 안동 문화원
의성문화원, ≪의성의 지명유래≫, 2002년
안동문화원, ≪안동의 문화유산≫, 1999년
안동시, ≪안동시사≫, 1999년
○ 고서, 고문서
어락정중건시집간행소 ≪魚樂亭重建詩集刊行所≫, 단기 4322년
柳雲龍, ≪謙菴集≫, 1742년
柳成龍, ≪西厓先生 文集 別集≫, 1894년
權 紀, ≪永嘉誌≫, 1608년
金學圭外 ≪寶白堂實紀(重刊本)≫, 1901년
李惟墇, ≪孤山先生文集≫, 1775년
鄭 侙, ≪愚川文集≫, 1833년
屛山書院 ≪豊山縣 鄕錄≫, 1589년
○ 인터넷 검색자료
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index.aks
안동김씨대종중 http://adkim.net
유교넷(한국국학진흥원) http://www.ugyo.net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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