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라디아서 4장 12-20절. 눈이라도 빼어주었을 것
12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I beg of you, brethren, become as I am, for I also have become as you are. You have done me no wrong;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Γίνεσθε ὡς ἐγώ, ὅτι κἀγὼ ὡς ὑμεῖς, ἀδελφοί,
become as I, because I also as you, brothers
직역하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처럼 되었으므로, 너희도 나처럼 되어라’는 뜻입니다.
‘되기를’(Γίνεσθε)은 현재형 명령형으로서(become) 지금 나와 같이 되라는 뜻입니다.
구하노라
δέομαι ὑμῶν.
I beg you
‘구하노라’(δέομαι)는 현재형으로서(I beg) 내가 지금 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οὐδέν με ἠδικήσατε
nothing me you wronged
직역하면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해롭게 하지 아니 하였느니라’에서 동사(ἠδικήσατε)는 부정과거로서(you wronged) 과거에 잘못한 것이 없는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1. ‘형제들아’라는 애칭은 지금까지 바울이 율법주의라는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리석은 일임을 논리적으로 설명했는데, 이제는 ‘형제들아’라는 사랑스러운 호칭을 사용해서 사랑의 감정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2.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이란 말은 바울이 원래 유대인이었지만, 이방인인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율법이나 할례나 절기나 성결법 규정을 버리고, 이방인들과 동일하게 오직 예수님만 믿고, 모든 율법주의를 버린 것을 가리킵니다.
‘너희도 나와 같이 되라’는 것은 지금 갈라디아 교인들이 예루살렘 율법주의 유대인 성도들의 유혹을 받아서 할례와 절기 지키는 것을 벗어버리고, 바울처럼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3.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과거 1차 전도 여행 시에 유대인들이 바울에게 극한 핍박을 해서 심지어 바울을 돌로 일시적으로 죽었으나, 갈라디아 지방 교인들은 바울의 복음 전도를 받아들이고 유대인의 유혹을 물리치고, 바울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예루살렘 교회 유대주의자들의 유혹에 빠져서 바울에게 괴로움을 주고 있는 상태인데, 바울은 지금의 잘못된 상황을 잠시 뒤로 하고, 과거 1차 전도 시에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복음 전도에 감사했던 시절을 회상케 해서, 지금의 배신적인 상황을 극복하도록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지금 아내가 다른 남자의 유혹을 받아 본 남편에게 배신하려는 상태이지만, 남편이 과거에 아내와 깊은 애정 관계였던 때를 회상케 함으로써, 현재의 불편한 관계를 타개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13절.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you know that it was because of a bodily illness that I preached the gospel to you the first time;
너희가 아는 바라.
οἴδατε δὲ
you have known but
직역하면 ‘그러나 너희가 이미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는 바라’(οἴδατε)는 완료형으로서(you have known) 이미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ὅτι δι’ ἀσθένειαν τῆς σαρκὸς
that through weakness of the flesh
내가 처음에--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εὐηγγελισάμην ὑμῖν τὸ πρότερον,
I proclaimed the gospel to you the first
‘복음 전한 것을’(εὐηγγελισάμην)은 부정과거로서(I proclaimed the gospel) 과거에 역사적으로 확실히 복음을 전했던 사실을 가리킵니다.
1.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란 바울이 1차 전도 여행 때 갈라디아 지방 사람들에게 눈병(고후 12:7)에 걸린 상태로 복음을 전한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눈병에 걸린 것은 첫째 다메섹 도상에서 하늘의 밝은 빛을 보고 눈에 비늘 같은 것이 씌워졌다가 비늘이 벗겨졌으나 눈이 아팠던 것과, 둘째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걸어서 일 주일간 타우루스 산맥을 지날 때 말라리아에 걸려서 눈병이 악화된 것(행 13:14. Ramsay: St Paul the traveller. 34)과, 셋째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가 살아났으나 눈에 돌이 맞아 눈병이 악화된 것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바울이 육체가 약한 가운데서 갈라디아 지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나,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의 연약한 육체를 보지 않고, 바울이 전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기쁨에 넘쳐서 바울을 천사같이 대접했다는 것입니다.
2. 여기서 ‘육체의 약함’이 눈병(ophthalmia)이라는 것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도행전 9:8,9,1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갈라디아서 4:15.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갈라디아서 6: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어떤 학자들(Lighfoot, Ramsay)은 바울이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걸어갈 때 풍토병인 말라리아에 걸려서 눈병 뿐만 아니라, 간질(epilepsy)까지 앓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에 대한 성경적 해석은 갈라디아서 4장 14절(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와 고린도후서 10장 10절(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를 근거로 합니다.
14절.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that which was a trial to you in my bodily condition you did not despise or loathe, but you received me as an angel of God, as Christ Jesus Himself.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καὶ τὸν πειρασμὸν ὑμῶν ἐν τῇ σαρκί μου
and the test of you in the flesh of me
동사가 없으나 적절한 번역입니다.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οὐκ ἐξουθενήσατε, οὐδὲ ἐξεπτύσατε,
not you did despise, nor you did reject
직역하면 ‘너희가 업신여기지 않았고, 거절하지도 않았다’는 뜻입니다.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에서 동사(ἐξουθενήσατε)는 부정과거로서(you did despise) 과거에 확실히 업신여기지 않은 사실을 가리킵니다.
‘버리지 않았다’에서 동사(ἐξεπτύσατε)도 부정과거로서(you did reject) 과거에 확실히 버리지 않은 사실을 가리키고, 원형(ἐκπτύω)은 밖으로‘(ἐκ)와 ’침뱉다‘(πτύω)의 합성어로서 ‘침뱉다, 경멸하다, 퇴짜놓다, 거절하다, 싫어하다’(spit out, spurn, disdain, reject, loathe)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ἀλλὰ ὡς ἄγγελον Θεοῦ ἐδέξασθέ με, ὡς Χριστὸν Ἰησοῦν.
but as angel of God you received me, as Christ Jesus
‘영접하였도다’(ἐδέξασθέ)는 부정과거로서(you received) 과거에 확실히 영접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1.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다’는 것은 바울의 육체에 병이 있었다는 것으로서, 이 병이 눈병(ophthalmia)이나 간질(epilepsy)인 것을 가리킵니다.
특히 본 절은 바울의 병이 간질이었다고 주장하는 근거 구절이 됩니다.
그러나 다른 여러 구절은 눈병이었다는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13절 해석 참조)
2. ‘너희가 나를 업신여기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았다’는 것은 복음 전도자 바울을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의 육체적 질병 때문에, 바울을 멸시할 수도 있었는데, 그렇지 않고, 오히려 바울을 천사같이 그리스도 같이 존경했다는 뜻입니다.
특히 당시 갈라디아 지방 사람들은 간질 같은 나쁜 질병에 걸린 병자를 보면, 자신에게 그 병이 옮길까 봐서 병자에게 침을 뱉으면서 자신에게서 멀리 떠나게 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라디아 교인들도 복음 전도자 바울의 질병을 보고, 당시 풍속대로 바울에게 침을 뱉으며 바울을 쫓아내고 멀리할 수 있었으나, 오히려 바울을 천사나 그리스도처럼 존경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과거 처음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믿고, 존경했을 때를 회상케 함으로써, 다시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주의자들의 유혹을 물리치고, 바울에게 돌아오도록 간곡히 권고하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천사같이 그리스도 예수 같이 영접했다’는 것은 사람이 천사같은 대접만 받아도 대단한 영광인데도, 심지어 예수님의 종인 전도자 바울을 예수님 자신처럼 영접했다는 것은 최고의 존경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전도자를 파송하시면서,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했고(마 10:40), 마지막 심판 때는 전도자 한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는 것을 바로 예수님이 상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마 10:42)
15절.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Where then is that sense of blessing you had? For I bear you witness that, if possible, you would have plucked out your eyes and given them to me.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ποῦ οὖν ὁ μακαρισμὸς ὑμῶν;
where then the blessedness of you?
직역하면 ‘그런데 너희의 복이 어디에 (있느냐)’는 뜻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μαρτυρῶ γὰρ ὑμῖν
I witness for to you
‘증언하노니’(μαρτυρῶ)는 현재형으로서(I witness) 지금 증언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ὅτι εἰ δυνατὸν, τοὺς ὀφθαλμοὺς ὑμῶν ἐξορύξαντες
that if possible, the eyes of you having gouged out
‘빼어’(ἐξορύξα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gouged out) 단호하게 빼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나에게 주었으리라
ἐδώκατέ μοι.
you would have given to me
‘주었으리라’(ἐδώκατέ)는 부정과거로서(you gave) 단호하게 주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1. ‘너희의 복’에서 ‘복’이란 단어(μακαρισμὸς)는 원래 ‘행복하고 기쁘다는 선언’(declaration of blessedness regarding as happy, blessed)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처음 복음을 전했을 때,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 복음을 믿고, 성령을 받아서 엄청 기뻐하고 감격했던 일을 가리킵니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는 말은 참 슬픈 말인데요, 과거 바울 사도를 통해서 처음 예수 믿었을 때의 기쁨과 감격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는 뜻입니다.
즉 과거 처음 바울을 통해서 예수님 믿었을 때는 하도 기쁘고 감사해서 바울에게 눈이라도 빼어 줄 듯한 애정이 있었는데, 지금은 예루살렘 교회의 율법주의자들에게 미혹을 당해서 바울을 거짓 사도로 매도하고, 바울의 복음을 율법주의 반하는 자유주의 이단이라고 180도 변질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2. “할 수 있으면 너희 눈이라도 빼어 내게 주었으니라”는 말씀은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에서 전도할 때, 타우르스 산맥을 지나면서 말라리아로 눈병을 앓았다는 좋은 증거가 되는 구절입니다.
즉 갈라디아 교인들은 1차 전도 당시에 바울이 타우르스 산맥을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오면서 눈병에 걸려 앞을 잘 보지 못하면서도 복음을 전해주어서 자신들이 구원의 기쁨을 얻게 되자, 너무도 감사한 나머지 자기들의 성한 눈이라도 빼어서 바울에게 주고 싶어 했다는 뜻입니다.
그처럼 바울에 대한 감사와 애정이 깊었던 갈라디아 교인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율법주의자들의 미혹을 받아서 바울을 원수시 하고, 거짓 사도라고 매도하고, 바울의 복음을 이단시 하는 것에 대한 바울의 깊은 애도가 여기에 담겨있습니다.
목회자들도 마음과 애정을 다하여 사랑을 부어 돌보았던 성도가 이단에 물들어서 자기를 대적하고, 교회를 소란케 하면 얼마나 가슴 아픈지 모릅니다.
가정에서도 애정과 희생을 다하여 사랑으로 기른 자식이 부모를 배신하고, 나쁜 친구나 나쁜 남자를 만나서 부모를 거역하고, 떠나가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슬프겠습니까.
바울은 자신을 배신한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해 이런 아픔과 슬픔을 이 구절에서 표현한 것입니다..
16절.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New American Standard Bible: So have I become your enemy by telling you the truth?
그런즉 내가--원수가 되었느냐
ὥστε ἐχθρὸς ὑμῶν γέγονα
so enemy of you have I become
직역하면 ‘그런즉 내가 너희의 원수가 되었느냐’는 뜻입니다.
‘되었느냐’(γέγονα)는 완료형으로서(have I become) 지금 이미 원수가 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ἀληθεύων ὑμῖν;
speaking truth to you?
‘참말을 하므로’(ἀληθεύων)는 현재분사로서(speaking truth) 현재 참말을 하고 있는 것을 가리키고, 원형(ἀληθεύω)은 ‘참말을 하다, 진실을 말하다’(speak the truth, say truth)는 뜻입니다.
1. ‘내가 너희에게 참말을 하므로, 내가 너희의 원수가 되었느냐’에서 ‘원수’(ἐχθρὸς: enemy)란 말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들어온 율법주의자들이 바울을 가리켜 바울이 이단을 전하는 ‘율법주의에 대한 원수’라고 지칭한 말입니다.
즉 바울은 율법이나 할례나 유대인 절기나 유대교의 성결법 규정을 진키는 것은 복음에 정면 반대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이방인 성도들이 오직 예수님만 믿으면, 이런 유대교적인 규정들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반면에,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도중에 도망가버린 마가 요한의 영향으로 예루살렘 교회에서 갈라디아 교회들에 침투한 율법주의자들은 할례를 포함한 유대교적인 모든 규정들을 지켜야 이방인이 참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가 요한이 1차 전도 여행 도중에 바울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가버린 것은(행 13:13) 핵심적인 이유가 바울이 전한 복음이 예루살렘 교회의 율법주의 신자들의 주장과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후로 바울 사도의 복음이 예루살렘 교회의 율법주의자들의 주장과 다르다는 마가 요한의 비판을 들을 예루살렘 교회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회들에 가서 바울의 복음대로 예수만 믿어서는 참된 구원을 받지 못하고,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신자들처럼 할례도 받고, 유대교적인 규정들을 지켜야 참된 구원을 받는다고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 율법주의자들의 말을 듣고, 바울의 복음을 배신하고, 바울을 원수시 했다는 뜻입니다.
3. 특히 본 절은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2차 전도 여행 후에 기록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근거 구절이 됩니다.
즉 사도행전 18장 23절에서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고 했는데, 이 2차 전도 여행 시에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심방했을 때,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을 원수시 하고 있는 것을 보았고, 그래서 이 갈라디아서를 썼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1차 전도 여행 직후에 갈라디아 교인들의 반란이 일어나서 이 갈라디아서를 썼고, 2차 전도 여행 때는 이미 안정이 되어서 바울이 갈라디아와 부르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면서 모든 제자들의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다졌던 것입니다.
17절.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hey eagerly seek you, not commendably, but they wish to shut you out so that you will seek them.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ζηλοῦσιν ὑμᾶς οὐ καλῶς,
They are zealous after you not good
직역하면 ‘그들이 너희에 대해서 좋지 않은 뜻으로 열심 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열심 내다’(ζηλοῦσιν)는 현재형으로서(They are zealous after) 그들이 현재 좋지 않은 뜻으로 열심 내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ἀλλὰ ἐκκλεῖσαι ὑμᾶς,
but to exclude you (from us)
직역하면 ‘오직 너희를 (우리에게서) 이간시켜려는 것이다’는 뜻입니다.
‘이간시켜’(ἐκκλεῖσαι)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exclude) 단호하고 확실하게 이간시키려는 모습을 가리키고, 원형(ἐκκλείω)은 ‘--로부터’(ἐκ)와 ‘닫다’(κλείω)는 동사의 합성어로서, ‘이간질시키다, 배제하다, 분리하다’(shut out, exclude, separate)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θέλουσιν, ἵνα αὐτοὺς ζηλοῦτε.
they desire, so that them you might be zealous after
직역하면 ‘너희가 그들에 대해서 열심내게 하려는 것을 그들이 원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열심 내게 하려는’(ζηλοῦτε)은 현재 가정법 동사로서(you might be zealous after) 현재 그들에 대해서 열심 내게 하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원하고 있다’(θέλουσιν)는 현재형으로서(they desire) 현재 그들이 원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1.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에서 ‘그들’이란 유대주의자들(Judaizers) 즉 율법주의자들을 가리킵니다.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신자들에게서 파송된 자들이었습니다.
이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이 설립한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에게 찾아가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자기 제자로 삼으려고, 이방인 신자들도 할례를 받고, 유대인의 절기와 율법을 지켜야 참된 구원을 받는다고 열심히 설득했습니다.
이처럼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해서 열심 낸 것은 좋은 의도로 한 것이 아니고, 갈라디아 교인들을 종 삼고 그들 위에 군림하여 사례비와 돈을 착취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돌에 맞는 위험과 유대인들의 난동을 감수하고, 복음을 전해서 갈라디아 교회들을 설립했어도, 스스로 천막 장사를 하면서 교인들에게 짐을 져주지 않았는데,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을 배척하고 자기들이 교회를 지배하여 교인들을 억압하고, 사례비를 받고 돈을 착취하려고 했습니다.
2. ‘너희를 이간시켜’란 말은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바울과 이간시키고 결국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와 이간시키려는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단들은 정상적인 교회에 침투해서 교인들에게 목회자 흉을 보고, 이단 교리를 주입시키고, 결국 목회자를 몰아내고 자기들이 교권을 장악해서 교인들을 억압 착취하고, 사례비를 받으려는 목적입니다.
18절.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it is good always to be eagerly sought in a commendable manner, and not only when I am present with you.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언제든지 좋으니라
καλὸν δὲ ζηλοῦσθαι ἐν καλῷ πάντοτε,
good but to be zealous in good always
직역하면 ‘그러나 좋은 일에 열심 내는 것은 언제나 좋으니라’는 뜻입니다.
‘열심 내는 것은’(ζηλοῦσθαι)은 현재 부정사형 동사로서(to be zealous) 현재 열심히 사모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동사(ζηλοῦσθαι)가 수동태로도 번역될 수 있는데, 그러면 한글 번역과 같은 뜻이 됩니다.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καὶ μὴ μόνον ἐν τῷ παρεῖναί με πρὸς ὑμᾶς,
and not only in the to be present me with you
직역하면,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뿐만 아니라’는 뜻입니다.
‘있을 때’에서 동사(παρεῖναί)는 현재 부정사형 동사로서(to be present) 현재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1.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ζηλοῦσθαι)은 수동태로 번역한 것인데, 이것은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열심히 사모해서 율법주의로 돌아가게 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새번역에는 수동태를 능동으로 바꾸어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좋은 뜻으로 여러분에게 열심을 낸다면, 그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 동사(ζηλοῦσθαι)를 중간태로 번역하면, 갈라디아 교인들이 좋은 일(바울의 가르침)에 열심내는 것은 언제든지 좋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은 좋은 목적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고, 할례와 의식법과 성결법으로써 이방인들을 종 삼으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좋은 일에 대해서 열심 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율법으로 종 삼으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고, 악한 일입니다.
마치 유괴범이 순진한 어린아이들을 꾀여서 데려가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도 이단들은 순진한 초신자들을 유혹하여 이단에 데리고 가서 종 삼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이런 이단자들의 열심은 좋은 일에 대한 것이 아니고, 악한 일에 열심 내는 것입니다.
바울 당시에 갈라디아 교인들을 유혹하던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받은 정통 신자라고 주장했으나, 실상은 바울의 복음을 대항하는 이단이고, 사탄의 종들이었습니다.
19절.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My children, with whom I am again in labor until Christ is formed in you
나의 자녀들아
τέκνα μου,
children of me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οὓς πάλιν ὠδίνω
of whom again I have birth pangs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ὠδίνω)는 현재형으로서(I have birth pangs) 지금 계속 해산하는 수고를 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μέχρις οὗ μορφωθῇ Χριστὸς ἐν ὑμῖν·
until that shall have been formed Christ in you
직역하면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형상화되기까지’란 뜻입니다.
‘형상을 이루기까지’에서 동사( μορφωθῇ)는 부정과거 가정법 수동태로서(shall have been formed) ‘확실히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도록’이란 뜻입니다.
1. ‘나의 자녀들아’(τέκνα μου: children of me)라는 말은 직접 낳은 자녀를 가리키는 말로서, 바울 서신에서는 이곳에서만 쓰였고, 사도 요한은 이 말을 많이 썼습니다.
과연 바울 사도는 복음 전도로써 갈라디아 교인들을 낳은 영적인 아버지(spiritual father)였습니다.
여기서 ‘나의 자녀’라고 호칭한 것은 지금까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엄격한 태도로 경고하고 교훈한 감정에서, 완전히 반전하여 사랑이 지극한 아버지의 애정 어린 태도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는 것은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의 영적 어머니(spiritual mother)란 표현으로서, 과거에 바울이 복음으로써 갈라디아 교인들을 낳았을 때, 유대인들의 심한 박해를 받으면서 복음을 전했고, 심지어 루스드라에서는 돌에 맞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정도로 심한 고통을 겪었는데, 이제 다시 갈라디아 교인들을 율법주의 이단에게서 구출해내는 것은 또 다른 해산의 고통과 수고를 한다는 뜻입니다.
이 해산의 수고는 유대주의(율법주의)에서 끄집어내는 것이고(bring off from your Judaism), 이교도에서 기독교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turning of them from Heathenism to Christianity).
3.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란 그리스도(성령님)께서 성도의 마음속에 거하셔서(indwelling of Christ in the believer’s soul),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마음을 다스리시고(Christ reigns wholly in your hearts), 성령님의 은혜가 성도에게 항상 주어지기까지를 가리킵니다. (till you be so endowed with the graces of his Spirit)
즉 그리스도의 형상이란 단순히 지적이고 이지적인 신앙 뿐만 아니라, 성령님의 내주(內住)로 이루어지는 체험적인 신앙생활을 가리킵니다.
20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I could wish to be present with you now and to change my tone, for I am perplexed about you.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함은
ἤθελον δὲ παρεῖναι πρὸς ὑμᾶς ἄρτι
I was wishing but to be present with you now
직역하면 ‘그러나 이제 너희와 함께 있기를 내가 원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함께 있어’(παρεῖναι)은 현재 부정사형 동사로서(to be present) ‘함께 있기를 (원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원하고 있었다’( ἤθελον)는 미완료과거로서(I was wishing) 계속 원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내 언성을 높이려
καὶ ἀλλάξαι τὴν φωνήν μου,
and to change the tone of me
‘높이려’(ἀλλάξαι)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change) 음성을 단호하게 변경하는 것을 가리키고, 한글 번역에 ‘언성을 높이려 함은’이란 번역은 적절치 못하고, 오히려 ‘부드럽게 음성을 변경하려 함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번역: 이제라도 내가 여러분을 만나 어조를 부드럽게 바꾸어서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당황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 지금이라도 내가 여러분과 만나서 어조를 바꾸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는 여러분의 일이 걱정스러워 안절부절못하고 있습니다.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ὅτι ἀποροῦμαι ἐν ὑμῖν
because I am perplexed in you
직역하면 ‘너희에 대해서 내가 의심하고 있기 때문이다’는 뜨입니다.
‘의혹이 있음이라’(ἀποροῦμαι)는 현재 중간태로서(I am perplexed) 현재 의혹을 가지고 당황하고 있다는 뜻이고, 원형(ἀπορέω)은 ‘당황하다’(am at a loss, am perplexed)는 뜻인데, 중간태는 ‘의심하다’(am in doubt)는 뜻입니다.
1.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란 바울이 단순히 편지로만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만나서 얼굴을 맞대고 마음을 주고 받으면서 말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 that be wished he was personally present among them; that an opportunity of seeing them face to face, and telling them all his mind, and in such a manner as he could not in a single epistle)
2.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ἀλλάξαι τὴν φωνήν μου: to change the tone of me)이란 번역은 개역성경처럼 ‘음성을 (부드럽게) 변경하려 함은’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새번역과 공동번역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새번역: 이제라도 내가 여러분을 만나 어조를 부드럽게 바꾸어서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당황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 지금이라도 내가 여러분과 만나서 어조를 바꾸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는 여러분의 일이 걱정스러워 안절부절못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 사도는 지금까지 앞에서 격앙된 어조로 말해왔는데, 이제라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가서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to change my tone from severity to gentleness).
좀 더 엄격하지 않는 어조로(in terms less severe) 말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할 수 있으면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과 기쁨으로 함께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If circumstances permitted, I would gladly be with you)
3. ‘너희에 대해서 의심이 있음이라’(ὅτι ἀποροῦμαι ἐν ὑμῖν: because I am perplexed in you)는 것은 ‘너희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하고 있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새번역과 공동번역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주의로 돌아가버린 변절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해서 되찾아와야 할지 당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your falling away from the profession of the gospel to Judaism)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자요 목회자인 바울이 자신이 설립한 갈라디아 교인들이 곁길로 갔을 때 얼마나 안타까워하고, 애타하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들도 바울 같은 애정으로 목회하기를 바라고, 성도들도 목회자에게 이런 깊은 애정이 있음을 알아주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안에서 목회자와 성도간에 끈끈한 애정이 깃들어져서, 행복한 교회 생활, 복된 신앙 생활을 해가시기를 축원합니다!