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영천군수榮川郡守 송공 이창宋公爾昌의 묘지명 병서
공의 휘는 이창(爾昌)이고 자는 복여(福汝)이며, 성은 송씨(宋氏)로, 족계(族系)가 은진(恩津)에서 나왔다. 고려조 때 판사(判事) 대원(大原)이란 분이 있었는데, 이분이 비조(鼻祖)이다. 대원으로부터 3세를 내려오면 명의(明誼)란 분에 이르는데, 사헌 집단(司憲執端)을 지냈으며,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등 여러 현인들과 친하게 지내어 세상에 이름난 사람이 되었다. 이분은 참판을 지낸 황수(黃粹)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황수는 회덕인(懷德人)이었으므로 자손들이 이로 인하여 회덕에 살게 되었다.
고조는 휘가 요년(遙年)으로 군자감 정(軍資監正)을 지냈다. 증조는 휘가 여즙(汝楫)이고, 조고는 휘가 세영(世英)인데, 두 분은 모두 벼슬하지 않았다. 선고는 휘가 응서(應瑞)로 임천 군수(林川郡守)를 지냈으며, 품계는 통정대부(通政大夫)였다. 비(妣)는 이씨(李氏)로 병조 판서 정헌공(正獻公) 이윤경(李潤慶)의 따님이다.
공은 태어나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어머님을 잃었다. 장성해서는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와 백록(白麓) 신응시(辛應時) 등 여러 사람들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또 율곡(栗谷)의 문하에서 종유하면서 스스로 학문에 힘썼다. 경인년(1590, 선조23)에 상상(上庠)에 오르고 경자년(1600, 선조33)에 벼슬길에 나아가 연원도 찰방(連原道察訪)이 되었다가 신축년(1601)에 경양도 찰방(景陽道察訪)으로 바뀌었다. 병오년(1606, 선조39)에 선공감 직장(繕工監直長)으로 있다가 전옥서 주부(典獄署主簿)로 승진하였으며, 이어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 전임되었다. 그다음 해에 진안 현감(鎭安縣監)에 제수되었으며, 또 그다음 해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다. 상기(喪期)를 다 마치고는 사섬시 주부(司贍寺主簿)에 제수되었다가 신녕 현감(新寧縣監)에 제수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계축년(1613, 광해군5)에 광해군이 큰 옥사를 일으켜 대비(大妃)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을 거짓 죄로 얽어서 죽였는데, 공의 서얼 누이의 사위인 서양갑(徐羊甲)이 그 화에 관련되었으므로 공은 이에 연루되어 파직되어 돌아왔다.
계해년(1623, 인조1)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 비로소 문의 현령(文義縣令)에 제수되었다. 처음에 조정에서 어사(御史)를 파견하여 여러 해에 걸쳐 포흠(逋欠)된 부세(賦稅)를 감면해 주겠다고 선유(宣諭)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명령을 취소하였다. 그러자 공은 상소를 올려 신의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며, 또 문의현의 잔폐된 상황을 아주 상세하게 진달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견감(蠲減)하는 것을 허락받으니, 온 고을 사람들이 이에 힘입게 되었다. 을축년(1625)에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에 제수되었다.
병인년(1626, 인조4)에 영천 군수(榮川郡守)에 제수되었으나, 감사의 뜻에 거슬려 파직되었다. 당시에 조정의 의론이 호패법(號牌法) 시행을 중하게 여겨 새 군수에게 맡길 수 없다는 이유로 공으로 하여금 곤장을 맞은 다음 계속해서 일을 보게 하였다. 그러자 공은 그렇게 하는 것은 국가에서 염치를 기르는 방도가 아니라고 여겨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가 이로 말미암아 삭직(削職)당하였다. 정묘년(1627, 인조5) 봄에 직첩(職帖)을 환급받았으며, 이해 5월 무자일에 정침(正寢)에서 고종(考終)하니, 향년이 67세였다. 이해 8월 정유일에 공주(公州) 유성현(儒城縣)에 있는 오도산(五道山) 손향(巽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 바로 선영(先塋)이 있는 곳이다.
공은 천부적인 자질이 아주 아름다워 관대하고 후하며 진실하였다. 나이 어려서 사우(師友)들의 사이를 왕래하면서 서로 간에 계발해 주고 선을 닦는 힘을 얻었으며, 집에서 많은 수행을 하였다. 어버이를 섬기는 데 있어서 효성스러웠고, 자식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의로웠으며, 제매(弟妹)들과 우애롭게 지냈고 여러 조카들을 자신의 친자식과 같이 어루만져 주었다. 다른 사람과 서로 접함에 있어서 한결같이 성실로써 대하면서 거짓으로 꾸미지 않았다.
공은 날마다 반드시 이른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은 다음 대(帶)를 띠고 바깥에 거처하면서 부인과 한곳에 거처하지 않았다. 손님이 찾아오면 반드시 술과 음식을 차려 대접하여 서로 우의를 나누었으며, 그러면서도 친압(親狎)하거나 모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두들 사랑하면서도 공경하였다. 궁한 자를 돌보아 주고 위급한 자를 보살펴 주는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며, 가난하고 궁핍하게 사는 사람을 보면 그때마다 번번이 자신의 재산을 희사하여 진휼해 주었다.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는 원근에 사는 친구나 아는 사람들이 난리를 피해 공이 있는 곳으로 왔는데, 마치 자신의 고향에 온 것처럼 편안하게 여겼다. 공은 가산(家産)이 본디 넉넉하였으나, 장사를 지내는 날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꾸어 와서야 겨우 장사를 치를 수가 있었는바, 의(義)를 좋아하고 재물을 가볍게 여겨 재물을 모았다가 능히 흩어 주는 것이 이와 같았다.
공은 향리(鄕里)에 거처하면서는 절대로 의롭지 못한 일을 하지 않았으며, 조세를 내고 부역에 응하는 것을 반드시 하호(下戶)들보다 먼저 하였다. 관직을 맡아서는 직무를 잘 수행하여 폐기되고 실추된 것을 다시금 닦아 거행하였으며, 고식적으로 해 나가기를 일삼지 않았다. 또 일찍이 백성들의 뜻에 영합하기 위해 도에 어긋난 방법으로 정사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관직에 있는 동안에는 혁혁하게 드러난 명성이 없었으나, 떠나간 뒤에는 백성들이 사모하여 잊지 못하였다. 공은 질병이 한창 심하여 신기가 혼미한 가운데에도 기거하고 접응하는 것을 평상시의 법도대로 하여 바꾸지 않았다. 임종을 하는 즈음에는 자리를 바꾸고 동쪽으로 머리를 두게 한 다음, 부축하여 앉히게 하고는 관을 반듯하게 쓰고 편안한 기색으로 서거하였으니, 역시 기이한 일이다.
공의 부인인 영인(令人) 김씨(金氏)는 행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김은휘金殷輝의 따님인데, 첨지중추부사는 바로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의 동생이다. 영인은 법도가 있는 집안에서 나고 자라 여자로서 지녀야 할 덕을 지극하게 갖추었다. 공에게 시집옴에 미쳐서는 지극 정성으로 시아버지를 섬겼으므로 임천공(林川公)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 며느리의 효성스러움은 옛날 사람 가운데에서도 드문 바이다.” 하였다. 공과 더불어 서로 손님을 대하듯이 공경스럽게 대한 것이 40년이었는데, 종시토록 덕을 어긴 적이 없었으며,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반드시 공의 뜻을 잘 받들어 행하였다. 빈객들이 날마다 항상 자리에 가득하였는데도 일찍이 싫어하는 기색을 얼굴에 나타낸 적이 없었다. 사는 고을에 임금으로부터 총애를 받는 어떤 권신權臣이 있어 친하게 지내려고 하자, 영인이 공에게 말하기를, “듣건대 그 사람은 행실이 불량스럽다고 하는바, 우리 아이들로 하여금 어찌 차마 그 집의 문 안에 들어가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공이 이르기를, “그것이 바로 나의 뜻입니다.” 하고는, 드디어 물리쳐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였다. 영인은 공보다 4년 뒤에 태어나 공보다 6년 먼저 죽었으며, 공과 같은 산등성이의 다른 묏자리에 안장되었다.
공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은 준길(浚吉)로 바로 경세의 사위이다. 갑자년(1624, 인조2)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는데, 아주 뛰어난 재주가 있다. 준길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그 명은 다음과 같다.
고을 안에 충신스러운 사람 있으매 邑有忠信
악한 짓을 감히 하는 사람 없었네 人無惡斁
살아서는 의 행하길 좋아했으며 生而好義
죽을 때도 외려 자리 바르게 했네 歿猶正席
자신 몸에 쌓아 놓은 덕 있었는데 有德于躬
지위 높지 아니했고 장수 못 했네 不位不壽
그걸 보면 저 하늘의 뜻은 아마도 天其或者
필시 후손 창성하게 하려 함이리 必昌其後
通訓大夫行榮川郡守宋公墓誌銘 幷序
公諱爾昌。字福汝。姓宋氏。系出恩津。麗朝判事大原其鼻祖也。大原後三世至明誼。官司憲執端。與圃隱諸賢善。爲世名人。娶參判黃粹女。黃懷德人。子孫因居焉。高祖諱遙年。軍資監正。曾祖諱汝楫。祖諱世英。皆不仕。考諱應瑞。林川郡守。階通政。妣李氏。兵曹判書正獻公潤慶之女。公生五歲而失慈敎。及長。受業於金黃岡繼輝,辛白麓應時諸公。又從遊栗谷之門。自力問學。庚寅。升上庠。庚子。筮仕爲 連原道察訪。辛丑。換景陽。丙午。由繕工直長陞主典獄簿。轉司憲府監察。明年。除鎭安縣監。又明年。丁外憂。服闋。除司贍寺主簿。拜新寧縣監。越二年癸丑。光海搆大獄。誣殺 大妃父金悌男。公之孼妹壻徐羊甲與其禍。公連累罷歸。癸亥改紀。初授文義縣令。始朝廷遣御史。宣諭蠲積年逋賦。未久而反汗。公上疏言信不可失。且陳本縣殘敗狀甚詳。遂得請。一境賴之。甲子病遞。乙丑。拜軍資判官。丙寅。除榮川郡守。忤監司罷。朝議以號牌事重。不可易生手建。令受箠治事。公謂此非國家養廉恥之道。終不赴。 命削職。丁卯春。給牒。五月戊子。考終于正寢。得年六十七。以八月丁酉。葬公州儒城縣五道山巽向之原。先兆也。公天質甚美。寬厚眞醇。少往來師友間。得啓發觀善力。又多修行於家。事親孝。敎子義。友愛弟妹。撫諸姪如己出。與人相接。一以誠實。不爲修飾。日必蚤起盥櫛。束帶居外。不與婦人處。客至則必設酒食相款洽。亦不爲狎侮。人皆愛敬之。賙窮恤急。出於至誠。人有貧乏。輒捐財以賑之。丁卯之亂。遠近親舊避地者。赴之如歸。產業素饒。而葬之日。至稱貸以襄事。其好義輕財。積而能散。有如此。居鄕。絶不爲非義之事。輸租應役。必爲下戶先。當官盡職。修擧廢墜。不事姑息。又未嘗違道以悅民。故在官無赫赫聲。去後嘗見思。疾方病。神氣夷曠。起居應接。不易常度。臨終。命易寢東首扶坐。正冠怡然而逝。亦奇矣。公配令人金氏。行僉樞殷 輝之女。僉樞卽黃岡公弟也。令人生長法家。女德備至。及歸公。至誠事舅。林川公嘗曰。吾婦之孝。古亦罕有。賓敬公四十年。終始無違德。事無細大。必承順公意。賓客日常滿坐。而未嘗以厭倦色見。鄕有一權宰求親。令人謂公曰。聞此人不良于行。忍令吾兒入其門乎。公曰。是吾意也。遂却之。令人後公四年生。先公六年歿。葬與公同原異壙。有一男曰浚吉。卽經世女壻。甲子司馬。有儁才。生二男一女皆幼。銘曰。
邑有忠信。人無惡斁。生而好義。歿猶正席。有德于躬。不位不壽。天其或者必昌其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