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병주를 소개한다
그는 나의 스승이다. 그가 1992년 작고하기까지
그에게서 강의를 들은 적 없고 그의 얼굴을 한번도 뵌 적은 없지만
세상에 빛을 본 그의 저서 중에서 거의 80프로 정도는 읽은 것 같으니
그가 나의 스승이라 하여도 그다지 어색하지는 않을 것이다. 1992년 어느 계절이었던가,
그의 부음을 신문을 통해 접하면서 나는 스승을 보냈다.
평창동 어느 부근에인가 거주하시었는데
지금 그의 묘는 하동에 있다. 아직 가 보지는 못하였다.
명색이 내가 그를 스승이라 부르며 그의 거처도, 그의 빈소도, 그의 유택도
한 번도 찾지 아니하였으니 제자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
훗날 나에게도 좋은 시절이 오면은 그분을 뵙기를 기약한다.
이 병주에 대한 세인의 평은 다양하다. 특히나 그의 살아 말년에 전두환 정권에의 의부는
두고두고 그에 대한 폄훼의 소재이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나
박 정희 사후 신군부 지도자 전 두환에 대한 그의 애증은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병주는 진주 중학 마치고 와세다 대학 불문과 시절
학병으로 중국전선에 나간다. 광복 후는 학생들 지도도 하고
당시 시대 상황에 따라 좌우가 갈릴 때,
회색인으로 살았다고 본인은 말하기도 한다. 언론에도 종사하였고
5.16 정변으로 약 3년간 수감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석방된 해,
그의 나이 마흔넷이었다. 그리고 그는 소설을 쓴다.
지리산, 관부연락선, 소설 알랙산드리아. 산하, 소설 남로당. 행복어 사전,무지개 연구, 이루 헤아릴 수 가 없다.
20대에 처음 이 글들을 접하고 이 소설들을 통해 나의 인격이 형성되었다.
어느 시절은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귀하게 모셔온 그의 책들을 주저없이 헌책방에 넘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너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나는 다시 그를 찾는다.
지금 머리가 아프다. 만일 그가 나라면
그는 이 위난을 어떻게 극복하였을까. 그의 책을 지금 당장 다시 보아야 하는데
나의 서가에 그의 책은 단 한권도 남아 있지 않다. 스승을 버린 대가를 혹독하게 치룰 것 같다.
그의 책이 보고 싶다. 다시 여유가 허락되면
그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올릴 날이 오기를 바란다. 이병주, 그는 시대의 거센 파도를 가슴에 안고 갔다.
사마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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