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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성전이신 예수님 (요 2:13-22)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 미래를 산다 ' 라는 그의 저서에서 세계 모든 나라와 민족중에서 역사적으로 큰 과오를 범한 뒤에 같은 과오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은 나라로 영국을 언급하면서, 두 가지 예를 들었습니다.
그 하나는 15세기에 영국군이 유럽 정복을 위해 프랑스를 침공했다가 잔다르크에 의해 궤멸된 이후, 다시는 유럽을 침공할 계획을세운 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영국이 북아메리카를 식민지로 갖고 있을 때 북아메리카 사람들이 요구한 자치권을 허락하지 않아 전쟁을 치른 뒤에 그 땅을 빼앗겼는데 그 후로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인도와 호주 그리고 캐나다 등을 미리 독립시켜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국인들은 큰 잘못을 범한 뒤에 민족적으로, 역사적으로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지혜를 어떻게 가질 수가 있었을까? 그들은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읽고 해석하는 데 익숙한 민족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큰 일을 계획했다가 그것이 허물어질 때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깨닫고 같은 잘못을 자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역사를 읽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지혜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역사는 있으나 그 역사를 망각하거나 또는 해석할 수 없다면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자기 나라의 역사에 대해서는 탁월한 지식과 자부심과 우월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를 해석할 수 있는 안목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선조들이 범한 죄들을 반복해서 범하고 하나님의 축복대신에 심판을 자초한 일들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였을 때는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이 떠나 있고, 율례와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이방 신을 섬길 때 그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월절 명절이 되어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상경하였습니다. 그것은 성전에 제사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에는 어떤 사람들이 가득하였느냐?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로 가득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예배하는데는 관심이 없고 장사해서 사악한 탐욕을 충족하는데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벌써 예수님이 오시기 수백 년 전에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서 지적 받은 죄악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것을 되풀이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명절을 당하면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잡아 제사장을 통해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제사 드리는 사람마다 각자가 준비를 해와야 하는데 먼 나라에 사는 유대인들은 짐승을 가져오기가 불편하기 때문에 이들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서 생긴 것이 성전 안에서 짐승을 파는 것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제물을 가지고는 왔으나 제사장과 결탁한 감별사가 흠이 있다고 판정을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사람들의 짐승을 비싼 값으로 사서 드려야 했습니다. 또 한가지는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릴 때마다 유대인들은 성전 세를 내야 했습니다.
성전 세를 내는데 반드시 유대인들만이 사용하는 ' 타이리언 코이니지' 라는 화폐만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그 화폐를 쓰지 않는 유대인들은 성전에 와서 환전을 해야 하는데이때 높은 수수료를 물게 되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장사하는 사람들과 결탁을 하고 제물을 팔아서 돈을 벌고 환전을 하면서 돈을 벌었습니다. 그들에게 깨끗하고 흠 없는 제물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명분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진짜 관심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거룩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재물과 돈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제사에 대해서 이미 하나님은 듣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제사를 원치 아니하고 인애와 겸손을 원하신다고 하였으나 그들은 여전히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의식과 형식주의로 가득한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 당시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그들은 낡은 전통주의에 붙들려 있었고, 성전 지상주의에 빠져 있었고, 형식과 의식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성전을 주신 목적 -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하여
여러분 ! 하나님께서 성전을 주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아시지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속에 임재 하셔서 그들과 교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장막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중요한 것입니까? 주님의 임재와 깊은 교제를 통해서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능력이 충만해서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어가게 하시기 위하여 성전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은 보이는 장막에 관심을 두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대가 변하고 세월이 흐르면서 그 장막을 주신 그 의미를 점점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성전 자체가 그들의 우상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성전의 역사
우리는 성전의 역사를 통해서 구약의 구속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고 출애굽기에서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내가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하나님이 나를 택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율법의 완성이신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기도 전에 내가 회막이 되어서 임재하겠다, 성전이 되어서 너희에게 임재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믿기 시작할 때에는 신앙생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예배나 수요예배, 구역예배, 십일조, 감사헌금에 대해 자세히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신앙의 유치원 시대에는 성막을 통하여 우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출애굽기, 레위기 시대는 '움직이는 성막시대' 입니다. 초신자가 교회에 빠지지 않고 다니기는 어렵습니다. 성막을 지었다 허물었다하는 것처럼 무슨 일이 있으면 교회에 갔다 안 갔다 합니다. 내 마음대로 교회에 출석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하나님이 직접 인도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성장하면 교회에 정착하는 시기가 옵니다. 여호수아에 이르러 실로에서 언약궤가 정착합니다. 드디어 '정착하는 성막시대'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더 이상 언약궤를 우상으로 섬기면 안 되는데 엘리 제사장 시대에 블레셋과 전쟁이 나자 금세 언약궤를 가져갑니다. 예수님을 믿되 우상처럼 믿는 것입니다. 성막이 고정된 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훈련은 안 하고 제사지내는 것, 교회에 가는 것에 집착하는 기복신앙에 머물러 있는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정권을 잡은 뒤 언약궤를 되찾아 솔로몬 시대에는 가장 화려한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진 뒤에 북 이스라엘에는 언약궤가 없으니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언약궤처럼 섬기게 됩니다. 그 때부터 본격적인 우상숭배, 산당예배가 시작되어 BC 722년에 북 이스라엘이 먼저 망했습니다.
예레미야가 남 유다도 망할 것을 외치지만 남 유다는 자기들에게 솔로몬의 성전이 있기 때문에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전을 훼파하시겠다고 선지자들을 통해 예고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성전이 완전히 불살라졌습니다. 이스라엘이 포로로 끌려가면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고자 한 가장 큰 목적은 성전을 짓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 후 70년 만에 돌아와서 지은 성전이 스룹바벨 성전인데 이 성전을 짓고 청년들은 기뻐하고 노인들은 솔로몬 성전의 옛 영화를 생각하며 울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전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훼파된 후 200년이 지나서 헤롯왕이 유대인의 환심을 사려고 BC 4년에 헤롯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동안에 일으키리라' 하시더니 티터스 장군에 의해 AD 70년에 성전은 돌 하나도 남지 않고 완전히 멸망을 당합니다.
그 뒤 지금까지 성전은 지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성전의 역사를 볼 때 가시적인 아름다운 성전은 다 무너졌습니다. 왜 이렇게 보이는 성전은 없어졌을까요? 보이는 모든 성전은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받은 성전이신 교회 공동체, 성도들에 대한 모형이며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 성전이신 예수님이 오셨는데도 불구하고 이 성전의 패러다임을 읽지 못하고 여전히 성전 우상주의에 빠져있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 시대에도 진행되고 있었고, 스테반 때도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마음의 순수한 동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삶보다 그들이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은 성전을 붙들고 있는 것이었고, 성전에 나와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을 붙들어서 계속해서 유대인들만의 특권을 누리려는 마음들로 가득하였습니다. 참 성전이신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제는 더 이상 구원의 지평이 유대인에게만 머물러 있을 수 없고 온 족속과 열방과 나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 속에는 흉악한 탐욕과 이기심이 가득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빙자하여 사람들을 착취하고, 재물과 돈을 벌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날마다 절기마다 안식일마다 성전을 찾아오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태도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을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아 온 열방을 구원하려는 참된 목적을 잃어버리고 특권의식에만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도 있었습니다.
" 차라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어찌하여 저는 것과 병든 것과 눈먼 것을 가지고 왔느냐?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가납하겠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 나온 것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봉사하는 것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들의 마음속에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과 감격이 없이, 예배를 드리고 봉사를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속에 교회밖에 세상과 열방을 품는 마음이 없이 교회생활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성전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제사 드리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께서 여러분을 불러 주신 것은 여러분과 교제케 하며 궁극적으로 여러분을 성전 삼아 열방과 족속과 나라와 방언 가운데 나가서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게 하려고 불러주신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이 마음을 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시적인 성전에 만족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교회에 오셨다는 것, 직분을 얻었다는 것, 세례를 받았다는 것에 만족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혹시 우리 교회에만 만족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지금의 이 믿음의 수준에 만족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우리 모두가 함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믿음과 인격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바로 교회된 여러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각 족속과 열방 가운데 학대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를 교회로 불러 주신 주님의 목적입니다. 주님이 주신 비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바로 이 목적이 이끌어 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비전이 이끌어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열방을 복음화 하며, 우리의 믿음과 인격이 그리스도의 분량으로 자라가는 이 비전이 덕일 교회를 이끌어가고 덕일 교회는 바로 그 비전을 소유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뜨거운 열정을 가져야 하고, 거룩한 댓가를 함께 지불해 나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종교지도자들의 큰 착각은 무엇이었습니까?
성전을 붙들기만 하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만 하면 모든 것이 순조롭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는 착각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안에 들어가는 것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먼저 그들을 불러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잃어버렸습니다. 오직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성전을 붙들고 있고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으로 알고 세속적인 재물과 돈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교회가 목적을 잃어버릴 때
여기서 우리는 영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공동체의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청결케 함을 당해야 할 만큼 부패하고 타락한 공동체입니다.
왜 그들은 그토록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요, 제사장임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공동체가 되고 말았을까요?
목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비전을 잃어버렸습니다.
성전을 주신 목적을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로 삼아주신 목적을 생생하게 알고 계십니까?
가난한 이웃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죽어 가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그리고 더 나아가 열방과 각 나라와 족속가운데 나아가 복음으로 그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덕일 교회는 이 선교의 부르심, 하나님 나라에 대한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직전에 우리에게 지상 명령을 주셨습니다.
"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너로 인하여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 약속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동일하게 지금 여러분들을 덕일교회로 삼으시고 바로 이 덕일 교회로 하여금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이끌어 가는 교회여야 합니다.
사람의 목소리가 이끌어가도 안됩니다. 특정한 경험이 이끌어가도 안되고, 전통이 이끌어가도 안되고, 오직 비전이 이끌어 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비전을 잃어버린 교회는 반드시 생기를 잃어버렸습니다. 중세 교회를 보십시오. 기독교가 국교이기 때문에 더 이상 선교 할 필요가없을 만큼 모든 나라와 국민이 다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더 이상 전도하지 않습니다. 선교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갈수록 교회는 부패해가고 타락해갑니다. 지금부터 100년 전 러시아의 희랍정교회는 선교하고 구제하고 복음을 전하는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주교들이 논쟁하고 싸우고 다투었습니다. 성모 마리아 상의 눈은 파란색이어야 하느냐 빨강색이어야 하느냐? 파리가 날아가다가 성찬기에 빠졌는데 그렇다면 그 파리는 예수님의 보혈을 마신 것이냐 아니냐? 그렇게 논쟁하고 하루종일 싸우고 하다가 3% 밖에 되지 않은 프로레타리아 층의 농민들에게 교회가 완전히 점령당해서 공산국가가 되고 말았습니다. 미국의 교회가 가장 강력하게 부흥할 때는 그들이 선교할 때였습니다. 그러나 선교가 시들면서 교회가 시들었습니다.
교회가 이 세상을 주목하고 이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이 세상을 복음으로 구속하는데 총력을 기울일 때 그 교회는 건강하고 힘이 있고 생동감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 안디옥 교회는 처음부터 선교하는 교회였습니다. 시들지 않고 계속 활활 타오르는 화산과 같은 선교하는 모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처음에는 강했으나 나중에는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목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는 돈 모으는 재미를 교인들에게 붙여 놓은 교회가 있습니다. 거기에 빠지면교회는 망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써야 합니다.
새해 시작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목적이 이끌어 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학교마다, 순마다, 여전도회와 남선교회마다 이런 '전도해서 양육하고 훈련하여 파송하여 세상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목적' 을 한시도 잃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
주님께서 성전의 본질과 목적을 잃어버리고 성전을 이용해서 사악한 탐욕을 채우고 있는 제사장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시고, 양이나 소를 성전에서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의 상을 엎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내 아버지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성전의 주인이신 것을 알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도대체 당신이 이와 같은 행위를 하는데 무슨 권리를 가지고 하느냐?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따집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일으키리라. "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전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타락해 버린 백성들을 정화하신 메시야로서, 성전의 주인으로서 예수님이 보일 수 있는 최고의 표적은 죽음과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음만 있고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은 절대로 그리스도이실 수 없습니다. 그분은 단지 훌륭한 성인일 뿐입니다. 훌륭한 스승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람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시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메시야일 수 있는 것은 죽으셨으나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하신 그 시점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예수를 믿을 수 없었습니다.
언제 그들이 믿었습니까? 22절을 보시면 "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성경과 예수를 믿으니라. " 그랬습니다.
성전이신 예수님
그러나 또 한가지 "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일으키리라. " 라고 하신 말씀 속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성전의 실상으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왜 예수님은 그토록 유대인들이 사모하는 성전을 헐라고 하였을까요?
구약에 있는 보이는 모든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위한 상징적인 것인데 성전의 실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이고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이되어 오셨습니다. 더 이상 모형과 그림자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약의 성전이 상징하는 모든 것들이 성취되었습니다.
구약시대는 성전이 있는 곳에 가야만 겨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명절만 되면 사람들은 성전이 세워진 예루살렘으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성전이신 주님이 오셨을 때 더 이상 예루살렘으로 갈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예수님에게 가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장소와 건물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혈동과 지역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사 40일 후에 승천하셨습니다. 성전이신 예수님은지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을 대신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 후에 부활하신 후 망치와 못으로 집 짓는 일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것은 공동체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무리들이 다락방에서 기도할 때 성령이 불같이 임했습니다.그 성령 받은 그들이 이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오늘 성전은 건물이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성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더 이상 성전은 시간과 공간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성전이신 여러분들이 가정에서 드리면 그곳에 주님이 임재 하시고 산에서 예배하면 그곳에서도 임재합니다.
98년 2월 달에 중국 단동에서 배를 타고 압록강을 항해하면서 우리는 처음으로 북한의 신의주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해방이후 최고의 공업도시였는데 그렇게 초라할 수 없었습니다. 해안가에는 경비병과 부서진 배들이 즐비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수리하고 있었습니다.
선상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선상예배를 드렸습니다. 북한을 위하여 기도하는데 그렇게 눈물이 날 수가 없었습니다. 책에서만 보았던 우리나라 북한을 보면서 아픈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는데 거기에서도 성령님은 얼마나 강하게 임하였는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성전이기 때문에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도 주님은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면 나도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태도입니다.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신령이라는 말은 성령안에서 라는 말입니다. 진리는 말씀안에서 라는 말입니다. 내가 성령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내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 드려지는 예배를 하나님은 받으시고 그 예배 자를 만나주시고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러면 성령을 모신 내 심령이 맑고 깨끗해져야 합니다. 순수해야 합니다. 내 마음의 성전이 강도의 굴혈처럼 세상의 욕심과 생각이 있다면 주님은 또 한 번 슬퍼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고 장사하는 사람들, 돈 바꾸는 사람들을 과감하게 정화한 후에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셨습니다. 귀신을 내어쫓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깨끗할 때, 성령이 마음대로 역사 하는 거룩한 성전이 될 때 바로 여러분을 통해서 놀라운 이적과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줄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새해를 시작하는 첫 주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 되어 올 한해동안 여러분에게 이적과 축복의 풍성한 삶이 나타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