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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 경상도에서 교난이 일어나자 한양에서 교회재건 운동에 뛰어든 청년이 있었다. 1801년 큰 아들 정 철상과 함께 순교한 정 약종의 아들 정 하상이었다. 정 하상은 여 섯 살 때 부친을 잃고 가산을 잃는다. 모친 유 조이 세실리아와, 누이동생 정 정혜 엘리사벳은 마재 숙부 정 약용 집에서 머문다. 머물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배교를 권유받지만 마재를 떠나 한양으로 올라온 후 교우들 집에서 살며 신앙을 이어 간다. 그러한 생활 속에서도 양근 출신 조 동섬(趙 東暹) 유스티노가 함경도 무산(茂山)에서 유배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길을 떠난다. 그를 찾은 하상은 교리와 한문을 배운 후 교회를 재건할 목적으로 북경에 갈 계획을 세운다. 정 하상은 22세 때 교우들이 마련해 준 여비를 갖고 동지사 이 조원 일행 역관의 하인으로 변복하고 1816년 10월 24일 한양을 떠나 북경에 무사히 도착한다. 북경에서 있던 부주교 리베리오(Riberio) 신부를 찾아 가 조선에 성직자를 보내 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프랑스혁명 여파와 청나라 내부에서 천주교 탄압관계로 현재는 어렵다는 이야기만 듣고 교리서와 성물만 받고 3월에 귀국하였다. 정 하상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10여 년 동안 9화에 걸쳐 북경을 오고 간다.
정 하상은 첫 번째 북경을 다녀오던 길에 짐을 실은 말이 다리를 다쳐 예정보다 하루 늦게 한양에 도착한다. 천만다행이었다. 정 하상이 한양에서 머물던 집주인 양근 출신 조 명수 베드로가 전날 관헌에게 체포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안 교우들이 서대문 밖에서 맞으며 다른 곳으로 안내하여 무사하게 된다. 조 명수는 조 동섬의 친척으로 권 일신의 딸 데레사의 남편이었으며 정 하상의 북경행을 도와준 교우였다. 조 명수가 잡히자 아내와 하녀 고 발바리아 도 형조에 자수하였으나 온갖 악형을 받다 1819년 5월 21일 참수형을 받게 된다. 정 하상 숙부인 정 약용은 세도가 김 조순의 배려로 강진 귀양에서 풀려나 마재로 돌아왔다. 이러한 때 정 하상은 거의 해마다 동지사 무리에 끼어 북경을 오가며 성직 자를 맞으려 노력한다. 그는 1823년 한어역관(漢語譯官) 인 유 진길을 사귀어 함께 북경으로 가 북경 부주교 리베리오 신부에게 아오스딩이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게 하고 성직자 파견을 간곡하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1825년 이 여진 등 교인들의 이름으로 로마 교황에게 편지를 보네 조선교회의 딱한 사정을 알려 조속한 성직자 파견을 요청한다. 이러한 사실에 감동받은 북경 부주교는 2명의 중국인 출신 신부가 조선에 진출할 뜻임을 알아차리고 1826년 조선 신자들이 북경까지 와 함께 입국할 것을 알렸으나 정 하상은 봉황성, 변문까지 갈 수밖에 없어 실패로 돌아간다.
이러한 와중에 1826년 10월 북경 주재 부주교 리베리오 신부가 선종하게 되고 마카오에서 대기 중이던 북경 주교 사라이바 신부도 1818년 1월에 이미 선종하여 남경주교로 임명된 피레스(Pires) 신부가 남경으로 취임하지 못하자 1826년 10월부터 북경 교구 사목을 이어갔다. 정 하상은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1827년 말에 북경으로 가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고 모친과 누이동생이 미신자 집에 기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을 하루속히 구원하라고 충고만 받고 돌아오게 된다. 헛되이 귀국한 정 하상은 모친과 누이동생과 함께 다시 고향 마재로 내려가 5- 6년 전교를 하며 지내게 된다. 이런 때에 1827년부터 조선교회는 다시 박해에 휩싸이게 된다. 전라도 곡성 천주교 신자들만 살고 있는 도공부락인 당고개 마을이 있었다. 이곳에 살던 교인이 개인적인 감정으로 밀고하여 생긴 박해였다. 전라도에서만 240여 명이 체포되고 그 여파는 전국으로 퍼져 충청, 경상도를 거쳐 한양까지 5백여 명의 신자가 채포 된다.
이 박해로 전라도의 이 경언, 김 대권 등 7명과 충청도의 전 운악, 박 성상이 처형되었으며 남인 교인들은 죄의 경중에 따라 처리된다. 이 경언은 왕족 이 수광의 9대 후손으로 서울에 체포되어 전주 감영에서 1827년 5월에 옥사를 한다. 다른 교인들은 사형선고를 받고도 집행하지 않은 것은 국왕 순조가 시파출신 왕비인 순원왕후의 감화를 받아 무죄한 교인을 함부로 죽이기를 꺼렸기 때문이었다. 또한 당시 몸이 많이 불편하였던 순조는 정사를 18세의 아들 효명세자에게 맡겨 세자의 행운을 빌어 주는 뜻에서 교인을 주이는 것을 꺼렸던 점도 있었다. 1830년 4월 22일에 세명세자가 피를 토하고 쓰러진다. 이때 승지 벼슬을 빼앗기고 긴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끝내고 마재로 돌아온 정 약용이 의술에 능하다는 소식을 접한 순조는 5월 5일 벼슬을 돌려주고 세자 병 치료를 맡기었으나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해 보고 다음날 세자는 21세의 나이로 운명하게 된다.
한편 조선 교우들은 1825년에도 로마 교황에게 편지써서 성직자 입국을 간청한다. 이 편지는 북경 주교 주관아래 라틴어로 번역되어 조선교우 암브로시오 이름으로 교황에게 보내진다. 이를 본 교황 레오 2세는 곧 추기경회의를 소집, 협의 끝에 포교성성장(布敎聖省長)이던 추기경 카펠랄리(Cappellari)로 하여금 1827년 9월 1일 자로 라틴어로 번역되어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신학교 교장 랑글로아(Langlois)에게 공문으로 보내도록 한다. 공문내용은 시급하게 영구적으로 조선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으로 나갈 수 있도록 정신적 곤궁 구제를 도와달라고 청하였다. 당시 파리외방전교회는 1663년 신학교를 설치한 후 극동 아시아와 캐나다와 같은 미전교지역 전교에 힘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진출을 요청받은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랑글로아 교장 신부는 성직자 부족, 재정의 궁핍, 조선입국의 어려움 등을 설명하며 조선 진출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적어 교황청에 보내게 된다. 이를 받아 본 교황청 카페랄리 추기경은 11월 17일 자로 교장에게 해결책을 만들어 제시하였다. 1. 신학생 증원 가능성. 2. 재외 주교들의 찬성 가능성. 3 교황청 포교성성 재정지원 가능성 4. 조선입국 가능성을 제시하고 조선신자들이 보내온 편지 사본을 보내 주었다.
두 번에 걸쳐 편지를 받자 교장은 12월 4일 자로 답신을 다시 보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입국의 어려움, 관련 주교들의 의견 타진서와 조선입국 안내와 관련된 마카오 경리부의 보고내용, 미도착 등의 이유로 난색을 표명한 것이다. 그렇지만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은 포교성성과의 약속한 파리 외방전교회의 규칙에 따라 재외 주교들에게 공문을 보내어 조선 전교의 뜻이 있는지 여부에 대하여 확인하겠다 하였다. 이러한 질의에 대하여 당시 태국 부주교였던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신부는 1829년 5월 19일 자로 포교성성과 신학교 교장에게 답신을 보내어 스스로 조선에 진출하겠다고 약속을 보내왔으며 태국교구 플로랑(Florent) 주교의 주례사제로 6월 29일 주교 위(主敎位)에 오르는 성성식(成聖式) 갖었다. 소(蘇) 주교가 교황청 결정을 기다리는 도중에 파리외방전교회에 대하여 조선에 진출할 것을 제의한 포교성성장 카페랄리 추기경은 1830년 11월 30일에 서거한 비오 8세 교황의 뒤를 이어 255대의 교황 뽑혀 그레고리오(Gregorio) 16세가 되었다. 새 교황 그레고리오 교황은 1831년 9월 9일 두 가지 교서를 발표한다. 조선교구를 북경교구에서 분리시켜 독립교구로 승격시킨다. 조선교구의 초대 교구장은 소주교를 임명한다는 것을 밝혔다. 비로소 조선교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 벽과 이 승훈의 노력으로 조선교회가 창설된 지 47년 만의 일이었다.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와 땀이 일궈낸 쾌거였다.
조산교구가 설정되고 초대 주교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을 소 주교가 알게된 것은 1832년 7월 25일이었다. 그는 청나라 사람 왕 요셉을 앞 세우고 패낭(Penang) 섬을 떠나 조선으로 향하였다. 패낭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신학생을 양성하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샤스탕(Chastan) 신부도 조선교회가 파리 외방전교회에 맡겨진다면 소 주교님과 고락을 함께 하겠다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이탈리아 나폴리 신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청나라 사람 유 방제 신부는 조선에 프랑스 신부를 보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방해하기 위하여 소 주교보다 먼저 길을 떠나 소 주교가 싱가포르를 떠날 때 미리 만주로 가 조선입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 주교는 이러한 유 방제 신부의 본심도 모른 체 10월 마카오에 도착하여 그의 임명장(任命장)을 받고 그곳에 있던 교황청 포교성성 동양경리부 소속의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 르그레좌(Legregois)를 조선교구의 총대리로 임명한 후 청나라로 가는 배편을 기다렸으나 쉽게 구하지 못하였다. 소 주교는 안내자인 왕 요셉에게 북경 주교, 유 방제 신부 및 조선 교우에게 보내는 편지를 갖고 먼저 북경으로 갔다가 남경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정한 후 왕 요셉이 먼저 11월 23일 북경으로 떠나도록 하였다.
안내자 왕 요셉이 떠난 후 소 주교도 배편이 생겨 12월20일경 사천 성(四川省)으로 임지가 결정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와 함께 청나라 배를 타고 마카오를 떠나 복건성(福建省) 경유하여 1833년 5월 15일 남경에 도착한다. 한편으로 모방신부도 소 주교를 따라 조선으로 가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사천주교의 허락을 받기 위하여 복건성에서 머물렀다.
남경에서 왕 요셉을 기다리리던 소 주교는 1833년 6월 26일 돌아온 왕 요셉과 만나 조선 교우들이 주교를 기다린다는 소식을 듣고 7월 20일 대륙횡단에 올랐다. 무더운 여름 갖은 고초를 겪어가며 10월 10일 산시 성(山西省) 주교관이 있는 태원(太原)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에서 소 주교는 10개월을 머물며 조선에 입국하기 위하여 길을 찾고 있었다. 소 주교보다 먼저 1834년 1월 16일 조선에 들어간 유 방제 신부의 갖은 공작으로 조선교구 교우들과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었으나 그를 따르던 정(鄭) 신부와 羅 신부도 뒤 따르는 것을 알고 1834년 9월 22일 만주로 걸음을 옮긴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넘어 내 몽고 서만자(西灣子)에서 10월 8일 모방신부를 만나고 왕 요셉 신부를 북경으로 보내 조선교우들에게 연락하여 입국날짜를 정하도록 하고 1835년 10월 19일 열하성(熱河省) 승덕(承德)북방에 있는 교우촌 별리구에 도착 요동 통과를 위한 북경교구 주교 보증서를 기다리던 중 뇌일혈 중세로 43세 나이로 급서 하게 된다. 브뤼기에르 (蘇) 주교는 11월 20일 전후에 봉황성에서 동지사 일행에 끼어 지나가는 조선 교우들과 만나 조선의 입국을 하려는 목적을 달성하려다 선종을 하게 되어 안타깝고 애석한 일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소식을 서만자에서 들은 모방신부는 벨리구로 달려 가 브뤼기에르 신부님 장례 미사를 치른 후 봉황성으로 나와 1836년 1월 10일 정 하상, 조 신철 등 다섯 명의 교우를 만난다. 즉시 상복으로 위장하고 교우들의 안내를 받으며 관문을 통과하여 1월 25일 한양으로 들어와 유 방제 신부가 머물던 집에서 짐을 풀었다. 이때부터 3년 9개월간 모방신부의 조선 전교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주 문모 신부가 순교한 지 35년 만에 프랑스 성직자를 조선교구는 모시게 된 것이다. 이후 입국하는 성직자들은 상복을 착용하여 신분을 속이고 조선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은 “떠나라! 복음의 군대여, 그대들의 소망을 이룰 날이 왔다. 선교사들이여, 그대들의 발자취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친구들이여, 이생에서는 안녕을. 언젠가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이오” 리는 파견가를 함께 부르며 멀고 먼 동북 아시아 교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을 전교하기 위하여 찾아 왔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프랑스 선교사들은 새남터에서 순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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