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수말(史禍首末)
이극돈은 일찍이 김탁영(金濯纓)이 헌납으로 있을 때에 크게 논핵(論劾)을 당하였다. 성묘(成廟)의 실록(實錄)을 수찬할 때에 당상(堂上)이 되었는데, 사초(史草)에 자기의 악행이 매우 자세히 적혀 있는 것을 보고, - 다른 데에는 “성묘의 국상 때 이극돈이 전라 감사로 있으면서 서울에 향(香)을 올리지도 않았고 기생을 수레에 태우고 다녔는데, 탁영이 그것을 사초에 적었다. 이극돈이 개정해 줄 것을 사사로이 청했으나 탁영이 따르지 않자 유감을 품었는데, 실록을 수찬할 때 이르러 드디어 사화(士禍)를 일으켰다.”라고 되어 있다. - 또 광묘조(光廟朝 세조(世祖))의 일을 적은 데에 점필재(佔畢齋)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은 것을 보고는, 화란의 불씨로 삼고자 하여 어세겸(魚世謙)에게 물으니, 어세겸이 대답하지 않았다. 또 유자광(柳子光)에게 의논하니, 유자광이 함양군(咸陽郡)에 자신이 만들어 건 현판(懸板)을 점필재가 불태워 버린 것에 대해 일찍이 유감을 품고 있었으므로, 이극돈의 말을 듣고는 팔을 걷어붙이고 따랐다. 노사신(盧思愼), 윤필상(尹弼商), 한치형(韓致亨)도 그 말을 듣고 따랐다. 함께 차비문(差備門)에 가서 비밀리에 도승지 신수근(愼守勤) - 이자도 일찍이 사류(士類)에 유감을 품고 있었다. - 에게 부탁하여 아뢰었다. 연산(燕山)이 일찍이 문사(文士)들에게 구애받아 마음대로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는 데에 분을 품고, 한번 분풀이를 하고자 하면서도 그 흠을 잡지 못하다가, 유자광 등의 말을 듣고는 매우 기뻐하여 일을 키워 옥사(獄事)를 이루었다. 유자광이 《점필재집》에 있는 〈조의제문〉과 〈술주시(述酒詩)〉를 집어내어 “모두 세조(世祖)를 가리켜 지은 것이다.”라고 하면서 스스로 주석(註釋)을 하고 구절구절 풀이를 하여, 부도(不道)로 아뢰고 대역(大逆)으로 논하니, 곧바로 부관참시(剖棺斬屍)하게 하였다.
김일손(金馹孫),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는 ‘악행을 편들어 이루어 주어서 그 글을 칭송하고 사초에 적었다’는 죄목으로 모두 극형(極刑)에 처하고, 이목(李穆), 허반(許磐), 강겸(姜謙)은 ‘선왕(先王)에게 있지도 않았던 일을 거짓으로 꾸며서 서로들 말을 전하고 사초에 적었다’는 죄목으로 모두 죄율을 적용하고, - 이목과 허반은 극형에 처하고 강겸은 곤장을 쳐 유배하였다. - 표연말(表沿沫), 홍한(洪瀚), 정여창(鄭汝昌), 종실(宗室) 이총(李摠)은 난언(亂言)을 범한 죄목으로, 강경서(姜景敍), 이수공(李守恭), 정희량(鄭希良), 정승조(鄭承祖)는 난언을 알고도 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모두 논하여 곤장을 쳐 원방(遠方)에 유배하고, 이종준(李宗準), 최부(崔溥), 이원(李黿), 이주(李胄), 김굉필(金宏弼), 박한주(朴漢柱), 임희재(任煕載), 강백진(康伯珍), 이계맹(李繼孟), 강혼(姜渾)은 모두 ‘문도(門徒)로서 붕당을 지어 윗사람을 비방하였다’는 죄목으로 경중을 나누어 곤장을 쳐서 혹은 극변(極邊)에 혹은 원방에 부처(付處)하고, 아울러 봉수군(烽燧軍)과 정로간(庭爐干)에 정역(定役)하였다. - 무오년 7월 17일에 전지(傳旨)를 내렸고, 7월 27일에 교서를 반포하였다. - 선생은 장일백(杖一百) 유삼천리(流三千里) - 종성(種城) - 로 결정되었다. 갑자년 9월에 사림의 화란이 다시 일어나 재앙이 무덤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주1] 조의제문(弔義帝文) : 항우(項羽)에게 죽은 초(楚)나라 의제(義帝)를 조문하는 글이다. 점필재는 이 글을 지어, 단종(端宗)에게 왕위를 빼앗은 세조(世祖) 및 당시의 시대 상황을 비유하여 풍자하였다. 연산군이 즉위한 뒤 《성종실록(成宗實錄)》을 수찬할 때에, 점필재의 제자인 탁영 김일손이 이 내용을 사초(史草)에 적어 넣었는데, 실록청 당상관이었던 이극돈(李克墩)이 이것을 연산군에게 보고하여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그 내용이 《점필재집(佔畢齋集)》에 실려 있다. 《국역 점필재집 문집 부록 무오사화 사적》
[주2] 술주시(述酒詩) : 도연명(陶淵明)의 작품으로, 남조(南朝) 송 태조(宋太祖)인 유유(劉裕)에 의해 시해당한 진 공제(晉恭帝)를 애도하는 내용인데, 점필재가 이 시에 화운(和韻)하여 〈도연명의 술주시에 화답하다〔和陶淵明述酒〕〉라는 시를 지었다. 《국역 점필재집 시집 제11권》
史禍首末
李克墩。嘗於金濯纓之爲獻納。重被論劾。及修成廟實錄時。爲堂上。見史草書已惡甚悉。一云。成廟之喪。克墩爲全羅監司。不進香京師。而載妓而行。濯纓書之於史。克墩私請改而不從。銜之。及修實錄。遂起士禍。 又見書光廟朝事。載佔畢齋弔義帝文。欲藉爲禍胎。問於魚世謙。世謙。不答。又謀於柳子光。子光嘗銜畢齋焚其所作懸板於咸陽郡。聞克墩言。揚臂從之。盧思愼,尹弼商,韓致亨。亦聞而從之。俱詣差備門。密囑都承旨愼守勤 亦嘗銜於士類 啓之。燕山嘗憤爲文士所拘。不能縱惡。欲一施快。而未得其釁。聞子光等所啓。大喜。鍛鍊成獄。子光 摘佔畢集中弔義帝文與述酒詩。以爲皆指 世祖而作。自爲註釋。逐句解之。啓以不道。論以大逆。卽令剖棺。金馹孫,權五福,權景𥙿。以黨惡相濟。稱美其文。書諸史草。竝置極刑。李穆,許磐,姜謙。以誣飾先王所無之事。傳相告語。筆之於史。皆按律。李許極刑。姜決配。 表沿沫,洪瀚,鄭汝昌,宗室摠。罪犯亂言。姜景敍,李守恭,鄭希良,鄭承祖。知亂言而不告。幷論決遠配。李宗準,崔溥,李黿,李胄,金宏弼,朴漢柱,任煕載,康伯珍,李繼孟,姜渾。俱以門徒。朋黨謗訕。分輕重論決。或極邊。或遠方付處。幷定烽燧庭爐干之役。戊午七月十七日傳旨。七月二十七日頒敎。 先生決杖一百流三千里。鍾城 甲子九月。縉紳禍再起。禍及泉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