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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일시: 2025년 3월 2일 (일)
o 날씨: 흐림
o 경로: 밀양아리나 입구 - 연꽃 단지 - 효자각 - 전망대 - 퇴로리 고가촌 - 위양지 - 완재정 - 용호정 - 가산둑길 - 연꽃 단지 - 밀양아리나
o 거리: 12.3km
o 소요시간: 2시간 45분
o 걷기정보 및 여행포인트: 밀양아리나, 퇴로리 이씨고가, 가산저수지, 위양지, 완재정, 용호정, 밀양연꽃단지
o 지역: 밀양 부북면
o 트랙:
o 지도
고향 다녀오는 길에 밀양아리나 둘레길을 찾았다. 밀양아리나 둘레길은 밀양아리나(구. 밀양연극촌)에서 시작하여 가산저수지를 경유하여 여주 이씨 집성촌인 퇴로리 古家마을을 둘러본 다음, 완재정으로 유명한 위양지를 돌아 나오는 둘레길이다.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려 습도가 높은 탓에 시정이 깨끗하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연꽃단지, 가산저수지, 퇴로리와 위양지 등 볼거리와 스토리가 많은 곳이라고 생각된다. 7~8월에 오면 1만평이 넘는 연꽃단지가 볼만 할 것같고, 5~6월에는 가산저수지와 위양지 주변에 만개한 이팝나무꽃이 압권이라고 한다. 퇴로리 여주 이씨 집성촌은 전통과 보존이라는 명제가 돋보인다. 덕분에 관광객도 북적인다. 위양지는 크지는 않지만 연못을 따라 늘어선 고목과 거목들이 볼거리며, 이팝나무가 만개한 모습은 절경을 뽐낸다고 한다. 연못 속 나뭇가지 위로 올라온 것이 남생이 인줄 알았는데, 사진을 찍고 보니 외래종인 '붉은 목 거북' 이다. 황소개구리를 비롯하여 블루길, 배스 등의 외래종이 우리나라 하천을 점령(?)한 것이 엊그제가 아니긴 하지만 어째 맘이 불편하다. 위양지를 돌아 나오면 가산호수를 내려다 볼수 있는 용호정이 멋진 자태를 뽑낸다. 밀양아리나 둘레길이 도상으로는 대략 7.5km정도 된다고 하는데, 트랭글이 측정한 거리는 12km를 약간 넘는다. 퇴로리古家마을에서 여기저기 골목길을 둘러봤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차이가 날까? 꽃피는 계절에 맞추어 한번 더 오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밀양 연꽃 단지]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가산리에 있는 문화 체험 단지로 살기 좋은 지역 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되어 교육과 문화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밀양연꽃단지는 7만 1472㎡의 규모이며, 공연예술 극장 밀양아리나를 연계한 연밭이 조성되어 있어서, 시민과 관광객에게 편안한 쉼터와 다양한 관찰 체험 등을 제공하고 있다.
밀양연꽃단지는 2008년 조성을 시작하여 2009년 6월 잎이 돋고 첫 꽃이 피어 관람객을 맞이하였다. 연꽃 둘레길이 조성되어 주변 경관과 절묘하게 어우러진 연꽃을 감상할 수 있다. 체험 활동으로 연근 캐기, 연잎차 만들기, 수생식물 및 수서곤충 체험을 운영하고 있다. 먹거리장터에서는 연밥, 연국수, 연잎차, 연꽃차를 즐길 수 있다. 연꽃, 수생식물, 수서곤충 관찰은 연중 개방되어 자율 체험으로 운영되며, 연잎, 연꽃차 만들기, 연잎, 연실, 연근 수확 체험은 정기 교육으로 이루어진다. 홈페이지에서 체험 예약을 하여 이용할 수 있다.
밀양연꽃단지에는 연꽃단지와 각종 체험장, 여러 편의시설이 조성되어 있다. 연꽃단지는 총 38필지로 이루어져 있다. 연꽃의 종류는 수련, 꽃홍련, 백련, 식용홍련 4가지이며, 각각 전체의 4%(2필지, 3,115㎡), 35%(16필지, 25,210㎡), 36%(12필지, 26,602㎡), 22%(8필지, 16,545)를 차지하고 있다. 연국수 가공 체험장을 연중 운영하며, 연 집하 선별장을 5월에서 12월 운영한다. 편의시설로는 450m의 관찰 데크, 쉼터 4개소, 100m의 식물 터널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산리(佳山里)]는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동쪽으로 부북면 월산리, 서쪽으로 무안면 동산리, 북쪽으로 부북면 퇴로리와 대항리, 남쪽으로 부북면 청운리와 접하고 있다. 가산리는 화악산(華嶽山) 지맥 중 하나가 서쪽으로 뻗은 앞쪽 기슭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넓은 들을 앞에 두고 마을 어귀에 우거진 숲이 있으니, 아름다운 산, 즉 ‘가산(佳山)’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의 형성과 관련하여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1726년(영조 2)에 설연과 설찬 형제가 함안에서 퇴로로 이주했는데,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할머니가 꿈 이야기를 하더라는 것이다. 꿈의 내용은 돼지 일곱 마리가 나타나 놀다가 어딘가 가기에 그 뒤를 따라가 보니 옛 둔던곡에서 멈추었다는 것이다. 꿈에서 깨어난 후, 돼지가 멈춰 섰던 곳에 터를 잡아 이주하라는 예시몽임을 깨닫고 이주하였다고 한다. 형제가 이주한 터가 지금의 가산 뒤쪽 독뫼 북편 기슭이고, 그 후 조금씩 남쪽으로 옮겨서 지금의 자리가 되었다고 한다.
가산리는 북쪽에 가산저수지가 있고, 서쪽에 독산이 있는 평야 지역으로 전형적인 도시 근교 농촌 마을이다. 마을 뒤쪽의 독산은 북풍을 막아 주고 마을 앞쪽의 숲은 마을의 후덕한 인심을 상징한다고 한다. 가산리 효자각과 마을 입구 정문(旌門)은 설광욱의 지극한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고 마을 안의 가산재(佳山齋)는 가산리로 옮겨 온 설연과 설찬 형제가 만년에 서책을 읽으면서 학문을 익히던 장소로서 1779년 창건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산리 효자각(駕山里孝子閣)]은 효자 설광욱(薛光旭)[1791~1822]의 효행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된 정려각이다. 정려각이란 효자, 열녀, 충신 등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마을 입구 등에 세운 건물이다. 설광욱은 본관이 순창(淳昌)이고, 설총(薛聰)의 후예이며, 옥천군파(玉川君派) 11대손이다. 순창설씨(淳昌薛氏)는 전라북도 순창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설거백(薛居伯)을 시조로 삼고 경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계승하다가 36세손 설자승(薛子升)이 순화백에 봉해지자 순창으로 분관하였다.
옥천군파(玉川君派) 시조는 옥천부원군 설계조(薛繼祖)[1418~1486]다. 설계조는 세조 때 정난 3등 공신에 추대되고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내며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작된 바 있다. 그 후에 옥천군파의 일부 자손이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가산리로 이주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다.
설광욱은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나이 9세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슬픔을 다하였다. 어머니가 병들어 눕자 종기의 고름을 입으로 빨고 대변을 맛봐 병세를 살폈고, 밤새 하늘에 기도하며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연명시켰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에 각각 3년간 시묘하였다. 1894년 경상도 지역 유림이 연명으로 설광욱의 효행을 포정하기를 조정에 상소하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퇴로리(退老里)]는 밀양시 부북면 북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동쪽으로 상동면 옥산리, 서쪽과 북쪽으로 대항리, 남쪽으로 월산리와 무안리와 접하고 있다. ‘퇴로리’ 지명은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수록되어 있다. 퇴로(退老)라는 마을 이름은 원래 우리 말로 무리채이다. 무리채라는 명칭의 연원을 알수 없으나, 원형은 ‘물리 채’ 혹은 ‘물리 치’이며, ‘물리’가 ‘퇴’로, ‘치’가 ‘로’로 대치된 것으로 여겨진다. ‘치’는 몽고어의 ‘적(赤)’[치]에서 온 것으로 사람을 가리키며, 존대의 의미로 로(老)가 된 것으로 보인다.
퇴로리는 자연 마을로 가산저수지 변의 퇴로마을, 북서쪽 산지의 득골마을 등이 있다. 퇴로리에는 토기 등 선사시대 유적이 발굴되고 있어 오랜 거주 역사를 알 수 있다. 재령 이씨가 처음 정착한 이후 경주 채씨와 순창 설씨가 정착한 것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이후 정착한 여주 이씨가 학문으로 널리 알려지며 마을이 번창한 것으로 전한다.
여주 이씨 재실인 밀양 삼은정이 있으며, 산지 쪽에는 서고정사가 있다. 본래 마을은 여주 이씨의 집성촌이었으나, 현재는 함평 이씨와 여러 성씨가 어울려 살아가며 퇴로 고가 농촌체험 마을을 조성하였다. 폐교된 정진초등학교 자리에는 밀양치즈스쿨이 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밀양 퇴로리 이씨 고가(退老里李氏古家)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밀양 용현정사] 조선말 유학자인 이능구(1846~1897)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909년 그의 아들 병규, 병원이 세운 정사이다. 주 건물인 정존헌을 비롯해 대문채, 고직사, 헛간을 먼저 짓고 1913년 정종헌 앞에 사암과 모암을 마주보게 세웠다. 정존헌이라는 이름은 이능구의 호를 따라 붙였고, 사암과 모암은 '우러러 받들고 마음소 깊이 따른다'는 뜻의 사모에서 한자씩 따서 지었다. 현재는 정존헌과 사암, 고직사만 남아있다. 모암은 1957년 사라호 태풍으로 멸실되었고 이후 대문채도 사라졌다. 정존헌은 정면 5칸, 측면 1.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온돌방-온돌방-마루를 차례로 배열하고, 왼쪽 온돌방 뒤에 부억을 두었다. 20세기초 밀양지역 정사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안내판)
[밀양 소은 고택] 19세기 중엽에 건축된 집으로 전통 한옥이 근대 한옥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한옥이 밀집한 퇴로리 여주 이씨 집성촌에서 가장 오래된 집으로 마을 가운데 있다. 대문채를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사랑채가 나오고, 사랑채 남쪽으로 모로 앉은 중문채를 통해 안채에 이른다. 사랑채는 팔작지붕에 정면 6칸 측면 1칸 규모이고 남북 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다. 남쪽부터 사랑마루, 큰사랑, 창고, 중사랑, 중사랑마루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앞면에는 쪽마루를 뒀다. 사랑채 앞 정원은 독선생이 기거하며 아이를 가르치던 새사랑채가 있던 자리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중문채와 마주하고 있다. 중문채는 온돌방, 광, 헛간 등으로 이뤄져있고 대문채에는 마구간, 창고 등이 배디됐다. 고택 이름 '소은'은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해 1936년 이 집으로 이주한 이태형(1895~1973)의 호에서 따왔다. 그는 유학과 시학문을 함께 배웠고, 명륜학원을 설립하여 초대원장을 맡는 등 평생을 육영사업에 헌신했다. (안내판)
여주 이씨 집성촌 마을인 [밀양 퇴로리 근대 한옥]은 근대 초기의 전통 양식으로 지은 한옥이다. 밀양 퇴로리 이씨고가(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와 중문으로 연결되어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안채, 사랑채 등의 배치와 평면 구조가 뛰어나다. 20세기 초 한옥의 변천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가치가 있다.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퇴로리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밀양 퇴로리 이씨 고가] 1985년 1월 23일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1890년 이익구(李翊九)가 건립한 이래 5대에 걸쳐 100년이 넘도록 보존된 전통적인 지방 고가이다. 기와를 얹은 토석장(土石墻)으로 구획된 넓은 대지에 남향으로 지은 목조 와가로 지금은 정침(正寢)과 중사랑(中舍廊)·별채만 남아 있다.
정침은 정면 6칸, 측면 2칸, 홑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청덕고가(淸德古家)>라는 당호가 있다. 중사랑은 정면 5칸, 측면 2칸, 우진각지붕집으로, 이익구의 아들 이병희(李炳熹)가 거처하던 곳이다. 별채는 내당(內堂)과 외당(外堂)이 있는데 내당은 정면 8칸, 측면 1칸이며 외당은 자제들의 독서실로 썼다. 동서 익랑은 맞배지붕으로 정면 4칸, 측면 1칸이며 후원(後園)에는 가묘(家廟)가 있고 정원이 꾸며져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밀양 부북면 퇴로리에 자리한 [여주 이씨 고가]는 문화재로 지정된 한옥으로 여주 이씨의 종택으로 조선 후기 항재 이익구 선생이 건립해 100여 년 동안 5대에 걸쳐 보존된 전통 한옥이다. 기와를 얹은 토담으로 경계를 가른 넓은 대지에 남향으로 지은 기와집으로 안채, 동서익랑, 중사랑채, 종가사랑채, 별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원형 그대로의 모습이 잘 보존돼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이웃한 이병수 고가와 중문으로 연결된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다. 청덕당이라는 당호를 가지고 있는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여주 이씨 자유헌공파의 종택이다. 퇴로마을 서쪽 산기슭에는 서고정사와 한서암 등 여주 이씨의 유적들이 자리하고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곳이지만, 아직도 여주 이씨 후손들이 생활하며 거주하고 있으며 체험객이 머무는 공간이므로 가급적 조용히 관람해야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위양지(位良池)]는 ‘선량한 백성들을 위해 축조했다고 붙여진 이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이 이름은 근래에 바뀐 이름으로 본래 이름은 양양지다. 신라 때 축조됐다는 양양지는 논에 물을 대던 수리 저수지였지만 인근에 거대한 가산저수지가 들어서 본래의 기능을 잃었다. 그러나 논에 물을 대는 대신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으로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밀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팝나무가 피고 있고 아름드리 왕버드나무와 소나무들로 울창한 숲을 두르고 있어 사시사철 아름다운 운치를 즐길 수 있다. 저수지 둘레를 따라 웅장한 기둥을 자랑하는 이팝나무 군락이 사계절 멋스러운 풍광을 뽐낸다. 하얀 눈이 내린 듯 이팝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봄날은 위양지의 절정이다. 맑은 날에는 못에 비친 이팝나무 꽃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예부터 이팝나무는 한 해의 풍년을 점치는 나무로도 알려져 있는데, 만발한 꽃송이가 마치 하얀 쌀밥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양양지의 풍경을 완성하는 건 정자인데, 연못에 떠 있는 섬 하나에 1900년에 지어진 안동 권 씨 문중 소유의 정자 ‘완재정’이 있다. 이 정자 주변으로 핀 이팝나무와 찔레꽃 등이 양양 지를 더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밀양 완재정(密陽宛在亭)]은 학산(鶴山) 권삼변(權三變)[1577~1645]의 유지를 받들기 위하여 안동권씨 후손들이 1900년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에 건립한 정자이다.
권삼변은 시조 권행(權幸)의 23세손이고, 증조부 권광국이 종정공파 파조이다. 권삼변은 6세 때 아버지 권추(權錘)가 죽자 교육상 어머니 파평윤씨를 따라 위양마을에 터를 잡았다. 당숙 권치(權錙)가 명종 때 단성에서 위양리 도방동마을로 이거하여 있던 연유였다. 권삼변은 임진왜란 때 어머니를 등에 업고 경상남도 창녕군 성산면 대산리로 피난 갔다가 왜군에게 붙잡혀 일본 산양도에 강항, 백수회, 정호인과 함께 지내다가 1604년 귀환하였다. 아들이 살아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 눈이 멀어지기까지 한 어머니가 귀국 후 10여 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애타는 그리움으로 밀양 위양못에 정자를 지으려고 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권삼변의 후손들은 250여 년이 지난 1900년 이르러 3칸의 집을 짓고 배를 띄워 왕래할 수 있도록 하였다. 향산 이만도의 기문[1903], 농산 장승택의 기문[1908]에 자세한 경과가 기록되어 있다. 정자 이름은 권삼변이 생전에 창건을 염두에 두고 지은 '완재정' 시에서 가져왔고, ‘완재(宛在)’는 시경 겸가에 나오는 말이다.
밀양 완재정은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목조 건물이다. 완재정은 밀양 위양못과 다리로 연결되어 있고, 마루에서 밀양 위양못을 볼 수 있도록 남쪽에 문을 별도로 설치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밀양 용호정(密陽龍湖亭)]은 격재(格齋) 손조서(孫肇瑞)[1412~1473]의 덕망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추화산(推火山) 일직손씨(一直孫氏)[안동손씨]의 문중 묘소 아래에 지은 정자이다.
경상남도 밀양 입향조는 정평공(靖平公) 손홍량(孫洪亮)[1287~1379]의 증손자로 진성현감을 지낸 손관(孫寬)인데, 1410년(태종 10) 외가인 승벌[현 용평]에 처음 터를 잡았다. 아들 손조서는 안동 일직현 송리동에서 태어나 3세 때 아버지를 따라 밀양 용평에 와서 성장하였다. 1435년(세종 17) 문과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집현전학사, 병조정랑, 지봉산군사(知鳳山郡事) 등을 역임하였다. 1456년 단종 복위를 꾀하던 신하들이 살해되자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은둔하였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 박팽년(朴彭年,1417~1456)과 교유가 깊었고, 뒷날 호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손조서는 사후 1812년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손조서의 5세손 영모재 손호(1531~1580)가 산외면 다원리로 이거함으로써 다원리가 안동손씨 집성촌이 되었고, 손조서의 구택이 있던 용평에는 현재 후손들이 거의 없다. (네이버 지식백과)
[밀양아리나]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가산리에 있는 공연 예술 극장으로 연극 제작과 교육, 세미나, 워크숍, 포럼 등 다양한 연극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1999년 밀양시장과 시의원, 교육장 등이 서울 정동극장에서 '어머니'를 관람한 것을 계기로 폐교한 월산초등학교 부지에 밀양연극촌을 건립하였다. 1999년 9월 1일, 이윤택 예술 감독이 이끌던 연희단거리패 40여 명이 입촌, 밀양에 정착하면서 본격적으로 밀양연극촌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밀양연극촌은 3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소와 단원과 단원 가족이 거주하는 8채의 개인 주택을 갖추고, 자연과 삶과 연극이 더불어 공동체를 이루는 연극 이상촌을 지향하였다. 초기에는 야외무대 숲의 극장(500석), 실내 스튜디오 극장(150석)이 개관하였으며, 이후 연극실험실, 브레히트 극장, 우리동네극장[250석] 등 실내 극장이 문을 열었다. 그 밖에 문화 체험과 예술 교육의 장, 연극 제작 공간, 연극사 자료관 등을 갖추었다.
밀양연극촌은 개관 10여 년 만에 연극 창작과 향유의 산실로 전국적 명성을 얻었다. 초기에는 매주 토요일 연희단거리패 공연과 주말 극장 공연이 열렸다. 매년 40~50회 정기적으로 열린 주말 극장 공연에는 밀양뿐 아니라 창원, 양산, 마산, 김해, 울산, 대구 등에서 방문하여 회당 관객이 150명에 이를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밀양연극촌은 2001년 제1회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를 개최하면서 공연 공간뿐만 아니라 문화 체험 및 예술 교육의 장으로 거듭났다. 제10회 축제에서는 젊은 연출가전, 대학극전을 비롯하여 50여 편의 연극과 뮤지컬을 상연하였으며, 연극 양식 세미나와 워크숍을 여는 등 전국 규모의 예술 축제로 성장하였다. 밀양연극촌은 전국의 젊은 연극인들이 숙식을 함께하며 꿈을 키우던 공간이었으나 2018년 미투 사건으로 치명타를 입었다. 밀양시에서는 임대 계약을 해지하고 축제 관련 예산 지원도 전면 취소하였다. 이러한 부정적 이미지를 쇄신하고자 대대적인 개편 작업을 시도하였으며, 공모를 거쳐 2020년 5월 밀양아리나로 개명하였다.
아리랑(Arirang)과 원형 경기장을 뜻하는 아레나(Arena)의 합성어 아리나(Arina)는 부드럽고 온화한 밀양의 이미지를 잘 나타내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밀양시는 복합 예술 공간 밀양아리나를 기반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함으로써 문화 도시 밀양의 이미지를 구축하여 나가고 있다. 밀양아리나는 16,104㎡ 대지에 스튜디오 극장 2곳, 우리동네극장[실내], 야외 성벽극장, 물빛극장[야외]이 조성되어 있으며, 연습실과 게스트하우스를 갖추고 있다. 2021년 6월 달뫼작은도서관이 문을 열기도 하였다. 밀양아리나의 상용 시설은 공연, 콘서트, 강연, 수업 등이 이루어지는 다목적홀로 기능한다.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