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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암집(松巖集)》 해제(解題)
- 《송암집(松巖集)》의 구성과 내용 -
윤호진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1. 서지사항
이 책의 원서에는 권수제와 판심제 모두 ‘송암선생문집(松巖先生文集)’이라고 되어 있고, 목판본 6권 3책으로 1852년 간행되었다.
원서는 가로 20.6 × 세로 17.4(㎝)로 10행 19자로 되어 있으며, 어미(魚尾)는 상하이엽화문어미(上下二葉花紋魚尾)로 되어 있다.
원서는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소장도서번호 811. 98-이로-송-판), 한국고전번역원의 한국문집총간 54집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 책은 한국문집총간의 것을 저본으로 하여 번역하였다.
2. 편집 및 간행경위
이 책의 원서는 송암(松巖) 이로(李魯, 1544~1598) 당대에 이미 많은 내용이 산일되고 나머지가 전해오던 것으로 보인다.
허목(許穆)이 지은 〈행장〉에 의하면, 〈신묘봉사(辛卯封事)〉나 〈격왜장문(檄倭將文)〉, 〈상천장서(上天將書)〉와 같이 의론이 정대(正大)한 저작이 있으나 이를 수습할 사손(嗣孫)이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이휘령(李彙寧)이 쓴 〈송암선생문집발(松巖先生文集跋)〉에서도 이로의 저술은 “병화(兵火)에 산일되어 상자에 모아 둔 것이 시는 겨우 100여 수이고 사(詞), 부(賦), 서(書), 소(疏), 서(序), 기(記), 비명(碑銘)은 약간 편만 있을 뿐”이라고 한 사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로의 8대 주손(冑孫) 이현집(李賢楫 초명은 관화(觀華))이 이형수(李亨秀)에게 발문을 부탁하며 “선조의 평생 저술이 소가 땀을 흘리며 끌 정도로 많았으나, 가화(家禍)가 계속 이어져 서적이 흩어져 없어졌다네. 상자에 수집한 것과 전송(傳誦)되는 것을 모은 것이 약간 편뿐인 데다, 또한 새겨서 오래도록 전하지도 못했네. 나는 우리 선조의 학행과 문장, 그리고 진실한 충성과 우뚝한 공렬이 날마다 없어져 천 년 뒤에는 사라질까 두렵네.”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이로의 저술이 본래는 많았으나, 가화 때문에 산일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현집(李賢楫)은 이렇게 가내(家內)에 전하는 시문을 수집하고 편차하여 간행을 도모하는 한편, 김희순(金羲淳)에게 시장(諡狀)을 부탁하여 시호(諡號)를 내리는 은전(恩典)을 도모하였지만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난 1852년 이현집의 종제(從弟)인 이현준(李賢俊)ㆍ이현곤(李賢坤) 등이 유치명(柳致明)에게 서문을 받고, 이휘령과 이형수에게 발문을 받아 문집을 간행하였다.
그런데 이형수의 발문에 의하면, 현준과 현곤이 가져온 초고가 4책이었는데 소, 서(書), 격문이 3분의 2를 차지하고, 시와 잡저는 10여 편이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또 이돈우(李敦禹)에게 부탁하여 지은 〈묘지명〉, 김희순이 지은 시장(諡狀), 허목(許穆)이 지은 행장 등 부록문자를 더하여 6권 3책으로 편차, 목판으로 문집을 간행하였다고 했다. 이점으로 미루어 현전하는 책으로 간행하기 전까지 약간의 증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간본은 현재 규장각(奎4248)과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811. 98-이로-송-판)에 소장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의 문집총간에 수록되어 있는 책의 저본은 1852년에 간행된 초간본으로,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이다.
3. 저자
이 책의 저자 이로(李魯)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여유(汝唯), 호는 송암(松巖)ㆍ문수산인(文殊山人)이며,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할아버지는 이한(李翰)이고, 아버지는 이효범(李孝範)이다. 어머니는 남평 문씨(南平文氏)로, 문은(文垠)의 딸이다. 이로는 1544년에 의령현(宜寧縣) 부곡리(孚谷里)에서 태어났다. 간략히 가계도를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삽화 새창열기
1550년 7세 때 처음 글을 배웠는데,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뛰어나 우뚝하게 두각을 드러내었으며, 13세 때에는 이미 경사에 두루 통달하였고 글을 짓는 솜씨가 뛰어났다고 한다.
1559년(명종14) 16세 때에 참의공 정위(鄭渭)의 딸인 초계 정씨(草溪 鄭氏)와 혼인하였고, 1560년에는 부친의 명을 받들어 거제(巨濟)에 귀양 와 있던 유헌(游軒) 정황(丁熿)을 배알하였다. 1562년 19세 때에는 두 아우 이보(李普)ㆍ이지(李旨)와 함께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1563년 20세 때에는 또 두 아우와 함께 진주(晉州)의 남명(南冥) 조식(曺植)에게 가서 배알하고 머물면서 수학하였는데, 조식이 한 번 보고 마음으로 허락하여 정성스럽고 지극하게 가르쳤다고 한다.
1564년 21세 때 진사 회시(會試)에 응시하여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율곡(栗谷) 이이(李珥),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등과 함께 합격하였다. 1568년(선조1) 25세 되던 해 봄에는 성주(星州)의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방문하였다. 1569년 26살 때에는 태학에 유학하였고, 이때 상소하여 을사충현(乙巳忠賢)의 설원(雪寃)을 청하였다. 1572년 스승 남명 조식의 장례에 참석하였다.
1573년 30세 되던 봄에는 덕계(德溪) 오건(吳健)을 배알하였고, 그해 6월에 아우 이보의 상을 당하였다. 1577년 34세 때에는 부친상을 당하였고, 2년 뒤인 1579년에는 모친상을 당하였다.
1581년 38세 때에는 삼년상을 마치고 상복을 벗었고, 1583년 40세 때에는 단성의 송암촌(松巖村)에 우거하였다. 동문 권유(權愉)가 단성에서 벼슬하고 있었는데, 이로가 송암의 산수를 사랑하여 그곳에 기거하게 되었고, 이곳의 이름을 따서 호로 삼았다.
1584년에는 봉선전 참봉(奉先殿參奉)이 되었으며, 이해 별과 초시에 급제하였는데, 이로가 1등을 하고 아우 이지(李旨)가 3등을 하였다.
1590년 10월에는 증광 문과 갑과에 3등으로 급제하였는데,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등도 함께 급제하였다. 이때 상소하여 수우당 최영경의 설원을 청하였다. 임진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직장(直長)이 되었고, 이해 3월 통신사가 가지고 돌아온 왜서(倭書)에 답하는 문제로 봉사(封事)를 올렸다. 이로는 여기에서 응대(應對)ㆍ사명(辭命)ㆍ강무(講武)ㆍ수변(守邊)의 계책을 갖추어 아뢰었는데, 그 표현이 엄밀하고 의리가 정확하며 조목과 강령이 정연하여 조야의 사람들이 모두 전하며 외웠다고 한다. 그리고 이해에 《사성강목(四姓綱目)》을 완성하였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창의하기로 약속하고 남쪽으로 돌아왔다. 5월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과 함양(咸陽)에서 만났고, 삼가(三嘉)와 단성(丹城)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진주의 촉석루(矗石樓)로 가서 김성일과 합류하였는데, 이때 이른바 삼장사(三壯士)가 시를 읊으며 진주를 사수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7월 왜적이 진주를 공격하자 김성일을 따라 나아가서 제군을 독려하며 왜적과 싸웠다. 이해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고, 10월에는 김성일과 함께 의령에서 왜적과 싸워 크게 이겼다.
1593년 50세 되던 해 정월에 병이 들어 산 속에 들어가 있었는데, 김성일에게 편지를 써서 군영의 중요한 일을 논하였고, 3월에는 조정에서 특별히 호남의 곡식을 내어 주기로 허락하여 호남의 곡식 2만 석을 수송하여 열읍(列邑)에 나누어 주었으며, 4월에는 김성일의 상에 곡하였다. 이해 가을 형조 좌랑이 되었다가 곧 거창 가수(居昌假守)가 되었다. 그리고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에게 큰 죄를 지은 풍신수길(豊臣秀吉)의 머리를 베어 오라고 격문을 보냈으며,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에게 계문(啓聞)하여 화의(和議)의 잘못을 논하였다. 11월에는 신광필(申光弼), 정경세(鄭經世), 신흠(申欽), 황신(黃愼), 이정귀(李廷龜), 이준(李埈), 안대진(安大進), 이춘영(李春英), 유몽인(柳夢寅)과 함께 제술문관(製述文官)에 초계(抄啓)되었다.
1594년 3월, 아우 이지(李旨)의 상을 당하였다. 7월에는 비안 현감(比安縣監)으로 재직하였고, 11월에 정언이 되었다가 곧 체차되고 다시 비안 현감이 되었다. 1595년 여름 합천(陜川)의 객사로 총병(摠兵) 유정(劉綎)을 방문하였고, 1596년 봄에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는데,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이 불러서 종사관으로 삼았다. 이에 이원익에게 편지를 올려 군영과 기무에 관해 논하였다.
1597년 54세 때에는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체직되었다. 3월에는 《용사일기(龍蛇日記)》를 저술하였고, 8월에 대소헌 조종도가 황석산성에서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자리를 마련하고 곡하였다. 9월에는 도체찰사 이원익의 별장(別將)으로서 창원(昌原)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598년 55세 되던 1월에 다시 정언이 되어 서울로 가다가 김산(金山)의 객관(客館)에서 졸하였고, 4월 의령현 소산(所山)에 장사 지냈다.
그가 졸한 뒤 예조 판서 김희순(金羲淳)이 쓴 시장(諡狀)에서는 “공은 어려서부터 뛰어나고 영특하였으며 조금 자라서는 강개하여 지조와 절개가 있었다. 두 아우를 이끌고 남명 선생을 사사하여 배움을 바로잡았고, 형제끼리 돈독하게 학문을 닦고, 사우들과는 토론을 하면서 경의(敬義)를 서로 닦고 박약(博約)에 나아갔다. 낙민(洛閩)의 여러 서적은 깊이 궁구하지 않음이 없었고, 역리(易理)와 병술(兵術)은 스스로 깨우쳐 이해하여 스승에게 인정을 깊이 얻었다. 그리고 한강 정구, 동강 김우옹 같은 동문과 김성일, 유성룡 같은 동지와 서로 선을 권면하며 지기로 허여하였다. 문장은 간묘(簡妙)하고 굉사(宏肆)하여 《춘추좌씨전》의 기풍이 많았다. 익히 알려진 것으로 상소문은 충간(忠奸)을 분별해 주기를 청하는 소와 왜적을 배척하는 글이 있고, 편지로는 왜장에게 보낸 격문과 명나라 장수에게 보낸 것이 있다. 이는 모두 손꼽히는 글로서, 하늘의 상도를 밝히고 사람의 윤기를 바로잡고, 시무의 큰 요점을 알기에 충분하다.”라고 하여, 그의 인물과 문장 등에 대해 정리하여 말한 바 있다.
1765년(영조41)에 통정대부 예조 참의에 추증되었고, 1802년(순조2) 의령 경산(景山)에 경덕사(景德祠)를 건립하여 위판을 봉안하고, 낙산서원(洛山書院)이라고 이름하였다. 10년 뒤인 1812년(순조12)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고, 1817년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사성강목(四姓綱目)》, 《용사일기(龍蛇日記)》, 《문수지(文殊志)》, 《송암집》 등이 있다.
4. 구성과 내용
이 책은 부록을 포함하여 모두 6권으로 되어 있다. 맨 첫머리에 유치명(柳致明)이 쓴 〈송암선생문집서(松巖先生文集序)〉가 있다.
권1에는 시와 만사(輓詞)와 부가 수록되어 있다. 시는 오언고시 5제 5수, 오언절구 4제 6수, 오언율시 7제 17수, 오언배율 1제 1수, 칠언고시 2제 2수, 칠언절구 15제 19수, 칠언율시 26제 77수, 칠언배율 1제 1수, 만사 4제 6수이고, 이어서 부 5수가 수록되어 있다. 권2에는 소(疏) 3편, 계(啓) 1편, 격문(檄文) 3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3에는 서(書) 9편, 잡저(雜著) 3편, 제문 8편, 신도비 1편, 묘갈명 5편, 묘지명 4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4에는 유사(遺事) 5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5와 권6은 부록으로 세계도(世系圖)와 저자의 〈연보〉, 〈행장〉, 〈시장(諡狀)〉, 〈신도비명〉, 〈묘지명〉, 〈유사〉, 〈낙산서원 봉안문(洛山書院奉安文)〉이 있다. 그리고 책의 맨 뒤에는 〈송암선생문집발〉이 있다.
권1의 시에는 1593년 승평(昇平) 등지로 가서 호남의 곡식 2만 석을 실어 보내 거제ㆍ진주 등지로 나누어 주는 일을 관장할 즈음 지은 〈승평동헌우음(昇平東軒偶吟)〉과 〈승평환선정증김상사여헌(昇平喚仙亭贈金上舍汝獻)〉 등이 있고, 1594년 병산(屛山)의 현감을 맡은 뒤 지은 〈병산횡루근차유서애성룡기고교관백량응경운(屛山黌樓謹次柳西厓成龍寄高敎官伯樑應擎韻)〉과 그 화운시 6제(題)가 모두 실려 있다.
이처럼 이로의 시는 거의 임란 시기에 지어진 것이 많다. 당시 자신의 감회를 노래한 것은 물론이고, 가까운 지기들과 소회를 주고받은 것, 전란의 상황을 읊은 것들이다. 이들 시는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으므로, ‘시사(詩史)’라는 말로 평하여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이로의 오언율시는 7제 밖에 되지 않으나, 이 가운데 〈차이서간제민운(次李西澗齊閔韻)〉이란 시는 11수로 이루어진 연작이다. 이 시에는 소서(小序)가 있는데, “불 때는 시루 위에 앉아 있는 듯 살갗에 땀이 질펀할 적에 홀연히 아름다운 시를 읊으니, 이에 상쾌하여 옥으로 양치하여 얼음물을 마시고 맑은 바람이 두 겨드랑이에 부는 듯하였습니다. 어찌 백붕지석(百朋之錫)일 뿐이겠습니까. 고마운 뜻을 헛되이 저버릴 수가 없으므로 거칠고 졸렬함을 헤아리지 않고 삼가 차운하여 돌려보내니, 한 번 보고 웃기를 바랍니다.”라는 내용이다.
이 시는 이로가 비안 현감으로 있을 때 이제민(李齊閔, 1528~1608)이 보낸 시에 차운한 것이다. 이제민은 이로의 벗으로 1552년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58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조 정랑, 양주 목사를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대사간, 대사헌을 맡아 국론을 조정하여 국가를 안정시켰다는 평을 들었다.
이제민의 시는 병산의 수령이 된 이로의 인물과 능력을 칭송하는 것에서부터 자신과 이로의 과거를 추억하는 것까지 다양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어, 이로에 대한 한 편의 인물기와 같은 시라 할 것이다. 이로가 이제민의 이러한 시를 받고 똑같이 이제민에 대해 칭송하는 시를 지어 보낸 것이 바로 〈차이서간제민운〉이다.
그의 시에 칠언율시가 수적인 면에서 다른 형식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그런데 칠언율시 가운데에는 갑오년인 1594년에 지은 〈병산횡루근차유서애성룡기고교관백량응경운(屛山黌樓謹次柳西厓成龍寄高敎官伯樑應擎韻)〉이라는 시가 있다. 이 시는 《송암집》 권1에 실려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문명을 만나 이로우니 굳세고 강한 용인데 / 利見文明矯矯龍
어느 해에 새매를 담장에서 맞힐 것인가 / 幾年鷙隼射于墉
맑은 시 예전부터 동산 가시밭에서 노래하고 / 淸詩夙昔歌園棘
굳센 절개 이제는 골짜기 소나무에 기대네 / 苦節如今倚壑松
유수곡 연주는 화답하기 부끄럽고 / 流水絃中慙和曲
병산의 벽 위에 새겨진 필봉을 감상하네 / 屛山壁上賞詞鋒
가련하도다 떠돌아다니며 누구를 의지할까 / 可憐旋轉憑誰仗
회복하면 응당 봉작 주는 곳에 놀 것이네 / 恢復端應游錫封
이 시는 1594년 7월 비안 현감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지은 것이다. 그런데 이 한 수의 작품에 대해 차운한 작품이 계속 이어졌다. 〈우화전운10수(又和前韻十首)〉, 〈재첩(再疊)〉 10수, 〈고조이군화시전운인우보증(高趙二君和示前韻因又步贈)〉 10수, 〈재첩(再疊)〉 10수, 〈삼첩(三疊)〉 5수, 〈사첩(四疊)〉 7수, 〈우차전운증이상사명지(又次前韻贈李上舍明之)〉 1수, 〈등석우차전운희증첨군(燈夕又次前韻戲贈僉君)〉 1수가 지어졌으니, 원래의 시 한 수에 대해 모두 55수로 차운한 것이다.
이로가 차운한 본래의 작품은 유성룡이 교관(敎官) 고응경(高應擎)에게 보낸 시인데, 이 시는 《서애집 별집》 권1에 〈갑신이관찰사도비안 차벽상운잉기교관년형(甲申以觀察使到比安次壁上韻仍寄敎官年兄〉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산에는 부소가 있고 습지에는 홍초가 있으니 / 山有扶蘇隰有龍
미인이 서로 생각하며 높은 담장에 기대네 / 美人相憶倚高墉
찬 구름은 어두워 돌아가는 기러기 헤매게 하고 / 寒雲黯黑迷歸鴈
지는 해는 아득히 먼 소나무 아래로 떨어지네 / 落日蒼茫下遠松
늙어감에 덧없이 세상 그리워함은 전혀 없고 / 老去都無浮世戀
얘기하니 옛날의 날카로움 여전히 드러나네 / 談來尙露舊時鋒
도리어 관찰사 됨 부끄러우니 몸소 교화함 헛되고 / 還慚按節虛親化
야박한 풍속 어찌 집집마다 봉해짐을 논하겠는가 / 薄俗寧論比屋封
서애 유성룡(1542~1607)의 시는 갑신년인 1584년에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유성룡은 1583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으니, 관찰사로 부임한 이듬해에 지은 것이다. 그는 비안에 도착하여 그곳 벽 위에 있는 시의 운을 차운하여 ‘교관 연형(敎官年兄)’에게 부친 것으로 되어 있다. 유성룡의 시에는 교관이 누구인지 드러나 있지 않다. 다만 형이라 한 것으로 보아 그가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이로는 그 교관이 바로 고응경임을 밝혔다. 고응경(1524~?)은 유성룡보다 18세 연장이므로, 유성룡이 형이라 한 것과 맞아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유성룡의 시도 벽 위에 있는 것을 차운한 것이라 하였으니, 이전에 이미 이 운자로 시를 지은 이름난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유성룡의 시만으로는 누구의 시를 차운했는지 알 수 없으나,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문집인 《회재집(晦齋集)》 권4에 〈차동헌운(次東軒韻)〉이란 작품의 운자가 유성룡 시의 운자와 같다.
《회재집》에 수록된, 이 시 바로 앞에 있는 〈차비안루상운(次比安樓上韻)〉이란 시에는 “戊戌七月十五日, 到比安, 患腫, 十八日呈辭, 以病久留.”이라는 주석이 있어, 이언적이 비안과 언제 어떤 관련이 있는가를 알려 준다. 주석을 보면 그는 무술년, 즉 1538년 비안 현감에 임명되어 7월 15일 부임하였다가 종기를 앓아 3일 만인 18일 사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언적 시의 제목도 〈차동헌운〉이라 되어 있으니, 그가 처음 이 시를 지은 것이 아니고, 동헌에 있는 시를 차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언적 이전에 같은 운으로 시를 지은 사람으로 고려 후기의 문인, 학자 이곡(李穀)을 들 수 있다. 그는 〈종전대회(㯶殿大會)〉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밝은 조정 활짝 열고 정종을 나열하였나니 / 大闢明廷列鼎鍾
종전이 우뚝 솟구쳐서 높은 성벽 압도하네 / 巍巍椶殿壓崇墉
씨름을 하는 무부는 씩씩하기가 범과 같고 / 武夫角力雄如虎
공중을 휘젓는 사마는 빛나기가 용과 같네 / 詐馬跑空炳若龍
일색의 의관들이 대가를 받들어 모시고 / 一色衣冠扶鳳輦
팔진미의 성찬으로 낙타의 봉우리를 올리네 / 八珍羞膳進駝峯
바라건대 태평의 낙을 위에서 길이 누리면서 / 願君永享升平樂
집집마다 여러모로 표창 받을 수 있기만을 / 比屋多方儘可封
그런데 이곡의 이 시는 비안의 동헌에서 지은 시가 아니다. 《가정집》 권19의 〈난경기행(灤京紀行)〉이란 시의 모음에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북경에서 지은 것임을 알 수 있고, 〈종전대회〉라는 시의 제목으로 보아 종전에서 대회가 벌어진 것을 보고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의 끝구절이 “比屋多方儘可封”이라고 되어 있는데, 비옥은 곧 비안의 옛 이름이므로, 이언적 이전에 비안에 왔던 어떤 사람이 이곡의 이 시를 차운하여 동헌에 시를 지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언적은 비안 현감으로 왔다가 동헌에 있는 이 시를 차운하여 시를 지었고, 유성룡은 경상 감사로 비안에 이르렀다가 그 동헌에 있는 이 시를 차운하여 고응경에게 주었던 것이다.
이로의 시에는 〈병산횡루근차유서애성룡기고교관백양응경운(屛山黌樓謹次柳西厓成龍寄高敎官伯樑應擎韻)〉이라고 하여 비안 향교의 누대에서 차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유성룡이 시를 지은 것은 1584년인데, 이로가 이를 차운한 것은 1594년이다. 즉 유성룡이 시를 지어준 지 10년이 지난 뒤에 이 시를 차운하였다.
이로가 이 시를 차운한 뒤에 다시 이 시의 운자를 사용하여 10수로 화운을 하였는데, 1~4번째 시는 조단(趙端, 1563~?)에게 부친 것이고, 5번째 시는 고여룡(高汝龍)에게 부친 것이고, 6번째 시는 시절을 탄식한 것이고, 7~9번째 시는 생각한 것을 읊은 것이고, 10번째 시는 매화를 조롱한 것이다.
앞의 운을 다시 사용하여 지은 〈재첩(再疊)〉에도 10수로 화운하였는데, 1번째 시는 유성룡에게 준 것이고, 2번째 시는 고 교관(高敎官)에게 준 것이고, 3~8번째 시는 품은 생각을 읊은 것이고, 9~10번째 시는 매화를 기롱한 시이다.
고군과 조군이 앞의 운으로 화답하여 보여 주기에 그로 인해 다시 차운하여 준다는 〈고조이군화시전운인우보증(高趙二君和示前韻因又步贈)〉이란 시도 10수로 화운하였는데, 1~2번째 시는 고응경에게 화답한 것이고, 3번째 시는 고여룡에게 화답한 것이고, 4번째 시는 조정부에게 화답한 것이고, 5~7번째 시는 시절을 탄식한 것이고, 8~9번째 시는 품은 생각을 읊은 것이고, 10번째 시는 매화를 조롱한 시이다.
앞의 운을 두 번째 사용한다는 〈재첩(再疊)〉이란 시도 10수로 화운한 것인데, 1번째 시는 유성룡에게 준 것이고, 2번째 시는 고 교관에게 준 것이고, 3~4번째 시는 성주(城主)에게 준 시이고, 5~7번째 시는 시절을 탄식한 것이고, 8~9번째 시는 품은 생각을 읊은 것이고, 10번째 시는 매화를 조롱한 것이다.
앞의 운을 세 번째 사용한다는 〈삼첩(三疊)〉이란 시는 5수로 화운한 것인데, 1번째 시는 유성룡에게 준 것이고, 2번째 시는 시절을 탄식한 것이고, 3~4번째 시는 품은 생각을 읊은 것이고, 5번째 시는 매화를 조롱한 것이다.
앞의 운을 네 번째 사용한다는 〈사첩(四疊)〉이란 시는 7수로 화운한 것인데, 1번째 시는 유성룡에게 준 것이고, 2~3번째 시는 성주에게 준 것이고, 4번째 시는 시절을 탄식한 것이고, 5~6번째 시는 품은 생각을 읊은 것이고, 7번째 시는 매화를 조롱한 것이다.
또 앞의 시를 차운하여 상사 이명지 백시에게 준다는 〈우차전운증이상사명지(又次前韻贈李上舍明之)〉라는 시는 1수이다.
등석에 또 앞의 시를 차운하여 장난삼아 여러 사람에게 준다는 〈등석우차전운희증첨군(燈夕又次前韻戲贈僉君)〉라는 시도 1수로 되어 있고, 이 시를 차운한 것으로 신탁(申濯), 고빙운(高騁雲), 고전운(高𩥇雲), 고응경(高應擎)의 시가 첨부되어 있다. 시의 뒤에는 “이때 좌객 중에 상사 이명지(李明之)는 말을 좋아하는 벽이 있고, 부정 윤경집(尹景楫)은 축적한 것이 두텁고, 고여룡(高汝龍)ㆍ고언룡(高彦龍)ㆍ고이룡(高而龍) 세 형제는 시를 잘 짓고, 신사결(申士潔)은 천천히 술이 취하고, 별감 이유현(李惟賢)과 좌수 변세림(卞世琳)은 전공이 많았다. 그래서 각각 그 성씨로 희롱하였다. 나 또한 농서(隴西)이니 이태백으로써 비유하였다. 애오라지 한 번 크게 웃고 박수 치기를 바란다.”라는 주석이 있다. 여러 사람에게 준다고 한 여러 사람은 이명지, 윤경집, 고여룡, 고언룡, 고이룡, 신사결, 이유현, 변세림 등으로 보이는데, 화답한 사람은 신탁과 세 고씨 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으로 보면, 이로는 유성룡의 〈갑신이관찰사도비안차벽상운잉기교관년형(甲申以觀察使到比安次壁上韻仍寄敎官年兄)〉이란 시를 무척 좋아하였고, 이 시를 차운하여 여러 방면으로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이렇게 이 시를 좋아한 까닭은 알 수 없지만, 이 시의 연원이 매우 깊었던 것을 좋아했던 것도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권2에는 소(疏), 계(啓), 격문(檄文)이 실려 있다. 소는 1569년에 태학에서 유학할 적에 을사사화(乙巳士禍) 때의 충현(忠賢)의 원통함을 풀어 줄 것을 청함과 동시에 간사한 무리들을 벌주기를 청하는 〈청신토을사충간소(請伸討乙巳忠奸疏)〉와 1590년 문과에 급제한 뒤에 무고 당한 최영경(崔永慶)의 설원을 청하는 〈청신최수우피무소(請伸崔守愚被誣疏)〉, 그리고 1591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에 왜서(倭書)에 답하는 문제로 올린 〈신묘봉사(辛卯封事)〉가 있다. 계는 1593년에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에게 화의하는 것이 이롭지 않음을 논하여 올린 〈상천장이도독계(上天將李都督啓)〉 1편이 실려 있고, 격문은 여러 고을에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알리는 〈통유열읍창기의려문(通諭列邑倡起義旅文)〉, 경상도의 강우 지역에서 군량을 모을 때 돌린 통문 〈통강우모량문(通江右募糧文)〉, 그리고 1598년 왜장 가등청정에게 보낸 〈격왜장청정문(檄倭將淸正文)〉 등 3편이 있는데, 모두 임란왜란과 관계된 저작이다.
이 가운데 〈신묘봉사〉와 〈격왜장청정문〉은 임진왜란 당시 이로의 왜군에 대한 인식과 왜군과 의병과의 관계 등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신묘봉사〉는 문과에 합격한 지 1년 뒤에 올린 것으로 글의 길이도 매우 장편일 뿐만아니라, 해박한 고사성어 등을 활용하여 지은 수준 높은 글이다. 뿐만아니라 이 글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왜국이 명나라를 치기 위해 길을 빌려달라는 글을 보내오자, 이에 답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이에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인데, 이 가운데에는 왜란에 대비하여 성지를 구축하고, 군대를 정예화할 것을 주장한 부분도 있다. 〈격왜장청정문〉은 임진왜란 중에 적장에게 보낸 글로, 가등청정에게 풍신수길을 임금으로 여기지 말고 빨리 항복하라고 권유한 내용이다.
권3에는 서간(書簡)과 잡저(雜著), 제문(祭文) 및 묘도문(墓道文)이 실려 있다. 서간은 모두 9편인데, 대부분 임진왜란 때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에게 보낸 것이고, 이원익(李元翼)에게 올린 것도 1편 실려 있다. 김성일에게 올린 것 가운데 1593년 김성일이 병이 들어 산속에 들어가 있을 때 보낸 편지는 군영을 운영하는 일에 대해 의논한 것으로, “왜적들의 형세를 보니 7, 8년 안에는 소탕될 기약이 없는데, 여러 진영의 장수들은 먼 앞날을 헤아리는 생각도 없이 쌀을 마치 흙을 쓰듯 합니다.”라고 하여, 군량을 절약할 것을 말하였고, “군중에 또한 형식적으로 꾸미기만을 힘쓰는 자가 많으니, 군관 수십 명을 또한 줄일 수 있고, 영리(營吏) 10여 명 역시 도태시킬 수 있습니다.”라고 하여, 불필요한 인원을 줄일 것을 건의하였다. 이원익에게 올린 편지에서는 군영과 기무에 관해 논하였는데, 대략 수령이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는 일, 장수와 병사들이 교만하고 건방진 것, 수성하는 방법, 면역의 잘못된 점 등에 대해 수천 언으로 아뢰었다.
잡저 가운데에는 〈사성강목서(四姓綱目序)〉가 있는데, 저자의 《사성강목(四姓綱目)》이란 책의 서문으로 1597년에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말한 사성은 주석에서 “四姓, 卽鐵城李氏,昌寧成氏,南平文氏,安岳李氏也.”라고 한 바와 같이 저자의 조부와 조모, 외조부와 외조모의 성씨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성강목》은 이들 네 성씨에 대한 간단한 보계(譜系)와 관향(貫鄕)에 관련된 기록 및 드러난 인물에 대해 정리한 책이다. 인물들에 대한 기록을 주자의 《통감강목》과 같이 핵심만 간추려 기록한다는 의미로 쓴 것 같다. 여기에는 〈사성찬(四姓贊)〉이 부기(附記)되어 있는데, 이는 《사성강목》에 수록된 사성에 대해 송찬하는 글이다. 이 밖에 〈화기(畫記)〉라는 글도 있는데, 이것은 1570년 이로의 외삼촌 감찰공 문덕수(文德粹)가 광주(廣州) 분원(分院)에서 그림을 가지고 오자 이로가 그것을 보고 느낀 점에 대해 기술한 것이다. 제문으로는 자신의 스승 남명 조식이 돌아갔을 때 지은 것과 자신의 동지이며 상관인 김성일이 진주에서 병사하자 그 죽음을 애도한 것 등 8편이 실려 있다. 묘갈명은 〈공조정랑정공묘갈명(工曹正郞鄭公墓碣銘)〉, 〈수의부위전공묘갈명(修義副尉田公墓碣銘)〉, 〈대호군김공묘갈명(大護軍金公墓碣銘)〉, 〈충의위김군묘갈명(忠義衛金君墓碣銘)〉 등 4편이 실려 있고, 묘지명은 〈참봉장공묘지명(參奉張公墓誌銘)〉, 〈박군묘지명(朴君墓誌銘)〉, 〈손군묘지명(孫君墓誌銘)〉, 〈처사노공유인김씨묘지명(處士盧公孺人金氏墓誌銘)〉 등 4편이 실려 있다. 1편이 실린 신도비명은 유경심(柳景深)에 대한 것으로, 저자 나이 27세경에 덕행과 문망을 인정한 유성룡이 종숙(從叔)의 신도비명을 부탁하여 지은 것이다.
권4에는 〈학봉김선생용사사적(鶴峯金先生龍蛇事蹟)〉, 〈대소헌조선생용사실적(大笑軒趙先生龍蛇實蹟)〉, 〈망우당곽선생용사실적(忘憂堂郭先生龍蛇實蹟)〉, 〈도구처사이공유사(陶丘處士李公遺事)〉, 〈군수성공유사(郡守成公遺事)〉, 〈현감문공유사(縣監文公遺事)〉가 수록되어 있는데,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도구(陶丘) 이제신(李濟臣) 등에 관한 유사(遺事)이다. 여기에 수록된 인물들은 모두 임란 때 크게 활약했던 의병장들로 그들의 활약상을 자세히 소개한 것이다. 이 내용은 《용사일기》를 축약한 것이라고 주석이 붙어 있다. 특히 이 가운데 김성일의 유사는 분량도 다른 것에 비해 훨씬 길어 김성일의 임란 활약상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출전을 《문수지(文殊志)》라고 각주에서 밝힌 것으로 보아 《문수지》에서 전재(轉載)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그 끝에는 또 〈부용사일기발(附龍蛇日記跋)〉이 더 있다. 《문수지》는 이로가 《용사일기(龍蛇日記)》의 내용을 줄여서 《문수지》라 하고, 이를 김성일의 본가에 보냈다는 기록이 〈연보〉에 보인다.
권5는 〈연보〉인데, 이 앞에는 저자의 세계도(世系圖)가 권차에 포함되지 않고 편차되어 있다.
권6은 부록(附錄)으로 의정부 우의정 허목(許穆)이 찬한 행장, 예조 판서 김희순(金羲淳)이 쓴 시장(諡狀), 이돈우(李敦禹)가 쓴 묘지명, 성여신(成汝信)이 쓴 유사, 진극경(陳克敬)이 쓴 유사, 유회문(柳晦文)이 쓴 〈청증작시소(請贈爵諡疏)〉, 정위(鄭煒)가 쓴 〈낙산서원봉안문(洛山書院奉安文)〉, 이휘령(李彙寧)이 쓴 〈상향축문(上享祝文)〉, 권사학(權思學)이 쓴 〈가증개제축문(加贈改題祝文)〉 등 저자의 묘도문자와 추존 관련기록이 실려 있다.
문집의 맨 뒤에는 이휘령(李彙寧)과 이형수(李亨秀)의 발문(跋文)이 붙어 있다.
2013년 12월 31일
[주-D001] 회재(晦齋)……같다 : 〈차동헌운(次東軒韻〉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坐對屛山似臥龍, 依依煙樹擁官墉. 映階舞月稚雙柏, 夾路迎風老萬松. 佳境重來驚鬢雪, 高樓昔日戰談鋒. 江湖十載憂君意, 近侍還慙欠一封.”
[주-D002] 종전대회(㯶殿大會)라는……읊었다 : 이곡(李穀)의 《가정집(稼亭集)》 권18 〈난경기행 종전대회(灤京紀行㯶殿大會)〉에 실린 이 시의 번역과 주석은 한국고전번역원의 것을 인용하였다.
[주-D003] 공중을……같네 : 사마연(詐馬筵)에서 화려하게 장식한 말이 허공에 앞발을 들고서 재주를 부리는 모양을 묘사한 것이다. 몽고 풍속의 일종인 마희(馬戱)를 사마(詐馬)라고 한다. 황제가 상도(上都)에 도착한 뒤에 보통 6월의 길일을 택해서 숙위(宿衛)하는 대신(大臣)과 근시(近侍)에게 말을 한껏 치장하여 묘기를 보이게 하고 각종 연희를 행하면서 사흘 동안 성대하게 연회를 베풀고 파하는데, 이를 사마연이라고 한다.
[주-D004] 집집마다……있기만을 : 한(漢)나라 육가(陸賈)의 《신어(新語)》 〈무위(無爲)〉에 “요순의 백성들은 집집마다 표창을 해 주어야 될 사람이 나오는 데 반하여, 걸주의 백성들은 집집마다 죽여야 될 자들이 나오니, 이는 임금의 교화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堯舜之民 可比屋而封 桀紂之民 可比屋而誅者 敎化使然也〕”라는 말이 나온다.
ⓒ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 | 윤호진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