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재집 발문〔艮齋續集跋〕
유심춘(柳尋春)
대현(大賢)의 세상에 태어나 대현이 사는 곳에 가까이 살며 직접 가르침을 받고 보고 느끼면서 그 덕을 이루었으니 이는 세상에 드문 행운이다. 간재 이 선생은 어릴 적부터 퇴도(退陶) 노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며 한 시대를 살았고 또 같은 고을에 살았다. 아침저녁으로 스승께 책을 들고 의심나는 것을 질문하여 이해하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았고, 시종일관 한결같이 하며 노선생께서 돌아가시는 날 그만두었으니, 선생 같은 분이 어찌 급문제자 중에 더욱 다행한 분이 아니겠는가. 아, 공자 문하의 뛰어난 제자는 대체로 노(魯)나라 사람이 많고, 《노론(魯論)》 1책은 모두 그 당시 문인들의 기록에서 나왔다. 그렇기 때문에 본 것이 더욱 가깝고 터득한 것이 더욱 깊어 상상하여 모방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제 선생의 유집(遺集)을 보건대 〈기선록(記善錄)〉은 완연히 〈향당(鄕黨)〉을 그려낸 것이고 〈문답편(問答編)〉은 한결같이 당시에 직접 들은 것이다. 자세히 보고 상세히 기록하였고 밝게 분별하여 깊이 신뢰하였으니 곧 《노론(魯論)》과 그 공이 같다. 만일 같은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고 매우 가까이 살지 않았으며, 직접 보고 깊이 터득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질의(質疑)〉와 〈주해(註解)〉 등 여러 편에 이르러서는 사우(師友)들 사이에 강론하고 나아가 질정한 저작인데, 의심나는 게 있으면 반드시 질문하고 터득한 게 있으면 반드시 기록하여 정추(精粗)와 본말이 모두 갖추어져 빠뜨린 것이 없다. 사람들로 하여금 읽고 완미하게 하면 마치 농운정사(隴雲精舍) 사이에서 옷자락을 걷어잡고 가르침을 받는 것과 같으니, 또한 얼마나 지극한 다행인가.
선생의 문집은 영조 임신년(1752)에 처음 간행되고 병술년(1766)에 중간되었으나 〈질의〉 여러 편은 그대로 상자 속에 있었는데, 선생의 후손과 고을의 사림이 간행할 것을 의논하여 속집 3책을 만들었다. 장차 온 나라에 널리 퍼트리고 백대에 전하게 된 것은 모두 선생의 아름다운 은택을 입었기 때문이니, 이 또한 어찌 사문(斯文)의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학식 천박한 후학이 아는 것이 없어 글 짓는 일에 대해서는 감당할 바가 아니지만, 다만 선생을 생각하니 우리 서애(西厓) 선조와는 도의(道義)로 친분을 맺었고 주고받은 시와 편지가 두 집안의 문집에 모두 실려 있어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기에, 삼가 간행의 전말을 책 뒤에 간략하게 기록하고 이어 마음에 느낀 점을 덧붙여 후손들의 청에 부응할 뿐이다.
순조 29년(1829) 기축 4월에 후학 풍산 유심춘(柳尋春)이 삼가 발문을 쓰다.
艮齋續集跋
[柳尋春]
生於大賢之世。近於大賢之居。親炙觀感。以成其德。斯乃千載一幸也。艮齊李先生。自童丱時。受業於退陶老先生之門。旣及其世。又同一鄕。朝夕函丈。捧書質疑。不得不措。終始如一。迄于老先生易簀之日。若先生者。豈非及門諸子之尤幸者歟。噫。孔門高弟。蓋多魯人。而魯論一書。皆出於當時門人之所記。故其所見益親。所得益深。非想像而摹擬者比也。今觀於先生遺集。記善有錄而宛然鄕黨之畫出。問答有編而一是當日之耳聞。審視而詳記之。明辨而篤信之。直與魯論同其功。苟非生之同世。居之甚近。見之親而得之深者。烏能與於是哉。至於質疑註解諸篇。乃師友間講論就正之作。而有疑必問。有得必書。精粗本末。咸備而無遺。使人讀而玩之。如攝齊承誨於隴雲之間。又何至幸也。先生文集。初刊於英廟壬申。重刊於丙戌。而質疑諸篇。尙在巾衍中。先生後孫與一鄕士林。謀所以鋟諸梓。爲續集三冊。蓋將廣之一國。垂之百世。咸被先生嘉惠之澤。此又豈非斯文之大幸也耶。膚淺末學。無所識知。其於文字之役。非所敢當。而第伏惟念先生。與吾西厓先祖。爲道義契。往復詩札。具載於兩家文集。竊不勝高山景行之思。謹爲之略記刊刻顚末于後。因附以所感於心者。以塞諸孫之請云爾。上之三十年己丑淸和節。後學豐山柳尋春。謹跋。
[주1] 노론(魯論) : 《논어(論語)》를 말한다. 《노논어(魯論語)》, 《제논어(齊論語)》, 《고문논어(古文論語)》 등 3가(家)의 《논어》 중에서 현재 전해지는 《논어》는 《노논어》에 기초한 것이다.
[주2] 향당(鄕黨)을 그려낸 것이고 : 〈향당〉은 《논어》의 10번째 편명으로 공자의 행동거지를 자세히 묘사한 편이다. 〈기선록〉이 《논어》의 〈향당〉처럼 스승인 이황의 행동거지를 자세히 그려낸 것이라는 말이다.
[주3] 농운정사(隴雲精舍) : 도산서당의 서쪽에 있는 제자들의 처소로 8칸이며, 퇴계 선생이 제자들의 공부를 독려하기 위해 ‘공(工)’ 자 형으로 지었다고 한다. 마루인 관란헌(觀瀾軒), 공부방인 시습재(時習齋), 숙소인 지숙료(止宿寮)로 이루어져 있다.
[주4] 유심춘(柳尋春) : 1762~1834.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상원(象遠), 호는 강고(江皐)이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후손이다. 1786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학행으로 천거되어 세자익위사 익찬(世子翊衛司翊贊)을 거쳐 익위(翊衛)가 되었고 의성현령도 지냈다. 1830년엔 왕의 하교로 3대가 과거에 급제한 것을 치하하고 돈녕부(敦寧府)의 도정에 임명하였고, 1854년엔 아들 유후조(柳厚祚)의 급제로 다시 통정대부에 올랐다. 저서로 《강고집(江皐集)》이 있다.
한국국학진흥원 김우동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